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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④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친일파 귀족의 백만금 유산이 5년 만에 먼지로 변한 까닭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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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당대의 친일파였던 이재극 남작

조중인이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소송까지 걸면서 매달린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기에 학대하고, 때리고, 협박하고, 공갈해도 법에 호소해가며 남편과 같이 살고자 했을까. 조중인에게도 숨겨놓은 비밀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닌게아니라 그로부터 2주 후 이인용은 음탕·방종한 아내와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시내 이화동 20번지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이 그의 남편을 상대로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지난 2일 이인용 남작은 다시 원고가 되어 그의 처 조중인을 상대로 이혼청구의 반소를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했다.

그 소장의 내용을 보면 피고 조중인은 귀족 집 주부의 몸으로 천성이 음탕 방종한데, 지난 1927년 원고의 부친 고 이재극 남작이 사망한 후 가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박영효, 이달용 제씨와 총독부와 이왕직 관계자들로서 가사 정리위원을 선정하여 원고의 집 재산을 정리하는 중 피고는 이 정리위원들을 싫어하며 스스로 이팔용이라는 자를 불러들여 가사를 정리하면서 이상의 정당한 정리위원들을 모해할 목적으로 기도를 하여 그 위원 중 우연히도 두 사람이나 죽어버렸다.

그리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3년간 피고는 원고의 집 재산을 거의 탕진해버렸으니 즉 원남동 가옥을 6만원에 팔고 은행회사 주권과 안성, 포천 등지에 있는 토지와 현금 등 10만2000원을 자유 처분해 가지고 그 중 4만5000여 원은 피고가 소비해버렸다.

이외에 피고의 음탕한 증거로는 전기 사설정리위원 이팔용과 지난 1927년 여름부터 정교 관계를 맺고 또 피고가 지난 1929년 봄 관철동 민영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친척관계가 있는 민성기와 정교 관계를 맺어서 동년 여름 석왕사까지 동행하여 그 관계를 계속하고 또 피고의 상노(床奴) 이철돌과도 정교를 하였으므로 원고의 호적 면에 입적되어 있는 장남과 장녀도 기실 원고의 자식이 아니다.



원고는 이 사실을 투서와 기타 모 방면으로부터 정확하게 알고 원고의 친족회를 한 결과 피고와 이혼하기로 되어 피고에게 이 사실을 고했던바, 피고도 그 비행을 부끄러워하여 자기 친가로 퇴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피고가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한 소장에서의 주장처럼 원고가 폭력을 행사하여 피고를 내쫓은 것은 아니며 단연 이혼을 청구했는데 재판은 오는 22일로 결정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년 6월3일자)

귀족가의 부부싸움은 점입가경이었다. 폭행·협박·공갈죄로 형사고발되고, 동거청구소송의 피고가 된 이인용은 합의를 시도하기는커녕 도리어 아내를 간통죄로 고소하고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다.

“내가 화류계에 투족하여 아내를 협박했다고? 아니다. 간통을 한 것은 아내다. 아내가 나은 자식들도 내 자식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아내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했다.”

진실을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내일까, 남편일까, 아니면 둘 다 진실을 말한 것일까. 이쯤에서 법정공방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난 10년간 이인용 남작 집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보자.

철없는 어린 신부

서울 동쪽 낙산 곁에 우뚝 솟은 대궁은 이재극 남작의 저택이었다. 재산이면 재산, 명예면 명예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게 없었건만 이재극에게는 남모르는 근심이 있었다.

“내게는 가까운 친척이 없는데 아들의 건강이 부실하니 내가 죽으면 이 집안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이재극은 현명한 며느리를 얻어 가사의 뒷날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집안, 재산, 외모 같은 것을 일체 따지지 않고 총명한 처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 결과 아들 이인용이 12세 되던 해, 14세 먹은 조중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남편이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어린 부부였지만, 두 사람은 웅대한 대궁에서 오누이처럼, 원앙처럼 사이좋게 지낸다.

1927년 봄이었다. 철모르는 열네 살 소녀는 어느덧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조중인은 꽃같이 화려한 청춘에 이르자 남편의 부실한 건강이 원망스러워졌다. 봄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 대궁의 담을 넘어 들어오자 대궁의 젊은 여주인의 마음은 몹시 심란해졌다. 하루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까닭 없이 짜증이 난 조중인이 이재극 남작이 부인 방에서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늙은이는 부부 사이 의가 좋고 젊은 사람은 아내를 돌볼 줄 몰라.”

조부인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었다. 이 말은 어느덧 하인의 입에서 남작부인 귀에 건너오고 다시 이재극 남작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재극 남작은 모든 일을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말을 삼가라 할 뿐 며느리를 꾸짖지 않았다. 아들을 아는 이재극 남작은 며느리의 ‘히스테리’를 꾸짖을 생각보다도 며느리의 청춘기가 까닭 없이 두려웠다. 이재극 남작은 며느리의 꽃피는 듯한 청춘을 보고는 가여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단의 과실’을 따 먹는 불상사가 이 집에서 나지 않을까 하고 남모르는 불안을 느꼈다. (‘이남작가 집안싸움’, ‘매일신보’ 1932년 10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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