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동의 해방정국. 38선을 그은 것은 미국이지만 분단을 재촉한 것은 국내 정치세력의 분열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자존심 대결과 주도권 다툼. 그들이 민족의 이익보다 정파 이념을 앞세우면서 분단 극복의 길은 멀어져만 갔다. 과연 광복 직후 좌우 대연정은 불가능한 것이었나.
8·15광복 직후 연합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역에 몰려든 환영인파. (동아일보)
혹자는 만약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분단의 외인론(外因論)이다. 만약 외세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좌우익간의 심각한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최악의 경우 내전을 거쳤을지라도 분단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분단의 외인론은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강대국이 약소국 정치에 개입했다고 해서 모두 분단된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강대국 점령하에서 내부의 분열을 억제하고 대연정을 구축함으로써 슬기롭게 분단을 방지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반도에는 분단의 내적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른바 분단의 내인론(內因論)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는 한반도 분단의 성격은 국제적 요인에 의한 분단(독일형, 이른바 국제형)의 성격과 민족 내적 원인에 의한 분단(중국형, 이른바 내쟁형)의 성격이 뒤섞인 복합형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외세가 개입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분단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고 내부의 역량으로 분단을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100년 전에 이렇게 단언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과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다(Those who can not remember the past condemned to repeat it)”. 외세의 규정력이 약화된 탈냉전 시대를 맞아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우리 민족은 분단의 씨앗이 뿌려진 광복 직후의 역사를 반추함으로써 분단 지속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45년 8월15일부터 9월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는 시점을 전후로 국내 정치세력이 좌우 대립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치안유지권 이양받은 여운형
1945년 8월10일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는 연합군이 진주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실시할 것이며 연합군 중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으로 알았다. 종전 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안정적인 귀환대책을 수립해야 했던 총독부는 8월10∼15일에 당시 일반 민중에게 영향력이 있는 인사라고 판단한 여운형·송진우, 안재홍과 독자적으로 치안유지교섭을 벌였다. 송진우는 일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으면 조선민중에게 괴뢰로 비칠 것을 우려해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해 여운형은 실무자의 의사 타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8월15일 새벽 총감관저에서 당시 총독부 실권자인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만난다.
일제는 단순히 치안유지권을 이양하기 위해 협상하려 했지만 여운형은 이를 건국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인식해 실질적인 ‘정권이양’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정치범 석방, 3개월치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구속과 간섭 금지,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불간섭, 노동자의 건설사업 참여에 대한 불간섭 등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이를 수락했다. 회담이 끝나자 여운형은 곧바로 건국준비회(이하 건준)를 구성해 공공안정, 정치범 석방, 식량배급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날 오후에는 건준 입회하에 정치범들이 석방됐다. 다음날인 16일 오후 3시, 안재홍은 건준 명의로 대국민 방송을 했다. 방송 내용은 자위대 신설, 정규군 편성, 총독정치 종료 등 건준이 하나의 정부라는 인식을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고, 안재홍은 이를 세 번이나 방송했다. 16일의 대국민 방송은 일반 민중에게 건준이 좌우를 망라하는 정치조직체로서 합법성을 갖는 정부기구라는 인상을 주어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 이상의 건준 지부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건준은 광복 후 급조된 정치조직이 아니었다. 광복 직전까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여운형의 건국동맹, 안재홍의 신간회 계열, 장안파 공산당으로 불리던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전선이 광복 후 공개적으로 건준 조직으로 표출됐던 것이다.
우파 거두 송진우의 거부
그러면 여기에서 초기 건준(1차 조직)을 이끌던 여운형·안재홍·정백의 이념적 성향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초기 건준의 성격을 알아보자. 여운형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내려져 있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중도좌파적 이념 성향을 보였다.
여운형은 광복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전자는 소수자본가 지배를 거부하며, 다수 민중의 이익, 조선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근로대중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후자는 반봉건적 지배구조와 경제구조의 타파를 의미했다. 따라서 여운형은 자유민주주의적 부르주아 경제와 구분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이 건준 내 중도좌파를 대표했다면 안재홍은 과거 신간회 인사들이 주축인 건준 내 중도우파를 대표했다. 안재홍이 주장한 신민주주의는 초계급적 종합국가 건설을 지향해 서구 선진제국의 봉건귀족과 대지주, 산업자본을 주도세력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는 성격이 달랐다. 또한 그가 주장한 신민족주의도 내적으로는 다수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계급적 협동체를, 대외적으로는 국제협동의 정립적 분담자로서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안재홍의 신민주주의, 신민족주의는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 진보적 민족주의와 동일한 성격의 정치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장안파 공산당의 결성을 주도하고 건준에도 적극 참여한 정백은 공산세력 내 박헌영의 재건파와 장안파의 중간에서 우파와도 협력을 도모했다. 그는 중간파적 공산주의자로 좌우협력에 관해서는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 그는 광복 직후에는 좌우협력, 이후에는 미소군이 철수한 후 남북한 정치지도자간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초기 건준에 참여한 세 지도자는 극단적인 좌우파가 아닌 중도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이 주도한 초기의 건준은 좌우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건준이 명실상부한 좌우연합체가 되려면 국내에 남아 있던 우파 거물 송진우가 참여했어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사실 여운형은 누구보다도 우파의 중심인물인 송진우와 협력하고자 했다. 여운형은 “송진우와의 합작은 개인을 상대함이 아니라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배후집단을 상대하는 것이며 우익 중 세력이 크다고 할 이 그룹의 편향을 방지해 좌익과 합작해 대동단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운형의 최측근인 이만규에 따르면 여운형은 송진우·김성수의 교육·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을 인정했고 이들을 중요한 협력자로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여운형은 광복 며칠 전부터 안재홍·정백·조동우와 협의해 송진우 측과 연대하기로 하고 광복 후 건국준비를 위한 협력을 제의했다. 중간 역할을 맡았던 장안파 공산당의 정백은 여운형과 송진우가 합치면 국내는 당할 정치세력이 없을 것이라는 뜻을 김준연을 통해 전달하고 송진우측에 8월12, 13일 양일에 걸쳐 교섭을 시도했으나 송진우가 거부해 결렬됐다.
15일 여운형은 다시 이여성을 송진우에게 보내고 17일에는 자신이 직접 가서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끝내 건준 참여를 거부했다. 송진우는 이때 여운형에게 “내가 보기에 몽양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그러나 자칫하면 그들에게 휘감기어 공산주의자도 못 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소. 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송진우다운 얘기다. 그러나 여운형과 송진우가 합세했더라면 건준은 명실상부한 좌우연합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송진우를 지지하는 편이던 이인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건준의 협조를 뿌리친 송진우의 태도가 정세판단에 너무 어두운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한 점도 음미할 만하다.
그러면 좌우연합을 표방한 건준의 성격이 어떻게 변질돼 해방정국이 좌우대립으로 전개됐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건준에 대한 도전은 우선 일제의 건준 견제로 나타났다. 8월15일 새벽 “이제부터 우리의 생명보전은 그대에게 달렸다”고 호소하던 엔도 정무총감은 사태가 일본이 의도하던 대로만 진전되지 않자 약속위반이라고 생각하면서 17일 건준의 기능을 치안유지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의 조선군관구는 만약 민간인들이 치안을 저해한다면 군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세상이 바뀐 것에 놀란 일본인들은 총독부가 질서유지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8월18일 “일본군은 엄연히 건재하다”며 일본군은 치안을 해칠 경우에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곳곳에서 충돌했으며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군사령관은 같은 날 행정권 이양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조선인에게 인계한 신문사와 학교를 다시 접수했다.
광복 직후 남한 정계를 이끌던 지도자들은 이념대립으로 연정을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왼쪽부터 여운형(건준), 박헌영(인공), 송진우(한민당)
일본이 이미 묵시적으로 인정하던 건준 조직에 맞서는 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군이 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기 때문이고, 8월20일 이후에는 실제로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한다는 소식을 미국과 몰래 접촉해 알아내고 이 방침을 더욱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항복을 접수할 미국과 접촉을 시도해 8월20일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일반명령 제1호’를 교부받았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38선을 중심으로 미소의 무장해제 담당구역으로 나뉜다’는 전보를 8월22일 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내게 됐던 것이다.
이때까지는 총독부나 일반대중 누구도 분할점령 소식을 몰랐고, 함경북도 지방에 소련군이 진공했으므로 소련군이 서울은 물론 전 조선을 점령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미군의 진주가 확인된 상황에서 총독부는 새로운 지배자 미국과 접촉을 시도하고 건준에 대한 지원을 철회한 것이다.
“일본군은 엄연히 건재하다”
이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좌파의 건준에 대한 도전을 살펴보자. 먼저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과 파벌 다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복이 되자 정치활동을 가장 먼저 재개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강력한 반일저항세력으로서 광복 전까지 비록 소규모이긴 해도 지하활동을 지속해왔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하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한 바 있던 이영·이승엽·조동우·최익한·이정윤 등은 8월16일 장안빌딩에서 당을 조직하고 그 건물에 당 간판을 내걸었다. 이후 이 당은 세칭 장안당 또는 장안파 공산당으로 불렸다.
한편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장안파와는 별도로 8월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박헌영 일파가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내세운 것은 1925년에 창당돼 1928년에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이는 당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뒤늦게 당조직에 착수한 재건파는 자파 이외의 여타 파벌을 부정하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박헌영은 장안파에 대해 “너희는 탁류요, 나만 청류”라는 ‘청류·탁류론’을 내세워 재건파 외의 각파를 부정했다. 재건파는 또한 장안파를 ‘운동유휴분자’ ‘사기, 파당적 좌익집결체’라고 비난하고 나섰으며 장안파와 우파의 민족통일전선을 ‘우파기회주의’로 규정했다.
재건파의 이런 비난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장안파에는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운동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사람이 많은 데 비해 재건파에는 변절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탁류, 나만 청류”
이처럼 광복 후 장안파와 재건파 사이에는 당권을 둘러싼 논쟁이 재개됐는데 결국 9월8일 장안파측에서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고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에 합류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재건준비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9월11일 조선공산당을 정식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발표된 공산당의 중앙간부직은 박헌영파 일색이었으며 장안파의 이영·정백·최익한 등은 제외돼 파쟁의 불씨를 안게 됐다.
이렇게 공산주의운동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박헌영의 재건파세력은 건준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에 열중했다. 건준은 8월17일 1차 부서 결정 후 22일 건준 중앙위를 확대해 2차 조직개편을 단행했는데, 개편 이후 세력분포의 가장 큰 특징은 공산파의 강화, 그 중에서도 박헌영이 이끄는 재건파 공산당의 강화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건준 2차 조직은 공산당계 13명, 중도좌우파 16명(건국동맹계 7명, 국민당계 9명), 우파 4명(한민당계 4명)으로 구성됐다. 공산당계 13명 중 재건파 계열은 10명이고 장안파 계열은 정백·최익한·조동우 3인뿐이었다.
건준의 좌경화
9월4일 단행된 3차 조직 개편에서도 공산계, 그중에서도 박헌영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3차 건준 집행부의 구성을 보면 공산파가 16명, 우파가 관료출신의 전규홍 1명, 여운형계의 중도좌파가 12명, 중도 우파가 양재하·유석현·권태휘 3명으로 우파와 중도우파는 거의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공산파 내에 장안파 공산당 계열은 최익한 한 명만이 남게 됐다.
주요 요직도 재건파가 독점했다. 조직부 이강국, 치안부 최용달, 재정부 김세용, 교통부 김형선, 기획부 박문규 등 요직 중 비(非)박헌영계는 여운형계의 김세용뿐이었다. 이로써 건준은 초기의 좌우연합체적 성격은 현저히 약화되고 극좌파인 박헌영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형세를 보였다.
다음으로 비록 실패했지만 우파세력은 어떻게 건준을 개편하려 했는지 살펴보자. 우선 건준 내에서 송진우의 건준 영입론이 논의됐다. 그러나 이 논의는 건준에 한참 침투하기 시작한 재건파의 우파 배제 방침 때문에 세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16대 17로 부결됐다. 여운형측은 찬성했으나 박헌영과 내통하던 건준 내 이강국·최용달 등이 반대해 결국 세 번째 표대결에서 한 표 차이로 부결된 것이다. 찬성측은 송진우가 국내 민족주의세력을 대표하는 거물일뿐더러 앞으로 건국과정에서 민족주의적 요소가 중요해진다는 점을 영입이유로 내세웠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호남재벌 김성수의 대변인인 송진우를 맞아들이는 것은 진보세력의 친일반민족적 자산반동가에 대한 굴종이라고 주장했다.
우파세력은 또 각계 인사 480명을 망라한 ‘전국유지자대회’ 소집을 통해 건준을 우파 조직으로 개편하고자 했지만 이것도 실패했다. 8월19일로 예정했던 대회소집장은 여운형 테러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송되지 않고 늦어지다가 23일 건준의 무경부장 권태석이 백관수를 방문해 건준 내부 사정으로 초청장이 발송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확대위원을 건준에서 추천하되 서울 시내의 명사로 한정하자고 새롭게 제의했다.
이에 김병로·백관수·이인 등 우파 인사들은 확대위원을 135명으로 결정했고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이를 수락했다. 이들 우파 인사들은 건준에 합세해 건준의 좌경화를 막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여운형 부재중에 자리를 대신한 안재홍의 결정으로 확정된 135명 위원 건은 건준 내부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여운형은 타협안으로 확대위원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말 것을 안재홍에게 지시했다. 안재홍이 그들이 참여하는 건준 확대위원회를 조직하려고 한 데 반해 여운형은 이를 받아들이면 건준은 우파 일색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렇게 지시한 것이다. 이 일로 여운형과 안재홍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결국 35인의 건준위원이 모여 건준 집행부를 18대 17 한 표차로 재신임하면서 135명 위원 확대 건은 흐지부지됐다. 이에 안재홍은 독자적으로 135명의 이름을 신문에 발표하고 건준을 사퇴했다.
“인공은 ‘자궁외 임신’”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재건파 계열이 건준을 장악하자 박헌영은 건준을 모태로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 이는 9월8일로 알려진 미군 진주가 임박하자 재건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해 1945년 9월6일 급조한 조직이었다. 9월6일 건준 주체로 1000여 명이 경기여고 강당에 모여 개최한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상정, 통과됐고, 중앙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해 발표했다.
그리고 9월8일에는 중앙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가 37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그간의 경과보고가 있은 후 각부 위원, 각 기관 접수임시위원 선임 문제가 논의됐고, 선언 강령 기초위원으로 이강국·박문규·정태식이 선임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9월14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 정부 부서와 선언, 정강, 시정방침 등이 발표됐다.
여기에서 건준과 인공의 관계, 인공의 정통성, 인공의 성격에 대한 문제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첫째, 건준의 중심인물이 여운형이고 인공에서도 여운형이 부주석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인공은 건준의 연장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공은 건준의 연장이 아닐 뿐만 아니라 비록 일부 동일 인물이 양쪽 단체의 간부로 등장했지만 두 단체의 성격은 전혀 달랐다.
인공이 건준의 연장이 아니라는 사실은 건준과 인공의 주체세력과 구성요원의 판이한 차이를 보면 분명해지겠지만, 일단 부수적인 증거를 들 수 있다. 우선 여운형의 가까운 개인적 막료들이 여운형과 박헌영이 인공에 대해 합의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운형의 측근 이동화는 “그날 나도 연락을 받지 못했고 회의를 한다고 해서 가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그것은 사실 박헌영이 미리 계획을 세운 다음 몽양 선생과 협의해 몽양 선생이 동의하자 부랴부랴 모여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른 건준 인사들도 “사전에 모르고 있다가 그 회의 장소에 나가서 알게 됐다”고 한다.
1945년 8월말 서울 YMCA에서 건준 집회를 주도하는 여운형.
둘째, 인민대표자회의와 인공의 정통성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중요한 대표자회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에 관한 통지가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누구에게 통고됐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조선공산당이 주관해온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편집자로 돼 있는 ‘해방일년사’에 따르면 이 ‘임시인민대표자회의’는 건준의 ‘지정추천’으로 소집한 것으로 ‘혁명투자 일천 수백명’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숫자 자체에 대한 기록이 확실하지 않은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여운형의 측근이던 이영근에 따르면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재건파’의 조직공작책이 파견한 철도노동자와 경인지역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라는데, 그럴 듯한 주장이다.
셋째, 인민대표자회의에서 발표된 중앙인민위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위원 중에는 이승만·김규식·김구·김원봉·신익희 등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은 임정계열 인사가 포함돼 있다. 또 김일성·무정 등 중국 연안이나 소련으로부터 귀국 도상에 있는 인물, 강기덕·조만식·현준혁 등 38선 이북에 있는 인사도 들어 있다. 여기에 김성수·이용설·김병로·안재홍 등 건준을 반대해 왔거나 건준에서 이탈한 우익계 인물도 끼어 있어 각계각층을 망라한 조직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선출된 인민위원과 후보위원 명단을 면밀히 살펴보면 ‘중앙위원회’가 매우 편파적인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인민대표자회의에서 선출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을 계열별로 보면 임정계 6.66%, 연안파와 김일성 6.66%, 우익 또는 민족주의 계열 13.33%, 여운형 계열 9.33%, 장안파 공산당 9.33%, 재건파 공산당 53.33%, 미상 1.33%로 재건파 공산당이 전 중앙위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넷째, 헌법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9월8일 처음 모인 중앙위원 37명은 헌법을 작성하기 전에 조각부터 단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중앙위원회에 참가했던, 여운형의 측근이자 그의 전기작가인 이만규는 이 모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남겼는데, 헌법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공산당 계열의 간행물인 ‘해방일년사’도 마찬가지다. 헌법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인공이 장기적인 구상이 없는 상태에서 급조된 조직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 부서 인선을 보면,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 내무부장에 김구, 외무부장에 김규식, 재무부장에 조만식, 군사부장에 김원봉, 사법부장에 김병로, 문교부장에 김성수가 임명됐다. 아직 해외에 체류중인 이승만을 주석에 추대했다는 것은 박헌영 세력도 이승만의 명망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좌파세력이 기피하고 후일 친일파라고 매도한 김성수가 문교부장에 임명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편 건준 중심세력인 여운형의 직계로 김세용이 군사부장 임시대리, 이만규가 보건부장, 이여성이 선전부장 수석대리, 최근우가 외교부장 수석대리를 맡았는데 숫자도 적은 데다 하나같이 한직을 맡고 있었다.
반면 재건파는 6부의 부장 자리와 11부의 수석대리 자리를 차지했다. 그중 부장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보면 서기장 이강국, 선전부장 이관술, 노동부장 이주상, 보안부장 최용달, 경제부장 하필원, 교통부장 홍남표 등 모두 요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1부의 수석대리도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언제 귀국할지 모르는데다 우익이 인공을 거부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부장 자리를 꿰찬 셈이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헌영은 인공을 설립함으로써 건준에 집결됐던 정치적 주도권을 여운형과 그의 주변에 있던 장안파에게서 빼앗아 자신이 주도하는 공산혁명의 도구로 삼으려고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은 너무나 조급하고 서툴렀다.
“중경에 있는 우리 정부…”
건준의 좌우연합체적 성격이 탈각되고 박헌영 중심의 좌파가 인공을 중심으로 결집됐다면 해방정국의 우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먼저 우파의 거두 송진우부터 살펴보자. 좌파에 대응하는 송진우가 내세운 논리는 ‘중경임시정부봉대론’과 ‘연합군직접상대론’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말 총독부의 치안유지 요청, 광복 직후의 건준 참여에 대해 ‘중경임시정부봉대론’을 내세워 거부했다. 그는 “왜(倭)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받는 것이 불가”하며, “중경(重慶)에 있는 우리 정부를 부인하고 여기서 새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광복직후 “여운형에게 세력을 뺏겼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일본세력이 아직 남아 있는 때에 그 세력을 이용해서 정권을 세우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연합군이 상륙하고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한 후에 연합국과 논의해서 건국을 해도 조금도 늦을 게 없다”며 “미구에 연합군도 들어오고 해외에 있는 선배 동지들도 귀국하게 될 것이니 그때까지 마음의 준비와 현상유지를 하면서 기다립시다”라고 응수했다. 이것이 바로 ‘연합국직접상대론’이다.
한편 정국의 주도권을 건준에 빼앗겼다는 위기를 느낀 우파의 일부 세력이 몇몇 계열로 뭉쳤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 계열이다. 그들은 건준에 맞설 정당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 송진우에게 정당을 결성하자고 제안했으나 송진우는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송진우는 8월말에야 활동을 개시했다. 9월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준비회’를 조직한 후 이를 ‘국민대회준비회’로 발전시켰다. 9월4일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곧이어 이 조직을 확대개편해 9월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앞서 언급한 일부 우익세력은 9월4일 대표 82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 발기총회를 열고 김병로를 대표로 선출했다. 이들은 9월6일 인공이 결성되자 위기감에 빠져 한민당 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창당도 하기 전인 9월8일 발기인 600여 명의 명의로 인공을 배격하고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인공과 중경임정을 경계선으로 삼아 해방정국의 정치세력을 양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성명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며 현하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하는 인공을 “단호 배격”하기로 결의하고, 중경임정을 맞이해 완전한 자주독립정부가 되도록 “지지육성”하자고 주장했다.
연합군직접상대론을 전개한 송진우는,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자 공산당에 대항하는 강력한 우익정당을 결성할 필요를 느끼고 한민당을 창당하는데 여기에 자신이 주도하는 국민대회준비회를 참가시켰다. 이로써 9월16일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국민대회준비회가 통합해 한민당이 창당됐고 송진우는 수석총무로 선임됐다. 한민당은 창당선언문에서 광복이 중경임정을 비롯한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血汗)의 결정”임을 상기하면서,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를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9월 중순에는 인공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형국이 돼 건준 중심의 좌우연합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이후 남한에서 몇 차례 좌우연합이 시도되지만 모두 실패한 것을 볼 때 광복 초기 한 달 동안의 좌우대립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 여운형·박헌영·송진우·안재홍 등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오스트리아와 같은 대연정을 구성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