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자산 1조2000억, 일본 파친코 황제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

“실력, 교양, 신용으로 차별 이겨냈다”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5-08-25 15:5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자산 1조2000억, 일본 파친코 황제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
    (주)마루한은파친코 회사다. 파친코 게임에 사용되는 ‘구슬’을 뜻하는 일본어인 ‘마루’와 한창우 회장의 ‘한’을 합성해 회사 이름을 만들었다. 그에게 성을 준 나라 한국과 그를 성장시킨 나라 일본을 모두 고려한 회사명이다.

    마루한은 2004년 1조3000억엔(13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일본에 168~200여 개 점포, 8만8000여 대의 파친코와 슬롯머신, 7300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 마루한의 회원고객은 100만명. 매출, 회사 규모 면에서 일본 파친코업계 1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규 점포가 생겨나고 있다.

    지난 6월22일 저녁, 도쿄 인근 지바시에 있는 마쿠하리 대형 컨벤션홀에선 마루한의 매출 1조엔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9000여 명이 참석했다. 대연회장 두 곳을 텄다. 유명 호텔 두 곳에서 종업원 1500여 명이 동원돼 프랑스 요리와 와인을 날랐다.

    ‘150억원 디너쇼’와 ‘챌린지 정신’

    중앙엔 한창우 회장을 비롯한 200명의 마루한 임원이 도열한, 웅장한 단상이 마련됐다. 한 회장의 초청으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북한 평양과학기술대학교 김진경 총장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규모의 만찬이 열리기는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이 음악을 연주했다. 한창우 회장은 이날 행사경비로 150억원을 썼다. 직원들에겐 특별보너스가 지급됐다. 그의 지인들은 “‘통 큰’ 한창우다운 빅쇼”라고 말했다.



    이 행사에서 한창우 회장은 “헝그리 정신과 챌린지(도전) 정신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회고했다. “매출 1조엔은 과정일 뿐이다. 5년 뒤엔 매출 5조엔(50조원)이 된다”고 밝혔다.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정도의 이날 행사는 마루한의 파워’라는 수식어와 함께 일본 신문과 방송을 탔다. 때마침 ‘포브스’ 일본판은 그의 순자산이 1210억엔(1조2100억원)으로, 일본에서 24위의 부자라고 발표했다. 2005년은 그가 1945년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때로부터 60년이 되는 해다.

    한창우 회장은 1930년 12월17일 경남 삼천포(지금의 사천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석 달 뒤 출생신고를 해 호적상 그의 생일은 1931년 2월15일이다.

    한 회장은 고향에 대해 “경치는 그만이었지만 일자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은 소작농이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가난했다. 중학교 1년을 마친 14세의 한 회장은 1945년 10월21일 밤 집을 나와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 일제시대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정착한 큰형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집은 가난해서 너는 한국에선 학교 못 다닌다”는 형의 말에 일본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들을 혼자 외국에 보내는 그의 어머니는 “가거라, 그곳에서 굶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며 쌀 두 포대를 들려줬다. 영어사전도 들고 갔다. 3시간이면 일본에 도착한다던 밀항선은 20여 시간 바다에 표류한 끝에 일본 시모노세키현 해안에 닿았다.

    -일본에서의 첫날 밤은 어땠습니까. 60년 전 일인데 기억이 잘 나는지요.

    “기억이 또렷하지요.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반달이 뜬 밤 함께 밀항한 일행과 섞여 여관으로 갔습니다. 유카타 입고 게다 신고 목욕장으로 가는 일본 아가씨들이 보였습니다. ‘딸각, 딸각’ 하며 걷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울리는 듯합니다.

    고향 선배라는 사람이 여관에 찾아와 나를 시청에 등록해줬습니다. 일본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게 됐다고 하더군요. 이틀 동안 기차를 타고 도쿄 인근 이바라키현에서 일하는 형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형의 형편도 좋지 못해 이내 도쿄로 나오게 됐습니다.”

    영어사전 들고 밀항해 대학 진학

    자산 1조2000억, 일본 파친코 황제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

    도쿄 인근 지바현에 있는 마루한의 파친코 점포

    -영어사전 들고 밀항했다는 게 인상적인데요.

    “소학교 6년 동안 한번도 1등을 놓친적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공부해서 실력을 쌓아야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했습니다. 요즘의 조총련이나 민단에 해당하는 도쿄의 재일교포단체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도쿄 조선장학회라는 곳에서 시험을 쳐 고교졸업과 대입시험 자격을 얻었습니다.

    학업에 더욱 매진해 일본에서 명문으로 통하는 도쿄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습니다. 숙식은 재일교포단체 사무실의 일을 도와주며 거기서 해결했고요. 에도강변에 있어 여름철이면 모기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식사는 주로 양배추와 쌀, 된장을 물에 넣고 끓여 먹었습니다. 되게 맛없죠. 그마저 재료가 떨어질 때가 많아 늘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21세 때인 1952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한창우 회장은 대학 재학 때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을 탐독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세 가지에 심취했다. 마르크스, 패션 디자인, 클래식 음악이 그것이다. 주인공이 스탄 게츠의 재즈를 들으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포스트모던’한 소설이 오버랩된다.

    마르크시즘, 패션, 멘델스존

    마르크스 경제학에 빠져든 것은 정밀한 비용과 승패율 계산이 요구되는 파친코업계에서 성공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는 음악감상 취미를 살려 음악다방 사업을 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일본 클래식 음악계의 유력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마루한의 디너쇼 행사 때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흘러나왔다. 젊은 시절 한 회장이 점심을 굶은 돈으로 음악카페를 처음 찾았을 때 들은 곡이다. 미적 감각은 마루한 점포의 차별화된 현대적 인테리어에서 발휘되고 있다. 요즘 한 회장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의 그림을 애호해 수집하고 있다.

    한 회장은 “일본사회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이어 그는 “어느 사회에서나 차별은 존재한다”고 했다. 차별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차적 반응은 차별하는 주체에 대한 적개심이다. 적개심이 성공의 동력이 되기는 한다. 대신 삶의 여유는 사라지고 투지만 남는다. 한 회장은 “나는 여유와 성공을 모두 얻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긍정적 사고로 차별을 수용한 것이다. 그는 “실력, 교양, 신용, 이 세 가지만 갖추면 어떤 사회의 차별이라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학부를 졸업했으니 취업해서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인 졸업생들도 대부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한국 국적으로는 취업이 불가능했습니다. 자형이 일본 교토에서 전철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 미네야마에서 조그마한 파친코 점포를 운영했습니다. 1952년 대학졸업 후 그곳에 가 점포 일을 도와주며 몇 년을 보냈습니다. 파친코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자형의 점포엔 파친코 게임기가 20대 있었는데, 인근에 60대를 들여놓은 새로운 파친코 점포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자형 점포의 손님이 뚝 끊겼어요. 자형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점포를 매물로 내놓았으나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형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어떤 제안이었습니까.

    “나는 빈털터리이니 점포를 내게 공짜로 달라고 했습니다. 대신 내가 꼭 점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점포 시세의 두 배를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자형은 내게 점포를 물려주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26세 때인 1957년 드디어 ‘마루한’을 설립했습니다. 파친코 게임의 승률을 조금 높였습니다. ‘잘 터진다’는 소문이 나자 손님들이 다시 찾았습니다. 돈을 잃은 손님에겐 담배도 주고 게임용 구슬도 줬습니다. 얼마 뒤 20대이던 파친코 게임기가 40대가 됐습니다. 자형과의 약속을 지키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32세 때는 지하1층, 지상3층 빌딩을 소유하게 됐습니다. 1층엔 취미를 살려 음악다방을 열었고 2층은 양식당이었습니다. 40평 규모인 3층은 집으로 사용했죠.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설인 자동문, 에어컨도 갖췄습니다. 동년배 일본 친구들보다 경제적으로는 훨씬 잘살게 된 것이죠. 파친코도 150대로 늘었습니다.”

    자산 1조2000억, 일본 파친코 황제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

    도쿄시내 마루한의 파친코 점포 내부

    그는 34km 떨어진 인구 5만의 도요오카시에서 도산한 파친코 점포도 인수했다. 거기서도 성공을 거뒀다.

    14세의 나이에 맨주먹으로 일본에 건너가 32세에 탄탄한 기반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회장의 청년기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아주 작은 인연들(예를 들어 재일조선인 모임, 자형의 영세한 파친코 점포 등)을 발견해 이를 소중하게 활용했다. 성공의 길을 먼 곳에서, 거창한 데서 찾지 않고 자신의 주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큰 시련이 닥쳐왔다. 40세 되던 해 한 회장은 볼링 사업에 뛰어들었다. 볼링장을 지을 땅을 물색하기 위해 하루 1300km를 달리기도 했다. 마침내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볼링장을 세웠다.

    “미네야마의 파친코 사업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 도시엔 낭만도 있어요. 미지근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통 나가고 싶질 않잖아요. 그런 심정이랄까. 그런데 그렇게 24년을 보내자 그 동네를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마음은 이미 오사카, 도쿄에 가 있었습니다.”

    볼링장 사업은 얼마 안 가 실패로 끝났다. 60억엔(600억원·현재시가 1200억원)의 빚만 떠안게 됐다.

    “그 큰돈을 어떻게 갚겠습니까. 한마디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거죠.”

    600억원짜리 신용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이 “돈을 더 빌려가라”고 한 것이다.

    -볼링장 사업은 왜 실패했습니까.

    “당시 일본에선 볼링 붐이 일었습니다. 42세 때 전국에 일본 최대의 볼링센터 체인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쿄 인근 시즈오카시에 120레인을 갖춘 볼링센터를 오픈했습니다. 전국에서 6개의 볼링장을 운영했습니다. 30여 년 전 일인데 그때 당시 27억엔(270억원)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볼링장 매출이 점점 떨어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쇼크가 찾아오자 손님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습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 순식간에 60억엔에 이르게 됐습니다.”

    -어떻게 수습했습니까.

    “돈을 빌려준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최선을 다해봤는데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우선 통장, 인감증명, 등기부 등 저의 전 재산을 갖고 왔습니다. 다 받아주십시오’라고 했죠. 그런데 은행 간부가 ‘오키나와 부근 섬으로 여행이나 가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2박3일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 간부는 ‘사업을 계속하세요. 돈을 더 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여행은 저에 대한 마지막 테스트였다고 합니다.

    비록 한번 실패는 했지만 저의 사업능력과 신용을 믿고 제게 더 투자하는 것이 원금 회수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저는 차별대우받는 한국인이었기에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신용을 생명처럼 지켜왔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결국 신용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마지막 밑천이 됐습니다. 주변에서 ‘부도를 내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저는 60억엔의 빚을 기어코 갚기로 결심했습니다.”

    한 회장은 볼링장 개설용으로 물색해놓은 목 좋은 지역에 파친코 점포를 열었다. 그는 점포를 계속 늘려갔다. 매달 빚을 갚아 나가는 액수가 많아졌다. 마침 그 무렵 일본 전역에 파친코 붐이 일어 매출이 급신장했다. 한 회장은 “42세 때 진 60억엔의 빚을 52세 때 모두 갚았다”고 말했다.

    600억원, 현재 가치로 1200억원을 10년 만에 갚은 비결은 무엇일까. 한 회장은 “단 한 분야에서 ‘마스터(Master)’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선 10가지 일을 평균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한 가지 일을 남보다 10배 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망해가는 파친코 점포들은 한 회장이 손을 대면 다시 살아났다. 그는 “왜 망했는지를 분석해 망한 원인들을 제거했다. 망한 원인이 치명적일 땐 인수를 포기했다. 열성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비용, 승률, 이윤을 계산했다”고 말한다. 이론과 실전경험을 조화시켜 파친코 점포에서 수익을 내는 노하우를 취득한 것이 그를 ‘미다스의 손’으로 만들었다.

    파친코 사업의 원리는 동일하기에 점포 한 곳을 아주 잘 운영하는 사람은 빠른 속도로 점포를 늘릴 수 있다. 그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수익은 ‘J자형’으로 수직상승한다. 한 회장이 60억엔의 빚을 모두 청산한 것도 바로 이 원리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마스터가 되라”

    자산 1조2000억, 일본 파친코 황제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

    (주)마루한의 도쿄 본사 전경.

    한 회장은 ‘상인팔훈(商人八訓)’이라는 글귀를 액자에 넣어 자신 소유의 모든 점포 사무실에 걸어두고 직원들이 매일 보도록 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것. 100원 손님보다 10원 손님을 더 중요시할 것. 손님이 물건을 환불하러 왔을 때 더 친철히 대할 것. 번성할 때 더 절약할 것. 비용은 아무리 적은 돈도 아낄 것. 개업할 때의 초심을 잊지 말 것. 같은 계열의 상점이 근처에 생겼을 때 호의로 대할 것. 점포를 새로 내면 새 점포를 3년간 돌봐줄 것….

    파친코는 수십년 전부터 이어져온 일본의 독특한 문화다. 돈을 구슬뭉치로 교환한 뒤 파친코에 구슬을 넣어 더 많은 구슬을 얻는 게임이다. 구슬을 모두 잃으면 게임은 끝난다. 구슬은 경품으로 교환됐다가 현금화된다. 파친코 점포에서 슬롯머신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일본 전국에 1만6000개의 파친코 점포가 있다. 점포당 200~1000개의 파친고 게임기가 놓여있다.

    일본 국민 4명 중 1명(3000만명)이 파친코 점포를 찾는다. 시장 규모는 300조원. 일본 파친코는 건 돈의 85%를 돌려주는 승률로 운영된다.

    10년 전인 1995년, 한 회장이 운영하는 마루한이 도쿄에 입성했다. 1995년은 일본에선 헤이세이(平成) 7년이다. 점포 개설식은 헤이세이 7년 7월7일 7시7분에 열렸다. 7은 파친코 애호가들에게 행운의 숫자로 통한다. 당시 파친코 점포는 1층에 주로 있었는데, 마루한은 도쿄 번화가인 시부야의 7층 건물 중 2~7층에 매머드 점포를 개설했다. 실내 인테리어는 일본 최고 수준. 파친코 업계 최초의 ‘기업화 선언’이었다. 동시에 한 회장은 탈세, 야쿠자와의 유착 등 파친코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투명 경영’을 공약했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아 연일 대서특필됐다. 한 회장은 “일본 파친코가 부정적인 도박장 이미지에서 벗어나 ‘현대화된 건전 레저 문화’ 쪽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봤다. 그렇다면 내가 한번 바꿔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마루한은 모든 수입과 지출을 실시간 단위로 전산처리해 세무당국에 제출했다. 1년에 150억엔의 세금을 내고 수익의 1%는 사회봉사에 쓴다. 마루한은 일본 프로축구(J리그) 오이타팀의 스폰서도 맡고 있다.

    마루한은 현재 도쿄증권거래소 주식상장을 준비 중이다. 한 회장은 “마루한은 은행 대출금도 별로 없다. 자금은 충분하다. 그런데도 거래소 상장을 하려는 것은 파친코 기업 마루한의 경영 투명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 결과, 한 회장은 일본 파친코 업계에서 규모 면에서도 1인자일 뿐만 아니라 ‘기업가 정신’의 측면에서도 리더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다음은 한 회장에 대한 일본 언론과 외신 보도 내용이다.

    ‘한창우 회장, 창업 약 반세기로 업계 톱의 매상 1조엔 달성. 그 백그라운드에는 숭고한 인생철학이 있다.’(재계일본 2005년 5월)

    ‘마루한은 투명경영으로 파친코업계의 더티(dirty)한 이미지를 쇄신하여 주식 공개를 비롯한 상장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동양경제일보 2004년 4월9일)

    ‘한창우씨는 신념, 열정,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다.’(아사히신문 1993년 6월29일)

    ‘한창우 회장은 창의적인 상상력과 성의, 노력, 신용, 봉사의 정신으로 오늘날의 기업을 이루게 됐다.’(포브스 일본판 2005년 7월)

    ‘일본의 파친코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처럼 희로애락이 넘쳐흐른다. 마루한은 1970년대와 80년대 일본 경제성장 붐과 함께 급성장했다. 설립자인 한창우 회장은 숱한 역경을 딛고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2004년 3월24일)

    잘나가던 일본경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장기 불황에 빠졌지만 마루한은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파친코 업계 1위 마루한의 매출은 1조3000억엔. 2위 업체는 1조엔, 3위 업체는 7000억엔 정도다. 그러나 4위 이하 업체의 매출은 2000억엔 이하다. 일본엔 6000여 파친고 운영자가 있는데 빅3 구도가 완연하다. 마루한측은 향후 이 같은 구도가 더 심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점포 신규 개소와 기존 점포 인수에서 마루한은 매우 공격적이다.

    마루한의 성장과 함께 한 회장의 재산도 계속 느는 추세다. 한 회장은 “내 재산 중 회사에 지급보증이나 담보로 들어가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의 1조2000억원 재산은 대부분 ‘현찰’이라는 얘기다.

    한 회장은 “5년 만에 매출을 5배 늘리겠다는 목표(50조원)는 무리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실현된다”고 장담했다. 한 회장이 파친코 운영의 귀재라고 해도, 본인이 소수의 점포를 직접 운영하는 것과 매출 10조원이 넘는 거대 조직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성격이 크게 다른 사안이다. 마루한의 조직 운영 시스템을 들여다봤다.

    평등주의, 실력주의

    자산 1조2000억, 일본 파친코 황제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

    일본 프로축구(J리그) 오이타팀 서포터스가 (주)마루한의 오이타팀 후원에 대해 ‘감사(ありがとう)’라고 쓴 현수막을 내걸어 답하고 있다.

    8월3일 도쿄 시내 시부야, 신고이와, 인근의 지바현 이치하라시 등 세 곳의 마루한 점포를 찾았다. 이치하라시 점포엔 하루 4000명(연 인원)이 찾는다. 오전 10시 문을 열기 전부터 손님들은 줄을 길게 서서 입장을 기다린다. 이 점포 한 곳에서만 매월 15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가네코 점장은 “점포 내부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모든 파친코 게임기의 운영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가네코 점장의 나이가 28세라는 점. 지방대학 출신인 그는 마루한에 평사원으로 입사, 점포의 잔일을 하는 말단 종업원으로 시작해 수년 만에 점포의 수장이 됐다. 점장(과장급)은 매출 실적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억원 정도를 연봉으로 받는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20대 직장인 수입치고는 적은 편이 아니다. 마루한에서 20대 점장은 흔히 볼 수 있다.

    마루한의 신입사원 중 고교 졸업생은 J1급, 전문대 졸업생은 J2급, 대학 졸업생은 J3급에 들어간다. 각 급수의 신입사원들은 1년 후 테스트를 통과하면 C급으로 승진한다. 업무능력만을 테스트 한다. 이후 인사성적과 상급자의 추천을 통해 매니저급이 되며, 다시 같은 과정을 거쳐 점포의 점장이 된다.

    마루한 인사부 곽승우 과장은 “마루한 시스템의 특징은 학력차별 없는 평등주의, 실력주의다. 회장님의 인사방침이다. 이것이 마루한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구조조정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마루한은 매년 400명의 대학졸업생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고 있다.

    도쿄 시부야 점포의 고마쓰(35) 점장도 20대에 점장이 됐다. 그는 “마루한은 인기 있는 직장이다. 직원들에게 의욕을 준다. 홋카이도 등 전국의 점포를 옮겨다니며 일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2년에 한 번씩 전 사원에게 회사자금으로 해외 여행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는 별도로 미국령 괌섬의 본인 소유 부지 78만여 평에 골프장과 호텔을 조성해 이를 사원 휴양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한 회장은 세계 각지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루한은 직원 재교육을 위한 비즈니스 스쿨을 별도로 운영한다.

    한 회장은 “마루한은 직원 교육, 조직 시스템, 도덕성에서 세계 최일류를 지향한다”고 했다. “내가 차별을 받았기에, 나는 차별 없는 일류 회사를 만들겠다”는 그의 지향점은 7300여 직원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한국 이름으로 일본 국적 취득”

    한 회장은 28세 때 결혼했다.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다. 그는 제과점에서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던 여대생에게 다가가 다자고짜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결혼한 부인은 한 회장보다 아홉 살 아래. 부인도 한 회장의 당찬 태도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그러나 처가는 한 회장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한 회장의 장인은 고베제철 부장 출신의 중산층으로 아들들은 은행, 증권사,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었다. 집안엔 천황의 사진을 걸어두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적대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다. 일본 중산층 가정에서 한국인과의 결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3남은 “한국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한 회장은 “기분이 좀 나빴다”고만 했다.

    그는 개의치 않고 결혼식을 강행했다. 결혼식 날인 11월13일은 일본에선 ‘재수가 없는 날’로 알려져 아무도 결혼하지 않는 날이었다. 한 회장은 “덕분에 예식장 잡는 데 여유가 있어서 잘됐다”며 그날 결혼했다. 결혼식에 한 회장의 가족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의 가족 역시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한 회장의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았다. 처가 식구는 한 회장의 회사에서 함께 일한다. 한 회장의 장남은 미국 유학 중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한 회장은 당시 장남의 구조 작업을 도운 미국인들을 일본에 자주 초청하며 매번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의 여섯 자녀 중 다섯 명은 재일 한국인과 결혼했다. 한 명은 미혼이다. 한 회장은 자녀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가정을 꾸릴 것인지를 하객 앞에서 발표하게 한다.

    일정을 끝내고 호텔에서 쉬고 있는 기자에게 한 회장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말미에 가족 얘기를 했다. 매출 1조엔 초과 달성 때 차남이 ‘루체(Luce)’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와인을 축하편지와 함께 보내왔다고 한다. 한 회장이 미네야마에서 처음 운영한 음악다방이 루체였는데, 아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2001년 한 회장은 일본 국적 취득신청을 해 국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꿨다. 대신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지 않고 이름은 그대로 ‘한창우’로 했다. 그의 국적변경에 대해 재일동포사회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 회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재미교포가 미국 국적(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은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니 재일동포가 일본 국적 취득하는 것을 비난해선 안 된다. 그렇게 다른 동포들이, 한국 국민이 비난하니까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 동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성과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버린다. 본인이 한국계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 민족이 스스로 녹아 없어지는 일이다. 지금 60만 재일동포가 이런 식으로 뿌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국인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도 ‘김’이나 ‘박’ 같은 성은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성을 그대로 자손에게 물려준다. 미국사회에서 한국 성을 가진 미국인들이 많아지면 한국에 더 이로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사회에 ‘한국 이름을 가진 일본 국민’이 많아지면 일본과 한국은 훨씬 더 우호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름만 들어도 ‘한국계 일본인’임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이 아무런 불편과 지장을 주지 않는 일본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내가 계기가 되어 한국 이름 그대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붐’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한일관계가 보통 국가간의 관계가 됐으면 한다. 그러면 많은 오해와 갈등이 풀린다.”

    한 회장의 자녀들도 모두 한국 이름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차남은 고등학교 시절 야구선수였다. 그는 고시엔 대회 결승전에서 뛰게 되었는데 주최측은 “스코어보드에 일본식 성 ‘니시하라’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으나 그는 “유치원 때부터 나는 ‘한’이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결혼, 국적, 이름의 문제에서 그는 민족 감정을 떠나 ‘쿨’하게 접근했다. 세계화 추세에 맞추는 이런 접근법은 일본사회에서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아사히신문’은 한국 이름을 고수하며 일본에 귀화 신청을 한 그의 사연을 2001년 3월24일자에서 한 면의 절반 정도를 할애해 “한창우, 나는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한국 청년들이여, 세계로!”

    한창우 회장은 1년에도 수차례 한국을 찾는다. 특히 고향 삼천포에 대한 연정은 각별하다. 경남 삼천포가 사천시에 통합되자 한 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왜 내 고향을 없앴냐”고 농담 섞인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는 “삼천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무엇인가를 봉사하고 기여하고 싶다. 그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동포 경제인간의 연대, 이른바 한상(韓商)과 한국 경제인과의 교류협력, 한국과 일본간 우호증진 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한 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서울올림픽 재일한국인 후원회 부회장’으로서 10억원을 한국 정부에 기부했다.

    또한 30억원을 출연해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을 설립, 17년째 매년 3억~4억원을 기부하며 이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은 한국 문화 관련 연구결과물을, 한국학이 개설된 전세계 대학에 전달했다. 그는 향후 이 재단을 사고로 고인이 된 장남의 이름을 따 ‘한철문화재단’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한국과 일본의 음악 예술 체육 영화 복지 분야 교류 사업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150억원을 들여서 개최한 전 사원 디너쇼를 한국측 요청에 따라 2007년엔 서울이나 부산에서 다시 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는 재일 한국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 세계 한인상공인대회 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 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합회의 양창영 사무총장(호서대 해외개발학과 교수)은 “한 회장은 서울에 오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한 회장은 한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한국 KBS에서는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파친코 점포를 처음 운영한 미네야마시에서는 ‘초대 명예주민’ 표창을 받았다.

    -회장으로 활동 중인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는 어떤 일을 합니까.

    “1993년 결성된 연합회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캐나다, 호주, 유럽, 중남미, 동남아 등지의 68개국 246개 한인단체 경제인들의 네트워크입니다. 한인 경제인들간의 협력 증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습니다. 연합회는 동포 경제인을 모아 세계한상대회를 해오고 있는 등 동포 경제인의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측에선 어떤 점에 관심을 둬야 할까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와 같은 곳에 거주하는 동포 경제인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나도 노력하겠지만 작은 관심과 성의가 이들이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한국에선 요즘 청년 실업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불거지고 있습니다.

    “한국 대학생들이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열네 살 이던 해 일본에 밀항했을 때도 일자리가 없었죠. 청년들에게 해외로 눈을 돌리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용기와 성실함만 있으면 세계 어디를 가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나도 세계로 나아가는 청년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