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회장, 5월 쿠웨이트 출장서 비밀리에 유전 프로젝트 논의
- 국내 첫 상업용 석유비축기지…대규모 유전 확보한 셈
- 항구, 시장 접근성, 석유저장시설 기술 등 여건도 최적
- 석유거래 허브 되면 지역 경제 허브는 시간문제
SK가 개발한 브라질 유전.
울산공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잔뼈가 굵은 직원들은 회장의 방문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정유회사 SK를 IT회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2세 회장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직원들은 ‘굴뚝회사’에 다닌다는 멍에를 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 회계 혐의로 수감됐다가 출소한 뒤 4개월 만의 회장 방문에 직원들은 섭섭하다는 감정을 대놓고 표출하지는 않았다. 최 회장을 내보내려는 외국 투자자 소버린의 공격이 있던 때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직원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상황이 어려울 때만 현장을 찾는 회장이 원망스럽다는 감정도 있었다.
“대단히 야심 찬 계획”
이제 최 회장에게 그런 비난은 하기 힘들 것 같다. 석유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쿠웨이트 방문은 최 회장이 앞으로 어디에 힘을 집중할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은 최 회장이 SK건설과 쿠웨이트 국영 석유회사 KOC의 석유플랜트 공사 계약식에 참석한 것으로 보도했으나, 비밀리에 또 다른 거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SK와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쿠웨이트 는 SK와 손잡고 한국·중국·일본 3국에 공급할 석유비축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기지 규모와 유치 지역 등 세부 사항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연내 최종 계약서에 서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쿠웨이트는 유가 급등 덕분에 넘치는 오일 달러를 투자할 새로운 사업을 확보하고, SK는 석유를 독점 정제하고 동북아 국가에 공급하게 된다. SK로서는 정유사업에서 한 단계 도약한 석유물류사업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석유산업에 정통한 업계의 한 전문가는 “SK가 석유물류산업에 뛰어든다면 그것은 대단히 야심 찬 계획”이라며 놀라워했다. “이는 세계적 석유회사인 엑슨모빌이나 BP와 같은 반열에 오르는 첫걸음이며, 동북아의 석유 수급을 조절하는 열쇠를 쥔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한국은 거대 유전 한 곳을 확보한 셈이기도 하다”는 것.
쿠웨이트는 SK와 최종현 선대회장 시절부터 40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사업 파트너다. 1962년 SK 공장을 첫 가동할 때 들여온 원유가 쿠웨이트산이었다. SK는 쿠웨이트에서 연간 5900만배럴의 원유를 들여온다. 이는 SK 전체 원유 수입량의 20%. 이렇듯 끈끈한 관계 때문인가. SK가 소버린에 대항해 우군을 끌어모으던 2004년 말, 쿠웨이트의 국영 석유기업 중 하나인 KPC는 3000억원을 투자해 SK의 지분 4%를 매입했다. 최 회장은 이에 답례라도 하듯 지난 2월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전, 한국과 쿠웨이트 경기에서 쿠웨이트 응원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이어 지난 5월 쿠웨이트는 SK건설에 대형 석유플랜트 공사(1조2000억원)를 맡겼다.
중·일·한, 세계 석유소비 2·3·7위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쿠웨이트는 SK를 통해 새로운 투자처를 발굴하고 있다. SK 관계자는 “쿠웨이트와 함께 아시아 시장 진출 확대를 위해 다각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쿠웨이트가 투자처 발굴에 열을 올리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유가 폭등 때문이다. 지금은 유가가 올라 재미를 보고 있지만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언제까지 유가가 오를지 예상하기 힘들고,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는 세계 각국의 노력으로 새로운 에너지원이 개발될 수도 있어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일찍이 석유로 번 돈으로 선진국의 증권과 부동산 매입 등 투자처를 다변화했다.
최태원 회장(가운데)이 SK건설의 쿠웨이트 공사 현장을 방문해 현장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특히 미국 다음으로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중국은 해마다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석유수출국이던 중국은 최근 매일 270만배럴을 수입하고 있으며, 하루 소비량은 700만배럴에 이른다. 한국석유공사는 중국의 소비량이 앞으로 5년 안에 하루 900만배럴까지 늘 것으로 전망한다. 산유국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조만간 세계 최대 석유소비국으로 부상할 중국이지만 대량의 석유를 실어 나를 선박이 접안할 항구가 부족한 것이 흠이다. 변변한 석유저장시설이 없는 것도 단점. 반면 한국은 수심이 깊고 큰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저장시설을 갖고 있으며, 저장시설 공사 기술 또한 세계 최고다. 산유국 처지에선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구 및 저장시설, 공사 능력까지 갖추고 거대 석유소비시장을 곁에 둔 한국을 동북아 석유물류기지로 점 찍을 만하다. SK와 쿠웨이트가 손잡은 것도 이런 여건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여수·거제 석유비축기지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석유비축기지 공사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미국은 지질상의 특징으로 암염(주 성분이 소금인 바위)에 구멍을 뚫어 석유를 저장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암염은 흔하지 않아 범용 기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 예전부터 석유를 선박 내부에 보관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 역시 거대 선박을 보유해야 하기 때문에 지진대에 속하지 않았거나 선박 구입비용이 부담되는 국가로선 따라 하기 힘든 기술이다.
한국의 저장방식은 동굴형이다. 통상 높이 30m, 지름 18m, 길이 300~1000m의 터널을 파고 이 안에 석유를 보관한다. 한국은 대체로 화강암 지질이라 석유를 보관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다. 화강암의 특징은 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굴 안에 보관된 석유가 땅으로 흡수되지 않는 이유는 화강암에 포함된 물의 압력 때문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는 물의 압력이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석유의 압력을 제압한다. 결국 석유는 밖으로 유출되지 않고 물만 안으로 들어온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 법. 동굴 안으로 들어온 물은 석유보다 무거워 밑으로 가라앉는다. 결국 위에 뜬 석유만 필요할 때 꺼내 쓰면 된다. 석유는 나지 않고, 오로지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일찍부터 정부가 나서서 석유저장시설을 개발한 결과 이런 여건을 갖추게 됐다.
한국석유공사는 1980년대부터 석유저장시설 선진국인 프랑스와 스웨덴의 기술자를 초청, 기술을 전수받으며 독자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여수, 거제에 있는 석유비축기지는 4500만배럴을 저장할 수 있어 세계 최대 규모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 막 비축기지를 건설하려는 중국과 인도는 한국석유공사에 기술을 이전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석유거래로 급성장한 싱가포르
그러나 문제는 한국석유공사의 비축기지가 상업용으로 활용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비축한 것이기 때문에 상업용 목적으로 전용하는 데 걸림돌이 많다. 최근 들어 석유가격이 급등했을 때 비축유를 풀어 석유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양은 많지 않다. 영리를 추구한다는 비판을 듣는다는 것도 한국석유공사로서는 부담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SK가 쿠웨이트와 손잡고 석유비축시설을 건설한다면 한국 석유산업에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셈이다. 국내 최초의 상업용 석유비축기지를 짓는 것이자 처음으로 OPEC 산유국의 투자를 받아 원유를 저장하는 것이다. 한국석유공사가 노르웨이의 석유를 비축기지에 저장해준 적은 있지만, 중동 산유국이 한국에 석유저장을 요청하거나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적은 없다. 이를 계기로 또 다른 중동 산유국의 투자를 끌어내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한국석유공사의 엔지니어가 석유를 저장할 동굴을 뚫고 있다. 완성되면 높이 30m의 터널이 된다.
전 삼성물산 싱가포르 지점장 출신으로 항공 항만 물류분야에서 독보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천주욱 마이아이노트닷컴(www.myinote.com) 대표는 “한국이 석유거래의 허브로 알려지면 물류·금융·교육·의료의 중심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이런 모습이다. 세계적인 저장시설을 확보하고 이를 산유국이 공유하게 하면 러시아 원유, 중국 북부 다이칭 유전의 원유, 그리고 발해만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까지 한국에서 정제해 중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 공급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 동북아에 있는 정유공장의 원유 수급을 조절할 수 있다. 석유뿐 아니라 에틸렌 스티렌모노머(SM) 같은 석유화학제품을 판매하는 중심국으로도 부상할 수 있다.
최 회장 리더십 검증받는 계기
한국의 정유산업이 발달하면 중동에서 들여온 원유를 한국의 정유공장에서 정제한 뒤 일본이나 중국으로 판매하는 사업(tolling business)도 새로 일어날 것이다. 수심이 얕은 중국으로 중·소형 석유운반선이 오고가면서 항만 물류 산업이 번창할 것이다. 또 석유거래는 단위가 수억달러에 이르는 계약이 많아 자연스럽게 금융이 발달하게 되고, 석유 현물뿐 아니라 석유 선물시장도 발달할 수 있다. 사람이 몰리면 교육·의료 산업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사람과 돈, 그리고 기술이 모여드는 아시아의 ‘경제 허브’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SK와 쿠웨이트의 석유비축기지 프로젝트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국부(國富)를 창출하는 첫 단추가 될지 속단하기는 이르다. 중국이 큰 시장이기는 하지만, 굳이 한국에서 정제한 쿠웨이트산 원유를 사용할지도 알 수 없다. 일본과 한국은 최대 소비국이지만 소비량이 정체돼 있어 새로운 시장은 아니다. 석유 선물거래가 일어나려면 금융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빠른 시일 안에 국내 은행이 그런 실력을 갖추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석유물류 중심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외국 선박이 자유롭게 한국 항만을 드나들 수 있어야 하지만, 각종 규제로 이중의 시간과 돈이 소요되는 등 불합리한 점이 적지 않다.
최 회장에게 석유비축기지 건설 계획은 새로운 도전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한 단계 올려놓는다면 2세로서 그만큼 자랑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SK글로벌 분식 회계,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 등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최 회장이 이를 만회할 계기도 될 것이다. ‘최 회장 효과’는 일차적으로 SK의 실적과 이를 반영한 주가가 검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