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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③

애증의 섬 대마도

통신사 오가던 교린의 징검다리, 약탈과 정벌에 상처입은 갈등의 진앙

  •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애증의 섬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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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열네 살 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호 면암은 화서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물세 살에 갑과(甲科)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지만, 꼬장꼬장한 자세로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정치 거물을 과감히 비판해 순탄치 않았다. 서른다섯과 마흔 살에 올린 시폐(時弊)상소와 5조(條)상소에서 이러한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이 준열한 투쟁으로 결국 대원군이 하야하기에 이르지만, 최익현 자신도 화를 면치 못해 제주도와 흑산도에 유배당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시대의 요청인 개항을 반대하고, ‘조선식의 부흥과 성공’을 꿈꿨다. 그가 왜병에 잡힐 때까지 올린 서른여섯 차례의 상소에 그러한 생각이 나타나 있다.

“화친을 맺으려는 적(賊)의 욕심은 물화(物貨)를 교역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물화는 사치 기완(器玩)하고 공업생산품이어서 양이 무궁한데 반하여 우리의 것은 백성의 목숨이 걸려 있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제한적입니다. 교역을 한다면 우리의 정신(심성과 풍속)은 폐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양 또한 한 해 수만에 달할 것이니, 이 나라도 부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듣다 보면 꽤나 익숙한 논리다. 요즘의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구호를 연상케 한다.

그의 열렬한 애국애족은 그런 의미에서 가히 ‘천동설(天動說)적’이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게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위해 ‘돌아줘야’ 한다는 식이다. 조선이 서세동점이라는 거대한 물결의 변수가 아니라 주변정세가 조선이라는 상수(常數)를 중심으로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는 것. 자기 객관화의 결여가 그의 치명적인 한계가 아니었을까.



세계관과 시대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익현의 명징한 선비정신만은 참으로 깊고도 투명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 선비치고는 드문 행동파 지성이었다.

1894년 대원군이 재집권했을 때 척사론의 기수인 최익현을 산업자원부 장관 격인 공조판서에 제수하려 했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그러나 최익현은 뿌리쳤다. 두 해 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할 때 정부는 다시금 면암을 조정에 불렀으나 그는 응하지 않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면암은 74세의 고령에도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1906년 2월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낙안군수를 지낸 태안 출신의 임병찬(林炳瓚)을 불러 전라도 태인과 순창을 중심으로 거병을 꾀했다. 두어 달 만에 의병은 113명이 됐다. 병력은 점점 늘어나고 마침내 태인읍을 접수하기에 이른다. 이어 정읍을 장악하고 난 뒤 의병부대는 800여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무장을 한 이는 2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단식과 죽음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칙지가 내려졌다. 한편 옥과(전남)와 금산(충북)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좁혀왔다. 면암은 그들을 치려 했으나 척후의 보고를 들어보니 상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관군이었다. 관군과의 전투에 의병들은 고민했다. 동족끼리 죽이고 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면암은 차마 결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의병진의 해산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의병이 흩어지고 22명이 남아 면암을 호위했다. 관군은 이 기회를 틈타 공세를 취했다. 면암은 경전을 외우다 임병찬과 함께 체포됐다. 다음날 일본인 고문관 쓰나지마 고지로의 심문을 받고 다시 하루가 지난 뒤 서울로 압송됐다.

6월26일 최익현에게 감금 3년형이 선고된다. 임병찬도 감금 2년. 두 사람은 7월9일 대마도로 유배됐다. 이미 대마도 수비대 병영에는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잡혀온 9명이 유배 중이었다.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면암의 기개는 대단했다. 야만의 나라, 좁은 섬에 갇힌 신세가 기가 막혔다. 그는 탄식하며 시를 지었다.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묻어나는 그의 한시가 전해진다.

기자(箕子)오실 적에 도(道)도 함께 왔거늘일본도 서양도 그 범위 안에 들거늘모르겠네, 조물주는 무슨 심사로날더러 대마도를 보게 하는지

상스러운(?) 왜적의 소굴에 갇힌 조선 선비의 굴욕감이라고나 할까….

일본 수비대장에게서 모욕을 당한 면암은 단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받아쓰게 했다. 당황한 일본 군인들이 ‘음식은 고국에서 보낸 것으로 짓고, 일본 수비대는 경비책임만 있을 뿐’이라며 단식중단을 설득했다. 함께 갇힌 의병들도 울면서 단식중단을 권했다. 단식은 중단됐으나 74세의 노령에 심신이 매우 손상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면암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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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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