
성형외과에는 수술로 외모를 가꾸려는 여성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필자는 이 현상을 보면서 오늘날의 과학과 철학을 생각한다. 우주는 과학의 발견 이전에도 존재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진리와 과학적인 진리 중에서 어느 것이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두 가치는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오늘날 과학은 철학에 등을 돌렸고, 철학은 과학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서로 경원시하며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그 경계를 조심스레 허물고자 한다. 특히 필자가 거론할 음양오행과 성형의학은 철학과 과학(의학) 분야에서 각기 독특한 빛깔을 지니고 있다. 일반인의 생활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불운한 학문이다. 우주의 원리에 대한 체계적 논리를 갖춘 철학이면서도 역술과 무속이라는 틀에 갇혀버린 음양오행론과 치유의 의학이라는 본뜻과 달리 상업적 의술로 낙인찍힌 성형의학에 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음양오행과 성형의학
누군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성형의 한계가 어디까지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글쎄, 무한하겠죠. 물론 신의 영역은 빼고…”라고 답할 것이다. 대부분 인간의 정신(정신세계)을 분석하는 것은 우주에서 새로운 별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이라 여기지만, 인간의 육체는 특별한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육체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양으로 진화했다.
어느 천문학자의 말처럼 비록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우주의 역사를 담은 400쪽 분량의 책 한 권 중에서 단 한 줄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발전해왔으며, 정신과 육체를 가진 생물로서 우주의 운명에 대한 예측과 검증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하물며 작은 몸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동양에서는 작은 몸도 일종의 소우주이고, 마음은 그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왔다.
인류는 운명과 인상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것은 깊이와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 동양이나 서양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자기 몸의 일정 부분을 변화시키고 인위적으로 고치는 행위는 언제부터 시작됐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운명이나 인상의 고정적인 부분이 과연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타고난 운명, 개선할 수 있는 운명
운명은 사람마다 다르다. 비슷한 얼굴은 있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듯이 운명도 비슷한 것 같지만 동일한 운명은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는데 이를 두고 명(命)이라 한다. 성형과 관상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바로 이 명이 정해지는 순간, 이에 따르는 운(運)이 정해진다. 태어난 시점을 두고 명이라 규정한다면 명의 주인공이 앞으로 겪게 될 흥망성쇠의 스토리가 운에 따라 전개된다. 명과 운은 모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다. 명리학에서 풀이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명과 운이 정해져 있더라도 본분이나 분수를 지키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명과 운이 정해놓은 코드를 이탈해 새로운 운명으로 개선할 수 있다. 인간의 운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 이른바 선행을 하거나 배우고 익힘으로써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더더욱 ‘어이구 내 팔자야’라고 한탄하며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다만 그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므로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여유와 지혜가 필요하다. 겉으로는 편안하되, 속으로는 고도로 집중해야만 적기를 포착할 수 있고, 한치 빈틈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의 근원이 무한경쟁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인간이 부딪히면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겉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