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예루살렘, 또다시 메시아를 기다리는 2000년 古都

  •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5-02-24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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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감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구시가지. 황금 돔을 이고 있는 ‘바위의 돔’이 눈부시다.

    해발 830m의 감람산 중턱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한 알의 달걀처럼 한 손에 쏙 들어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관령 높이인데도 그다지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그만큼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기 때문이리라.

    한 변의 길이가 1km쯤 되는 육중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사각의 구시가지는 면적으로는 전체 예루살렘의 1%(30만평), 인구로는 5.5%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세계의 역사는 이 작은 공간 속에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체에 비유하면 핵과 같은 존재라 할까. 그 한가운데에 황금의 ‘바위의 돔’이 우뚝 솟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성벽은 무척 단단해 보였다. 절로 힘이 느껴졌다. 그 뒤로 솟아 있는 신시가지의 고층빌딩은 구시가지를 위한 무대장치처럼 보였다.

    감람산의 ‘감람’은 올리브나무를 뜻하는 감람나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올리브는 황야에 사는 이곳 사람들에게 영생불사를 상징한다. 감람산에는 예수의 행적을 기리는 교회가 여럿 있다. 산꼭대기에는 예수의 승천을 기념하는 승천교회가 있고, 그 아래로 예수가 주기도문을 가르친 것을 기념하는 주기도문 교회,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눈물을 흘린 예수를 기념하는 눈물교회 등이 있다.

    거기서 길 하나를 건너면 겟세마네가 나오는데, 넓은 동산과 숲으로 이뤄져 있고 과일나무와 꽃들이 무성하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기도했다는 바위 주변에 지어진 교회가 바로 만국교회, 일명 겟세마네교회다. 바실리카 구조에다 화려한 파사드(건물의 정면) 양식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 교회는 16개국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지어졌다.

    서기 30년 4월2일 일요일 오후 1시경, 당시 나이 서른이던 예수는 베다니를 나와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해 감람산에 올랐다. 감람산에 오른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날 그의 감회는 여느 때와 달랐다. 바로 최후의 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오랫동안 갈릴리 지역에서 설교활동을 해왔던 예수는 여리고를 거쳐 그 전날, 즉 토요일 오후 4시경 베다니에 도착했다. 이날은 유월절을 앞둔 안식일로, 그에게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안식일이었다.

    유월절을 앞둔 시점에 그가 예루살렘을 찾은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유월절은 그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출애굽)하면서 겪었던 고난의 여정을 기리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다. 매년 이때가 되면 예루살렘엔 교인들로 넘쳐난다. 예수는 그런 날을 기해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날을 보내고자 한 것이다.

    갈릴리와 나사렛에선 이렇다 할 대접을 받지 못했던 그였지만, 베다니에선 나사로 형제와 시몬, 그리고 이웃 주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선지자인 그는 왜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을까. 그건 아마도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뜻을 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지 모른다. 예수 또한 그래서 예루살렘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고난을 생각했다. 하지만 겁내지는 않았다. 예수는 제자 두 사람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서 누군가가 매어놓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도록 했다.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나귀였다. 예수는 그 나귀를 타고 황금의 문을 지나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갔다.

    예수의 이런 행동에 대해 평화의 왕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나귀의 걸음이 사람의 발걸음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범상치 않아 보이는 한 청년이 제자들을 이끌고 성내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다. 제자들은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호산나(구원이란 뜻. 주로 ‘만세’란 의미로 쓰였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제자들과 함께 성안을 지나던 예수는 초라한 행색의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냥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목격한다. 그 모습을 본 예수는 “부자는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서 일부를 떼어내 바쳤지만, 가난한 저 과부는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도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모두 바쳤다”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수많은 군중들 때문에 예수 일행이 성 안에 있는 성전에 도착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 후 말없이 성전 뜰을 거닐던 예수는 저녁때가 되자 베다니로 되돌아갔다.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올리브 등 과일나무와 꽃들이 무성한 겟세마네 동산. 입구에 서 있는 건물이 겟세마네 교회다.

    다음날인 4월3일 월요일, 예수는 또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 이날은 뭔가 할 일이 있는 듯 지체 없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다. 성전은 기원전 965년 솔로몬 왕이 지은 원래의 것이 아니었다. 바빌로니아제국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쳐들어와 파괴한 것을 재건하고 증축한 것이었다. 때문에 제사장과 율법학자, 장로, 장사꾼 등 유대인들은 성전 뜰을 조심스레 걸어다녔다. 행여나 옛 지성소(至聖所) 자리를 밟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대제사장들도 일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나귀에서 내린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성전 뜰을 거닐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모두가 유월절을 준비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즉시 장사꾼과 환전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고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쳤다. 마치 심판자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군중들을 향해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군중들은 “이 사람은 갈릴리에서 오신 선지자, 나사렛 예수이시다”라고 대답했다. 때맞춰 아이들은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며 노래했다.

    메시아가 돌아올 ‘황금의 문’

    성전의 장사꾼들은 대제사장과 한통속이었다. 장사꾼은 제사장의 묵인과 보호 아래 성전에서 장사를 하며 폭리를 취했고, 이익의 상당부분을 대제사장에게 바쳤던 것이다. 때문에 이날 예수의 행동은 대제사장의 권위를 부정하고 돈줄을 틀어막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잡아들일 수도 없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를 체포할 방안을 궁리했으나 별다른 묘책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사실 이날 예수의 행동은 유대인의 낡은 전통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잘못된 전통과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창조, 바로 그것이 예수가 생각한 자신의 시대적 소명이었다. 그로 인하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과 기원후라는 시대 구분, ‘구약’과 ‘신약’이란 성경 구분이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전에서 나온 예수는 다시 감람산을 거쳐 베다니로 돌아갔다.

    4월4일 화요일에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수는 이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새로운 시대란 하나님의 나라를 뜻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신국(神國)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것으로 지상의 나라, 즉 왕국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날도 예수는 다시 베다니로 돌아갔다. 예수는 날이 어두워지면 베다니로 돌아가고, 날이 밝으면 다시 예루살렘을 찾은 셈이다.

    그 다음날인 수요일 예수는 예루살렘을 찾지 않고 베다니에서 조용히 지냈다. 목요일, 다시 예루살렘에 온 예수는 시온산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 체포된다.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 밤새 심문을 당한다.

    그때 예수가 통행한 ‘황금의 문’은 최후의 심판 날에 메시아가 왕림할 것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막혀 있다. 필자는 그곳에서 제일 가까운 스데반 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스데반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다. 벽면에는 사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왕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예루살렘의 성벽을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자의 모습을 성벽을 재건하면서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부터 찾기로 하고 동쪽 유대인 지구로 향했다. 성은 네 개의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성전과 다마스쿠스 문이 있는 무슬림 지구, 통곡의 벽에서 시온문에 이르는 유대인 지구, 예루살렘 성의 정문인 야파문 일대의 아르메니아 지구, 마지막으로 골고다 언덕 주위의 기독교도 지구다.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세계 최초의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3000년 역사 간직한 좁다란 길

    성내의 길은 매우 좁고 꼬불꼬불했다. 가장 넓은 길이라야 소형 차량이 겨우 통과할 정도였고, 대개는 나귀와 등짐 진 사람들이나 간신히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좁았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은 물론 길바닥까지 온통 돌 천지였다.

    길이 넓으면 모든 게 빠른 속도로 변화해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을 게 얼마 되지 않겠지만,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특유의 좁고 꼬불꼬불한 길 덕분에 3000년의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모든 게 제 무게를 갖고 몸을 감추고 있는 이곳에선 천년도 찰나처럼 느껴진다. 이런 길을 지나다 보니 2000년 전 예수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얼마나 재미있고 다행스런 일인가.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예루살렘 구시가를 동서로 관통하는 대로. 이름과 달리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용모나 복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무슬림 지구라 해서 무슬림만 오가는 건 아니다. 그들 특유의 차림을 한 유대인도 보이고,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기념품 가게나 레스토랑, 찻집도 드물지 않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제일 먼저 찾았던 예루살렘 성전 터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40년 뒤 로마군에 의해 불타 사라지고 나중에 그 자리에 황금빛을 발하는 ‘바위의 돔’이 세워져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바위의 돔’이 있는 곳은 무슬림 지구에 속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예루살렘의 무채색 건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높이 35.4m의 돔은 지름이 20m나 되는 황금빛 지붕을 뒤집어쓴 모스크로, 상부는 24각의 벽면을 이루고 있지만 바닥과 만나는 곳은 8각이다. 각 면은 청·백·녹·흑·황색이 한데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을 만들어냈다. 그 표면을 밝은 청색이 뒤덮고 있어 생명의 밭을 연상케 했다.

    신발을 벗고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다. 통돌을 다듬어 세운 16개의 기둥이 동심원을 그리며 천장을 바치고 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어김없는 하늘이다. 신이 산다는 그 하늘 말이다. 그 아래엔 검은 색의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다듬지 않아 거칠게 보이는 바위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의 바위이고, 예언자 무하마드가 꿈속에서 승천하면서 밟고 올랐다는 그 바위다. 바위가 주인이라 ‘바위의 돔’이란 이름이 붙었다.

    옛 성전과 관련된 축조물 가운데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벽이 유일하다. 높이 21m나 되는 이 벽은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수직의 벽 그 자체다. 하지만 이곳은 신성한 공간이다. 그 옛날 성전을 이루던 벽의 일부라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한편 그들이 유대인 지구에 있는 많은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마다하고 그저 높다란 벽만 있는 이곳에서 간곡한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면 기도의 공간이라는 게 굳이 거창하고 화려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전이 화려하면 할수록, 또 거창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마음은 오히려 신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붕이 없는 ‘통곡의 벽 광장’은 기도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마가 다락방의 ‘최후의 만찬’

    통곡의 벽 광장에서 동쪽으로 곧장 빠지면 옛날 오물을 수거하던 똥(Dung)문이 나오고, 동남쪽 언덕으로 오르면 시온(Zion)문이 나온다. 구약성서에 무려 152차례나 나올 만큼 유대인에게 귀한 이름인 시온은 예루살렘의 발상지로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시편 137장에 나오는 ‘망향가’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온산은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시온문을 지나 100m쯤 나아가자 이른바 ‘마가의 다락방’이 나왔다. 2층 건물인데 1층에는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린 다윗왕의 석관이 안치돼 있고, 2층은 예수가 열두 제자를 불러모아 ‘최후의 만찬’을 베푼 그 유명한 다락방이다. 유난히 눈에 띄는 로마양식의 코린트식 석주가 천장과 만나면서 아치를 이뤘다. 이슬람식 색유리가 칠해진 창은 찬란한 빛을 발했다. 오스만제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던 시절 모스크로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창이다. 지금은 빈방이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는 이 방에서 제자들과 만찬을 하면서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말했다. 유다를 겨냥한 말이었지만 유다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는 그런 다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빵을 들어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고, 포도주 잔을 들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고 말했다.

    지상 최후의 만찬. 예수는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또 행했다. 세족(洗足)과 식사, 그리고 용서가 그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그 결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신세가 된다. 기독교 예배에서 중히 여기는 성찬식의 유래가 바로 이 최후의 만찬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후의 만찬은 중세 이래 많은 화가들의 테마였다. 그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최고로 평가받는다. 지금 세계의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는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의 미스터리 스릴러 ‘다빈치 코드’는 바로 이 다빈치의 그림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그림이 소장돼 있는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은총의 성모) 수도원은 최근 ‘다빈치 코드’가 나오고 난 뒤 찾는 이가 크게 늘어 예약을 하고서도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작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관람시간과 인원이 극히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30분 단위로 한 팀씩 입장하고, 한 팀은 25명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 벽에 그려져 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 다빈치의 여러 그림에 등장하는 각종 도상과 암호들을 풍부한 미술사, 종교, 비밀결사, 기호학적 지식들을 총동원해 꼼꼼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파헤쳤다. 댄 브라운은 여주인공 소피 느뵈의 입을 빌려 예수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예수의 부인이자 그의 두 자식을 낳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가 결혼했다거나 막달라 마리아가 그의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다빈치 코드’ 미스터리

    다빈치의 작품은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것도 예수 사후 1500년이 지난 뒤 아무런 물증 없이 오직 복음서의 기록에만 의지해 르네상스 스타일로 그린 것이라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재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13명. 예수는 그 한가운데 정좌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왼쪽에서 중앙으로 바돌로메, 야고보, 안드레, 가롯 유다, 베드로, 요한이, 중앙에서 오른쪽 끝으로는 도마, 야고보, 빌립, 마태, 다데오 유다, 시몬 순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댄 브라운은 소설에서 예수에겐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걸 지켜온 게 시온수도회(일명 템플기사단)이며, 이 그림을 그린 다빈치도 그 멤버 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그는 다빈치가 막달라 마리아를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편에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은근히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 흐르는 듯한 머리칼과 섬세하게 모아 쥔 손, 살짝 솟은 젖가슴 등이 영락없는 여자라면서 그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다.

    정통 신학자들의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한 댄 브라운의 주장은 신선함을 넘어 쇼킹하다. 소설이 대단한 흡입력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예수 오른쪽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라면 다빈치의 그림에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빠져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젊은 요한일까, 배반자 유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제자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최후의 만찬 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거기서 2km쯤 떨어진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그날 밤 하늘에선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처럼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예수는 거기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기도했다.

    제자들이 깨어서 그 모습을 보았다면 스승이 무엇을 간절히 기원하는지 알았겠지만 그들은 지쳐서 잠에 떨어진 상태였다. 바로 그때 로마 병사들이 들이닥쳐 나사렛 예수를 찾았다. 예수는 서슴없이 자신이라고 대답했고, 유다는 입맞춤으로 나사렛 예수를 가리켰다. 입맞춤으로 예수를 팔았던 것이다. 그날 겟세마네의 밤은 별이 빛나는 밤이 아니라 악마가 으르렁대는 스산한 밤이었을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베드로는 그 장면을 보고 단검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벴다. 예수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고통스러운 중에도 말고의 상처를 만져 낫게 했다. 예수는 그처럼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비를 베풀었다. 그런 다음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어라. 아버지께서 내게 내리신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그를 겟세마네에 있는 안나스의 저택으로 데려갔다. 안나스는 전임 대제사장이자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안나스는 곧 예수를 가야바의 저택으로 보냈다. 스승이 잡혀가는 데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몸을 숨겼다. 예수의 수난(Passion)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그만의 것이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고민

    가야바의 신문은 4월7일 금요일 새벽 3시 반에 시작돼 약 한 시간 정도 진행됐다. 가야바는 사형에 처할 목적으로 증인들을 불러들였으나 그들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려면 반드시 반역죄를 뒤집어씌워야 했다. 그래야만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역죄는 총독 소관으로, 그가 다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아직 깜깜한 시각인데도 가야바는 예수를 총독 관저로 이송토록 했다.

    가야바의 법정으로 오르는 길은 돌로 만든 계단으로 되어 있다. 예수는 이 길을 맨발로 걸어 올라갔다. 오늘날 순례자들도 이곳을 맨발로 걷는다. 예수가 걸음을 멈춘 곳엔 ‘닭울음 교회’ 또는 ‘베드로 통곡기념교회’가 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후 닭이 울자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다는 성서의 기록에 따라 세운 곳이다. 교회 내부에는 가야바 법정과 죄수들을 감금한 후 매질을 했던 지하 동굴감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모르긴 해도 예수는 이곳에 갇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최후의 만찬이 행해진 마가의 다락방 내부. 코린트식 기둥이 아치 모양을 그리고 있어 로마식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전 5시30분 경, 밧줄에 묶인 예수가 들어오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를 데리고 온 유대인들을 향해 물었다.

    “이 사람을 왜 데려왔소?”

    “가이사(카이사르,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를 왕이라 합니다.”

    빌라도는 고개를 돌려 잡혀 온 예수에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내가 붙잡히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네가 왕은 왕이구나.”

    “네 말이 맞다. 나는 진리를 갖고 이 세상에 왔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은 죄가 없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나라를 소란케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요?”

    빌라도는 그를 헤롯왕에게로 보냈다. 갈릴리는 헤롯왕의 사법권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6시경, 예수가 포박된 채 헤롯왕 앞으로 끌려왔다. 헤롯왕은 그에게 죄를 묻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괴롭히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예수는 어떠한 신문에도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 헤롯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냈다.

    예수가 다시 나타나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소. 헤롯왕도 죄를 찾지 못하고 돌려보냈소. 사형 받을 만한 죄가 없소. 해마다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대로 나는 이 사람을 놓아주고 싶소. 당신들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는가. 이 사람인가, 바라바인가?”

    바라바는 유대인 레지스탕스였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그러면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십자가에 다시오.”

    빌라도는 더 이상 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그릇에 물을 떠오게 하여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소.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아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에게는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가롯 유다의 배신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매우 민주적(?)’ 절차인 다수결로 예수의 처형을 의결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예수의 처형을 선고한 뒤 책임을 면하고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물로 씻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은 그 후 2000년이 지나도록 면죄되지 않았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주기도문이 오늘도 기독교도들의 입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달가워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죄를 홀로 뒤집어썼다. 가엾은 빌라도, 교활한 대제사장….

    예수는 결국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날 일몰 때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총독은 처형을 서둘렀다. 율법상 안식일에 시신을 처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형장은 골고다였다. ‘골고다’란 해골을 뜻한다.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이 가롯 유다다. 유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최후의 순간에 그 이름에 결정적인 오점을 남겼다. 돈 몇 푼에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다. 물론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서부터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잔치가 끝난 뒤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에게 다가가 벽장 깊숙이 갈무리해둔 귀한 향유를 꺼내서는 예수의 발을 씻어주었다. 이를 본 유다는 비싼 향료를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는 것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예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 그 발자취를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은 ‘십자가의 길’ 다섯 번째 지점. 시몬이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를 졌던 곳이다.

    이를 지켜본 예수는 “너희들은 이 여인에게 참견하지 마라. 그녀가 진심으로 선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알면서 왜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느냐. 너희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함께 있으니 어느 때라도 그들을 돌볼 수 있겠지만, 나는 너희들과 항상 함께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곧 내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이 여인은 장사지낼 내 육신을 위하여 이 향유를 오랫동안 간직해 왔으며, 나의 죽음을 예상하여 이 기름을 부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때도 일찍 자리를 떴다. 더 이상 예수에게서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그 시간에 대제사장을 만나 흥정을 벌였다. 유다는 은 30냥에 자신의 스승이자 지도자인 예수를 팔아 넘겼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은화를 그의 손에 주지 않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의리를 저버린 자에 대한 그 나름의 대우였다. 복음서에는 유다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쏟아져 구르는 은화들을 좇아 눈의 초점을 잃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한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에게 입맞춤으로써 로마 병사들에게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알렸다. 과연 유다는 그런 인물이었을까.

    예수의 출현으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대제사장측은 예수를 잡으려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었다. 소란을 덜기 위해 공식석상에서만 피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씌울 죄목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다. 매질 정도라면 언제든지 가능했지만,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려면 반역죄, 즉 정치범으로 몰아야 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왕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고 로마 군정에 반기를 든 일도 없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그를 심문하면서 예수에게 “네가 메시아냐”고 직접 묻기까지 했지만 허사였다.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

    그렇다면 유다는 무슨 일을 했기에 그토록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인가. 대제사장이나 로마 총독부에선 마음만 먹으면 예수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예수 소전’에서 유다가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를 대제사장에게 밀고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했으나, 빌라도 법정에서의 진행상황을 보면 유다의 역할이나 그가 제시한 증거가 그리 돋보이지 않는다.

    그의 죄는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점, 관심이 오직 지상의 것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베드로 역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그렇지만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믿음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유다는 오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그에게서 희망을 읽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유다의 존재를 배반자가 아닌 반면교사로 읽는다.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유다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내게는 있는 걸까.

    필자는 예수의 수난을 되새기려는 순례자들과 함께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이른바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라틴어로는 ‘비아 돌로로사’라고 한다. ‘슬픔의 길’이란 뜻이다. 이 길을 어떤 이는 십자가를 지고, 어떤 이는 무릎걸음으로 걸으면서 예수의 고난을 묵상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일까. 기독교 신앙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십자가의 길에는 14개의 의미 있는 장소가 있다. 그중 몇 군데에는 표식이 있다. 출발점은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빌라도의 법정. 스데반 성문에서 250m쯤 떨어진, 지금의 아랍인 학교가 있는 곳으로 그곳에 첫 번째 표식이 있다. 그 건너편에 두 번째 표식이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를 졌다는 지점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요한 19:5)”라고 외쳤던 현장에는 ‘에케 호모(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란 뜻)’ 아치가 세워져 있다. 세 번째 지점은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예수가 처음으로 쓰러진 곳이다. 그 예에 따라 순례자들도 이 곳을 지날 때면 그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쓰러졌다. 예수는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걸었겠지만 지금은 순례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진다.

    어머니 마리아를 만났다는 네 번째 지점과 시몬이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를 졌던 다섯 번째 지점, 베로니카가 피묻은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었던 여섯 번째 지점을 차례로 지나자 구시가를 동서로 가르는 대로가 나왔다. 그 길에는 예수가 두 번째로 쓰러진 일곱 번째 지점과 예루살렘 여인들이 그를 보고 울자 예수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한 여덟 번째 지점이 있다.

    예수가 세 번째로 쓰러진 아홉 번째 지점은 성묘교회 입구인 카르도 막시무스 거리에 있다. 카르도(Cardo)란 남북으로 달리는 길을 말하고 막시무스는 ‘큰 대’를 뜻하니 카르도 막시무스는 ‘주작(朱雀)대로’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대로라고는 하지만 자동차 두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길에 불과하다.

    열 번째 지점에서 열네 번째 지점까지는 모두 성묘교회 안에 있다. 정면은 십자군 전쟁 때 복구된 것이라 유럽 중세 스타일 그대로다. 성묘교회의 역사는 서기 3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가 처형당한 이곳을 방문하고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후 세월과 함께 증축을 거듭해 지금과 같은 큰 교회가 됐다. 이름이 된 성묘(聖墓·Holy Sepulchre)란 예수의 무덤을 뜻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예수의 가짜 무덤이 만들어져 있고, 그걸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현재 성묘교회 내부는 로마가톨릭, 그리스정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시리아정교회, 콥트 기독교(이집트 기독교), 에티오피아 교회 등 6개 종파가 각각 분할해서 관장한다. 물론 예배도 별도로 행한다. 하지만 교회 열쇠는 십자군 이후 이슬람측에서 계속 관리한다. 지금도 교회의 유일한 출입문은 이슬람교도가 열고 닫는다.

    교회 안 제일 깊숙한 곳에 모셔진 골고타의 바위는 열 번째 지점으로 로마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겨 그들끼리 나눠가진 곳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열한 번째 지점에는 프란체스코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열두 번째 지점은 예수가 두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은 곳이다. 죽음에 이른 예수는 소리 질러 이렇게 말했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지상 최후의 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내려진 곳이 마지막 열네 번째 지점인데, 그 자리엔 조그만 둥근 돌판이 놓여 있다. 예수의 주검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인계받았다.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안식일에 시체를 형장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유대 계명을 들어 돌려달라고 했던 것. 빌라도는 예수가 죽었는지 확인한 뒤 그에게 시신을 넘겨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지 세 시간 만에 한 병사가 창끝으로 늑골 사이 심장을 찔러 숨졌다.

    필자는 골고타 바위를 보면서 요셉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비싼 세마포에 싸서 내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장면을 떠올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장면을 그린 성화를 여러 번 본적이 있어서다. 미켈란젤로 또한 그렇게 내려진 상처투성이의 예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비통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피에타’란 이름의 조각으로 새겨놓지 않았던가.

    요셉은 장차 자신이 쓰려고 미리 장만해둔 지하묘실에 예수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게 예수의 무덤이다. 안식일인 토요일은 온전히 쉬고 그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햇살이 대지 위를 비추기 시작하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갈보리에서 온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찾았다. 헌데 입구를 막아두었던 큰 돌은 저만치 굴러가 있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허리를 구부려 비어있는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누가 내 주를 가져다 어디 두었는지를 알지 못하노라”며 울먹였다. 바로 그때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의 음성인지 몰랐던 마리아는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소서”라며 애원했다. 그때 “마리아야!” 하며 부르는 아주 낯익은 목소리에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바로 예수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기뻐 다가오는 마리아를 향해 예수는 “너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하고는 “나를 잡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예수는 그렇게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대로 부활했다.

    예수의 지상 마지막 날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4월7일 오전 9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졌다. 골고타 언덕까지 2시간 정도 십자가의 길을 고통스레 걸어올라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숨을 거둔 것은 오후 3시경, 그때 시신은 요셉에게 인도됐다. 요셉은 시신을 곧바로 묘실에 안치했다.

    다음날은 안식일인지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 등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일요일 오전.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해 신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40일이 되던 날 승천한 것으로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예수는 역사적 인간으로 예루살렘에 왔다. 그리고 고난을 받았다. 그 고난은 인간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역사적 인간의 틀을 벗었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듯 모든 것을 초월했다. 따라서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이므로 역사가나 신학자가 논할 영역의 밖인 것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기독교에서 부활의 신비를 제거하거나 부정한다면 그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를 믿고 따를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붙잡혀갈 때 몸을 숨겼던 제자들도 그가 부활하고 환영 속에 나타나자 그가 메시아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들려준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진정한 사도가 되지 않았던가.

    물론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일요일 아침 교회 종소리를 듣는다. 저것은 로마의 사형수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종소리다. 그러나 그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면서 예수의 부활은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한껏 목청을 높였다.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지만 초자연적인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성묘교회에서 나온 필자는 아랍인이 운영하는 작은 찻집을 찾았다. 진한 박하 향이 나는 민트차를 마시면서 예수의 생애를 생각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웠다”며 그 사실을 세상에 전하라고 일렀다. 그런데도 그는 왜 스스로의 입으로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부활하기 전까지는 인간이기에 미래적 성격이 강한 메시아란 칭호의 사용을 절제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자세는 대제사장이 그에게 “네가 메시아냐”고 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진정한 메시아의 자격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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