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와 야만’ 클라이브 폰팅 지음, 김현구 옮김/돌베개/712쪽/3만원
20세기 중반이 막 지날 때 태어난 일행이 제각기 기쁘고 서러웠던 기억을 나누며 21세기 첫 시간을 흘려보낼 즈음, 아내는 20세기 첫 사사분기 초 세상에 나왔다가 한 해 전 하직한 시아버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20세기의 모진 풍상을 온몸으로 겪었던 그분. 이 시간 편히 잠들어 계시려나. 20세기가 10여 년 남았을 때 태어난 녀석들은 나중에 제 부모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까.
20세기, 21세기라 함은 서구적 관념이라고 ‘진보와 야만’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은 주장한다. 맞다. 우리는 현재 단기 4340년이고, 일본은 헤이세이 19년이다. 누군가 시간에 매듭이 없다고 했듯, 서기 2000년을 맞는 축하 마당은 실제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을 딛고 역사는 계속 펼쳐진다. 따라서 지나간 세월을 되짚어보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겠다. 결국 역사는 내일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른다.
아랫목이 따뜻하면 윗목도 데워진다?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역사는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클라이브 폰팅도 ‘진보와 야만’에서 비슷한 말을 전한다. 같은 자료를 수집한 역사가라도 자신과 다르게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1991년 ‘녹색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A Green History of the World’를 통해 개발의 필연적인 이면을 적나라하게 들춰낸 클라이브 폰팅은 이번에도 남다른 시각을 선보인다. 오랜 세월 영국 국방성의 고위관료로 일한 그는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의 비화를 폭로해 기소됐지만 그 일을 계기로 ‘알 권리(The Right to Know)’를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데, ‘20세기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태어난 ‘진보와 야만’도 막연히 ‘발전이면 좋은 거려니’ 믿어온 독자에게 작지 않은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초 한국에서 태어난 이의 인생역정은 어떠했을까. 국운이 스러져가는 나라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3·1운동을 겪고 6·25 민족상잔에 이은 좌우대립의 소용돌이를 용케 헤치고 국가 건설에 뼈 빠지게 일하다 반쪽이나마 나날이 발전하는 국가의 모습을 목전에 두고 그만 세상을 떠났을까.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람을 상정해본다.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점령을 경험한 그는 20대에 내전에 의한 대량살육과 광범위한 기아를 목도하고, 무자비한 집단농장에서 굶어죽지 않았어도 스탈린주의 테러의 참극에 치를 떨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강제 동원돼 굶주림을 체험하다 독일에 재점령된 조국에서 포로수용소를 전전해야 했고, 구소련에 의한 노예노동에 시달리다 늘그막에 안정되었을 때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로 핵에 대한 공포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 시절 중심부 세계는 비약적으로 진보했다. 그는 진보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고 폰팅은 기술한다.
아랫목이 계속 따뜻해지면 차가운 윗목도 서서히 데워진다고? 정부 지원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단칸방 세입자의 방에도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있다. 그걸 과거에 비해 따뜻해진 증거라고 해석한다면 세입자는 아마 저항하고 싶을 것이다. 상대적 가난은 그 정도가 심해진 까닭이므로. 가난한 건 게으르거나 무능력했기 때문이라고? IMF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고 빈민이 된 대다수는 능력이나 게으름과 무관했다. 오히려 경영자의 잘못이 컸는데 망해가던 회사의 경영자는 오늘날 다시 떵떵거린다. 왜? 거액 정부 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지원금에는 빈자에게 돌아갈 몫의 세금이 대거 포함됐다. 그래서 부자와 빈자의 거리는 더 멀어졌는데, 윗목이 따뜻해지길 기대하며 아랫목에만 불 지펴야 하나.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
18세기 말까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대적 부의 격차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폰팅은 20세기의 세계를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나누어 분석한다. 물론 경제적인 잣대로 진보를 규정하지만, 그렇다고 중심부의 경제적 성과를 결코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들이 진보하는 대가로 반주변부와 주변부가 겪어야 했던 야만의 실상을 폭로한다. 윗목이 있어야 아랫목이 있는 법. 중심부가 진보하면 할수록 반주변부와 주변부의 고통은 크다는 걸 ‘진보와 야만’은 다각도로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