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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③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 정경환 동의대 교수·윤리문화학 cw3581@hanmail.net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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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자격으로 비밀리 귀국

8·15가 지니는 이런 의미 때문에 해외 정치지도자들, 특히 민족진영의 3영수라 일컫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입국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이들 민족지도자 3명이 수십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 당시 이미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미 군정체제가 성립돼 있었다.

미 군정은 군정 관계자가 천명했듯이 당시 남한에서 유일한 권력체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 군정장관 아놀드는 1945년 10월10일 기자단 회견에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10월16일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군정청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기간에 38도선 이남의 조선지역을 통치·지도·지배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지도하에 미군이 설립한 임시정부다. 군정은 남조선에서 유일한 정부”라며 미 군정의 유일합법성을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이던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입국은 자연히 미 군정이라는 실질적인 권력체로부터 강력한 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역량에 따라 국민의 성원 속에 해방된 조국 땅에 당당하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에서 개인 자격으로 비밀리에 입국한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 민족시인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날이면 날마다 나의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나의 거울을 닦아보자”면서 일제 강점기를 사는 식민지 지식인의 참담한 심정을 자성하는 글로 남겼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해 우리 민족은 8·15를 해방과 독립이라는 차원에서 기뻐만 하지 말고 왜 8·15가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의 출발점이 되지 않고 분단국가 성립의 출발점이 됐는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꿈꾼 백범

이제 한국민족주의의 영원한 신화로 일컬어지는 백범 김구의 해방에 즈음한 생각과 입국과정을 규명하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 백범의 독립운동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다. 그는 나라가 기울어가던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할 때까지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한말에는 동학혁명과 의병운동, 그리고 교육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정국에서는 반탁운동과 통일운동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의 임무를 다했다.

그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사사로운 행복을 초월해 민족과 세계라는 거시적인 가치에 자신을 일체화했다. 모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던 때에도 그는 분연히 일어나 민족 전체에 희망의 불꽃을 안겨주었고,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불사조의 민족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그는 민족의 이익만을 위하는 편협한 민족주의(국수주의)에 머물지 않고 세계 평화와 문화국가의 이상향을 추구한 열린 민족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그가 ‘세계적 대가정론’을 제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김구의 ‘세계적 대가정론’은 1945년 12월27일 발표된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에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나아가 그는 독재를 배격하고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설정했다.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는 그의 글(‘자유이념’ 중 한 구절)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소신과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가치와 이념을 가지고 있던 백범에게 일제는 어떤 경우라도 용납하기 어려운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는 비록 악(惡)의 세력인 일제가 일시적으로 기승을 부리지만 역사의 기나긴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패퇴할 것으로 확신했다. 1930년대 초 일제가 기세 등등하게 만주와 상하이를 점령해 독립에 대한 희망이 약해질 때도 그는 일제가 멸망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떠난 임정을 그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배춧잎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해방되는 그날까지 수호했다. 그는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우리의 ‘정부’ 간판을 지키고자 했다. 이것은 그의 독립에 대한 강인한 의지의 표출이자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민족정신의 표현이었다.

이처럼 완전한 자주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가진 백범은 한반도의 남단을 장악한 미국에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일제 강점기 백범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메시아적 희망을 갖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특정 세력, 특히 소련의 독점적인 지배를 방지해야 한다는 정책목표를 가지고 신탁통치안에 따른 좌우연합정부 수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에 우호적이고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인물과 세력을 찾았다. 미국은 백범을 미국의 정책에 순순히 따를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백범은 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한 완전히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신생 독립국가의 모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백범의 자주사상과 미국의 한반도 분할정책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그것은 1945년 민족해방과 동시에 촉발됐다.

백범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하늘이 준 기회로 생각하고 그때까지 불신하던 좌파를 포용해 좌우연합정부를 수립하고 광복군을 확충했다. 그는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됐을 때 우리 민족의 발언권과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일(對日)전에서 우리 민족이 일정한 몫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의미하는 한중연합론을 주창했고, 국내 진공(進攻)작전을 위해 미국과의 합동훈련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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