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와 위스키는 보리로 만든 술이다. 드물지만 우리 술에도 보리로 만든 소주가 있다. 구수한 보리향이 가득한 ‘보리소주’는 그 자체가 별미다. 대표적인 보리소주는 대구 금복주의 ‘운해’, 전남 보성의 ‘강하주’, 진도의 ‘홍주’다. 주당의 혀와 코끝을 사로잡는 보리소주 향을 찾아 길을 나섰다.
금복주의 증류식 소주 제조 라인.
넓은 공장 마당 너머로 보이는 높다란 굴뚝에는 ‘금복주’라는 상호가 새겨져 있다. 이 회사는 1957년에 창업됐고, 복영감 심벌은 1960년에 만들어졌다. 벗겨진 이마에 늘어진 귓불, 통통하면서도 처진 볼이 언뜻 보면 달마대사와 흡사한 복영감이 오른손에는 망치, 왼손에는 호리병을 들고 오크통 위에 앉아 있다. 진로의 두꺼비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주류회사 심벌이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소주 상자를 가득 실은 주류 전용 수송트럭이 정문을 나선다. 그 뒤를 큼지막한 물탱크차가 따른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금복주에서 쓰는 물은 20년째 대구시 외곽의 달성군 가창면에서 물차로 실어나른다고 했다. 지하 맥반석층에서 뽑아올린 물로 탈취와 정수를 하지 않고도 쓸 수 있을 만큼 좋은 물이라고 했다.
공장 안에는 2층 공장건물과 별도로 연구소 건물이 있다. 연구소에서 만난 이는 하현팔 전무. 그는 197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산 백화수복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하 전무는 1976년에 처음 시행된 주조사 1회 합격자 출신이다. 어느덧 양조업계 현장에서 최연장자 축에 속한다. 그는 “주조사 의무고용 조항이 (관련 법규에서) 없어지면서 주조사 모임도 흐지부지되고, 이 길을 걷는 전문가층도 엷어졌다”며 걱정한다.
사실 필자가 이 회사를 찾은 이유는 보리소주를 맛보고 싶어서다. 국내 대형 소주 회사 10개사 중에 보리소주를 만드는 회사는 금복주가 유일하다. 보리소주는 우리에게 생소한 주종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생소할 게 없다. 쌀농사 많이 지으면 쌀술 만들고, 보리농사 많이 지으면 보리술 빚게 돼 있다. 그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치다.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 남쪽 해안마을에 가면 보리소주의 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 보성 강하주는 보리소주를 만들어 약주와 섞은 것이고, 진도 홍주는 보리소주를 밑바탕으로 만든 술이다.
흔히 사람들은 쌀밥이 보리밥보다 더 고급이니, 쌀술이 보리술보다 더 윗길인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술 나름의 개성이 있어서 수평적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발효주인 약주를 만들어놓으면 쌀술이 보리술보다 훨씬 윗길이다. 쌀은 보리보다 잘 삭아서 술맛도 부드럽고 도수도 더 높게 나온다. 하지만 증류주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보리소주는 쌀술보다 맛이 구수하고 강렬하다. 향도 독특하다. 별다른 향이 없는 쌀밥에 견주어 보리밥이 구수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에 위스키가 없는 까닭
보리술이 좋다는 것을 구구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맥주와 위스키가 보리로 만든 술이라는 것만으로 설명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리 싹을 틔워서 엿기름을 만들고, 엿기름물로 밥알을 삭혀 식혜(甘酒)를 만들어 먹으면서도 왜 맥주나 위스키 같은 술을 만들 생각을 안했을까.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누룩에서 그 답을 찾는다. 우리에게는 누룩이라는 강력한 곡물 발효제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도수 낮은 맥주를 만들려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금복주에서 만든 보리소주는 알코올 도수 45도의 ‘운해(雲海)’다. 100% 보리만으로 빚은 소주다. 찐 보리에 종국(種麴·당화효소를 증식시키기 위해 따로 배양한 곰팡이균)을 뿌려서 일본식 보리흩임누룩으로 만든 다음 거기에 다시 찐 보리를 넣고 물을 부어두면 보리술이 된다. 이 술을 증류기로 증류한 것이 보리소주다.
도자기 병에 담긴 ‘운해’를 맛보려고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집에서 들고온 일본 보리술 2종류를 탁자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술맛은 비슷한 술과 견주어보면 그 특징을 잡아내기가 쉽다. 일본 보리소주는 일본 증류식 소주 시장에서 랭킹 1위를 차지하는 25도 ‘이이치코’와 일본 증류회사로서 랭킹 3위 안에 드는 운카이(雲海)주조주식회사의 38도 ‘아야셀렉션(綾 Selection)’. 일본의 경우 2005년 초부터 증류식 소주 판매량이 희석식 소주를 넘어섰다. 일본의 증류식 소주는 다양해 보리소주, 쌀소주, 고구마소주, 메밀소주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이치코’는 한국월계관에서, ‘아야셀렉션’은 면세점에서 각각 구입한 것이다. 두 술을 ‘운해’와 번갈아 맛보았다.
‘이이치코’는 색이 투명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고 곱다. 25도라 혓바닥 끝을 살짝 쏘는 정도의 순한 맛인데, 비릿한 듯하면서 뒷맛이 쓰다. 엷고 투명한 보리색을 띠는 ‘아야셀렉션’은 향이 깊고 강렬하다. 38도라 혀끝이 따끔하고 잇몸과 입술 사이가 얼얼하다. 맛은 풍부하고 강하다. 얼음덩어리라도 섞어 시원하게 마시면 그 맛이 좀 부드러워질 것 같다.
‘운해’는 45도로 도수가 가장 높고 향이 강하다. 한쪽 눈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콧속 깊숙이 찌른다. 그러면서 향이 짙게 깔리는 게 마치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짜 운해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본의 대표 증류회사인 운카이(雲海)와 이름이 같다. 도수에 비해 맛은 무겁지 않고 가벼운데, 입안에 남은 알코올 향이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곡물을 발효한 맛이 돌고 입천장에 쓴맛이 치받고 위벽도 지긋이 눌러댄다. 이 술이야말로 칵테일을 해서 마셔야 편할 것 같다.
‘운해’는 2002년에 처음 출시됐다. 일본에서 수입한 자동제국기와 자동증미기로 보리흩임누룩을 만들고 보리밥을 쪄서 술을 빚는다. 그런데 금복주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보리소주를 만들었을까. 2003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 증류식 소주 생산량은 희석식 소주의 0.00042%에 불과하다.
하현팔 전무는 “지금은 비록 희석식 소주의 연생산량이 110만㎘로 소주시장을 석권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일본에서 증류식 소주 붐이 일면서 다양한 소주의 맛을 추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도 증류식 소주가 활성화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고 판단, 그 시절을 대비해 증류식 소주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주는 ‘지방 사투리’ 같은 처지
금복주는 진로소주에 이어 소주업계 랭킹 2위의 회사다. 전국 소주 매출액의 10% 남짓, 경북시장의 94%를 차지한다. 경북의 맹주인 셈이다. 하지만 경북 바깥쪽 소주시장은 넘보지 않는다. ‘우리도 넘보지 않을 테니 다른 이들도, 특히 진로도 우리를 넘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을 법한데, 사업이라는 것이 어찌 그렇듯 금 그어놓고 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하이트맥주가 진로소주를 삼키기 직전의 상태에서, 그리고 하이트맥주가 경북 맥주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긴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전불사의 태세를 갖추고 현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는 게 금복주의 현실이다. 물론 다른 소주 회사 처지도 마찬가지다.
소주회사들의 이런 경쟁구도를 살피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소주의 선택권이 이를 마시는 소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주회사간 경쟁구도 속에서 오히려 소비자가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류회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주류 도매업자를 얼마나 장악하고, 주점이나 음식점에 얼마나 독점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지다. 소비자의 취향은 입맛에 따르는 게 아니라 어느 도시에 살고 있고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 보면 소주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지방 사투리와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집중이 더욱 빨라지고 서울 억양이 보편화하면서 서울을 근거지로 한 진로가 전체 시장의 58%를 장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58%는 결코 맛의 주도권을 획득한 수치가 아니라 서울에 집중된 인구의 비율, 자본의 비율, 문화의 비율과 비례하는 수치일 뿐이다.
그런 관성이나 매출의 크기에서 벗어나 이제 주류회사를 바라보는 평가기준을 소비자의 기호에 맞춘 다양한 술을 얼마나 만들어내는가에 둬도 좋을 듯싶다. 만일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금복주는 소비자를 가장 배려하는 주류회사로 꼽힐 만하다.
금복주에서 만들어내는 술의 종류는 다양하다. 희석식 소주 ‘참소주’, 쌀소주 ‘제비원 4도’, 보리소주 ‘운해’, 쌀소주와 보리소주를 섞은 증류주 ‘안동소주 25도’ 등이 모두 금복주에서 만드는 술이다. 이 가운데 ‘안동소주 25도’는 출고가격이 4000원으로 비교적 저렴한 술이다. 이 술이 증류식 소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이라는 게 하 전무의 설명이다. 한달에 1000상자(12병, 300ml), 명절 때는 4000상자가 나간다.
1 전남 보성 회촌면 율포리의 도화자씨가 강하주를 내리기 위해 보리술을 담은 솥 위에 소줏고리를 얹고 있다.<br>2 진도 홍주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허화자씨가 집 마당에서 보리가 들어간 술밥을 퍼내고 있다.<br>3 곰팡이가 핀 진도 홍주의 보리알 누룩.
보리술은 빚기 까다롭다. 밥을 지어보면 보리밥이 쌀밥보다 잘 퍼지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쌀밥보다 잘 쉬기 때문이다. 일본식 누룩(고오지)을 만들 때도 보리는 도정하기 어렵고 딱딱해서 균이 잘 파고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보리술을 만드는 것은 향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부 지방에서는 쌀이 귀하고 보리가 흔해서 보리술을 빚기도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술이 보성 강하주와 진도 홍주다.
여름을 넘기는 술 ‘과하주’
이제 보리술을 찾아 전라도 보성 땅으로 가보자. 보성군 율포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 마을, 회천면 율포리에서 강하주를 빚고 있는 이는 도화자씨다. 그는 농림부에서 농민주 추천을 받아 올해 주류면허를 받았다. 보성 강하주는 조선시대 널리 빚어졌던 과하주의 다른 이름으로 이곳 사람들끼리 부르던 이름으로 보인다. 과하주(過夏酒)는 글자 그대로 ‘여름을 넘기는 술’로, 여름에도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소주와 약주를 섞어 만든다. 즉 강하주를 빚으려면 소주와 발효주 두 종류의 술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만든 소주가 보리소주다.
보리소주를 만들려면 먼저 보리 발효주를 빚어야 한다. 그런데 보리 발효주를 빚을 때 사용하는 누룩이 독특하다. 밀누룩을 디뎌 쓰는 것은 일반 전통주와 다름없는데, 그 밀누룩을 빻아서 찐 보리밥에 뿌린 다음 상자에 담아 일주일 가량 띄운다. 마치 일본 흩임누룩(고오지)을 만들 때 고두밥에 황국균을 뿌리듯이, 막걸리 양조장에서 찐 밀가루에 백국균을 뿌리듯이, 그렇게 찐 보리밥에 누룩가루를 뿌려 띄우는 것이다. 띄우는 데 42시간쯤 걸리는 고오지와 달리 전통 누룩과 비슷한 열흘 정도가 걸린다.
무척 독창적인 방법인지라 어디서 배운 것이냐고 물었더니, 도씨는 진도 홍주를 빚는 이에게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띄운 보리누룩에 멥쌀고두밥을 넣어 발효시켜서 이를 가마솥에 넣고 소줏고리를 얹어 소주를 내린다. 재료의 비율은 보리 20kg, 누룩 3kg, 멥쌀 10kg. 순수한 보리소주는 아니지만 보리향이 강한 소주가 만들어진다.
술맛을 보니 향이 그윽하고 깊다. 도씨에게 강하주도 좋지만 보리소주도 매력적이니 따로 상품화해도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여기까지 왔으니 강하주 내리는 법을 마저 들어보자. 보리소주를 마련했으니 이제 발효 약주를 담가야 한다. 찹쌀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밑술을 담고, 만 이틀 뒤에 다시 찹쌀 고두밥을 지어 덧술을 한다. 이때 대추, 생강, 계피, 감초, 강활, 용안육 따위의 약재를 넣는다. 30시간이 지난 뒤 미리 내려둔 보리소주를 붓고 15일간 항아리를 밀봉한다. 그러면 도수가 높고 약주 향이 고운 강하주가 완성된다.
강하주는 이처럼 손이 대단히 많이 가는 까다로운 술이다. 여기에 값비싼 찹쌀을 쓰는 걸 보면 강하주는 민가에서 쉽게 담던 술 같지 않다. 또 쌀이 귀해 보리를 썼다는 표현도 옹색하다. 이를 종합해보면 강하주는 보리의 향을 취하기 위해 까다로운 보리누룩을 만들어 빚은 고급술로 보인다.
최초의 정부 지원 명품 소주
보성 강하주에 보리누룩 제조법을 전해준 동네인 진도로 향했다. 보성에서 장흥을 거쳐 강진을 벗어나는 데까지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하지만 아직 해남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좁은 2차선 길을 따라 해남을 거쳐 진도로 들어서니 진도대교가 하나 더 놓이고 있다.
4년 전에 진도 홍주 문화재 지정보유자인 허화자씨를 만난 뒤로 이제 다시금 진도 홍주를 찾아간다. 진도 농업기술 센터에 들르니 김성호 소장이 진도 홍주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해준다. 마침 그 자리에 진도 홍주 면허업체 모임 대표인 강대진씨가 함께했다.
현재 진도의 홍주 면허업체는 6개다. 4년 전보다 두어 개가 더 늘었다. 그러나 진도 홍주 밀주업체는 20개 정도로 추산된다. 밀주업체는 제쳐놓더라도 한 지역에 6개의 소주회사(진도 지초홍주, 대복홍주, 한샘홍주, 아리랑홍주, 대대로홍주, 예향홍주)가 밀집된 곳은 이 동네가 유일하다. 진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소주 동네로, 한국의 코냑 지방이 될 잠재력을 지닌 곳이다.
진도군은 진도 홍주 명품화 사업으로 모두 95억원의 국고지원예산을 확보해 올해 35억원, 내년과 내후년에 각각 30억원씩 투자할 계획이다. 지역 명품화 사업으로 선정돼 막대한 예산의 혜택을 보기는 전통주 중에서 진도 홍주가 최초다.
진도 홍주는 40도 안팎의 소주다. 그런데 면허를 낸 6개 업체의 제조방법이 각기 다르다. 원료도 다르다. 대체로 보리쌀과 멥쌀을 쓰지만 간혹 찹쌀을 쓰는 데도 있다. 홍주 회사 ‘대대로’는 쌀소주를 만들어 홍주를 내리고, 다른 5개 회사는 모두 보리를 쓴다. ‘아리랑홍주’와 ‘지초홍주’는 보리만 사용한 100% 보리소주 홍주를 만들고, 나머지 회사는 보리누룩에 멥쌀이나 찹쌀을 원료로 홍주를 만든다.
진도 홍주에서 특기할 만한 방식은 지초라는 약재를 사용한다는 점과 보리누룩을 만들어 쓴다는 점이다. 보성 강하주의 도씨가 얘기한 것처럼, 보리누룩은 찐 보리에 빻은 밀누룩을 섞어 40℃가 넘는 누룩방에 띄운 것이다. 이때 지초홍주에서는 찐 보리에 누룩과 백국(白麴)을 함께 뿌리고, 한샘홍주에서는 누룩가루만 뿌려서 보리누룩을 띄운다.
진도읍내에서 홍주를 빚는 한 아주머니는 창고를 사우나처럼 후끈하게 만들어 보리누룩을 띄우는데, 4일쯤 지나서 한두 시간쯤 식혔다가 9일째에 누룩을 꺼낸다고 한다. 이때 꺼낸 보리누룩은 단단한 형태를 유지하는데 겉에 초록빛이 도는 곰팡이가 피어 있다.
황홀한 향기의 진원지는 보리
진도 홍주를 빚을 때 왜 보리알 누룩을 만들어 썼을까. 진도에만 존재하는 방식이라 궁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해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보리를 충분히 삭히기 위한 방법인지, 일본식 쌀입국의 변형인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보리누룩을 쓰면 향긋하고 도수 높은 보리발효주가 만들어지냐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진도 홍주 기능보유자 허씨 집에서 발효된 지 30일이 지난 보리발효주를 맛봤다. 신맛이 약간 돌고 달지 않고 맛이 거친데, 알코올 도수는 그리 높지 않았다. 막걸리 도수인 7~8도쯤 되는 것 같다. 소주를 내리기 위한 술로는 너무 낮은 도수였다. 그래서 얼마나 소주를 내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진도 홍주의 진하고 구수하고 강한 맛은 지초라는 약재뿐만 아니라 보리에서 우러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보리가 들어가는 전통술에는 향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전주 이강주도 포함된다. 이강주의 덧술을 담글 때에 보리를 쓴다. 누룩을 포함한 전체 원료량의 55%가 보리다. 배와 생강, 울금, 계피, 꿀뿐만 아니라 보리도 이강주의 황홀한 향기의 진원지였던 셈이다. 주당들이여, 보리술, 보리밥처럼 별미 술이 우리 곁에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