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진보적 민족지식인의 대표주자였던 교육계의 거목이 여제자를 추행했다는 엄청난 논란에 휩싸인다. 격분한 제자의 남편은 흉기를 들고 그를 뒤쫓고, 당대의 유력 신문 ‘조선중앙일보’는 총력을 다해 ‘파렴치한 교육자’를 고발한다. 반론에 반론, 반전에 반전, 번복에 번복을 거듭한 사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타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당대 유력 인사의 끝 모를 추락.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린 박희도의 춤추는 모습.
키스내기 화투?
밤늦게 돌아온 남편은 아내에게 “이년! 내가 무섭지? 하늘이 무섭지?” 하며 버럭 호통을 친다. 아무리 술이 취했고 또 개화가 덜된 시절이었다지만, 아내에게 ‘이년’이라니! 엄청나게 간 큰 사내임에 틀림없다. 요즘 같으면 당장에 도장 찍자고 덤벼들겠지만 착한 아내는 꾹 참고 남편의 몸을 부축한다. 그러나 남편의 태도는 예전에 술 취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남편은 “고만두어! 다 귀찮다!” 하고 당황해 서 있는 아내를 밀치더니 드디어 가슴에 품은 말을 꺼낸다.
“흥! 너도 키스내기 화투한 년이지?”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아내에게 남편은 연이어 비수를 날린다.
“너 어느 학교 졸업했니?”
“그건 왜 새삼스레 물어보세요?”
“알 필요가 있으니 말이지!”
남편은 방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외투, 양복, 저고리, 넥타이를 마구 벗어던진다. 취중에 한 행동이라도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 아내는 반격에 나선다.
“비록 하늘의 이치가 남자는 수염이 나게 하고 여자는 핸드백을 가지고 다니게 했기로 그 수염 값 못하는 행태를 어디다 한단 말이에요? 기생이나 여급이나 창부나 술 파는 계집 같으면 몰라도 그 아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에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또다시 쏘아붙인다.
“무슨 큰소리야? 제자와 선생이 모여 앉아 키스내기 화투한 것이 잘한 노릇이란 말이냐? 너의 학교의 교장이란 자가 …에 취해 …키스하고 …에 취해…”
교장과 제자가 키스내기 화투를 쳤다니,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자세한 내막은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계속해서 읽어보자.
“영자!” 남편은 아내의 이름을 연극배우가 대본을 외우는 것같이 부르더니 “영자는 찔리는 구석이 없나?” 하고 묻는다. 어이없는 질문에 아내는 “찔리기는 무엇이 찔리어요?”라고 답한다. 술 취한 남편은 “영자는 그래 교장과 키스내기 화투는 안 했느냐는 말이야?” 하며 의처증에 걸린 사람처럼 횡설수설한다.
“왜 대답이 없어? 침묵은 모든 사실을 시인하는 말이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무엇이야? 누가 영자의 몸이 순결하다고 변명해줄 것이야? 결혼 전 영자의 처녀성을 보증할 사람이 누구냐고?”
'혜성' 1932년 3월호에 실린 박희도의 캐리커쳐.
“영자와 나는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오늘은 자자! 내일은 헤어지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을 당한 아내는 독자에게 하소연한다.
‘그날 밤 나의 심경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그 몹쓸(?) ‘에로교장 Y선생 사건’ 때문에 난데없는 가정풍파가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옛날의 사은(師恩)이 도리어 오늘의 원수 같습니다. 그 한밤을 나는 전전반측하였습니다.’
소설보다 황당한
도발적인 도입부와 달리 이야기의 결말은 밋밋하다. 남편이 아침밥상도 받지 않고 출근하자 아내 ‘영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학교선배 ‘은숙’을 찾아간다. 자초지종을 들은 은숙은 자신도 어젯밤 똑같은 일을 당했지만 묘안을 찾아 잘 해결했노라고 말한다. 영자가 그 묘안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자 은숙은 쪽지에다 여덟 글자를 써줄 뿐이다. 하루 종일 여덟 글자의 의미를 연구한 영자는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에로교장 Y선생 사건’ 때문에 자신의 정조를 믿지 못하겠거든 그만 갈라서자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말한다.
“무슨 청이야?”
“그놈의 키스내기 화투가 무엇인지 그것 때문에 우리들의 행복하고 달콤한 결혼생활도 깨지고 부서지고 했으니…. 당장에 그것이나 한번 쳐보지요! 영원히 서로 갈라선 후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 그것이 한이 될지 알겠어요?”
“그까짓 소원이야 못 들어줄까?”
이야기는 밤 깊도록 키스내기 화투를 친 부부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은숙이 적어준 여덟 글자는 ‘이열치열 전화위복’이었다.
교장이 제자와 화투를 치는 것도 충분히 패륜적인데, 키스내기로 쳤다니 가히 엽기적이다. 키스내기 화투가 무엇일까. 승자가 키스를 받고, 패자가 키스를 줘서 키스내기 화투였을까. 이기거나 지거나 키스하기는 마찬가진데, 힘쓰고 머리 써서 화투는 왜 쳤을까. 이아부라는 무명작가가 과연 이런 해괴망측한 상황을 오로지 자신의 상상력만 가지고 꾸며낼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소설보다 더 황당한 실화를 알아보자.
한밤의 활극
1934년 3월12일,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는 박희도 교장이 이끄는 중앙보육학교 순회음악단의 음악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오늘날의 창춘)까지 방문해 열릴 순회음악단의 첫 번째 연주회였다. 평양부 남정(南町)에 사는 노원우는 음악회가 열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객석에 앉아 음악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직 인솔자 박희도와의 만남을 기다릴 뿐이었다. 만나서 담판을 지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회가 열리던 밤, 평양거리에는 때늦은 눈송이가 흩뿌리고 있었다. 노원우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백선행기념관을 찾았다. 그의 가슴은 격분에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그대가 과거의 비리를 깨닫고 뉘우치면 침묵을 지켜 어느 정도까지 용서할 수 있다.”
노원우는 오랜 동지요 친구이던 박희도에게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희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만나기는커녕 노원우란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악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허둥지둥 몸을 감췄다. ‘설마 음악회에야 나오겠지.’ 노원우는 음악회가 열리기까지 분노를 삭이며 기다렸다. ‘말로 타일러서 과오를 뉘우칠 인물이 아니다.’ 박희도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노원우는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 대신 많은 청중 앞에서 박희도의 비행을 폭로하고 시비를 가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박희도는 아예 음악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피해 다니는 것만 봐도 그의 행위는 여실히 입증된다.’ 한층 격분한 노원우는 흉기를 품고 음악회를 후원한 동아일보 평양지국이며 근처 여관을 밤늦게까지 찾아다녔다. 그러나 박희도는 밤새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 몰래 10여 명의 단원을 빼돌리고 북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희도가 줄행랑을 놓자 노원우는 한층 격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제가 피하면 얼마나 피할 터인가? 나는 이미 내친 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일개 부녀자를 위하여 일신을 희생한다고 비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모름지기 그냥 내버려둔다면 장래 얼마나 많은 여자의 정조와 행복을 깨뜨리고 가정을 파열시키고 추한 영향을 끼칠는지 모르는 이 사나이의 비리를 세상에 널리 폭로하여 경고하는 것은 위대한 사회적 의의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나의 한 몸을 희생할 작정이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17일자)
박희도 교장의 여제자 정조유린 사건을 풍자한 이아부의 유모어소설 ‘키스내기 화투’. ‘별건곤’ 1934년 4월호.
3월12일 밤 평양에서 벌어진 소동은 그로부터 닷새 후인 3월17일 ‘조선중앙일보’의 단독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박희도 같은 거물급의 추문을 폭로하자면 사실확인을 위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닷새간의 취재 끝에 확신을 갖게 된 듯 ‘조선중앙일보’는 ‘교육계의 대(大)불상사. 제자를 유인하여 정조유린을 감행. 중앙보육학교장 박희도씨의 추행을 피해자가 폭로’라는 선정적인 제목 아래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과도기에 있는 조선 여성 교육계에 당면하여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교육자로 경성 중앙보육학교 교장인 박희도씨는 신성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미모의 모 학생에게 일종 추악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하여, 12일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열린 중앙보육학교 순회음악단의 음악회가 열리던 날 밤 평양 가두에는 일장 비극이 연출되었다.
‘에로교장 Y선생 사건’
노원우는 박희도가 ‘정조를 유린했다’는 ‘미모의 모 학생(윤신실)’의 남편이었다. 오늘날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정조를 유린했다’는 말의 충격파는 어마어마했다. 기사가 나가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교장이 여제자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것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박희도가 그런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다는 데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박희도는 평범한 교육자가 아니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 ‘검증된’ 민족지도자였다. 또한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를 역임한 기독교 사회운동가이자 사회주의 계열의 잡지 ‘신생활’을 간행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별건곤’ 1928년 5월호 인터뷰에서 ‘내가 자랑하고 싶은 조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박희도는 다른 좋은 것을 다 제쳐두고 ‘민족적 도덕성’이라 답했다. 적어도 말로는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꼽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인물이 뒤로는 제자에게 ‘추악한 행동’이나 저지르고 있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폭로된 ‘정조유린’의 수법 또한 추하기 그지없었다. 노원우는 물적증거라며 아내 윤신실의 수기를 공개했다. ‘키스내기 화투’는 ‘정조유린 고발서’라고도 불린 이 수기에 처음 등장한다.
“…그 어떤 날 몇몇 학생이 놀러왔는데 박희도의 말이 키스내기 화투를 하자 하여 화투를 하다 간 후 나는 그 집에 살기 때문에 혼자 남아 있는데 나를 끌어 키스하고 자기의 침대에 눕히고 나의 가슴도 만지려 하므로 몸을 꼬고 만지지 못하게 하였으나 약한 탓으로 만짐을 당하고 마음과 몸이 약한 탓에 정조를 빼앗기었고…”
교장이 ‘제자’의 정조를 유린한 것도 엄청난 문제였지만 ‘제자들’과 키스내기 화투를 친 것은 더욱 큰 문제였다. 단지 강간뿐이었다면 순간적인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수 있었겠지만, 키스내기 화투를 쳤다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윤신실의 수기가 공개되었을 당시의 사회적 충격을 시인 김동환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키스내기 화투하다가 젖가슴 만지다가 그러다가 최후에 여성의 생명선까지 침범하더라는 그 광경이 에로틱하고 리얼리즘하게 묘사된 그 수기(手記)가 사진에 박혀 신문지면에 나타나자 딸 둔 여학생의 부형들은 치를 떨었고 감독의 임무에 있는 학무당국은 사건진상의 조사에 착수하였고 일반 사회에서는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격노하는 소리가 빗발치듯 나왔다. (‘박희도 연애사건 사문(査問)위원회 광경’, ‘삼천리’ 1934년 5월호)
정조유린 고발서가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공개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윤신실이란 인물이 수기를 쓰게 된 배경으로 모아졌다. 키스내기 화투를 칠 당시 그녀는 왜 교장의 집에 살고 있었나.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수기를 써서 남편에게 보여준 것일까.
용서받지 못할 만행
노원우와 박희도는 일찍이 결의형제를 맺은 막역한 사이였다. 그들은 조선사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유익한 사업을 할 것을 꿈꾸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박희도가 여성교육에 뜻을 두고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을 때 노원우는 아직 경성비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박희도를 만나기 위해 중앙보육학교에 들를 일이 많았던 노원우는 황해도 곡산 출신 여학생 윤신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노원우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여 윤신실 집안의 반대가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사랑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1926년 결혼에 성공한다.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윤신실은 임신을 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다. 같은 해 노원우는 신문기자로 취직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한다.
평양에서 노원우 부부는 ‘스위트홈’을 만들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단란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꿈같은 시간도 잠깐, 3년 후인 1929년 첫아들이 돌연 죽자 윤신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사랑하는 아내를 그대로 두었다간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노원우는 윤신실에게 기분전환 삼아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라고 권유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윤신실은 중앙보육학교에 복학하기로 결심한다. 상처가 깊은 아내를 서울에 혼자 살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 노원우는 절친한 친구이자 아내가 복학할 학교의 교장인 박희도를 찾아가 방 한 칸을 내달라고 청한다. 박희도는 자기 딸의 동무도 될 겸 자기 집에 하숙하라고 흔쾌히 승낙한다.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윤신실이 서울에 올라간 지 며칠 되지 않아서 학업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것이다. 왜 그냥 돌아왔는지 물을 만도 했건만 노원우는 아내가 집과 남편이 그리워 그냥 돌아왔나 보다 하고 이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후 노원우는 아내와 함께 진남포로 이주해 사업을 시작한다. 진남포에서 노원우 가족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1933년 10월 노원우는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과 함께 진남포를 떠나 평양으로 이주한다. 노원우와 윤신실은 이사를 기회로 하여 서로 비밀을 모두 털어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 출발하기로 합의한다. 남편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아내는 무슨 큰 비밀이 있는지 머뭇거릴 뿐 말을 잇지 못한다. 부끄러워서 말로 고백하지 못한 아내는 자신의 과거를 글로 적어 털어놓는다. 그것이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18일자에 실린 문제의 ‘정조유린 고발서’다.
새 출발 기념으로 배우자의 비밀과 과오를 용서하기 위해 시작한 ‘진실게임’은 예기치 못한 풍파를 일으킨다. 아내의 비밀이 눈앞에 펼쳐지자 노원우는 이성을 잃는다. 털어놓기 전에는 이해 못할 비밀이 없지만, 털어놓고 나서는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은 많지 않은 법이다. 비밀도 비밀 나름이지, 믿었던 친구가 아내에게 그처럼 추악한 일을 저질렀으니…. 더욱이 자신에게는 친구이지만 아내에겐 교장이 아닌가.
그와 같은 아내의 수기가 나오매 노원우씨는 그 사랑하는 아내의 고백서를 손에 들고 위선 교육자의 만행을 타매하면서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손이 떨리고 가슴이 격분에 타올랐다. 관계없는 제3자가 보아도 얼굴을 붉힐 만큼 증오할 그 행동! 연약한 여성! 사랑하는 그 아내의 수기! 그것은 바로 영자(‘조선중앙일보’는 3월21일 이전에는 ‘노영자’라는 가명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 인용자)가 장남을 잃고 중앙보육학교에 재입학하여 수학하고 있을 때에 그 교장인 박희도씨에게 당한 모욕이었으니 이를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아내의 수기를 손에 쥔 노원우씨는 주먹을 쥐고 고함을 질렀다.
“색마와 같은 소위 명사여!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구나! 나의 아내 영자를 부탁 받아 갖다 두고 ‘키스’ 내기 화투를 하여 욕정을 충동시키어 놓고 그 다음에는 정조에 손을 대었다.” (‘정조유린의 고발서 유래2’,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19일자)
노원우는 아내의 수기를 움켜쥐고 몇 번이고 울부짖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윤신실은 남편에게 “자신의 육체는 이미 더렵혀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순결하다”며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순결을 서약한다. 노원우는 전후사실을 고백하고 손가락까지 잘라 순결을 서약하는 아내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희도의 만행은 생각할수록 치가 떨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조만간 서울에 올라가 담판을 지으리라 마음먹은 차에 노원우는 3월12일 백선행기념관에서 중앙보육학교 순회음악단 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노원우는 개인적 원한도 원한이지만 조선 여성교육계의 정화를 위해서라도 박희도의 비행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월12일 평양에는 때늦은 봄눈이 내렸고, 중앙보육학교 순회음악회는 교장의 인사말이 생략된 채 진행되었다. 그리고 흉기를 든 한 사내가 밤새 시내를 활보했다.
조선중앙일보가 박희도의 비행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조선노동총연맹의 정운영은 “인도적으로 용납 못할 죄악”이라 말했고, 변호사 김병로는 “조선 교육계의 불상사”라 탄식했다. 한 중앙보육학교 학부형은 “가슴이 서늘해질 뿐이었으며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튼 이 문제는 너무도 끔찍하여 입밖에 내기도 싫다”며 몸서리쳤다. 관할 관청인 경기도청 학무과의 일본인 과장은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 사실은 어제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사건을 엄중히 조사하겠습니다. 그런 소문이 난 것만 하여도 감독자로서는 여간 미안하지 않습니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18일자)
여론은 들끓고
조선여자교육협회장 김미리사는 박희도의 과거행실을 거론했다.
교육자로서 더구나 여자교육에 당면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사실이 이미 세상에 드러나고 또 항간에 풍설이 낭자한 지 이미 오래였으니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19일자)
김미리사의 말처럼 ‘여제자 정조유린사건’이 폭로되기 이전에도 박희도를 둘러싼 흉흉한 풍설이 있었을까.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건폭로 이전에 잡지에 등장한 그에 대한 인물평을 살펴보면 풍설이 있었을 개연성이 충분함을 알 수 있다. ‘혜성’ 1932년 3월호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박희도의 캐리커처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실려 있다.
몸이 코끼리같이 크고 눈조차 코끼리같이 작아서 학생시대부터 코끼리란 별명을 듣는 박희도씨! 어느 날 아침에 신설리 자택에서 바쁘게 시내로 들어오느라고 미처 앞도 잘 살펴볼 여가가 없이 전찻길로 뛰어나오다가 나뭇짐을 밀쳤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가 나뭇짐을 밀친 줄 알았으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였겠지만 그는 모르고 그냥 전차로 올라탔는데 나무꾼은 소위 종로에서 뺨 맞고 북바위에 가서 눈을 흘긴다고 나뭇짐을 다시 짊어지고 동대문을 향하여 들어오며 “아무리 눈이 코끼리같이 작기로 남의 나뭇짐도 잘못 보나! 몸뚱이가 눈같이 작았으면 나뭇짐에 걸리지나 않지” 하고 혼자 중얼중얼하더라고. - 이것은 어떤 동대문 밖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가두에서 본 인물 - 박희도씨’, ‘혜성’ 1932년 3월호)
1934년 3월27일 종로 백화원에서 열린 박희도 사건 관련 사문위원회 기사. 60~70명의 관계자가 모였다. ‘삼천리’ 1934년 5월호.
‘제일선’ 1932년 7월호에는 서양무희와 박희도의 합성사진 아래에 다음과 같은 만문이 실려 있다.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에 분개한 박씨는 2~3일 전에 불란서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덴서’와 이와 같이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본사에 전송하여 독자 제씨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 ‘카메라’ 놈도 행삿머리가 고약해! - (‘가장행렬화보 -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씨’, ‘제일선’ 1932년 7월호)
박희도와 서양무희가 퇴폐적인 포즈를 취한 합성사진을 보면 박희도를 둘러싼 구설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라는 괴상야릇한 표기는 무슨 뜻일까. 박희도 자신은 곱사춤을 잘 춘다고 생각하고 또 자주 추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흉물스럽다는 뜻이었을까.
흔히 ‘사회지도급 인사’에 해당하는 이들을 만나보면 유난히 손버릇이 나쁘거나 입이 거칠어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글을 읽어보면 한없이 깊이가 있는데 만나서 몇 마디 나눠보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몸서리쳐지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술 먹으면 ‘가축’이나 ‘짐승’에 가까워지는 사람 또한 아주 많다. 박희도도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혜성’ 1931년 3월호에는 남자 간통죄 입법 문제가 일본의회에서 논의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각계의 의견을 수록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박희도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여자의 정조문제를 법이 간섭하는 것은 사회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요 따라서 그 법은 악법이외다. 어찌 되었거나 아내라 하면 자기가 일신으로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오던 생의 동반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한번 부정한 일이 있었다고 해서 고발을 하면 법이 그 여자를 잡아다가 징역을 시키니 고발하는 남자도 나쁘며 그 법 또한 악법입니다. 아내가 그런 부정이 있으면 좋은 말로 나무랄 것이요 몇 번 나무라서 안 들으면 그것은 자신에게 정이 없어진 때문이겠으니까 ‘너희끼리 가서 살아라’ 하고 갈라설 따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정조에 대하여 아내가 고발을 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한다’는 것은 인정에 맞지 않는 일인 동시에 그 법이 또한 악법이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악법이 하나 더 생길 뿐이요 또 여자 측으로 보면 도리어 자신네를 우롱하는 것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 난센스’, ‘혜성’ 1931년 3월호)
이 글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박희도가 부부 사이의 정조를 개인의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했다는 것, 둘째, 남자를 간통죄로 처벌하는 법이 생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점이다. 시쳇말로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피어오를 법하다.
목숨을 건 두 사내
박희도가 언제까지나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니다. 문제가 터지자 그는 측근들과 의논하여 나름대로 발빠르게 대책을 마련한다. 보도가 나간 다음날인 3월18일, 중앙보육학교 동창 이기하가 윤신실의 집을 방문한다. 이기하가 마음이 답답할 터이니 산보나 가자고 말하자 윤신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나선다. 그러나 산보를 가자던 이기하는 엉뚱하게도 윤신실을 자신이 투숙하는 여관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는 박희도의 측근 고광명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자 이기하가 낯빛을 바꾸고 말한다.
“3~4년 옛날 일을 무엇 하려 지금 꺼내어 가지고 그러느냐? 박희도 선생님을 위하여 오늘까지의 사실을 번복, 부인할 수 없느냐?”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21일자)
윤신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그들을 돌려보낸다. 아내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노원우는 박희도의 파렴치함에 또 한번 치를 떤다. 박희도는 그후로도 몇 차례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 윤신실을 회유하려 한다. 박희도가 성의 있는 사과는커녕 일체의 사실을 부인하고 사람을 넣어 아내를 회유할 생각만 하자, 노원우는 담판을 짓기 위해 박희도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다.
3월25일 오후 2시, 마침내 노원우와 박희도 두 사람은 동대문 밖 신설리 박희도의 집에서 만난다. 이 ‘역사적인’ 회동을 지켜보기 위해 중앙보육학교 공동 설립자들과 시내 각 신문기자는 물론 경관까지 입회한다. 한때 결의형제를 맺었던 두 사람은 ‘파렴치한 성추행 사건’인지 ‘악의적 무고사건’인지 진실을 가리기 위해 마주앉았다. 어색한 침묵도 잠시, 노원우가 먼저 공격에 나선다.
노원우: 지난 12일 평양에서 너는 어째서 나를 피하고 도망하였느냐?
박희도: 동아일보 평양지국 기자 김 씨가 백선행기념관으로 가지 말라고 하며 정신이상이 생긴 사람이 ‘아지(agitation·선동)’와 망신을 주리라 하니 어찌 음악회장으로 가겠는가?
박희도가 평양에서 피신한 일에 대해 그럴 듯하게 변명하자, 노원우는 사실과 다르지만 그 일에 대하여는 추후 김 기자를 대면하고 알아보겠다고 말한다. 추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사소한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것이다. 노원우는 공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간다.
3월27일 열린 사문위원회 광경을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29일자.
박: ‘부친 병세’라는 전보를 받고 내려오다가 사리원에서 총독부 인사과에 있는 최화숙을 만났다. 그곳에서 비로소 신문을 보아 네가 나를 만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 고광명 여사와 이기하 여사를 내 아내에게 보내었는가?
박: 그런 사실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 같은 수기를 썼는지 알아보라고 보냈다.
노: 그런 사실이 없는데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이 없느냐고 애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박: …(침묵)
그러고 나서 노씨는 1933년 10월 초순에 서로의 사실과 서로의 과거를 청산하자는 의미로 윤신실 여사가 고백서를 쓰게 하였다는 것과 그 고백서를 받고 난 후의 노씨의 심경이 어떠하였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이어서
노: 윤신실의 단지(斷指)한 손가락을 본다면 누구라도 다 알 것이다. 신실은 손가락을 찍어가면서 나의 앞에서 사랑과 용서를 바랐다.
노씨는 울음 섞인 소리로 말한 다음에 뒤를 이어
노: 풍설에 들으니 네가, 나는 정신병자, 신실이는 음탕한 계집이라 한다니 네가 만들어준 신실의 통신부(通信簿沼煇·생활 통지표)를 지금까지 보관하여 두었지만 교장으로서 음탕한 계집에게 네 손으로 무엇 때문에 조행(操行·태도와 행실)에 ‘갑(甲)’을 주었느냐? 신실이 욕 당하던 날 너의 부인은 신병으로 입원 중이었고 딸은 외출하였다. 그래 내가 정신병자이냐?
박: 사실은 언젠가는 판명된다. 사실 없는 일을 말하니 정신병자다.
노: 교육자로 그 학생을 데리고 키스내기 화투는 무엇이냐?
박: 상식상으로 말이 안 된다. 기생이라 할지라도 키스내기 화투란 없을 것이다. 만일 키스내기 화투를 하였다는 것이 법정에서 사실로 판명된다면 내가 살고 있지 아니할 것이다. 칼로 가슴이라도 그을 터이다.
노: 참말인가?
박: 참말이다. 그리고 만일 사실이 아니라 번복될 때는 어찌할 터인가?
노: 나도 각오한 바 있다. 오냐.
이같이 최후의 극적장면을 보이고 사실 흑백에 따라 서로의 생명을 걸고 나서 악수를 한 다음 오후 4시50분에 이 긴장된 장면은 막을 내렸다.
(‘경관과 기자 입회 하에 노·박 양씨 담판’,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27일자)
박희도와 담판한 후 노원우는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희도는 평양에서 도망하여 온 뒤에 나와 내 아내를 회유하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므로 나는 직접 대하여 박희도의 죄를 성토하였습니다. 박희도가 나를 정신병자라고 악선전을 한다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박희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분 앞에서 나타난 줄 압니다. 여러분께서 입증하셨지만 박과 회견 중 처음부터 끝까지 명백히 내가 아니하였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며 키스내기 화투를 하였다면 그게 무슨 강간이냐 하였습니다. 여학교 교장으로 그 태도가 너무도 뻔뻔하지 않습니까. 금후 박의 행동을 보아 나도 적극적 태도를 결정하겠습니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27일자)
반전을 거듭한 반전
노원우와 박희도의 담판으로 대세는 결정난 것처럼 보였다. 남은 문제는 박희도가 언제 칼로 가슴을 그을지인 것 같았다. 그러나 노원우와 박희도의 목숨을 건 담판이 있은 다음날 상황은 180도 바뀐다. 3월27일 시내 각 언론사에는 윤신실의 또 다른 고백서가 날아들었다. 자신은 박희도에게 추행당한 사실이 없으며, ‘맹수와 같은’ 남편이 강요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거짓진술을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중앙보육학교 설립자 대표 장두현은 각 언론사에 당일 오후 3시에 종로 백합원에서 윤신실이 박희도 문제에 대하여 진상을 말하겠으니 와달라고 통보했다. 남편이 평양을 비운 사이 박희도측이 윤신실에게 손을 쓴 것이었다.
갑자기 소집된 ‘사문(査問)위원회’였지만 워낙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므로 3시가 되기도 전에 백합원에는 60~70명이 모여들었다. 신문·잡지기자, 고등계 형사, 변호사, 중앙보육학교 교사, 졸업생, 설립자 대표 그리고 장안의 호사가들까지 좁은 백합원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노원우였다. 혼자 하는 기자회견인 줄 알고 참석하기로 했던 윤신실이 남편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꿔 회견장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사문위원회는 4시에야 열렸다. 사문위원회를 계획한 장두현은 윤신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윤신실은 어린애를 업고 회견장에 입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미롭지 못한 일로 여러분께 뵈옵게 되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조선중앙일보’에 보도된 수기는 나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남편이 곁에서 협박하는 바람에 아니 쓰고는 목숨을 유지할 도리가 없어서 거짓으로 쓴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남편에게 모진 협박을 받았는지는 의사를 불러 내 몸에 난 상처를 보여도 아실 것입니다.
윤신실의 입에서 이와 같은 말이 흘러나오자 청중석은 술렁였다. 노원우의 주장과 ‘조선중앙일보’의 보도내용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사실은 노원우가 맹수와 같은 야비한 사람이고 박희도는 애매한 누명을 쓴 사람이었을까. 혹시 이 역시 박희도측이 꾸민 비열한 책동은 아닐까. 윤신실이 번복선언을 하자 기자단의 질문이 빗발쳤다. 시인 김동환은 사문위원회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문: 죽음을 두려워하리만큼 모진 협박을 당하여 거짓으로 간통을 당했다고 고백서를 썼다 하니 남편이 무슨 흉기를 가지고 그때 덤벼들었소. 총이요 칼이요.
답: 협박할 때에는 단도와 인두로 하였소.
문: 그러면 단도로 찔리고 인두로 지진 상처가 지금 남아 있소?
답: 상처는 없습니다.
문: 그 정도의 협박이라면 어째서 몸을 피하여 남편의 폭행을 신문사나 경찰에 호소하지 못하였소. 평양에도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평양매일신문이 다 있고 경찰서가 있는데 어째서 생명이 위태한 지경에 있으면서 지식 있는 여성으로 능히 생각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취하지 않았소?
답: 내 신체는 남편에게 감금당해 자유를 잃었으니까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어 그리하였소.
문: 그러면 조선중앙일보 기자가 방문하여 일문일답할 때에도 비록 남편이 곁에 있다 하였어도 언론기관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 절호의 기회에 어찌하여 진상을 호소하지 않았소. 딴 제삼자가 곁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말을 못하였소?
답: 그때 나의 두려운 심리는 내 자신이 아니고는 모를 겁니다.
문: 어찌하여 하고많은 남성 중에 하필이면 교육가요 사회에 이름 있는 박희도씨를 이 문제 속에 집어넣었소?
답: 그것은 남편이 자꾸 박희도와 음행이 있었지 하고 협박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요.
문: 처음 남편에게 준 수기는 확실히 당신이 썼소?
답: 쓴 것은 사실이나 남편이 그렇게 쓰라고 하여 협박에 못 이겨 썼소.
문: 그러면 이번 수기도 또 누가 협박하여 쓴 것이 아닌가. 한갓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또 남편이 위협한다고 전번에 수기를 쓴 점으로 보아서는 그렇게 뜻이 약한 사람이라면 또 이번에도 서울 올라와서 남의 꼬임이나 협박에 의하여 본의 아닌 수기를 쓴 것이 아닌가요?
답: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것이야말로 나의 본의에서 나온 수기입니다. 제일차 수기는 남편과의 부부생활을 갱신하고 새 생활에 들어가는 의미에서, 즉 남편의 애정을 도로 찾기 위하여 쓴 것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확대될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박희도씨 연애사건 사문위원회 광경’, ‘삼천리’ 1934년 5월호)
노원우의 또 다른 폭로
윤신실의 답변에는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2차 수기를 어디에서 썼느냐는 물음에 윤신실은 그런 것은 묻지 말아달라고 말했고, 거듭 밝힐 것을 요청하자 그제야 ‘도염동 18번지’에서 썼다고 밝혔다. 그곳은 박희도의 측근 노영애의 집이었다. 또한 윤신실은 처음에는 노원우에게 감금당해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했다고 증언했지만, 노원우가 외출했을 때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어 그냥 집에 있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박희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모인 자리였지만 윤신실의 답변이 이어질수록 상황은 더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사문위원회는 사실상 박희도측이 윤신실을 회유하여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만든 얄팍한 사술(詐術)이었다. 당사자인 노원우는 초대하지도 않았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그에게 발언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기자의 거듭된 항의로 노원우에게 발언기회가 주어졌다. 아내의 황당한 진술을 듣고 노원우는 어떻게 답변했을까. 시인 김동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죄송합니다. 사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춘천군청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본가인 용강으로 갔다 하기에 그곳까지 가려 하였는데 마침 방안에 찢어진 편지조각이 있기에 그것을 맞추어 보니 최 목사의 연애편지였습니다. 편지에는 두 사람의 밀회 장소가 서평양역으로 되어 있었지만 숙천으로 간 흔적이 있어서 그곳까지 추격하였소이다. 그리하여 숙천으로 가던 도중 서평양역에서 바스켓을 들고 서있는 아내와 만나 그 연애편지 사실을 추궁한 즉 아내의 말이 평양 동일여관에서 최 목사와 하룻밤 같이 잤다는 것을 자백하였소이다. 이 같은 일을 미루어 또 다른 부정이 있지 않느냐고 추궁하였습니다. 그때 과연 나는 때리기도 하고 협박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인들 제 여편네가 딴 사내와 간통하는 것을 보고 가만두겠습니까. 나는 사실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박희도도 나쁜 놈이요” 하면서 박희도와 키스내기 화투로 시작하여 처음에는 키스하고 다음에는 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그 추접한 육체관계의 사실까지 전부 자백하였소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는 분격한 태도로 아내를 향하여 “네가 모든 문제를 나의 협박으로만 뒤집어씌운다면 나중에 당할 네 책임을 각오해라. 나는 이미 결심한 바 있다.”
그리고는 연하여 아내가 그 고백을 하고 나서 “그렇지만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없다”고 단지(斷指)하더란 전말까지 말한 뒤 나중 눈물 섞인 어조로 아내를 향하야
“나 없는 동안에 서울 와서 이런 짓을 하는 너와 나와는 이미 남 된 사람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은 그 젖먹이 어린것을 3년 후까지 길러다오. 네가 지금은 달콤한 어떠한 말의 꾐을 받아 그러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네 눈에서 피눈물 흘릴 날이 있으리라.” (‘박희도씨 연애사건 사문위원회 광경’, ‘삼천리’ 1934년 5월호)
노원우의 진술로 박희도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적어도 “신실이는 음탕한 계집”이라고 한 말에는 대중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조유린 고발서’가 평양으로 이사한 기념으로 새 출발을 위해 서로 과거를 고백하는 과정에 썼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아내와 최 목사의 부적절한 관계를 포착한 노원우가 또 다른 부정을 알아내기 위해 아내를 때리고 협박하여 얻어낸 것이었다. 박희도, 노원우, 윤신실 세 사람 중 진실만을 증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문위원회 이후 박희도는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 평양지국 기자, 노원우 등 여섯 사람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였고, 노원우도 박희도와 윤신실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윤신실은 조선중앙일보사를 방문하여 왜곡보도를 항의했다. 사문위원회 이후 박희도의 여제자 정조유린사건은 더는 신문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맞고소도 정식재판까지 가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사건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박희도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중앙보육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후 다시 교육계로 복귀하지 못했다. 중앙보육학교는 학생들의 신뢰를 잃어 폐교 위기에 몰렸다가, 설립자 전원이 사퇴하고 독지가 임영신에게 모든 운영권을 넘긴 이후에야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노원우와 윤신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아마도 헤어졌을 것이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승자 없는 싸움
박희도는 ‘혜성’ 1931년 7월호 ‘나의 실업보험’이라는 코너에서 “당신이 만일 교육계를 그만두시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예, 나는 정치운동에 뜻을 둔 사람이니까 전문으로 정치운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말이 씨가 된 것인지, 그는 1934년 추문에 휩싸여 교육계를 떠났고 5년 후인 1939년 ‘정치운동가’로 화려하게 지식사회에 복귀한다.
그는 1939년 1월 일문(日文)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위해 헌신한다. 3·1운동으로 한 차례, 사회주의 운동으로 또 한 차례 옥고를 치렀던 박희도는 광복 후 친일 혐의로 반민특위에 의해 다시 한 번 감옥에 갇힌다. 후세의 사가들은 그를 3·1운동 33인 중 가장 추악하게 타락한 인물로 평가한다.
어쩌면 박희도는 노원우의 악의적 무고에 의한 억울한 희생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후 그의 친일행적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역사는 친일파 박희도의 추행을 폭로한 것을 조선중앙일보 사장 재직시 여운형의 업적 중 하나로 꼽고 있다. 품행이 바르지 않거든 상황 판단이라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할까.
지금도 수많은 교수가 ‘성폭력 교수’로 낙인찍혀 교단을 떠나고 있다. 많이 배웠다고 행실이 바른 것은 아니다. 행실이 올곧아서 받은 박사학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인간이기에 젊은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다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실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 ‘단 한번의 실수’를 눈감아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 그러므로 교수들이여. 만일 학생이 여자로 보이거든, 박희도의 비참한 최후를 생각하고 근신하고 또 근신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