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억대 필로폰 사범 60명 검거, 현대차 노조 취업비리 실마리 풀어
- 포커페이스 잃지 않는 원칙주의자
- 이상형은 ‘현빈의 보조개, 박신양의 목소리’ 가진 남자
-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조희진 부장검사 존경
- “조사 받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검도와 마라톤 매력에 푹 빠져
“이렇게 화려한 색의 옷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입어요. 보통은 짙은 계열의 바지 정장을 입죠. 원래 좋아하는 스타일은 단아하고 여성적인 건데…. 솔직히 (오늘은) ‘사진용’으로 입은 거예요.”
예상을 뒤엎는 파격은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1년 365일 중 300일 넘게 강력범들과 씨름하는 그의 여성다운 옷차림이 외려 반가운 것도 그 때문이다. ‘특수부 여검사는 터프하고 거칠 것’이라는 편견도, ‘여검사는 마음이 여릴 것’이란 예단도 그의 앞에서 모두 무너지고 만다. 낭랑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검사의 사명을 단호히 말하는 그의 모습은, 차갑지만 정열에 넘치고 부드럽지만 서릿발처럼 강하다.
울산지방검찰청 김희경(金希京·29) 검사.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지난 2월, 여검사로서는 최초로 특수부의 마약·조직 범죄 수사를 담당하게 되면서다. 그로부터 5개월이 흐른 7월 중순, 그는 또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월부터 필로폰 사범 단속에 들어가 5개월 동안 무려 47억원 상당의 필로폰 공급·판매·투약 사범 60명을 검거하는 개가를 올린 것. ‘금녀(禁女)의 벽’을 깨뜨리고 범죄 현장을 누비는 20대 여검사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의 여검사는 100여 명, 그중에서 강력업무를 담당하는 여검사는 김 검사가 유일하다. 어느 에로영화 감독은 “여검사, 여의사, 여기자는 남자들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3대 배역”이라고도 했다(듣는 여성으로선 불쾌할 수도 있는 얘기지만).
“교과서가 가르쳐준 대로 살고 싶어 법조인이 됐다”는 김 검사의 삶을 한번 조망해보자.
‘진짜 나쁜 놈’ 잡는 특수부
한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던 8월5일 오후. 울산지검 417호 김희경 검사실은 듣던 바와는 달리 한산한 분위기였다. 늘 조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피의자와 참고인이 넘쳐나던 그의 방에 잠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수사 일정을 조금 미뤄놓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는 쉼없이 네 시간을 이야기했다.
미리 보낸 질문지에 꼼꼼히 답변을 써 혹시 저지를지 모를 실수를 방지하려는 그의 태도는 영락없는 모범생의 그것이다. “~습니까” “~합니다”로 끝나는 말투는 업무를 처리하면서 밴 오랜 습관인 듯했다. 한두 시간이 흐르고 자리가 좀 편안해질 무렵에야 그의 말투가 ‘~해요’체로 바뀌었다.
사법시험 41회 출신인 김 검사는 200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곧바로 수원지검 형사부로 발령받았다. 2004년 2월엔 두 번째 근무지인 울산지검으로 옮겨 민원과 가정폭력을 담당하는 형사2부와 공판을 맡는 형사1부에서 일했다. 이후 올해 2월 울산지검 특수부로 옮기면서 그의 이름 앞엔 ‘개척자’란 타이틀이 붙었다.
그가 특수부 마약·조직폭력 수사를 전담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먼저 ‘여검사니까 주로 여성범죄 수사를 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깨뜨리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지는 삶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발전을 꾀하고도 싶었다. 형사부와 달리 특수부에서는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기획하고, 사회적 파장이 큰 수사를 해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
“검찰은 나쁜 사람을 처벌하라고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강력 업무의 매력도 업무 성격상 우리 사회 구성원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진짜 나쁜 사람’을 잡아들인다는 데 있지요. 형사부 검사로 근무할 때 가장 힘이 빠지는 경우가 피해자도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일 때였거든요. 사기 고소 업무가 많은 형사부 업무를 하다 보면, 피의자와 고소인 중 누가 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인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뚜렷하게 구별돼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특수부 일은 보람이 더 큽니다.”
그는 검사의 사명이 ‘악의 징벌’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악의 구별에 더욱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강력부 검사의 범죄 소탕기를 다룬 영화 ‘공공의 적 2’를 떠올린다. 영화에서 절대악에 맞서 싸우는 강철중(설경구 분) 강력부 검사의 활약을 보며, ‘이 세상에 착한 사람과 나쁜 놈의 구별이 저리도 분명하면 기사 쓰기 참 편하겠다’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시대, 선과 악,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일은 얼마나 어렵고 혼란스러운가.
그가 검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사법연수원에서 검찰 시보 생활을 할 때다. ‘검사는 와일드한 성격에 형사처럼 총 들고 뛰어다니며 범인을 검거하러 다니는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2001년 5~6월 서울 남부지검으로 매일 출근했습니다. 특히 피의자와 벌이는 진실게임은 묘한 흥분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피의자를 심문하다 보니 거짓말하는 것이 훤히 보이더군요.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것이 마치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듯 즐거웠습니다.”
마약사범 킬러
이쯤에서 그가 수사한 사건들을 살펴보자. 그는 7월초 중국산 필로폰 1.27㎏을 들여온 3명의 밀수범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사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필로폰만 먼저 압수했고, 정작 필로폰 소유자인 밀수사범은 검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약수사관 3명이 부산에서 밤낮으로 잠복근무한 끝에 범인들의 소재를 파악, 검거에 성공하기까지엔 김 검사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는 사흘 내내 검찰청에서 밤늦게까지 대기하면서 잠복근무 상황을 점검했고, 범인 신병 추적을 위한 단서 찾기에 골몰했다. 그의 부르튼 입술은 마약 밀수범을 검거하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며 생긴 영광의 상처다.
첩보에 의존하는 마약 밀수범 수사는 열에 아홉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이 강력통 검사들의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5개월 안에 두 차례에 걸쳐 6명의 마약 밀수범을 검거한 그의 실적은 두드러진다.
범인 검거율이 높은 비결을 묻자 그는 “운이 좋았다. 다만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될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수사팀이 포기하지 않고 호흡을 맞춰 최선을 다한 덕분”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지난 3월과 4월엔 주말마다 예외없이 수배 중인 마약사범이 검거되거나 필로폰 관련 첩보가 접수돼 조사를 벌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토요일에 퇴근하면서 수사관들에게 “내일 봅시다” 하고 인사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피의자와 벌이는 심리전
그의 논리력과 끈질긴 설득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지난 봄을 뜨겁게 달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취업비리 수사 때였다. 울산지검 소속 검사 4명이 한팀을 이뤄 벌인 이 수사에서 20명의 노조간부가 사법처리되고 8명이 구속됐다. 김 검사는 이중 2명을 구속시켰다.
신고와 제보가 없어 전적으로 계좌추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이 수사에서 김 검사는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취업비리 개연성이 높은 한 노조 간부에게 3000만원의 돈을 보낸, 현대자동차 신입사원의 부모를 만나 중요한 진술을 확보한 것.
처음엔 “차용 관계에서 빌린 돈을 갚았을 뿐이다. 추천받은 사실도 없다”고 주장하던 신입사원의 부모는 4시간에 걸친 김 검사의 설득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브로커를 통해 알게 된 노조 간부에게 취업을 알선해준 대가로 돈을 줬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 “지금 회사를 다니는 자녀에게는 어떤 피해도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진실한 태도가 부모의 마음을 움직였다. 난항을 거듭하던 수사는 이후 급물살을 탔다. 한 명의 혐의를 포착하자 다른 관련자들의 혐의도 줄줄이 드러났다.
김희경 검사는 “법적 절차대로만 수사하면 ‘인권침해’ 논란에 휘말릴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김 검사가 분신처럼 여기는 사건 중에는 형사부에 근무할 때 기소했던 아동 성폭력 사건도 여럿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함으로써 범죄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아동 성폭력 수사는 인내와 공부가 필요하다.
“2003년 수원지검 형사부에서 아동 성폭력 사건을 전담했습니다. 그해 가을 6세, 4세인 어린 아들과 딸을 수년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아버지를 기소했습니다. 고소를 당한 아버지는 ‘이혼한 부인이 아들, 딸을 회유해 거짓 진술을 시켰다’고 주장했죠. 애초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고추 장난을 했다’고 진술한 아들은 아버지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이모(어머니의 동성애인)가 자신을 성추행했다, 이모가 거짓말을 시켰다’고 말을 바꿨어요.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피의자는 치밀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청산유수처럼 변명을 늘어놓더군요. 그러나 물고 물리는 추궁과 심리전 가운데 제가 던진 한 가지 질문이 갑자기 피의자의 태도를 바꿔놓았습니다. 냉정을 잃고 말을 머뭇거리기 시작하더군요.
사실 최초에 이뤄진 진술 녹화에서 아이들은 ‘고추 장난이 뭐냐’는 질문에 극도의 두려움을 보였습니다. 그의 딸은 ‘그거 비밀인데’ 하고 입을 닫았고, 아들은 ‘쉿! 그거 아버지가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댔어’ 하고 시선을 돌렸지요. ‘아이들의 반사적 행동이야말로 당신이 몇 년간 아이들을 입막음해온 증거가 아니냐’는 질문에 피의자는 말문이 막혀 식은땀만 흘렸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범인이 확실해’ 하고 감을 잡았죠.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그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사건은 대법원에 가 있어요. 누가 뭐래도 저는 피의자의 혐의를 확신합니다.”
김 검사는 피의자를 압도하기 위해 조사에 들어가기 직전 수사기록을 3~4번씩 검토한다. 피의자의 변명과 거짓말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기 위한 전략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강성 여검사’ ‘포커페이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언성을 높여 “당신 이거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며 속사포같이 추궁하던 그도 일단 피의자가 조서에 지장을 찍고 검사실을 나설 땐 한층 부드러워진다. “요즘 벌이가 쉽지 않죠? 조사받느라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드러운 여검사에게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할 피의자가 있을까.
제주도 모범생 소녀의 꿈
김희경 검사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도 제주도 토박이다. 학창시절 모범생이던 그는 부모와 선생님께 반항해본 기억이 없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반장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교실에서 조용히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다.
그는 신성여고에 진학하며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조기유학’을 떠난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한라산을 넘는다는 건 곧 문화공간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성여고는 제주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가톨릭계 학교다. 좋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난 것이다.
하숙집 생활은 외로웠다. 일요일마다 서귀포 집에 다녀왔다. 일요일 오후 3시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가는 시외버스에 오를 때마다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토록 눈물 많던 그가 거칠디 거친 직장에선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별수없는 여자군”이란 말은 결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은 학교 건물 옥상에 올라 상공을 가르는 비행기를 바라봤다.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섬 사람들은 누구나 열린 공간을 동경해요. 저도 언젠간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국제 비즈니스 전문가나 국제변호사 같은 직업을 막연히 동경했죠.”
등산과 마라톤
법대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것은 고교 2학년 때였다.
“원칙주의자인 저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세상은 교과서대로 사는 사람을 무능하게 여기고, 변칙적인 수단과 권모술수로 출세를 구가하는 사람들을 능력이 있다고 규정하더군요. 교과서대로 살았을 때 가장 잘했다고 평가받는 직업이 뭘까 고민했죠. 법조인은 그저 법대로 살면 성공할 수 있잖아요. 지금도 제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995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고려대 응원단 ‘영 타이거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지원했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대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4공주파’를 이뤄 함께 다녔다. 4공주파? 멤버들은 결코 ‘공주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촌스럽다고 할 정도로 우직하고,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의 친구들이다. 폭넓게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마음에 맞는 몇 사람과 곰탕처럼 진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 그에겐 더 좋았다.
그는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이미 법조인의 뜻을 세운지라 진로에 대한 흔들림은 없었다. 4학년이던 1999년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의 대학 졸업학점도 4.0점을 훌쩍 넘는다. 고시 합격과 높은 학점 취득이 모두 가능했던 이유를 묻자 “집중력 때문”이라는 간결한 답변이 돌아온다.
그는 매섭게 자기관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 삶을 최대한 단순화했다. 마음을 심난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멀리했고,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꾸준히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건강관리를 했다. 이 습관은 검사 생활을 하는 지금도 그대로다. 그는 수원지검에 근무할 때 검도를 배웠고, 최근엔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졌다. 골프처럼 번거로운 운동보다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되는 달리기나 등산이 그에겐 훨씬 즐겁다.
“여검사는 좀 무섭대요”
스물아홉 해의 인생. 단 한번의 삐뚤어짐도, 뼈아픈 실패담도 없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곤 하지만 순조롭게 검사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껏 순탄대로를 달려왔다. 아쉽다면 로맨스가 없다는 것 정도일까.
“아, 이건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인데…. 아직 누구를 미치도록 좋아해본 적이 없어요. 선이 폭주하냐고요? 남자 만날 기회도 별로 없고, 선을 안 본 지도 몇 달이 훨씬 넘은 것 같네(웃음). 남자 검사들이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여자들을 주위 소개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여검사는 달라요. 여검사라고 하면 우선 남자 쪽에서 좀 무서워하고….
그래도 어디엔가 분명히 제 운명이 있다고 믿어요. 그런 인연이 눈앞에 나타나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족과 떨어져 울산의 13평형 전세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는 여검사. 수사 업무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지만, 휴일을 홀로 보내며 느끼는 외로움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울산지검에 ‘미혼 여검사 5인방’이 있다는 것. 이들은 휴일에 함께 영화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며 ‘또래 문화’를 즐긴다. 2년이 지나면 모두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겠지만, 서로 격려할 동료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나이론 그와 동갑인 삼순이의 일과 사랑은 그를 울리고 웃겼다. ‘다시보기’로 세 번씩 드라마를 볼 만큼 ‘삼순이’ 마니아다.
“삼순이가 그러잖아요,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 그 생각 저도 참 많이 했거든요. 인간한테 상처받고 살 때마다…. ‘난 심장이 딱딱해져서 죽었잖아’ 하고 받아치는 삼순이 아버지의 말에 웃겨서 뒤로 넘어갈 뻔했어요.
드라마 엔딩 신에서 삼순이의 마지막 대사는 특히 가슴에 와 닿았어요. ‘내게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드라마를 본 모든 20~30대 여성이 삼순이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처럼 여긴다는 게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그게 다 작가의 힘인 것 같아요.”
김희경 검사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7명의 남성 검찰 수사관을 이끌고 있다.
“현빈의 보조개에 박신양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나타나면 정말 확 반할 것 같은데…. 대니엘 헤니요? 그 사람은 너무 조각같이 잘생겨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잖아요.”
한참 웃음꽃을 피우다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왔다. 20대의 마약·조직폭력 담당 여검사가 겪는 어려움과 고민에 대해, 대한민국 검찰로서의 신념에 대해 그는 가슴속에 묵혀둔 묵직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유부녀 행세를 하다
특수부에 오면서 그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범죄 수사가 아니라 조직운영이었다. 예전엔 검찰수사관 1명과 수사를 해오다 특수부로 발령받으면서 7명이나 되는 수사관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수사팀의 수장인 김 검사는 팀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런 여자 상사를 모셔야 하는 수사관들도, 삼촌뻘 되는 수사관들을 이끌어야 하는 그도 서로 불편하긴 마찬가지일 터. 특히 직원 개개인의 특성과 능력을 파악해 적절한 용병술을 구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초임 검사 시절, ‘20대 여검사라고 만만하게 보이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닫고 방어벽을 높이 쌓았어요. 그 잘못된 생각이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어요. 부하 직원들이 진심으로 제게 다가올 만한 여지를 주지 못한 거죠. 저부터 마음을 열어야 부하 직원도 마음을 열어 서로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어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지니까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죠. 저는 검사실 식구들이 모두 ‘운명공동체’임을 늘 강조합니다. 그분들에게 마음을 열고, 믿고 함께 가려고 합니다.”
수사관들은 김 검사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고성준 계장에게 상사에 대한 평을 부탁했다.
“뭐, 처음엔 특수부에 여검사가 오신다니 되게 생소했지예. 그런데 일 추진하시는 걸 보니 남자 검사보다 약하다, 뭐 이런 게 절대 없습디더. 수사를 지휘할 땐 부드러운 말투로 핵심을 찔러서 일을 정리하는 편이지예. 객지 생활의 어려움도 소소하게 잘 들어주시고 해서 참 고맙지예.”
강력범들이 20대 여검사를 대하는 태도가 궁금해졌다. “건장한 마약사범들이 20대 여검사라고 좀 만만하게 보지 않더냐”고 하자 김 검사는 “피의자가 되어본 적이 없군요?” 하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피의자는 저를 검사로 대할 뿐 20대 여성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저도 20대 여성이란 사실을 잊고요. 검사는 피의자의 인생에 결정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피의자는 검사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듯 둘의 관계가 ‘널널’하지는 않아요.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공식적 관계여서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드러낼 여유가 없죠.”
그러나 딱 한 번 20대 미혼여성인 자신의 처지에 곤란을 느낀 적이 있다. 지난해 울산지검 형사부에서 가정폭력을 전담할 때의 일이다. 양형 조사와 상담 위탁을 하기 위해 여러 쌍의 부부를 만나야 했던 그는 ‘말발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 결혼반지처럼 보이는 굵은 반지를 끼고 노숙해 보이는 정장을 갖춰 입었다. “두 분 싸우시면 되겠습니까?” 하며 화해와 합의를 권고하는 검사가 20대 미혼여성이라면 사람들이 콧방귀를 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각도를 틀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양자간의 공개적 논쟁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가운데,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청와대의 절충안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 검사는 “경찰의 수사권 조정 주장의 궁극적 목표는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없애자는 것”이라며 “공소유지에 유념하지 않는 수사는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고대 법대 동기로 김 검사와 ‘4공주파’를 이루던 공현진(사진 오른쪽) 인천지법 판사는 그의 둘도 없는 단짝 친구다.
만약 경찰이 공소유지에 미진한 수사를 해서 검사의 지휘 없이 송치할 경우 검찰에서는 처음부터 반복해 다시 조사해야 합니다. 검찰 지휘를 통해 초동수사 단계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부분을 검찰 단계에서 뒤늦게 바로잡으려면 그 비용과 시간이 두 배 이상 들 겁니다.”
한국 검찰이 세계 어느 국가의 검찰보다 많은 권력을 쥔 귀족 엘리트 집단이란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때는 부정적 의미를 띤 ‘검사스럽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이렇듯 검찰에 쏟아지는 부정적 시각에 대해 김 검사는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한다.
“검찰은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다. 국민이 검찰을 외면하면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검찰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뼈아픈 과거를 되새기며 자성하고 있습니다. 결코 ‘깜짝쇼’가 아닙니다. 밝혀야 할 것은 제대로 밝혀내는 검찰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더 필요한 때입니다.”
“김 검사, 아주 씩씩해!”
김 검사가 존경하는 법조계 선배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여성 최초의 부장검사인 조희진 의정부지검 형사부장. 제주도 출신인 강금실 전 장관은 김 검사의 고향 선배이기도 하다. 김 검사는 남들이 가지 않던 길을 개척하고, 특유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사로잡았던 두 선배의 장점을 고루 배우고 싶어한다.
김 검사는 2003년 수원지검과 2004년 울산지검에서 초도순시를 나온 강 전 장관과 두 번 마주친 적이 있다. 2003년 처음 만난 김 검사의 인상이 강렬했던지 이듬해 강 장관은 “김 검사, 아주 씩씩해!”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조희진 부장검사는 그에게 ‘마음을 여는 리더십’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책상물림’의 대변신
김 검사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여전히 조심스럽다. 언론에 의해 포장된 ‘얼굴 마담’이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하는 알짜배기 검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해 뜬 스타는 곧 언론에 의해 매도되고 상처받기도 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똑같은 성과를 거뒀더라도 남자 검사였다면 이만큼 주목받지 못했겠지요. 처음 특수부로 발령받았을 때 TV 출연 요청도 몇 건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어요. 업무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언론에 휩쓸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저 스스로나 조직을 위해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남자 검사들과 진정한 실력을 겨루는 것이 저의 할일이죠.”
‘책상물림 모범생’은 어느덧 전과 7∼8범을 능숙하게 쥐락펴락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특수부 강력담당 여검사가 됐다.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 눈물을 펑펑 쏟던 여고생은 외로움을 가슴 한켠에 묻어둘 줄 아는 냉철한 프로가 됐다. 남들과 부대끼는 게 싫었던 깍쟁이는 이제 ‘가장 고생하는 사람이 되겠다’며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김 검사는 자신의 이런 변화가 놀랍고 대견하다.
“검사가 되어 조직과 사람이 상생하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베푸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 줄 알게 됐고요. ‘온실 속의 화초’가 야생에서 이렇게 인생을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