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세풍 사건 주역, 서상목 전 의원 단독 인터뷰

“97년 대선 때 홍석현이 나를 이회창에게 소개했다”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 조영철 기자

    입력2005-09-28 11:4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김현철과 이원종 전 청와대 수석에 밉보인 게 불행의 씨앗● DJ 정권, 이회창 차기 집권 원천봉쇄 위해 세풍 사건 일으켰다● 국세청 압력 있었다면 대기업이 여당 후보에게 20억, 30억밖에 안 줬겠나● 1992년 대선 때 청와대는 10대 그룹, 국세청은 30대 그룹에서 모금● 1997년 DJ 비자금 조사 안 한 건 YS와 김태정 검찰총장의 합작품● 김종필측, “내각제 약속하면 DJP 연대 깨고 이회창에 가겠다” 제의● 홍석현 회장에게 10억 요구한 건 당 외부 홍보조직일 것● 대통령제에선 능력 있는 후보보다 약점 적은 후보가 이긴다

    세풍 사건 주역, 서상목 전 의원 단독 인터뷰
    ‘세풍(稅風) 사건’의 주역 서상목(徐相穆·58) 전 한나라당 의원이 입을 열었다. 국세청을 동원해 불법 대선자금을 모았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세풍’. 공교롭게도 검찰은 1998년 8월 이회창씨가 한나라당의 총재로 선출되던 날, 서 전 의원을 출국금지하면서 수사를 시작했다. 한나라당 의원 십수명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됐고,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일부 야당의원들은 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년 동안의 수사, 7년에 걸친 재판 끝에 서씨는 1년형을 선고받았고 사건은 종결됐다.

    그러나 꼬박 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에도 서 전 의원은 여전히 ‘죄인’으로 살고 있다. 최근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세풍 사건은 다시 언론에 오르내렸고, 참여연대는 진상규명을 위해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지난 8·15 사면복권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빠졌다. 담담한 표정으로 기자를 맞은 그는 “불법 모금한 죄보다 더 큰 죄가 있다. 선거에서 진 죄, 그래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게 한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다.

    서 전 의원은 작정한 듯 기자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의 갈등과 견제, 김대중 후보보다 이회창 후보와 연대하고 싶어했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본심, 이회창씨의 선거자금을 모금하게 된 배경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과거 인민군에 학살당한 그의 가족사를 계기로 감옥에서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를 집필했다는 얘기도 기억에 남았다.

    국회의원 시절 그의 텃밭이던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서 전 의원은 강남구 원격교육원의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 8·15 사면복권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2002년 불법 대선자금을 모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사면됐는데, 그보다 5년 전인 1997년 대선자금 관련자들은 사면되지 않았어요. 섭섭하지 않습니까.

    “내가 더 섭섭해하는 것은 한나라당이에요. 나 같은 사람의 사면은 반대한다고 했잖아요. 이 정권에 당하는 것보다 더 섭섭해요.”

    -친정에서도 내쳤으니 다시는 정치를 하고 싶지 않겠군요.

    “글쎄…. 좀 허무해. 박지원씨처럼 대통령이나 만들고 감옥에 갔으면 좋았지. 내 이익을 위해 뛴 것도 아니고. 이회창씨 대통령 만들겠다고 이리저리 뛰었지만, (청와대에서) 도움도 받지 못하고, 돈도 몇 푼 못 모으고, 그걸로 범죄자 취급받고, 지금까지 사면 복권 안 시켜주니….”

    YS, JP, TJ에게 사랑받던 절정기

    -어떻게 정치를 하게 됐습니까. 경제전문가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는데요(서 전 의원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계은행(IBRD)에서 일하고, ‘타임’지 경제고문을 지냈다. 귀국해서는 36세에 일약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을 맡았고, 국내 처음으로 국민연금제도를 연구해 도입하는 등 1988년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경제통으로 활약했다).

    “1983년 KDI에서 근무할 때 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이 88서울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작업팀을 구성해서 연구했습니다. 1964년 일본이 도쿄올림픽을 개최해 성공했고 우리도 올림픽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클 것이란 결론을 냈죠. 그땐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올림픽이 악영향을 줄 거라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 보고서가 청와대를 고무했고, 당시 노태우 올림픽조직위원장의 눈에 띄게 됐습니다. 1988년에 나를 13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로 지명한 사람이 바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에요.”

    -그뒤 내리 3선(選) 의원이 됐고,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했으니 1990년대 중반까지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김영삼 대통령이 나를 아꼈죠. 내가 대선공약을 만들었고, YS 대신 TV 토론에도 나가 선전했거든. 그래서 보건복지부 장관도 했고. 김종필 당 대표는 내가 충청도 사람이라며 챙겨줬어요. 박태준 최고위원도 나를 경제전문가로 예우했어요. 경제 관련 회의가 있으면 나를 불러서 같이 간 적이 많아요. YS, JP, TJ에게 모두 사랑을 받았으니, 내 인생의 절정기였지.”

    -보건복지부 장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경기고 동문 3인방이 모두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아 화제가 됐습니다.

    “내가 제일 먼저 했고, 그 다음엔 손학규, 지금은 김근태가 하니까…그러네요.”

    -고교시절에 누가 공부를 제일 잘했습니까.

    “글쎄요. 김근태가 제일 잘했던 것 같은데. 김근태, 손학규는 운동권이었어요. 근데 학규는 영국에 유학을 가더니 보는 눈이 바뀌어서 돌아왔죠. 인생에 굉장히 도움이 됐을 거예요. 손 지사는 진짜 골수 운동권이었지. 위장취업을 한 적도 있으니까. 성품이 착해요. 나중에 보궐선거에 나갔을 때 내가 도와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승승장구하다가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겁니까.

    “1996년 15대 총선에서 공천받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기 시작했어요. 전국구 의원만 하다가 처음으로 지역구(서울 강남 갑)에 출마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데, 현철이하고 그 측근인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한테 (내가) 밉보인 것 같아. 내가 지구당위원장으로 닦아놓은 터에 최병렬 의원이 공천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이 수석에게 확인해보니 강남 갑의 여론조사 결과가 좋지 않아 문제가 있다고 해요. 나중에 알았는데 내가 허주(虛舟·고 김윤환 의원)계로 분류돼 정무수석팀의 경계 인물이었다고 합디다.

    이회창과 서상목의 중간다리, 홍석현

    처음엔 현철이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내가 자체 여론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결과가 좋았거든요. 안되겠다 싶어 김광일 비서실장에게 부탁해서 YS를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강남 갑에 거주하는 1만명의 경기고 동문, 내가 나가는 소망교회 표가 상대 후보에게 날아간다. 그러니 내게 공천을 주면 서울에서 최고 표차로 이기겠다’고 설득했어요. YS로부터 ‘시간 좀 주지’라는 말을 듣고 나왔죠. 차를 몰고 효자동쯤 갔을 때, 이 수석이 전화로 ‘대통령을 잘 설득했나 봅니다, 선거준비 잘 하세요’라고 하데요. 결국 공천을 받았고, 선거에서 노재봉 전 국무총리, 홍성우 인권변호사 같은 쟁쟁한 후보들과 싸워 정말 서울에서 최고 표차로 당선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당선된 뒤였습니다. 내가 모든 당직에서 배제된 겁니다. 3선 위원이면 정책위원장 0순위인데 아무 직함도 못 받았어요. 그때 마침 이회창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좀 도와달라고. 장관할 때 총리로 모셨던 분인데, 인상이 좋았어요. 즉석에서 좋다고 했지요. 그때부터 험난한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했어도 될 일이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 응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전부터 이회창씨를 신뢰했어요. 이 총리 내각에 (내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들어갔잖아요. 당시 힘이 제일 센 사람이 최형우 내무부 장관이었어요. 누구도 그 양반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총리는 달랐어요. 배짱이 있었어요. 총리 주재 회의에서도 (최 장관에게) 따질 것은 따졌죠. 또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것도 대부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1997년 대선에서 이 총재 측근으로 활동하는 데는 홍석현(전 주미대사)씨도 한몫 했어요. 나와 이 총재의 중간다리 노릇을 했죠. 홍석현씨는 경기고 3년 후배지만, 친구처럼 지냈어요. 홍석현씨가 1997년 대선에서 이 총재를 (대통령감으로) 찍었고, 이 총재가 홍 회장에게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니까 나를 소개한 겁니다.”

    “YS는 심플한 사람이야”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씨는 왜 사사건건 YS와 대립한 겁니까. 청와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을 텐데요.

    “YS가 이 총재를 견제한 거지. 자기한테 인사도 잘 안하고 뻣뻣하니까.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자신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YS도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잖아. YS는 원래 당 대표로 이홍구씨를 밀었지. 그런데 이 대표가 노동법 파동으로 물러나면서 이회창씨가 당 대표가 된 거예요. 이회창씨가 당 대표가 되기 전에 우리가 이회창씨에게 코치를 좀 했어요. YS에게 인사도 잘하고, 현철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는 위로도 좀 하시라고. 우리 말을 듣고 (이회창씨가) 그렇게 했더니, 당 대표로 발탁됐어요. YS는 심플한 사람이야.”

    -YS와 이 총재가 대립한 첫 번째 사건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건이었죠?

    “두 사람이 사면되면 경상도 표를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포함한 이 총재 참모 7명이 내놓은 의견이었지. 그런데 너무 급하게 나와서 청와대와 조율하지 못했어요. 이 총재 입으로 나간 것이 신문에 보도됐어. YS가 노발대발했어요. 사면은 자기가 하는 건데 건방지다며. 그렇더라도 여당 후보인데 YS가 봐줄 수도 있었지. 그런데 안 해준 거라. 결국 누가 사면 건의를 한 줄 아세요? 대선 직후 DJ가 대통령당선자로서 YS에게 건의해서 그렇게 했잖아요, 불과 몇 달 후에.”

    -사면 건의가 물 건너가자 강삼재 사무총장을 주축으로 DJ의 비자금 의혹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결국 이회창씨가 YS에게서 등을 돌린 계기였는데.

    “DJ가 이 총재 아들의 병역의혹을 제기하면서 ‘병풍(兵風)’을 일으켰고, 그것이 지지율 하락의 중대한 원인이 됐어요. 이 총재측에서도 뭔가 대응전략이 필요했는데, 그게 DJ 비자금이었습니다. 계좌번호까지 다 파악해서, 누구에게 비자금을 줬다는 사실까지 확보해 강삼재 의원이 터뜨렸잖아요.

    그런데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이 수사를 안 한다고 했어요. YS의 지시라고 봐야지. 그래서 이 총재가 화가 나서 며칠 있다가 YS에게 탈당하라고 요구한 거예요. 검찰이 수사하는 시늉만 했어도 DJ의 지지도는 떨어졌을 겁니다.

    1992년 대선 때 정주영씨가 회사 돈으로 선거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상승세이던 지지도가 딱 멈췄거든. 정주영씨 표가 늘면 DJ의 지지도도 같이 상승하니까, 이런 기획을 했던 거죠. 그래서 맞아떨어졌고. 1997년에도 DJ 비자금을 수사했으면 지지도 떨어졌지. 수사를 안 한 건, YS와 김태정의 작품이라고 봐야죠.”

    이상주의 연대 vs 지역주의 연대

    -YS가 꼿꼿한 이 총재를 포용하지 않았군요.

    “이회창이 그렇게 싫은 거라. YS가 너무했어요. 당신도 1992년 대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대들어서 지지도가 올라갔거든. SK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려고 할 때, YS가 대통령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최종현 당시 SK 회장 사돈이 노태우 대통령이었으니까.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은 YS를 견제하지 않았어요. YS 본인도 그렇게 해서 지지도를 높였으면서….

    대선 직전 탈당한 이인제씨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분명히 아는 건, 이인제 진영에 홍재형 의원이 간 사실입니다. 홍재형씨는 내가 잘 아는데, 이인제에게 갈 사람이 아니에요. 청와대에서 가라고 하니까 간 거지. YS가 이인제에게도 탈당하지 말라고 했으면 안 했을 겁니다. YS가 이인제의 정치 스승인데….”

    -여당 후보의 프리미엄도 얻지 못하고, 병풍으로 지지도까지 떨어졌으니, 이 총재측으로선 뭔가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으려 했을 텐데요.

    “그랬죠. 그런데 대선 직전, 김종필 자민련 총재측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제안이 들어왔어요. JP의 측근인 김종호 의원이 내게 “내각제 약속만 들어주면 DJP 연대를 깨고 이회창 후보와 연대할 수 있다”고 했어요. JP가 같은 조건이면 이회창 후보와 연대하고 싶었는데, 제안을 하지 않으니 DJ와 했다는 겁니다. 우리 당엔 JP와 친한 사람이 많고, 보수정당이고 또 당 대표도 했기 때문에 DJ보다는 마음이 편한 것은 사실이었겠죠. 반전의 카드를 마련하려고 고심하던 내게 좋은 제안이었어요.

    그런데 이 총재 생각은 달랐어요. 자신이 내각제를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JP와 연합하면 거짓말하는 셈이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어요. 그때 연대했으면 이겼지. 1997년과 2002년 대선 모두 충청도 표가 승패를 갈랐잖아요. 1997년 대선은 이회창-조순의 이상주의 연대가 김대중-김종필의 지역연대와 싸워 패한 사건입니다.”

    -얼마 전 공개된 ‘X파일’에서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이 서 전 의원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서 전 의원이 이회창 총재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10억원을 요구했다는 것인데, 사실인가요?

    “이인제 의원이 탈당하고, 청와대는 안 도와주고, 당은 극심한 분열 상태였어요. 그때 나는 기획본부장이었는데, 도저히 당내에서 작업을 할 수 없었어요. 대책회의를 하면 이 총재에게 보고도 하기 전에 다음날 신문에 나는 거라. 이 총재 음해세력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별도로 외부에 팀을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홍보조직도 외부에서 만들었는데, 그 회사가 홍 회장측과 접촉하면서 돈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이회창 사진작가도 세무조사 받아

    -이회창 후보의 대선자금을 관리하게 된 계기는 뭡니까.

    “이 총재는 돈 관계로는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았어요. 유력한 대선후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이 돈을 전달해줄 사람을 찾은 겁니다. 1997년 대선에선 내가 찍힌 거고, 2002년 대선에선 서정우 변호사가 찍힌 거죠. 둘 다 이 총재 측근이라는 이유로. 적어도 ‘배달사고’는 내지 않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1997년 대선에서 당이 나를 자금책으로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그때 나를 끌어들인 의원이 둘 있는데, 대선이 끝나자 한 의원은 국민회의로, 한 의원은 자민련으로 소속을 옮겼어요. 그러다 보니 1998년 세풍 사건에서 조사받을 사람이 나뿐인 거예요.”

    -‘세풍’은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대선자금을 모금한 것 때문에 생긴 말인데요.

    “병풍 사건으로 이회창 총재 지지도가 떨어지니까 기업이 도와주질 않았어요. 그때 친구 이석희를 만났고, 내가 어렵다고 하니까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과거엔 국세청이 여당 후보 도와주는 게 관례였다고 그럽디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만 해도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재무부 장관이 10대 그룹을 통해 100억원 이상씩 거뒀고, 국세청은 그 밑의 30대 그룹을 상대해 모금했다고 하더군요.”

    세풍 사건 주역, 서상목 전 의원 단독 인터뷰

    서울 강남구 원격교육원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 전 의원.

    -지난해 종결된 ‘세풍’ 사건 일지를 보니 모두 166억원을 거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실제 이석희가 전화해서 모금한 돈은 그보다 훨씬 적어요. 30억원이나 될까. 그때가 9월쯤이었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병풍으로 이 총재 지지도가 떨어질 때여서 기업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1월 말, 12월 초에 돈이 들어왔어요. 지지도가 올라가니까. 그래도 액수를 보면 2002년 대선과 비교해 10분의 1도 안 돼요. 대우 20억원, 현대 30억원…다 이 정도예요.

    기업이 여당 후보에게 그 정도 주면서 국세청 압력 때문에 줬다는 얘기는 말이 안 돼요. 검찰이 수사하면서 ‘국세청 압력 때문에 줬죠?’라고 다그치면 어떤 기업인이 ‘아닙니다’ 하겠어요? 2002년 대선엔 국세청 개입 없이도 이회창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100억원 이상씩 준 것 아닙니까. 얼마 전에 기가 막힌 얘기를 들었는데, 이회창 총재 대선 때 사진 찍어준 작가도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돈도 많이 받지 않고 자원봉사하다시피 한 사람이에요. 이 나라가 그런 나랍니다. 그러니 기업에선 국세청이 나서지 않아도 선거 때마다 돈 챙겨주기 바쁘지.”

    -공교롭게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씨가 총재로 선출된 1998년 8월, 서 위원장을 출국금지하면서 세풍 사건이 시작됐더군요.

    “DJ는 치사한 분이에요. 본인이 지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들어오는 돈도 많았고, 더 썼거든. 선거가 끝난 뒤에 대선자금을 수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에요. 전두환·노태우 조사는 대선자금이 아니라 통치자금 수사였고, 권력형 비리사건이었어요. 과거에 여당이 선거에 이긴 뒤 야당 선거자금을 뒤진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여당도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죠.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보세요. 적고 많고를 떠나 모든 후보가 돈 받은 것으로 드러났잖아요.

    만약 지금 검찰이 1997년 대선자금을 수사한다면 대상은 DJ밖에 없어요. 대통령 임기 때는 조사가 면책되지만 공소시효는 대통령 임기만큼 연장되니까, 아직 공소시효 5년이 끝나지 않은 것이죠. 1997년 11월24일 정치자금법이 개정됐기 때문에 이후에 DJ가 후원회 창구를 통하지 않고 돈을 받았다면 그건 불법이에요.”

    세풍 사건의 교훈

    -DJ 정권이 왜 세풍 사건을 일으켰다고 봅니까.

    “계기는 야당이 JP 총리 동의안을 부결시킨 것이지만, 여소야대를 뒤집고 이회창의 차기 집권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그랬겠죠. 세풍 사건으로 10명 이상의 한나라당 의원 체포 동의안을 냈어요. 마구 흔들어댄 거지. 그것 때문에 30명 이상이 여당으로 넘어갔고.”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함께 모금한 의원 이름은 왜 밝히지 않았습니까? 국민회의와 자민련으로 이적한 의원 둘이 있었잖아요.

    “그러지 않았어요. 사건이 커지니까. 당이 조직적으로 선거자금에 관여한 게 되고, 그러면 이회창씨까지 얽혀들어가니까, 내 선에서 끝냈어요. 여당에서 역이용할 수도 있고 해서.”

    -2002년 서 전 의원이 미국에 도피 중인 이석희씨를 만나러 갔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이석희를 뭐 하러 만나요?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었어. 그래서 형사 고소했지. 고소했는데 수사도 안 합디다. 민사 소송을 할 걸 그랬어.”

    -당시 한 신문은 서 전 의원이 1997년 대선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쓰기도 했는데요.

    “만약 그랬다면 검찰에서 밝혔을 것이고, 선고 받을 때 추징금을 맞았을 겁니다. 난 추징금을 한푼도 내지 않았어요.”

    -한나라당이 세풍을 겪고도 2002년엔 천문학적인 대선자금을 모았습니다. 전혀 반성한 모습이 아닌데요.

    “세풍으로 갖은 수모를 당한 한나라당이 2002년에 엄청난 대선자금을 모금했다는 것은 내게도 충격이었어요. 그러니까 1997년 세풍 사건의 교훈은 불법자금을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많이 모으지 못해서 진 것이었다고 자백하는 꼴이죠. 어쨌든 이제는 대선자금 모을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정작 후보는 다치지 않고, 모은 사람만 처벌받는데 누가 하겠어요.”

    -기업으로선 안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줄 수도 없고…. 방법이 없을까요.

    “영국의 경우가 재미있어요. 기업 후원금을 허용하되 주주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조건을 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투명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어요. 미국은 대선에서 필요한 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보조합니다. 대통령선거를 공영화하면 정치자금제도가 개선됩니다.”

    -비록 아무런 당직도 없었지만 2002년 대선은 거의 막판까지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세풍 사건에 시달린 서 전 의원이 내심 기대한 것도 있을 것 같은데요.

    “완전히 이기는 줄 알았어요. 정몽준 의원이 배신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선거 날 아침, 신문을 보니까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의원을 찾아갔지만 못 만나고 돌아갔다는 기사가 났어요. 뭔가 불안했는데, 그만 동정표가 몰려들면서 전세가 완전히 뒤집어졌지.

    “무슨 소리야, 가야 돼!”

    그후 감옥에서 정대철 의원을 만나 뒷얘기를 좀 들었어요. 정몽준이 돌아선 날, 정대철씨가 노 후보에게 전화해 정 의원 집에 가야 한다고 설득했대요. 그랬더니 노 후보가 완강하게 거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 의원이 ‘무슨 소리야, 가야 돼!’ 하고 소리를 질렀대요(그땐 서로 반말할 때니까). 그래도 노 후보가 안 가겠다는 걸, 억지로 붙잡고 갔대요. 결국 못 만났지만, 그게 도화선이 됐어요. 이번 사면에서 노 대통령이 무리하게 정 의원을 사면 복권시킨 것은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일 겁니다.”

    -2003년 8월 법정구속되고 꼬박 1년을 교도소에서 지냈는데, 그런 일을 처음 겪었으니 몸고생,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다.

    “서울구치소에서 보낸 첫날은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단 1%도 구속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날 교도관이 성경책을 하나 줍디다. 하나님에게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불평했어요. 근데 욥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진정됐어요(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가족과 소유물을 모두 잃고, 자신도 지독한 병에 걸린다. 하지만 신앙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한다).

    차츰 내가 뭘 잘못했는지 보입디다. 불법자금 모은 죄보다 더 큰 죄, 즉 선거에서 진 죄, 그래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게 한 죄. 그렇다면 나는 10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어요. 나는 욥보다 훨씬 작은 사람인데. 뭔가 뜻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잠을 청했는데, 형광등이 내내 켜져 있으니 어쨌든 첫날은 못 잤어요. 서울구치소에선 힘들었지. 개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는데 목으로 넘어가나.

    그래도 다음날부터는 안정됐어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단전호흡도 매일 3시간씩 했어요. 아침에 1시간, 점심 저녁 먹기 전 30분, 자기 전 1시간. 그랬더니 변을 제대로 봤어요. 사실 방 안의 변기가 너무 더러워 적응하는 데 몇 달 걸렸어. 그러다가 구치소에서 만난 권노갑 의원이 나보고 ‘소설책 읽지 말고 책이나 쓰라’고 해요. 그때 마침 노무현 정부에서 부동산 10·26 대책이 나왔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그걸 주제로 경제서적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부동산도 시장인데, 정부가 잡으려고 하면 안 되죠. 교도관에게 볼펜하고 메모지를 부탁해서 매일 썼어요. 이걸 집사람이 ‘매일경제’ 장대환 사장에게 보여줬나봐. 그래서 거기서 책이 나왔지.”

    -집행유예로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책 한 권 쓰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4개월 지나니까, 2002년 대선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서정우 변호사가 구속됐어요. 내 사건의 2심 재판 변호사였는데…. 그러니 내가 어떻게 나와? 이회창씨 관련 대선자금 사건으로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이 난데, 나를 내보내고 서 변호사를 구속할 수 있겠어요? 재판부도 미안했던지, 1년6개월형에서 6개월을 감형해주고 일부는 무죄로 해주고 그랬어요. 결국 나는 1997년 대선자금으로 4개월 살고, 관여하지도 않은 2002년 대선자금으로 8개월을 더 산 셈이에요. 그래서 아예 책을 두 권 더 쓰자고 마음먹었어요.”

    서울구치소에서 여주교도소로

    -그래서 2004년 8월에 펴낸 책이 ‘정치시대를 넘어 경제시대로’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군요. 어느 책을 먼저 썼습니까.

    “‘…경제시대로’를 먼저 썼어요. 그때 서울구치소에서 여주교도소로 이감됐는데, 거기가 훨씬 좋았어요. 안이 깨끗하고, 화장실도 좌변기여서 무릎이 아프지 않았어요. 화장실 문도 있고, 책도 쌓아놓을 수 있어서 마음껏 책 보고 썼죠. 북한 전문가는 아니니까 통일에 관련된 책은 방안에 100여 권 놓고 읽으면서 썼어요. 출소할 때까지 아프지도 않고 모범수로 지냈습니다.”

    -‘정치시대를 넘어 경제시대로’라는 제목의 책을 쓴 계기가 있습니까.

    “현장에서 느낀 한국정치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싶었어요. 경제 전문가 시각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장애물이 됐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정치가 적어도 경제에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거죠. 결론은 내각제를 하자는 겁니다. 대통령제에선 네거티브 캠페인이 기승을 부리고, 능력 있는 후보보다 약점이 적은 후보가 승리합니다. 자신의 비전도 없으면서 참모들이 만든 것을 유권자에게 전달하는 능력만 뛰어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나 내각제에선 정치 엘리트들이 수상을 선출하기 때문에 국정운영이 뛰어난 사람이 발탁됩니다. 대통령보다 오래 집권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비전을 실현할 가능성이 높죠. 또 과반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어요. 민주화 이후 한국의 대통령들이 경제시대를 열지 못한 원인은 대통령제의 결함 때문이에요.”

    세풍 사건 주역, 서상목 전 의원 단독 인터뷰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는 왜 썼습니까. 남북관계 전문가도 아닌데.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선친이 1950년 고향 충남 홍성에서 우파 정치단체이던 국민회 대표로 국회의원선거에 나갔다 낙선한 적이 있어요. 6·25전쟁이 나면서 선친이 인민군에게 체포돼 대전교도소에 수감됐어요. 총알을 아끼려고 선친을 우물에 던져넣어 살해했다고 합니다. 우파단체의 대표로 출마한 것이 이유인 것 같아요. 50년 뒤에 내가 감옥에 앉아 있으니 대물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민군에 학살당한 가족

    당시 고려대에 다니던 큰형님도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가 인민군에게 학살당했어요. 30년 뒤엔 동력자원부 장관이던 둘째형(서상철)이 아웅산 테러로 순직했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2년 뒤 돌아가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내가 감옥에 갔으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감옥에 있으면서 잊고 지낸 내 인생과 가족사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게 우리 가족만의 불행은 아니니까, 그리고 북한 문제와 통일은 우리 민족의 앞날이 걸린 문제이고. 그래서 대북정책의 대안을 내보려고 책을 쓴 겁니다.

    김정일 정권은 도와줘도 망하고 내버려둬도 망합니다. 김정일 이후의 시대는 시나리오별로 대응해야 합니다. 북한이 개방되면 김정일보다 뛰어난 사람이 집권해도 북한 사람들은 남한으로 내려올 겁니다. 대책이 필요해요. 그래서 ‘통일을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교수들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포럼을 열고 있어요.

    미국에도 모임을 만들었어요. 내가 다닌 스탠퍼드대 출신 로완 교수에게 부탁했어요. 그는 2000년에 나와 함께 ‘Brink of Peace’를 쓴 사람입니다. 랜드연구소 소장과 국방부 차관보를 역임했어요.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과는 친구이고, 국방부 부장관을 지낸 폴 월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그의 밑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갖고 있는 정보가 많아요. 로완 교수에게 한국과 미국에서 각자 남북문제를 연구하다가 필요하면 만나자고 했어요. 정부간 대화가 잘 안 되니까, 우리라도 모여서 의견을 나누자고 했죠.”

    -그런 가족사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감옥에 있던 1년 동안 인생을 깊이 있게 돌아본 계기가 됐겠군요. 그래도 최근 10년이 가장 정리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회창씨 때문에 거의 10년을 감옥에 있는 것처럼 보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이회창씨가 다시 출마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한나라당에서 (이회창씨를) 다시 모실 수 있을까요? 2002년 대선 끝나고 내가 이 총재에게 그랬어요. ‘한나라당 총재는 반쪽이지만 대통령이었다,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이 퇴임한 것처럼 행동하시라’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들어 활동하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글쎄…근데 이 총재가 그거 못할 것 같아. 사무실이라도 하나 낼라치면 언론에서 또 대선에 나오려 하냐고 삐딱하게 볼 테니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