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김정일 위원장은 당과 군, 관료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장악력을 확보해갔다. 그 과정에서 친(親)김일성 성향으로 분류된 적잖은 수의 북한 인사가 숙청되거나 제거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동아’ 2005년 8월호는 북한 핵심권력기관에서 일하다 탈북해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전직 관료의 수기를 ‘김일성 사망 직전 父子암투 120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독점 게재한 바 있다. 이번에 ‘신동아’가 입수한 수기는 시간상 그 다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무렵 북한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이른바 ‘심화조 사건’의 전모를 생생하게 전한다.
‘심화조 사건’이란 1990년대 후반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빚어진 대규모 숙청작업으로, 그간 탈북인사들을 중심으로 사건의 존재가 전해진 바 있다. 그러나 그 발단과 흐름, 반전과 결말이 구체적으로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기에 따르면 1997년 8월 전 노동당 당중앙위 농업담당비서 서관히가 6·25전쟁 당시 미국 간첩으로 포섭됐다는 혐의를 받고 평양에서 공개처형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이후 사회안전성이 국가안전보위부 등을 누르고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과거 경력을 샅샅이 뒤지는 작업을 가속화한 사회안전성은 전국 수백개 하부조직에 8000명의 인원으로 이뤄진 ‘심화조’라는 조직을 건설해 연일 6·25전쟁 당시의 간첩사건을 조작해내며 옛 인사들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이 수기에선 당중앙위 간부, 평안남도 당책임자 등 고위급 인사들을 잇따라 제거한 심화조의 사실상 지휘자로,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지목하고 있다. 무자비한 심문과 고문을 이용한 조사방식으로 심화조가 1997년 말부터 2000년 말까지 숙청한 인사와 그 가족이 모두 2만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듯 심화조의 활동이 도를 넘자 2000년 초에 또 다른 권력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등이 이를 견제하고 나서고,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김정일 위원장이 심화조에 대한 소탕작업을 지시하면서 상황이 정리됐다는 것이다.
북한 권력전환기의 상황과 분위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수기의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에게 생소한 북한식 표현은 일부 수정했으나, 글의 흐름이나 구성, 문장 내용은 되도록 원문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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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이후의 북한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김정일의 끊임없는 군 현지시찰이 실은 이 산, 저 산 숨어다니는 산악 도피행각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1990년대 중반부터 굶어죽은 북한 주민이 300만명을 넘는다는 것, 셋째는 김일성 사후 진행된 김정일의 권력장악 음모 ‘심화조 사건’의 내용이다.
첫째와 둘째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북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심화조 사건’에 대해서는 국제사회는 물론 남한에서도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게 내겐 충격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상황에 견주어도 좋을 만큼 북한 사람 누구에게나 아직도 그 공포가 생생한 유례없는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 권력기관에 몸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이 사건의 전모를 기록해두려 한다.
첫 번째 사업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에 대해 많은 이가 의문을 갖던 1994년 7월, ‘신(神)’을 잃은 슬픔으로 대성통곡하던 북한 주민들과 달리 평양 권력층에선 슬픔을 넘어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 김정일 옆에서 부자간의 권력충돌과 긴장을 지켜본 몇 사람에 불과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옛말이 있듯 김정일의 눈에는 그 수가 몇백, 몇천으로 보일 만큼 두려웠을 것이다. 독재자에게도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상 1994년까지 김정일의 권력은 지금처럼 완벽하지 못했다. 김일성과 그 측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정일에게 김일성은 권력의 은인인 동시에 권력불안의 원인이기도 했다. ‘온 사회의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확립’을 위한 지도적 명목을 내세워 당 내부적으로는 사실상 당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굳힌 김정일이지만, 권력을 절대화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요소가 중요 직위 요소요소에 박혀 있는 김일성 측근들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김정일은 그들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 김일성에게 “국가 일은 잘되니 안심하고 말년에 휴식과 독서, 그리고 친지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라”며 사실상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인 혁명1세대 인물들을 따로 관리하며 주석부와 연결시키는 담당부서를 만들었다. 해외도 마찬가지다. 중앙당 통일전선부에 해외조직을 관리하는 조직을 만들고 김일성과 연고가 있는 해외 동포들을 찾는 연고자과를 신설하기도 했다. 그렇게 외형상으로는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듯했지만 두꺼운 제도적 장벽을 친 뒤 뒤에서 권력남용과 온갖 전횡을 일삼았던 것이다.
김정일은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것에서도 김일성과 큰 차이가 있었다. 김일성은 아무리 하찮은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줄 줄 아는 아량이 있었던 반면, 김정일은 애당초 입도 열지 못하게 할 만큼 성급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 특히 김일성 측근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떻게든 줄을 대어 김일성에게 국가 정사와 관련해 잘못된 현황을 몰래 보고했다. 그것이 축적되어 한번은 김일성이 국가원로들과 당고위급 간부들을 불러놓고, “이제부터 당 조직부를 걸치지 말고 모든 중요 현안들을 나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정식으로 통보하기도 했다. 부자간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다 못해 폭발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중국과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북한과 대만의 군사과학자 상호교환 문제를 토의하는 협의회에서 강성산 당시 정무원 총리가 “이런 중요 문제는 수령님께 보고해서 비준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며 이의를 제기하자, 김정일은 “그러지 않아도 과년한 몸으로 피로해하시는 수령님께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담을 끼쳐서야 되겠느냐”며 그 자리에서 일축했다. 그리고 자기를 무시한 듯한 강성산의 발언을 잊지 않고 협의회가 끝난 즉시 당 조직부 4과에 자료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일대 사상전쟁’의 시작
당 조직부 4과는 당 조직부 검열과 중 하나다. 김정일이 특별 관리하는 이 부서는 중앙당과 정무원 고위 간부들의 비행을 색출해 처벌한다는 일명 ‘암행어사’ 부서였다. 하지만 대부분 김정일 지령으로 움직이는 이 부서의 권한이 편향적이고 그 방법과 음모가 너무도 다양하고 엄청나서, 간부들뿐 아니라 당 총비서이자 국가주석인 김일성도 가장 싫어하는 부서였다. 자기가 신임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4과가 만든 자료에 의해 숙청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정일은 강성산의 사소한 가정문제를 가정혁명화로 크게 부각시켜 (북한의 당 간부원칙에는 본인뿐 아니라 가정도 문제가 제기되면 그 연루죄로 처벌 받거나 심지어 해임당하기까지 한다) 해임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김일성은 대로해 “당 총비서로서 당 조직비서에게 당적 경고를 준다”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도 분을 삭이지 못한 김일성은 “어쩌면 제 친인척도 가리지 않는가” 하고 노발대발했다. 이렇듯 독재권력을 위해서는 제 친인척도 안중에 없는 김정일이었기에 김일성 사후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이 바로 권력지반 강화, 즉 김일성 측근 제거였다.
그러나 중앙과 각 시·도에 널려 있는 친김일성 인사들을 단번에 제거하기에는 당 조직부 4과의 힘만으로는 시간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김일성이 사망하고 식량난까지 겹쳐 정국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예측할 수 없는 돌발사태가 조성될 수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수백만을 넘어서고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의 농성투쟁과 같은 거대 반란이 속출하자, 김정일은 위와 아래를 다같이 장악할 수 있는 원자폭탄과도 같은 사건, 즉 일대 사상(思想)전쟁을 결심했다. 먼저 당 중앙 선전선동부에 지시하여 ‘국부(國父)가 없는 틈을 노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들이 침략전쟁의 기회를 노린다’며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는 한편, ‘혁명의 수뇌부를 암살하려고 테러분자까지 침투시킨다’는 내용으로 강연회를 비롯한 대대적인 정치공세에 나섬으로써 온 나라 주민에게 혁명적 경각성과 함께 강력한 조직적 통제를 강요했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북한사람들 누구나 김일성 사망과 동시에 전국에 내려진 군 동원명령의 연속으로만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몇 주일 후 당 선전선동부의 그러한 주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바로 서관히 간첩사건이다. 온 나라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일성 밑에서 오랫동안 당 중앙위 농업담당비서로 일해온 사람이 남한 안기부 간첩이었다는 얘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서관히는 비료 30t을 친인척들에게 장사 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사회안전성 산하 보통강구역 안전부에 수감돼 있었다. 그때로 말하면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200여 명의 노동자가 굶어죽어 나가던 때였으므로, 김정일 대신 누군가가 식량난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민심이 당장 폭발할 상황이었다. 이러한 판단에 기초해 당시 당 조직부 행정담당 제1부부장을 지내고 있던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은 극비리에 사회안전성을 시켜 간부들의 뒷조사를 하던 중 마침 서관히의 비료유출 자료를 손에 쥐게 됐던 것이다.
“정치하는 이가 왜 그리 배짱이 없나”
‘심화조 사건’의 사실상 지휘자로 지목된 장성택 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수기의 필자는 그의 실각이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이반과 관계 있을 것이라 분석한다.
이렇게 김정일의 말 한마디로 비료유출 경제범에서 안기부 간첩으로 정치범이 된 서관히는 그로부터 한 달 후 사회안전성 자체 예심기록문건이 완료됨과 동시에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평양 거리의 인민재판장에 끌려 나왔다. 사건의 실감을 더해주기 위해 조연으로 간첩망 망책에 서관히의 첩자로 고용된 적이 있다는 어느 농촌의 한 여자 관리위원장도 같이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그러나 사실 이 여성은 서관히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경제범에 불과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하루 전 사회안전성에서 나온 수사국 예심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지령을 받았다.
“서관히가 자기 죄를 전부 부정하는데 그 자는 악질이어서 재판장에서도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니 당신은 우리가 써준 이 원고대로 그와의 연계성을 주장하며 간첩활동을 시인하라. 그러면 당신은 내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음날 그 여자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순간순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서관히 앞에서 수사국 예심원이 써 준 원고대로 일장 연설하듯 읊었다. 곧 이어 ‘혁명의 원수’인 두 간첩에게 판사가 사형판결을 내리자, 안전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대중 앞에서 원통함을 호소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서관히와 그 여자는 사격수들의 총탄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격노한 군중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다. 군중은 미국과 남한이 북한 주민을 전멸시키기 위해 체계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한 결과 자기의 가족과 친인척이 그동안 굶어죽었다며 숨이 막힐 정도로 통분해했다. “남조선 괴뢰놈들을 찢어 죽이라”는 고함이 가득 찼다. 김일성 주체농법이 빚은 참혹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서관히가 혼자 고스란히 떠안고 간 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은 북한 전 주민에게 남한에 대한 증오감정을 극대화하는 사상적 효과도 가져왔다. 간부들이라면 무조건 당의 충신일 것이라 믿고 존경하던 주민들이 그 사건 이후 소위 혁명적 경각성과 정치적 안목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된 토대에서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심화조’라는 것을 만들고 당·군·내각 안의 고위직 김일성 측근 인물들을 사정없이 제거해가기 시작했다.
‘용성 간첩사건’의 내막
‘심화조’라는 명칭은 주민등록 요해를 심화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 주민에겐 각각 세 개의 두꺼운 경력카드가 있다. 인사사업을 위한 당위원회 보관용 간부문건으로 불리는 주민등록 요해 문건, 또 하나는 국가보위부에서 그 사람의 정치적 동향이며 발언까지 일일이 기록한 사상검토 차원의 주민등록 요해 문건, 끝으로 사회안전성에서 사돈의 12촌까지 기록한 족보집 같은 주민등록 요해 문건이다.
그 세 문건은 북한 주민을 일생 감시하고 구속한다. 집을 이사하거나 직장을 옮길 때마다 이 문건들은 본인의 그림자처럼 해당기관을 통해 따라다니므로, 문건의 평가에 따라 출세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민등록 문건만 봐도 이 사람이 10여 년 전에 며칠부터 며칠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손금 보듯 알 수 있으며 생각까지 읽을 만큼 구체적이다.
사회안전성 수사발표에 의하면 서관히의 경우 6·25전쟁 시기 경력에 한 달간 공백이 있었으며 그것을 추적한 결과 문제의 한 달 동안 남한의 임무와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장성택을 수뇌로 하는 사회안전성은 자신들의 이러한 수사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용성 사건’을 추가적으로 감행했다. 사회안전성이 이런 사건들을 연발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의 특혜와 당 조직부 제1행정부부장 장성택의 권력야심이 사회안전성에 고스란히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안전성은 그전까지만 해도 권력만능으로 악명을 떨치던 국가안전보위부, 그리고 선군(先軍)정치 이후 그 권력만능마저 능가하는 신권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절대주의에 짓눌려 사법권이 거의 무의미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서관히 사건을 계기로 장성택의 영향력 아래 최고의 권위기관으로 부상할 계기를 맞은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서관히 처형 후 두 달도 안 되어, ‘최고사령부’를 타격하기 위해 6·25전쟁부터 현재까지 잠복해 있던 간첩들을 적발했다는 소위 ‘용성 간첩사건’을 다시 조작했다.
살인범에 대한 공개처형을 알리는 북한의 포고문. 1992년 촬영된 것으로 보이며 명의는 사회안전성 소속인 함흥시 안전부로 되어 있다.
사회안전성은 사건의 실감을 더하기 위해 ‘그 간첩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무기를 숨기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조선중앙TV 카메라 앞에서 땅에서 파헤친 무기를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계급적 원수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록영화를 만들어 거의 매일 방송했다. 사실 6·25전쟁 시기의 그 무기들은 용성구역 안전부가 구역 내 주민들에게 계급교양을 하는 반간첩투쟁전람관 전시품들로서,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 소금물에 담가 녹슬게 한 다음 땅속에 파묻은 것들이었다.
용성 간첩사건의 대상도 대부분 당 간부였다. 이미 죽었거나 나이가 들어 집에서 쉬고 있는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또다시 온 나라가 세차게 술렁거렸고 그 도가니 속에서 노인들에 대한 총살이 연이어 집행됐다. 당 중앙위 전 농업부장 김만금은 1984년에 죽어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던 것을 다시 파헤쳐 공개재판을 한 후 유골에 사격을 가했다. 먼 옛날에나 있었을 법한 부관참시였다. 중앙당 고위간부로 오래 일하며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피창협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고, 그 가족들은 3대까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간첩을 잡은 용성구역 안전부 부장과 담당수사관은 영웅칭호를 받아, 순식간에 용성구역 안전부는 ‘영웅 안전부’로 명성을 얻게 됐다. 그 영웅적인 사기를 더해주려는 듯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북한주민 전체의 주민등록 문건을 요해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어 김정일은 “내 주민등록 문건부터 요해하라”고 사회안전성에 공화국 최고의 특권을 줬고, 사회안전성은 열흘 만에 각 도·시·군에 이르기까지 수사과 감찰과의 유능한 안전원을 총망라해 조직을 결성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심화조’다.
평양 각 구역을 비롯한 전국 수백개 지방단위에 각각 수십명의 고급인력으로 구성된 심화조를 총지휘하기 위해 사회안전성에는 심화조 총지휘본부가 설치됐다. 책임자는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대장(북한에서는 경찰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성(훗날 인민보안성) 직원들도 군대식 계급을 사용함-편집자), 지휘부 참모장은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 상장이었다. 사상 최대규모로 조직된 심화조의 총인원은 무려 8000명. 김정일의 특권을 하달받은 그 8000명이 가뜩이나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북한 전 주민을 상대로 감행한 온갖 정신적·육체적 악행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과 피해자는 모두 2만5000여 명에 달했다.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조선노동당의 조직생활 원칙에는 ‘당원은 누구나 당조직 생활에 참가해야 하며, 당 조직의 한 사람으로서 소속 세포비서에게 개체생활을 보고하는 과정을 통해 정신수양을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당중앙 본부당 책임비서라면 당 총비서인 김일성도 원칙상 조직적으로 구속받게 되어 있는 당 세포의 책임자다. 때문에 중앙당 내 각 부서의 당위원회를 종합적으로 관리, 감시하는 본부당 책임비서라면 당 주도의 북한에선 당연히 김일성, 김정일 다음가는 권력이었다.
심화조가 조직된 첫날 가장 먼저 잡아들인 사람이 바로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이다. 흡사 자신들의 권력을 시위하기라도 하려는 기세였다. 국가안전보위부나 무력부 보위사령부 앞에서도 그 권세가 당당하던 당 중앙위 성원들은 순간 아연해졌다. 본부당 책임비서를 체포하려면 반드시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중앙당 간부들은 김정일의 권력으로 움직이는 심화조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게 됐고, 그 권력이 전국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진 북한은 위아래가 따로 없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문성술 체포를 직접 발기한 사람은 다름아닌 장성택이었다. 장성택에게 전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은 원수 같은 존재였다. 문성술은 본부당 책임비서로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와 김정일 계승문제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친인척들 중에서 권력지향 가능성이 가장 높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을 ‘곁가지’(문제가 있는 김일성·김정일의 친인척-편집자)로 철저히 감시, 견제했다.
그는 장성택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포착되면 그들을 분열시켰고, 당사자인 장성택에게 직접 주의를 주기도 했으며, 심지어 여자와 돈을 좋아하는 그의 비행을 참다못해 김일성에게 보고하여 김정일은 물론 (장성택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동생인) 김경희로부터도 온갖 욕설과 모욕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장성택의 지시로 채문덕이 직접 작성한 문성술 체포와 관련한 제의서가 올라가자, 김정일은 김일성 측근 인물들과 연관된 그의 사업성을 중시하여 엄하게 따져보라는 자필까지 더해 문건을 내려보냈다.
북한 전역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문성술 간첩사건에 이어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이 체포된 일이다. 그의 체포도 순전히 개인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화조 총지휘부의 책임자 채문덕은 사회안전성으로 옮겨가기 전 평양시 안전국 국장을 지냈다. 서윤석은 이 시기 평양시 당책임비서였다. 질투와 욕심이 많은 채문덕을 밉게 보던 서윤석은 채문덕의 비리가 제기됐을 때 당적 권한으로 그를 혁명화 교육에 보낸 적이 있었다.
서윤석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더 빨리, 더 높이 출세했을 거라며 항상 불만과 증오를 품고 있던 채문덕은 역시 장성택, 김정일의 순서로 사인을 받아 평남 당책임비서를 체포했다. 북한의 평남 도당책임비서라면 남한의 경기도지사나 서울시장과 맞먹는 위치인데도, 의심이 간다는 몇 장의 보고서만으로 수갑을 채운 것이다.
심화조 총지휘부의 책임자들부터 이렇듯 김정일이 부여한 특권과 비과학적인 수사방법을 이용해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까지 고문할 만큼 안하무인이었으니 도나 시·군 안전부 심화조 성원들은 더 말할 여지가 없었다. 심화조가 퍼져 있는 전국 곳곳에서 복수전과 피바다가 시작됐다. 6·25전쟁 시기 구월산 유격대, 지리산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던 도당 책임비서들과 인민위원장들은 거의 전부 수감됐다. 박사, 교수, 노동자, 농민 등 직종에 관계없이 6·25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의심이 가는 이들은 심화조에 불려가 예심을 받아야 했으며 평소 심화조 성원들과 앙숙이던 사람들은 대부분 고문으로 살해되거나 간첩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고통과 억울함을 더욱 키운 것은 북한의 악법인 ‘정치범 3대멸족’이었다. 고문 중에 죽은 사람들은 물론 억울하게 간첩누명을 입은 사람들도 본인뿐 아니라 온 가족과 친척 3대까지 정치범수용소로 실려갔다. 간부 비중이 높은 평양시에서는 하루에도 몇 대씩 트럭들이 어디론가를 향해 가곤 했다. 설사 그것이 가정집 이삿짐을 옮기는 차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침통한 얼굴로 자기 가족문제로 연결짓고 심장이 덜컥 멎는 것 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직장에 출근해 누군가가 지각만 해도 혹시나 하고 얼굴을 볼 때까지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가슴을 조였다.
“죽이든가, 자백을 받아내든가”
사실 주민등록 요해라는 비과학적인 수사방법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치고 경력이 한 달의 공백도 없이 순조롭게 이어진 사람은 북한을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더욱이 그때는 지금처럼 사법기관의 조직적 기능이나 임무가 구체화되지도 않았던 때이기 때문에 문건 정리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이나 구실도 통하지 않는, 한마디로 불가능이 없는 심화조의 수사권한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간첩을 한 명 잡으면 ‘공화국영웅’이란 최고의 표창을 받고 승진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심화조 성원들은 시작부터 고문을 무기로 삼았다. 지금부터 서술하는 심화조의 고문 실례들은 훗날 소위 심화조의 죄행을 폭로하는 중앙당 간부강연회에서 참가자들에게 배포한 강연내용의 일부다.
첫 희생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이다. 평생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을 위해 충성한 문성술은 턱에 수염도 안 난 젊은 계호들이 자기에게 수갑을 채우고 어이없는 진술을 받아내려고 달려들자 “너희 정치국장 채문덕을 내 앞에 당장 데려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고 한다. 나타난 채문덕에게 문성술은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로 부르짖었다.
“네놈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누군지 몰라?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이야! 당장 장군님께 네 놈들이 하는 이 짓을 보고해! 아마 용서치 않으실 거다!”
그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나오던 채문덕이 담당계호들에게 한마디 했다.
“죽이든가, 자백을 받아내든가. 알았어? 당장 집행해!”
문성술은 이후 결국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지문도 미처 못 찍은 자백서를 위조하기 위해 문성술의 사체에서 손가락을 잘라 피 같은 손지장을 남긴 ‘문성술 종합진술문건’은 그렇게 완성된 것이다.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도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정신이상이 되어 현재도 봉화진료소에 입원중이다. 간호원이 주사기를 들고 다가가면 “선생님 제발 주사는 놓지 말아주십시오, 다 말하겠습니다” 하며 무릎 꿇고 빌 정도라고 했다. 훗날 심화조에 책임을 떠넘기고 스스로를 북한 주민의 구세주로 포장한 김정일은 “문성술은 신념이 투철한 사람인데 서윤석은 신념이 없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심화조의 고문은 전기고문, 얼음고문, 손톱·발톱을 뽑는 고문 등 그 잔인성과 방법이 참으로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기로 유명했던 것은 비둘기 고문이다. 사람의 팔과 다리를 뒤로 한데 모아 묶고 매달면 가슴이 비둘기가슴처럼 둥그렇게 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매달아놓고는 먼저 “너 간첩이지?” 하고 물어 아니라고 답하면 군화발로 세차게 걷어찬다. 최대한 옥죈 가슴을 군홧발로 차면, 첫 발길질에는 갈비뼈가 부서지고 두 번째 발길질에는 부서진 뼈가 심장까지 찌를 만큼 안으로 박힌다. 그 아픔이 더해지는 세 번째 발길질에는 자인(自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강연자료에 따르면 평양시 안전국의 한 여성 예심원은 예심과정에 진술을 완강히 부정하는 여성 과학자의 젖꼭지를 도려냈다고 한다. 북한에서 흔히 ‘신 해방지역’으로 부르는, 즉 6·25전쟁 이전에는 남한 땅이었던 옹진 지역 노인들은 망돌을 목에 매고 찜통더위 속에서 하루종일 군 안전국 마당을 걷게 해 탈진시켜 죽였다. 고문으로 죽었지만 자살로 처리된 사람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심화조의 사법처리 방법은 다른 기관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감옥 수감자수를 줄이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일단 자백문건을 받아내 죄명이 인정되면 상부의 사인을 받아 감옥 내에서 총살했다. 중앙급 간부들 처리는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야 했는데, 누가 쏠지 이름까지 지명하여 친필서명이 떨어지면 그대로 사회안전성 간부들이 나가서 직접 처형했다. 지방에서는 지방안전국 자체 결정으로 재판도 없이 총살이 집행되기도 했다. 이런 야만적인 숙청의 폭풍이 21세기에 접어들어서까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북한에서 진행됐다.
사상 최초의 공동협의회
김정일은 “사회안전원들도 이렇게 간첩을 잘 잡아내는데 너희들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뭐 하느냐!”며 강하게 질책했다. 결국 2000년 초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조직의 질적 향상을 높여 반혁명 분자들을 철저히 소멸하자’는 안건으로 협의회를 가졌다. 창건 이래 두 조직이 공동협의회를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간첩소탕’이었지만, 사실은 사회안전성의 권력횡포가 나라를 무너뜨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조율에 합의를 보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물론 이들 기관이 사회안전성의 과도한 권력남용과 허위과장 사업실태 보고를 처음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당 조직부에서 국가안전보위부 및 사법 담당 행정부부장을 맡고 있던 계응태가 이미 문성술 사건 때 제1부부장인 장성택에게 이런 점을 이야기하며 사회적으로 혼동과 불안이 증폭되고 있음을 경고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성택은 심화조의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김정일에게 “계응태가 질투가 나는지 방해하려 든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그 친구 왜 그래, 공부 좀 더 하게 해라!”고 즉석에서 지시했고, 계응태는 1999년 당 조직부 행정부부장 직을 내놓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김일성고급당학교 학생으로 ‘책가방’ 신세가 됐다. 김정일의 측근으로 가장 인정받았던 그의 순간적인 몰락을 보고 그때부터 누구도 심화조 활동에 대해 감히 시비를 걸지 못했으며, 결국 장성택이 이끄는 심화조는 당 위의 절대권력으로 성장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공동작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극비리에 진행돼야 했다. 이는 사회안전성의 배후에 여전히 장성택이 있고 그는 김정일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부터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자신들의 선(線)을 발동해 전국의 심화조 예심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매 건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부에 모인 녹음 테이프 내용은 하나같이 사회안전성의 비인간적인 학대와 허위과장으로 일관된 사업실태 등 권력남용을 명백하게 폭로하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공동문건 형식으로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변화와 그 부정적 현상들을 골자로 하는 정세보고서를 작성하고, 방증자료인 녹음 테이프를 김정일에게 제출했다.
김정일은 이 문건을 통해 김일성 사후 당·군·내각 내의 권력지반 정돈과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심화조 사업이, 본래의 의도를 넘어 전 사회적인 불안과 불신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것이 나중에는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읽었던 듯하다. 김정일은 대책보고서까지 준비한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수고에 “제때에 충고를 줘 고맙다. 내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나라가 망할 뻔했다”며 친필사인을 하고 즉시 당 비상회의를 열었다.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의 권력전횡과 고문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당 중앙에 검열과를 조직하고 심화조를 해산하며 그 지휘성원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지 않아도 사회안전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사무칠 대로 사무쳤던 북한 주민들은 그 소식을 듣고 마치 폭동이라도 일으키듯 안전원 복장을 한 사람만 봐도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으며, 전국 각 도·시·군 안전부는 대문을 닫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도성원에 의해 검열총화에 들어갔다. 중앙당과 국가안전보위부, 무력부 보위사령부, 중앙검찰소 공동으로 조직된 검열단 성원은 전국 각 지역에 급파되어 한 주일이라는 짧은 검열과정을 끝내고 그 결과 보고서를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김일성의 항일역사 교과서를 외우며 의무교육과정을 거친 북한 사람치고 ‘민생단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민생단 사건’이란, 해방 전 일제 특무기관이 한인 공산주의 세력 내에 몇 명의 밀정을 박아뒀다가 곧 발각되고 소멸되었는데, ‘민생단 숫자가 수천명에 이른다’는 특무기관의 소문 때문에 조직 내에서 서로 의심하고 죽인 끝에 그 희생자가 정말로 수천명에 달했다는 사건이다. 북한에는 김일성이 민생단 혐의 문서 보따리를 불에 태우자 억울한 누명을 썼던 이들이 감동해 우는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과 영화가 있다.
북한은 이 ‘민생단 사건’을 김일성의 대범한 광폭정치와 믿음의 정치를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널리 선전해왔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을 현대판 ‘민생단 사건’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시대의 구원자로 포장했다. 말하자면 권력야심에 눈이 먼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한 사람이 출세를 위해 수많은 당 간부를 제거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법기관의 수뇌부에 오르려 했는데, 장군님께서 제때에 사태를 수습하시어 억울하게 더 희생될 뻔한 수만의 사람을 구해주셨다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자로 포장하고
김정일은 전국의 강연회에서 사회안전성 심화조의 죄행을 폭로하는 당 중앙 검열 총화보고서를 낭독하게 하고, 당 중앙 간부강연회에선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녹음한 테이프 자료를 기초로 고문행위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도록 했다. 간부들에 한해에서만 공개됐던 테이프가 사회로 유출되면서 그것을 들은 많은 이가 경악했고 분노했다.
김정일은 민심을 달래고 격앙되는 정국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대대적인 사회안전성 심화조 소탕작전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심화조를 처음 조직했던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과 중앙당 조직부 사회안전성 담당책임지도원 리철, 사회안전성 주민등록국 국장, 용성구역 안전부 수사과장 등 네 사람에게 장성택의 책임까지 떠넘겨 현대판 종파분자, 반혁명적인 권력야심가로 판결하고 총살에 처했다.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을 비롯한 몇몇 간부는 징역 15~20년의 중형, 심화조 세포조직을 책임졌던 각 도·시·군 안전부장과 정치부장은 10년형, 심화조 사업에 앞장서서 악독한 고문방법으로 예심조사했던 평양시 심화조 여성 예심원을 비롯한 전국의 고문전문가 수백명에게는 무기징역형 등 전국의 안전원 6000명에게 무거운 형벌을 언도하거나 철직, 추방했다.
김정일은 또한 “생각 같아선 사회안전성을 통째로 없애고 싶지만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참는다”는 식으로 사회안전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명칭이라도 바꿔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인민을 탄압하는 조직이 되지 말고 인민의 생명을 보안하는 조직이 되라는 의미에서 사회안전성을 인민보안성으로 개편했다.
김정일의 정치적 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정일은 수많은 사람의 억울한 누명을 자기가 직접 벗겨준다는 의미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심화조 피해자들을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석방시켰다. 그들이 인생을 다시 찾는 격정의 순간을 주민들에게 실화로 보여주어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김정일은 전국 곳곳에 강연회를 조직하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그 무대에서 정치범수용소 석방선언과 가족상봉 모임을 조직했다.
그러나 모략은 모략일 뿐이었다. 강연회장은 오히려 독재의 고발장처럼 돼버렸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르고 정치범수용소에서 며칠동안 트럭에 실려 시내까지 온 초췌한 몰골의 정치범들은 큰 소리로 낭독되는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석방명령이 사형판결처럼 들렸는지 “제발 죽이지 말아달라”며 애원하고 통곡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들은 비인간적인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그 분노는 곧 가족상봉모임에서 절정에 달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들은 각각 다른 정치범수용소에 갈라져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둥켜안기 바쁘게 큰 소리로 제 아들과 아내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아직도 갇혀 있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희들이 죽는구나. 제발 나만 잡아가라”고 피를 토하며 소리질렀다.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정치범석방과 가족상봉모임은 원래 3차까지 예정돼 있었지만, 첫 실험 후 역효과가 명백해지자 중단하고 말았다.
심화조 피해자들은 정치범수용소 생활로 인해 정신장애와 중병을 얻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석방은 또 다른 고통과 울분의 연속이었다. 정치적 문제로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당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자를 눈물로 그리워해야 했고, 어떤 여자는 아이를 빼앗기던 날의 공포와 아픔을 잊지 못해 남편을 만나자마자 저주하며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본의 아니게 가족해체를 당한 그들은 재산과 집까지 잃었다. 간부들이 대부분 심화조 사건으로 숙청당하면서 고급 아파트에는 다른 간부들이 들어왔으므로 원래 살던 이에게 돌려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당에서는 일단 심화조 피해자들에게 임시로 집단거처를 마련해주고 쌀과 기름을 공급해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문제는 체제의 열악함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심화조 사건’의 뿌리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서관히 간첩 사건이다. 이는 곧 심화조 사건 자체가 본래 김정일의 작품임을 의미한다. 김정일이 오늘날 장성택의 권력마저 중지시킨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심화조 사건이 정권에 준 타격도 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심화조를 총지휘한 장성택에 대해 간부들과 당원들의 감정과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그것이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감행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심화조의 피해가 그토록 심각하게 번진 또 다른 이유는 김정일의 소심한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김정일 본인도 심화조의 연발되는 간첩사건 보고서를 보고 겁에 질린 것이다. 때문에 그는 심화조가 올리는 사형수 명단에는 반드시 사인을 했으며, 그 이름들 가운데는 자기의 충신도 많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두 죽인 것이다. 북한의 당 선전선동부가 그때부터 김정일의 정치를 ‘사랑의 정치요 믿음의 정치’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심화조 사건’을 통해 배신과 기만의 정체가 여실히 드러난 김정일의 정치적 이미지를 바꿔보려는 것이다.
장성택과 채문덕의 권력야심과 출세욕도 심화조 사건이 심각해진 이유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지지와 특권허용을 이용해 당내에 자신의 권력기반을 닦으려 했고, 채문덕은 그러한 장성택을 등에 업고 사법기관의 수뇌로 부상하려 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듯 몇몇 사람의 야심과 계획에 의해 수만명이 희생당할 수 있는 북한체제의 열악한 상황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끌려가도 기댈 수 있는 법적인 변호가 없고, 무참히 고문당하고 맞아 죽어도 그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반인민적인 제도와 환경이 결국 2만5000여 명의 희생자와 피해자를 낳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상전쟁은 북한체제를 유지시키는 필수도구다. 여전히 많은 이를 미국이나 남한과 연결시켜 공개처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북한인권을 해방하자는 주장은 절대적인 사명일 수밖에 없다. 특히 같은 민족이 사는 이 남한 땅에서 북한인권을 무시하고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진심, 그 어떤 양심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