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치 : 음탕한 계집’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 손재석 옮김/ 황금가지
저자 엘리자베스 워첼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시정하려는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이 책은 ‘나쁜 년’, 즉 ‘비치’로 산다는 것의 가치를 발견한 씩씩한 ‘비치’ 옹호자의 진솔한 고백서다. 저자 워첼은 하버드대를 나와 ‘뉴요커’와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편집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는 똑똑한 여성이지만, 심한 우울증 때문에 약물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이 책은 신화와 갖가지 서사물, 수없이 많은 미국 영화와 드라마들을 뒤져 ‘악녀’의 발흥과 발생론적 배경을 더듬고, 남성 중심사회의 문화와 역사가 어떻게 그들을 몹쓸 ‘악녀’와 ‘요부’로 조작해냈는가를 밝힌다. 또 여성에 대한 번뜩이는 저자의 통찰력이 책 읽는 흥미를 북돋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렇다. “여성들이 성적 대상물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것만큼이나 이를 상쇄하는 힘, 즉 여성들의 공모 속에서 여성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만들어버리려는 힘이 존재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
세상의 모든 서사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캐릭터는 ‘사악한 여성’, 즉 ‘나쁜 년’이다.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나쁜 년’이 나오지 않으면 드라마가 안 되기라도 하듯 작가들은 ‘나쁜 년’ 캐릭터 창조에 골몰한다. 그녀들은 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며 그래서 라이벌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미 열 살 전후부터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등의 교활한 테크닉을 개발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가십과 비방’으로 경쟁자들을 거꾸러뜨리는데, 이 간접적인 공격은 희생자를 감정적으로 황폐화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녀들은 늘 “공범이며 간교하고, 유혹적이며 언젠가는 배신”을 해 남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부당하게 덧씌워진 남근 우월주의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겨내면 그녀들은 그냥 “다른 사람의 욕구와 필요와 욕망을 공유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코드니 러브의 “광포한 분노”, 제니스 조플린의 “끔찍한 고통”, 마릴린 먼로의 “숭고한 연약함”, 앤 섹스턴의 “현란한 광기”, 샤론 스톤의 “차가운 매력”이 혁명적으로 도드라지는 것은 남자들은 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지만 여성들은 대부분 매사를 조용히 해결하는 선택을 해왔기 때문이다. 광기와 창조적인 천재, 영웅적 행동은 결코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메리 월스턴크래프트, 시몬 드 보부아르, 버지니아 울프, 글로리아 스타이넘, 수전 팰루디 등과 같은 선도적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올바른 행실” 속에 숨은 음모를 폭로하고, “여성의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를 예찬했다. 그래서 여성들은 제 본능과 충동을 억제하고 “연애와 구애의 모든 과정에서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불필요한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워첼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시 말해 여성 스스로 남자들이 여성을 비하하며 내뱉는 ‘비치’가 되라고 선동하는 것. 회사에서 생리 휴가를 꼬박꼬박 챙기는 여자를 마초들은 끔찍한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비치 되기는 남성들이 오랫동안 끔찍한 것으로 규정해온 여성의 욕망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해방의 환각이자, 방탕한 쾌락에 대한 환영”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워첼은 비치의 철학을 온몸으로 전파하기 위해 “이제 나는 울부짖고 소리지르며 시동을 걸어 질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삼손을 해방시킨 데릴라
성경의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데릴라는 일찍이 비치의 한 ‘원형’이었다. 삼손을 유혹해 그의 괴력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데릴라는 “화려하고 퇴폐적이며 불온하고 문란한” 여자다. 삼손은 터미네이터이자 테러리스트이고 행동하는 인간형이자 시나이반도의 ‘체 게베라’였다. 달리 보면 삼손은 자신의 “남근과 변덕스러운 힘자랑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삼손을 유혹한 데릴라는 매춘부이거나 블레셋 방백들이 데리고 놀던 고급 창녀였을 것이다. 하지만 데릴라는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딸이 아니라 그냥 데릴라, 결혼 관계나 가족 관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독립적인 여성이다. 삼손과 데릴라의 이야기는 “‘그들의 규칙’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영혼”을 지닌 한 여자가 “일생 동안 육체적 혼돈 속에 지냈던” 한 남자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감성과 정신적 성숙으로 이끈 윤리적인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