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인간 애니콜’들의 각개전투장, 국회 의원회관 24시

“‘작품’과 맞바꾼 젊음, 여기서 생존하면 어디 가도 살아남는다”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7-05-04 15: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私的 방식과 비공식 일처리로 움직이는 보좌진
    • 의원회관은 ‘세운상가’, 보좌진은 ‘24시간 애니콜’
    • 피감기관에 배워 피감기관을 요리하라
    • 노하우보다 노웨어(Know where)가 중요하다
    • 국회 들어온 순간부터 국회 떠날 궁리
    ‘인간 애니콜’들의 각개전투장, 국회  의원회관  24시
    국회 의원회관에는 수년 전, 지금은 국회에서 ‘퇴출’된 한 의원이 의원실에서 내내 바둑만 두다 보좌관이 건네준 질의서를 들고 국정감사장에 가서는 “책상을 쾅쾅 치며…”라고 읽어 웃음거리가 됐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책상을 쾅쾅 치며’라고 동작까지 설명해둔 보좌진의 질의서를 아무 생각 없이 읽어버린 것이다.

    국회의원을 주연배우라고 치면, 보좌진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고, 매니저다. 의원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이며 법안 마련, 소속된 상임위와 정당 활동, 지역구 관리, 민원 처리까지 모두 보좌진 몫이며 의원 개인의 이미지 관리며 정치적 입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배우의 기량을 한껏 살리고 작품성도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각본을 쓰고, 연예 관계자들과 두루 친분을 쌓아 배우를 스타덤에 올려놓을 기반을 다져야 하는 것과 같다.

    의원회관, 제도와 통념 벗어난 곳

    16대 국회부터 ‘정책 강화’ 목적으로 4급 보좌관이 1명에서 2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한 의원실에 배정된 보좌진 정원은 6명.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1명, 6급·7급·9급 비서가 각 1명씩이다. 의원실에 따라 인턴을 2명까지 채용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의원을 포함해 7~9명이 한 팀을 이룬다. 4급 보좌관은 대개 정책과 정무로 나뉘지만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의원실에 따라 정책보좌관이 선거를 앞두고 지역구에 내려가 있기도 하고, 4급 보좌관 둘 다 정무를 맡고, 5급 비서관이 정책을 담당하기도 한다. 6·7·9급 비서 3명은 대개 전화연락에서부터 일정관리, 문서작성, 차량운행 및 의원 수행 등을 분담한다.

    오전 6시30분. 603호 한나라당 안홍준 의원실 불이 켜진다. 올해로 보좌관 생활 14년차에 접어든 서인석 보좌관은 매일 아침 이 시간에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2003년 ‘국정감사 실무 매뉴얼’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는 그는 요즘 자신이 경험한 보좌관 생활을 글로 정리하는 중이다. 국회의원을 보좌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근무시간을 보좌관 자신을 위해 쓰기 어려운 만큼, 서 보좌관은 남보다 일찍 사무실에 나와 다른 직원이 출근하기 전까지 자기 시간을 갖는다. 그는 국회 의원회관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의원회관은 한마디로 시스템보다 나름의 독특한 논리나 사고에 의해 움직인다. 보좌진 생활이 그만큼 ‘사적(私的) 방식’이나 ‘비공식적인 일처리’에 많이 노출돼 있다는 의미다. 보좌진은 임명에서 면직에 이르기까지 기존 가치관이나 통념과 다른 것이 많다.”

    형식적으로 4급과 5급은 국회의장이, 6·7·9급은 국회사무총장이 임명하도록 돼 있지만, 의원이 국회 사무처에 ‘임명 신청서’를 제출하면 해당자는 그날로 ‘취업 확정’이고, ‘면직 신청서’를 제출하면 당장 ‘밥줄’이 끊긴다. 보좌진의 생사 여탈권을 의원이 쥐고 있는 셈이다.

    국회 홈페이지엔 각 의원실에서 올린 보좌진 채용 공고가 떠 있다. 과거에 비해 보좌진 ‘공채’ 비율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추천’ 등의 형식을 띤, 인맥을 통한 국회 입문 비중이 높다. 인사권을 악용해 친인척을 보좌진으로 등록한 의원도 없지 않지만 상당수 의원이 학생운동권 선후배, 민주화운동 동지, 선거 공신 등 정치적 지향점이 같은 사람을 보좌진으로 채용한다. 이럴 경우 의원과의 관계도 오래 지속되는 편이다.

    ‘배지’ 잃을까 좌불안석

    오전 8시30분, 열린우리당 A의원실에 B보좌관이 분주하게 들어섰다. 수행비서로부터 의원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은 터다. 지역구 행사에 갔다가 오후에나 잠깐 의원회관에 들르겠다더니 급작스레 일정이 바뀌었단다. B보좌관은 평소 오전 7시에 출근해 브리핑을 준비하거나 상임위 질의서를 작성하는데, 이날은 브리핑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지난밤 대학 동문 보좌관들과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좀 늦게 집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B보좌관은 “오늘도 당했다”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A의원은 이렇게 종종 B보좌관을 ‘기습공격’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주요 일간지를 꼼꼼히 챙겨보고 나와서는 능청스럽게 “신문에 뭐 난 거 있나?” 하고 물을 게 뻔했다. B보좌관이 “별거 없다”고 얼버무리면 이번 주 신문에 같은 상임위 소속 의원의 이름이 몇 번이나 났는지 숫자를 제시하며 히스테리를 부릴 게 불 보듯 했다. A의원은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배지’를 잃을까 불안해하며 언론 노출 빈도에 부쩍 예민해져 있다.

    정치학 석사 출신인 B보좌관은 공채로 A의원과 손을 잡았다. B보좌관은 “입법 과정에 참여하고, 민생 현안 해결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건 보람되지만, 업무의 선이 명확하지 않고 의원이 보좌관을 부리는 사람으로 여길 때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싶다”고 토로했다.

    서인석 보좌관은 “현재 국회 보좌진은 의정활동 ‘보좌’ 기능과 의원의 ‘개인비서’ 개념이 혼용되면서 하루 24시간 의원에게 매어 있는 존재가 돼버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4년차에 접어든 여당의 한 초선의원 보좌관은 “국회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영화 한 편 마음 편히 보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휴일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원과 기자, 민원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이다. 보좌진에게 ‘24시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좌관들은 공공연히 “우리는 ‘3D 직종’에 몸담고 있다”고 말한다.

    299개 개별법

    비슷한 시각,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실 보좌진이 넓은 탁자 주위에 둘러앉는다. 박영선 의원실 보좌진은 매일 오전 8시40분에 티타임을 갖는다. 박 의원은 일정에 따라 참석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기자 출신인 박 의원이 일간지와 TV 뉴스 정도는 본인이 알아서 보는 터라, 이 시간엔 보좌진끼리 당번을 정해 그날의 뉴스를 정리해 브리핑을 하고, 각자 의견을 나눈다.

    박영선 의원은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을 발의해 삼성과 ‘다윗과 골리앗’ 싸움을 계속하는 등 초선임에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MBC 보도국 경제부 부장을 지낸 ‘경제통’이지만, ‘국회의원 박영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여러 성과는 보좌진과 손발이 척척 맞았기에 가능했다. 박영선 의원실 최고참인 민현석 보좌관은 줄곧 재정경제위원회 소속 의원을 보좌해온 베테랑이다.

    300여 의원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굴러간다.’ 열린우리당 보좌관 C씨는 “의원회관엔 299개의 개별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보좌진의 역할분담이 잘되고, 의원과 보좌진의 의사소통도 원활한 의원실은 무슨 일이든 신속·정확하게 판단해 일사천리로 진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의원실에선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 의원회관엔 보좌진이 수시로 교체돼 악명 높은 의원실이 몇 곳 있다. 그러나 그 의원실 보좌진이 왜 자주 바뀌는지는 추측만 무성할 뿐 ‘충격 증언’ 같은 건 없다. C보좌관은 “연예인들이 이혼하면서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하고, 헤어진 뒤에도 친구처럼 지내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고 말한다.

    “조직이 작아서 구멍가게 같기도 하고, 부부관계를 닮은 점도 있죠. 관계가 틀어지면 옮길 부서가 없으니 해결방법은 국회를 떠나거나 방을 옮기는 수밖에요. 서로 미주알고주알 다 아는데 상대방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죠. 더욱이 보좌진은 국회 안에서 재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요.”

    한나라당 임태희 의원이 의원실에 들어서는 건 대개 시곗바늘이 오전 9시에서 9시30분으로 옮겨갈 즈음이다. 임 의원이 여의도연구소장과 한나라당 수석부대표를 맡고 있어 매일 최고회의, 당중심모임, 최고중진연석회의, 실무회의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터라 문형욱 보좌관은 임 의원이 의원실에 잠깐 들렀을 때 구두로 진행상황 및 일정을 설명하고, 임 의원이 의원실에 들르지 못할 땐 직접 본관으로 가거나 전화 연락을 취한다.

    대북 송금 의혹 쇼크

    문 보좌관은 1996년 국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아 15대 노기태 의원, 16대 엄호성 의원과 함께 일했다. 15대 때는 전국적으로 ‘기아차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기아차 부실은 경영진과 노조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그 부담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건 문제’라고 노기태 의원을 설득해 결국 노 의원이 공개적으로 견해를 밝히도록 했다. 16대 때는 엄호성 의원이 2002년 국감에서 대북 송금 의혹을 제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엄 의원의 대북 송금 의혹 제기는 국회에 5년 이상 근무한 보좌관 다수가 충격적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2002년 국감이 대북 송금 이슈로 초토화됐고 이후 국감에서도 그 정도 파괴력을 가진 사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상황 한 장면을 복기(復棋)해보자.

    2002년 5월초, 점심때가 지나서다. 식사를 마치고 의원실로 들어온 엄호성 의원이 문 보좌관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디다 얘기하진 말고…현대에서 북한에 돈을 줬대.”

    ‘인간 애니콜’들의 각개전투장, 국회  의원회관  24시
    목소리를 낮춘 엄 의원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문 보좌관은 놀란 기색을 감추고 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굴렸다. 2000년을 기준으로 ‘현대’ 간판을 단 모든 기업의 자금 흐름을 알아봐야 했다. 금융감독원과 국내 모든 은행에 현대 여신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9월 국감이 열리기 전까지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다른 보좌진의 힘을 빌릴 수는 없었다.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혼자 야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문 보좌관의 철저한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다른 직원이 모두 퇴근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에 매달렸다.

    금감원에서 받은 현대 계열사별 여신 내역과 각 은행으로부터 받은 여신 내역을 비교했다. 도저히 뭐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밤,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해준 금액과 금감원이 제출한 자료에서 차이를 발견했다. 산업은행 담당자와 금감원 담당자를 불러 추궁한 결과 금감원에서 자료를 조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추적 범위가 ‘모든 은행’에서 산업은행으로 좁혀졌다. 그러나 문 보좌관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받은 현대상선과의 거래 전산기표는 2만여 쪽에 달했다.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엑셀로 처리했더니 4000억원이 빠져나간 게 잡혔다. 산업은행에 대출 관련 서류를 요구했지만 선선히 내줄 리 없었다. 산업은행으로 달려가 직접 문서를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4000억원 대출 관련 서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가지번호’와 엉터리 서명

    그런데 문서 번호가 ‘가지번호’였다. 정상적인 문서라면 1, 2, 3 하는 식으로 번호가 매겨져야 하는데, ‘1-1’의 형태였다.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관련자 서명이며 기재 내용도 엉터리였다. 일단 의혹을 제기할 만한 단서는 확보한 셈이었다. 계절은 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2002년 9월 국회 정무위 금융감독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엄호성 의원은 “현대상선이 2000년 6월7일과 28일 각각 4000억원과 900억원을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아 현대아산에 제공했고, 이 돈이 다시 북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대북 송금 파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도 ‘대북 송금’ 하면 처음 의혹을 제기한 엄호성 의원이 거론되지만, 몇 달씩 남모르게 작업한 문형욱 보좌관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실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16대를 끝으로 국회를 떠나려 한 문 보좌관에게 임태희 의원이 공을 들였다. 문 보좌관은 결국 국회를 떠나지 못하고 임 의원과 손을 잡았다. 문 보좌관은 요즘 같은 의원실의 신용출 보좌관, 박성규 비서관과 함께 외부 인사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책략’에 대해 토론한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오후 2시가 되자 전 보좌진이 가방을 메고 의원실을 나섰다. 영국과 미국, 일본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 각 정당이 어떤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는지, 정권 교체 뒤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고민한다고 했다.

    ‘정치인은 이미지만으로 성공하기 어렵고 노력과 열정, 그리고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결과가 따른다’는 게 문 보좌관의 생각이다. 또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개인이 아니라 팀이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이미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가 최근 서강대 경제대학원에 등록해 다니는 것도 자신이 속한, 혹은 속하게 될 ‘팀’의 싱크탱크 기능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문이 ‘영업실적’ 게시판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은 국회를 ‘세운상가’에 비유한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국회의원이던 시절 그의 보좌관을 지낸 차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어보니 보좌진의 능력에 따라 그날그날의 실적이 뻔히 드러나는 것을 알겠다”고 했다. 의원회관 사람들에겐 신문이 전날 ‘영업실적’을 보여주는 성적표이자 앞으로 먹고살 재료를 수집하는 장이다. 그래서 의원실마다 신문 보도 브리핑과 스크랩을 보좌진 업무의 ‘기본’으로 삼는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실의 음종환 보좌관은 후배들에게 기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기자가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지면이 모자라 놓친 것이 무엇일까를 집중적으로 살피는 ‘크리티컬 리뷰’(critical review)를 강조한다.

    지난해 3월4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의원실에 나와 있던 음 보좌관이 조간신문을 집어들었다.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의 ‘3·1절 골프’ 파문을 첫 보도한 ‘동아일보’의 속보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중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철도 파업이 시작된 날 골프를 함께 친 기업인 중에 최도술씨에게 정치자금을 건넨 인사들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한 기사는 문제의 기업인들을 K, P, S, Y 등의 이니셜로 처리했다. 그 중 Y씨는 “2001년 코스닥 주가를 조작해 소액 주주에게 수백억원의 피해를 준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돼 있었다.

    “Y씨 기업이 어디에요?”

    음 보좌관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고, ‘영남제분’임을 알아냈다. 금쪽같은 주말이건만 어차피 기다리는 전화도 있던 터라 음 보좌관은 금감원의 전자공시시스템 ‘다트(DART)’에 들어가 영남제분의 공시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교원공제회가 투자한 내역을 발견했다. 음 보좌관은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교원공제회에 영남제분 투자 자료를 요청했다. 며칠 뒤 권영세 의원은 “교원공제회가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영남제분에 투자해 주가 띄우기를 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해찬 총리 골프 파문을 일파만파 확대시킨 의혹 제기는 이렇듯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음 보좌관은 KTF 로비 내부 보고서, 이해찬 총리 골프 파문, 국가정보원의 제이유(다단계업체) 로비 의혹 보고서 등 굵직굵직한 건을 터뜨려 의원회관과 기자들 사이에 ‘선수’로 통한다. 하지만 6년 전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에겐 정책에 대한 의욕만 있을 뿐, 인맥이며 정보망이 전혀 구축돼 있지 않았다. 음 보좌관뿐 아니라 보좌진 대부분의 출발이 그렇다.

    한나라당 이계경 의원실 박철호 보좌관의 경우 국회 입문 초기, 소관 상임위 관련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낸 책을 매일 한 권씩 다 읽기 전엔 퇴근을 안 했다고 한다. 음 보좌관은 금융연구원 등 소관 상임위와 관련된 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를 챙겨 보고, 연구진을 만나며 인맥을 쌓았다.

    “보좌진에겐 노하우(knowhow)만큼이나 필요한 정보를 어디의 누가 갖고 있는지 아는 노웨어(knowwhere)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적재적소의 사람들을 알아두어야 알고자 하는 바를 순발력 있게 확인할 수 있지요. 그 ‘노웨어’를 만드는 때가 저녁입니다.”

    음 보좌관은 같은 당 내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보좌관이 1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권영세 의원으로부터 “의원보다 약속이 많은 보좌관”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국회 밖 사람들과의 약속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음 보좌관은 기자를 만나도 국회 출입 기자보다 검찰과 법무부를 출입하는 법조 기자, 주·월간지 기자를 더 많이 만난다.

    음 보좌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노웨어가 구축돼 있더라”고 했다. 그러나 정보는 정보를 생산해낼 수 있는 곳으로 흘러든다. 음 보좌관이 계속해서 뉴스를 만들어내기에 정보가 모이고, 정보가 모이니까 뉴스가 생산되는 것이다.

    ‘게이트’ 신호음

    2005년 4·30 재·보선을 한 달여 앞두고, 철도공사가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거액을 날렸으며 여기에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여권이 궁지에 몰린 적이 있다. 이 ‘유전 게이트’가 단순히 철도청의 한심한 예산 낭비로만 알려졌을 시점에 음 보좌관의 레이더망에 ‘게이트’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출근길에 아는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아침 MBC 뉴스에 유전 얘기가 나왔는데 봤냐는 거예요. 못 봤다고 했더니 출근하자마자 인터넷으로 챙겨보고 준비하라고 하더군요. ‘큰 건이다’라면서.”

    그에게 전화를 해준 선배는 당시 정치권, 정확히는 여권에 몸담고 있었다. 의원실에 도착해 뉴스를 확인해보니 “철도공사가 나랏돈 60억원을 떼일 처지에 놓였습니다”로 시작된 리포팅이 아주 자세했다.

    “대정부질의 준비해야 하는데, 뭐 할 거 없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양창호 보좌관(현 서울시 의원)에게 음 보좌관은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 개발 건을 파헤치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토스’했다. 당시 음 보좌관은 김재경 의원실에 있었고, 양 보좌관은 권영세 의원실에 있었다.

    다음날 MBC 뉴스가 “철도공사의 납득하기 어려운 유전개발 투자과정에 여권 실세 이모 의원이 관련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하자 한나라당은 권영세 의원을 진상조사단장으로 ‘철도공사 유전개발 실태조사단’을 구성해 사건의 배후를 조직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진상조사는 한나라당 여러 의원의 참여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권영세 의원실은 철도공사에 요구해 받은 ‘신규진출 사업 설명 토론회 의사록’에서 “유전사업 참여 동기는 이 사업을 주도하는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에서 철도청에 사업 참여를 제의”라는 대목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국회 상임위 중엔 외교안보위가 없고, 더군다나 이광재 의원은 산업자원위원회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권영세 의원실은 외교안보위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추측했지만 마땅한 근거가 없었다. 2005년 4월8일 저녁 상황이다.

    폭로정치? 제도개선 지름길!

    ‘인간 애니콜’들의 각개전투장, 국회  의원회관  24시

    2003년 대북 송금 관련 대국민 사과 담화문을 발표한 뒤 생각에 잠긴 김대중 전 대통령. 왼쪽은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4000억원을 대출받은 후 작성한 영수증.

    외교안보위가 NSC임을 증명하는 정황증거들이 한나라당에 속속 제보됐지만 결정적인 물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답보상태를 거듭하던 때, 서인석 보좌관이 움직였다. 당시 안상수 의원실에 있던 서 보좌관은 철도공사가 권 의원에게 보낸 의사록이 조작됐을 수 있다고 의심했다. 10년 넘은 보좌관 생활이 일깨워준바, 국회에서 왜 그 자료를 요청하는지 아는 정부 기관이 선선히 그리고 고스란히 자료를 내줄 리 없었다. 서 보좌관의 자료 요청 노하우가 진가를 발휘할 기회였다. 결국 4월20일 안상수 의원은 ‘NSC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라고 적시된 의사록 원자료를 공개했다.

    현재 안홍준 의원실에 근무하는 서 보좌관은 “그 방법마저 공개하면 (자료를 구하지 못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한 방식, 헛다리를 짚는 듯하지만 알고자 하는 바가 포함되도록 에둘러 자료 요청하는 노하우임을 짐작케 했다.

    대북 송금, 유전 게이트, 3·1절 골프 파문은 모두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말미엔 늘 ‘폭로정치’라는 비난이 따랐다. 더군다나 이런 사건 모두 야당의 ‘작품’이라 ‘소모적인 정치 공세’라고 역풍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좌진이 “정부의 실정, 비리 등을 견제하고 감시해 적발하는 것이 제도개선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라는 데 동의한다. “한강다리 절대 안 무너지게 만드는 공법 만들었다고 해봐야 한강다리 부실 공사만큼 파괴력이 있겠냐”는 얘기다.

    피감기관과의 두뇌싸움

    더군다나 보좌진은 최근 국회에서 제기되는 의혹들이 밀실정치에서 나온 산물과 다르며, 은밀한 거래로 입수한 정보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데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음 보좌관은 “아무리 정보망이 발달해도 누가 문건을 만들어 와서 의원이 터뜨리기만 하면 되는 비리나 게이트는 없다”고 단언했다. 유전 게이트의 경우 정보망을 통한 작은 단서에서 시작됐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꼼꼼한 자료 스크린과 집요한 추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 좀 한다’ 하는 의원실 보좌관은 밤늦도록 자료에 파묻혀 지낸다. 국회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같지만, 자료조사권이 제한돼 있다. 정부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고, 정부가 자료를 보내줘야 받아볼 수 있는 것이다. 국회는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정부는 감추기 위해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음종환 보좌관은 ‘국회에서 자료를 요구하면 공무원은 무조건 숨긴다’고 본다. 이 때문에 일상적으로 ‘무장해제’ 상태에서 보내온 자료에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무식하면서도 속 편한 방법’이라고 여긴다. 일부 의원실에선 ‘문서수발 대장’을 수시로 체크한다. 각 부처 국·실에 오가는 문서의 전체 내역을 조감한 다음, 들여다볼 만한 문서를 형광펜으로 체크해 빠짐없이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2004년 논란이 된 ‘외국인 반한(反韓)단체’는 음 보좌관이 김재경 의원실에 있을 당시 법무부 문서수발 대장에서 ‘반한활동 관련자 단속…’ 하는 문서 제목을 보고 ‘반한활동’이라는 표현이 낯설어 조사하는 바람에 수면으로 드러난 경우다. 당시 언론엔 김재경 의원실 발(發)로 “국가정보원이 반한활동 차원에서 방글라데시인 5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다와툴이슬람코리아’를 적발해 핵심 조직원 3명을 검거해 강제 추방했다. 이들은 1억여 원의 자금을 모아 방글라데시의 한 정당에 송금했고, 불법 체류자 취업 알선으로 정부 정책에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났다. ‘국내 반한 이슬람 단체 첫 적발’ 제목을 단 신문과 방송 보도는 한국이 테러 안전지대가 아님을 강조하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데 김재경 의원실엔 그 이튿날부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화살엔 ‘한건주의’ ‘이주노동자 인권탄압’ ‘과거 공안정국의 조작사건에 버금가는 이주노동자판 시국사건’ 같은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김재경 의원실이 증거나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않아 당초 반한단체 관련 보도를 냈던 언론도 곤란해졌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무심코 자료를 보내고 사실 확인을 해준 관계자가, 막상 그 내용이 언론을 타자 음 보좌관의 집까지 찾아와 “살려달라”고 통사정했던 것. 김재경 의원실은 ‘허위 폭로’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끝내 그 관계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보좌진이 가장 솔깃해하는 주제가 ‘안전’ ‘비리’ ‘부실’ ‘예산낭비’다. 국민과 언론의 관심을 단번에 집중시키는 파급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 그런데 이러한 주제를 파고들다보면 의도하지 않게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음 보좌관의 집앞까지 찾아온 그 관계자가 그렇고, 문형욱 보좌관이 대북 송금을 추적할 땐 산업은행 관계자가 몸과 마음을 많이 다쳤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문 보좌관이 추적할 당시 막 자리를 옮겨와 현대상선 대출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도 아니었다.

    의도하지 않은 피해

    그럴 때면 보좌진의 마음도 편치 않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부실과 비리를 추적한 바 있는 민현석 보좌관은, 자신의 ‘작품’이 신문에 보도된 날 몇몇의 ‘목’이 날아가겠구나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한동안 의원실 밖에 나가 있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보좌진과 피감기관은 애증의 관계다. 같은 공무원으로 연민을 느끼면서도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막아야 할 때는 한 치 양보도 없다. 서인석 보좌관은 “보좌진 초년생 때는 피감기관 공무원을 과외선생으로 여기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목에 힘주며 괜히 아는 척해서 자료 하나 얻지 못하느니 ‘한 수 가르쳐주십사’ 바짝 엎드리면 하나 얻으려다 두 개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 물론 정부 부처가 가르쳐주거나 보내주는 자료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부분의 보좌진이 ‘정부에 요청해 받은 자료는 100%가 아니다’라고 전제하고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문서수발 대장을 챙겨 보는 것인데, 서 보좌관에 따르면 그것조차 조작된다고 한다. 민감한 문서는 그 명칭을 변경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 보좌관은 같은 자료를 복수 기관에 2중, 3중으로 요구해 ‘크로스체크’하고, 담당 공무원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기 위해 ‘원본대조필’ 도장을 반드시 찍어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국회 보좌진의 정보수집 능력이 날카로워질수록 피감기관의 대응방식도 날로 진화한다. 실제로 한나라당 이계경 의원실은 국무조정실이 2004년부터 ‘국정감사 수감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정부 250조 vs 국회 3500억

    “국회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피감기관이 뭘 숨기고 있는지, 어디서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겁니다. 피감기관인 행정부처는 여기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데 반해 국회는 각 의원실의 보좌진 2, 3명이 각개전투를 치러요. 수백 대 일, 수천 대 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경험한 사람이 기록을 남기는 수밖에 없죠.”

    서인석 보좌관은 국회가 “개인의 지식과 노하우가 조직의 자산으로 치환되지 않는 곳”이라고 지적한다. “국회 보좌진에 대한 교육이 전무하다시피 하고, 있다 해도 교육 받으러 갈 시간이 없는 보좌진 대부분이 ‘맨땅에 헤딩하며’ 노하우를 터득한다”는 것. 그가 새벽에 출근해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계경 의원실 박철호 보좌관은 “의원회관에서 생존한다는 건 어디에 내놓아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의원회관의 환경이 그만큼 열악하고, 경쟁은 치열하기 때문이다. 박 보좌관은 후배들에게 “네가 최선을 다해서 의원을 높이면, 그 의원을 보고 너를 데려간다”고 조언해준다. 그런 영향인지 이계경 의원실에선 최근 2년간 6급으로 들어온 비서가 다른 의원실 5급 비서관으로 ‘스카우트’되는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개별 의원실에서 도제식으로 보좌진을 키워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시 박철호 보좌관의 이야기다.

    “정부가 쓰는 돈이 연간 250조원, 국회 예산은 3500억원인데, 그중 80%가 인건비다. 정책개발비가 턱없이 적다. 250조원 쓰는 기관을 감시해야 할 국회가 예산을 늘리거나 인원을 확충하겠다고 하면 언론에서 비판부터 하고 보는데, 꼭 그럴 것만은 아니다.”

    ‘선출되지 않은 의원’

    여러 보좌관이 자신의 처지를 미국 의원 보좌관과 비교했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로 의회에 행정부 견제의 의무가 주어지는데, 보좌진의 규모와 예산이 엄청나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나라당 보좌진협의회가 주최한 ‘보좌진이 달라져야 한국정치가 달라진다’ 세미나 자료집에 따르면 미 의회 규정엔 하원의원 한 사람이 최대 18명의 보좌관과 4명의 파트타임 보좌관을 둘 수 있도록 돼 있다. 이들을 위한 경비로만 하원의원 한 사람에게 1년에 약 90만달러가 지원된다. 상원의원은 보좌관 수에 제한이 없고 지역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한 사람당 보통 40여 명을 둔다. 그리고 의원실과 별도로 상임위원회 전담 보좌관이 있다.

    규모뿐 아니라 지위에서도 미 의회 보좌관은 우리와 차이가 있다. 한국의 의원 보좌관은 소속 정당의 본회장 점거시 회의장 문 앞을 막아서는 ‘인간 바리게이트’가 될 수는 있어도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반면 미국에선 청문회나 위원회가 열릴 때 의원 자리 뒤에 보좌관 자리가 마련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입법 자료 수집을 위해 보좌관이 외국 방문 길에도 오른다. 지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기간에도 미 입법보좌관 15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의원이 해외 출장을 떠날 때 공항에 우르르 나가 배웅하고, 돌아설 때 ‘좋아서 표정관리가 안 된다’는 우리 보좌진의 현실과 현격한 거리감이 있다.

    미 의회 보좌관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선출되지 않은 의원’이라고까지 불리지만, 우리 사회에서 의원 보좌진은 오래전부터 정치판에서 커보겠다고 의원 쫓아다니는 ‘가방모찌’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 보좌진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되면서 보좌진 경험을 정치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보좌진에서 국회의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현직 의원 중 열린우리당 의원 10여 명, 한나라당 의원 1명이 보좌진 경험을 갖고 있지만,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신청한 한나라당 보좌진 전원이 공천에서 탈락한 사례는 보좌진과 의원 사이의 벽을 실감케 한다.

    2005년 황진배(이재창 의원실), 이경규(박희태 의원실), 김진권(최연희 의원실), 정원동(정의화 의원실) 보좌관 등 한나라당 보좌진 20여 명이 모여 만든 ‘윤중로포럼’은 ‘회원의 정치역량 강화 및 정치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원과 보좌진 사이의 벽을 낮출 수 있을지 지켜볼 만하다. ‘윤중로포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30분에 모임을 열고 국가 현안과 관련한 정보 교류, 연구, 토론을 하는데 최근엔 박근혜·이명박·손학규 등 대권후보 리더십을 분석하기도 했다.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원동 보좌관은 “35~45세의 젊은 보좌관 중심으로 공부하고, 정치적 능력도 향상시키며, 한나라당에 건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룹”이라며 “앞으론 사안에 따라 논평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있는 동안 최선 다하자’

    40대 초반의 비례대표 의원 보좌관 D씨는 “국회에 들어온 날부터 어떻게 하면 국회를 떠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선출직에 관심 없는 D보좌관은 오래 버텨봐야 18대가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보좌관에게 ‘미래’는 가장 답답한 화두다. 어느 당 소속을 따질 것 없이 많은 보좌관이 다음 대선 승리를 통해 ‘청와대’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일해보기를 기대하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고민은 남는다. 17대에 처음 국회에 입문한 서른아홉 살의 E보좌관은 “40대 이후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고 했다.

    “보좌진은 꽤 유능한 집단이다. 연령대도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이 대부분이라 일반 회사로 치면 가장 창의적으로 열심히 일할 나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할 만한 직업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보좌관이 캠프에서 ‘콜’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열린우리당 소속 F보좌관은 “국회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살릴 만한 인프라가 국회밖에 전혀 없으니, 보좌관이 나가서 하는 일이라는 게 고작 보좌관 인맥 활용해 대정부 질의 내용 미리 빼내는 정도”라며 “국회에서 국가 정책 방향을 조망했던 경험을 살려 기업에서 기획력을 발휘하면 좋지만, 보좌관 출신이라고 하면 ‘낙하산 인사’라는 인식이 팽배해 여의치 않다”고 말한다.

    법을 만드는 국회 보좌관이 불합리한 근무여건을 법으로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들은 오늘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자료를 보고, 전화를 걸고, 민원인을 달랜다. 여의도에서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거나, 의원회관을 나서더라도 집으로 향하지 못하고 대학원이나 술집으로 향한다.

    “오늘도 집에 택시 타고 들어가겠죠.”

    밤 10시가 가까워오는 시각, 한나라당 G보좌관은 초저녁부터 기다리고 있는 민원인을 만나러 의원회관을 나섰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