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여의도 빌딩숲.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본인과 타인의 나르시시즘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문제는 마음이란 것이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음, 그까짓 것 신경 끄지 뭐!” 하고 쉽게 외면해버릴 때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지금 당신 마음은 분노 40%, 불안 30%, 시기심 20%, 기타 우울 짜증 10%입니다”라고 분석해주는 저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런 저울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지표는 있다. 그것 한 가지만 알고 있으면 심리의 80%는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알면 우린 당연히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도 가질 수 있다. 그 힘의 원천이자 ‘심리 중의 심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애는 제2의 본능
매슬로라는 정신의학자는 인간의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고 했다. 첫 단계가 의식주의 욕구이고 그 다음이 안전의 욕구, 이어서 사랑과 인정의 욕구, 자기 실현의 욕구가 있으며 맨 꼭대기에 영생의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위 욕구가 만족돼야만 상위 욕구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고 봤다. 반대로 상위 욕구가 만족되면 하위 욕구가 덜 만족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랑과 인정의 욕구가 딱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인정의 욕구가 만족되면 의식주의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아도 우린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욕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나르시시즘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애’를 말한다. 풀어서 설명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옳고 가장 중요하며 세상은 그런 나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심리다. 정도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그와 같은 심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 아닌데, 난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난 것 같은데’라는 열등감도 사실은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이다.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이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을 가리켜 에리히 프롬은 ‘제2의 본능’이라는 표현을 썼다. 즉 동물적 본능을 상실한 인간에게 나르시시즘은 생존을 위한 본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정신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르시시즘은 우리에게 두 번째 본능이자 정신적 양식이다. 따라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린 언제까지나 정신적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60억의 인구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60억개의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이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기중심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넬슨 만델라에 비유했다. 그 터무니없는 말에 화가 난 오프라 윈프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오프라 쇼에 나온 한 게스트가 딱 한마디로 오프라를 이해시켰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말이었다. 자기가 당하면 음모에 희생당하는 거고, 상대방은 그 음모를 꾸미는 나치가 되는 게 자기 중심성으로 가득 찬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다.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다. 이 역시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면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의 심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