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간 골프장을 드나든 한 기업 CEO가 캐디에게 성희롱(으로 의심될 만한 일)을 했다. 캐디가 이를 골프장에 신고하자 CEO는 캐디를 협박하고 조직을 만들어 골프장 운영회사를 음해했다. 이 사건을 담당할 변호사라면 어떤 논리로 재판부를 설득할지 가상의 준비서면을 만들어봤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골프는 어떤 의미가 있고, 골프장의 ‘정의’란 무엇인가.
이제부터 소개할 스테판 브라우닝이라는 사람은 일찍이 1870년대부터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한 거리에서 전당포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업적 환경에 타고난 꼼꼼함까지 더해진 메모광(狂)이었습니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그의 메모장도 두꺼워졌는데, 그가 사망한 1939년 무렵에는 창고의 한쪽 구석에 최소한 3m 높이로 쌓여 있었다는군요.
오래 전부터 이 메모의 가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던 그의 조카 패트릭 워드는 스테판 브라우닝이 사망한 뒤 일가친척의 승낙을 얻어 창고에 들어가서 거의 반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쌓여 있던 메모와 격투를 벌입니다. 훗날 ‘에든버러타임스’의 편집장을 지낸 패트릭은 브라우닝의 메모야말로 당시 시민생활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이면사’를 남겼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브라우닝의 메모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던 세상의 그늘이 확인됩니다. 상류계급 고귀한 가문의 후손이 겉으로 드러난 훌륭한 행동과는 달리 조상 대대로 물려져 내려오던 가보를 심야에 몰래 저당잡히기도 했고, 여행 도중에 돈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네덜란드의 왕후가 평범한 여자로 가장해 그의 점포에 왔던 사실도 밝혀집니다.
전당포 주인과 엘리트 관료
이처럼 메모광이었던 스테판 브라우닝은 전당포 주인이었을 뿐 아니라 주위로부터 어이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심각한 골프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프를 할 때도 그날그날의 게임 내용은 물론 날씨, 승패의 향방, 동반 경기자의 인물평까지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해 세밀한 관찰력으로 생생하게 기록해두었습니다. 조카인 패트릭은 그 메모들 가운데 의외의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세상에 소개합니다.
골프는 심판이 없는 경기다. 이 때문에 골프에서는 남을 속이는 행위가 가장 심한 경멸을 받곤 한다.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볼의 라이를 건드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거나 스코어를 줄여 신고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어떠한 변명도 용인되지 않는 중죄인 것이다.
브라우닝은 참지 못하고 다그쳤다.
“포터씨! 당신은 지금 볼의 라이를 건드렸어요. 이전에 같이 라운드할 때에도 클럽 끝으로 교묘하게, 적어도 세 번이나 라이를 건드리더군요. 저는 오늘도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무렵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해 대담한 세제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대비해 런던으로부터 수많은 관리가 스코틀랜드에 파견되던 시대였다. 포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한낱 시중의 전당포 주인이 엘리트 관료에게 시비를 건 셈이었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소? 전당포 주인인 주제에 건방지게시리…. 어디 증거라도 있소?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소.”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우선 당신은 지금 ‘전당포 주인인 주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프라는 경기는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차별 따위는 불허하고 있습니다. 클럽하우스에 들어오기 전에 지위와 신분은 밖에 두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와 대등한 골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신분과 지위가 골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무엇보다도 위세 부리는 태도야말로 골프가 자랑하는 ‘평등의 정신’에 크게 반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은 증거를 대라고 하셨군요. 이는 그야말로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행위입니다. 골프에서는 ‘의심받을 만한 행위’조차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지요. 제가 지켜보니 당신은 게임의 정신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곳 스코틀랜드에서는 골프의 오락성만을 탐닉해 파다, 보기다 떠들어대는 사람을 가장 경멸합니다. 골프에서는 어떻게 홀아웃했는지를 말하기 전에 어떻게 플레이했는지 그 세세한 행동이야말로 평판의 대상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네요.”
그러면서 브라우닝은 땅에다 볼을 놓고 포터의 흉내를 내보였다.
“자 보세요! 당신은 이렇게 했습니다. 클럽 끝으로 떠 있는 라이에 볼을 올려놓고 당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비열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자세였습니다. 잘 보십시오. 이래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재판장님,
골프라는 운동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돼 국민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때론 비리의 온상으로 비칠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또한 골퍼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든 이야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래 골프경기는 다른 운동과 달리 심판이 없기 때문에 발생 초기부터 정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골프가 ‘신사의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골프 규칙에 전통적으로 ‘볼은 있는 그대로 플레이돼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2대 원칙이 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골프가 지닌 이렇듯 미묘한 양면성 때문에 골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 역시 이중적인 경향을 띱니다. 골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골프를 혐오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골프를 하는 사람들은 그 본연의 면을 보기보다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골프를 치는 것이 마치 무슨 큰 벼슬이나 되는 양 거만을 떨며 스코어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성희롱 경고받자 명예훼손 고소
본 사건에서 자신을 채권자로, 골프장을 채무자로 하는 회원 제명처분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낸 사람의 태도도 골프에 관한 부정적인 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회사의 사장으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거금을 내고 골프 회원권을 취득한 채권자가, 그것도 이미 환갑을 지나 인생의 황혼녘에 선 사람이, 나이 어린 경기보조원(캐디)들에게 거친 말을 한 것이 이 사건의 요지입니다. 아무리 자기 돈 자기가 마음대로 쓰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전세금이 없어서 엄동설한에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그의 유죄를 인정한 형사판결과 달리 백보를 양보해 그가 자신의 주장대로 경기보조원을 강제추행하지 않았다 해도, 성희롱을 했다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한 채권자의 행동이 사건의 무대가 된 골프장 회원권을 가진 골퍼이기 때문에 용인돼야 하는 것일까요.
참고로 이 사건과 관련해 채권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형사판결은, 피고인의 범죄 사실을 아래와 같은 취지로 판시했습니다.
피고인은, ○○컨트리클럽의 회원인바,
1. ○○컨트리클럽 1번홀 티박스 부근에서 드라이버헤드로 피해자인 경기보조원의 엉덩이 부위를 수회 툭툭 치고, 같은 날 4번홀 부근에서 세컨드샷 지점으로 카트를 타고 이동하던 중 왼손으로 위 피해자의 오른쪽 허벅지를 만지면서 수회 주물러 위 피해자를 강제 추행했고,
2.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만나자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대한 경위서를 작성해 ○○컨트리클럽에 제출한 것에 불만을 품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주식회사 사무실에서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년, 쌍년, 너 이년, 내 앞에 무릎을 꿇려버리겠다. 네까짓 게 뭔데, 너 쪽문으로 다니지? 너 이년 사람 시켜서 데려와 패겠다”라고 말해 피해자를 협박했고,
3. ○○컨트리클럽 4번홀 부근에서 경기보조원에게 “이곳 언니 중에 싸가지가 없는 애도 몇 명 있다. 여기 ○○○이라고 있는데 걔 진짜 싸가지가 없다. 일도 제대로 못하고 볼 봤냐고 물어보면 못 봤다고 대답한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싸가지는 제일로 없다. 어떻게든 ○○○을 이 회사에서 짤리게 만들겠다”라고 말해 공연히 ○○○를 모욕하고,
4. 소재불상의 회사 사무실에서 공소 외 성명불상자로 하여금 그곳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케 한 후 인터넷 문자메시지 발송서버로 “골프장에서 폭리 착취하고 회원 하대하며 인권탄압 일삼는 ○○자본 하수인 퇴출하자”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컨트리클럽 회원 200여 명의 휴대전화로 발송하도록 한 것을 비롯해, 모두 4회에 걸쳐 같은 방법으로 문자메시지를 발송토록 해 공연히 ○○컨트리클럽을 모욕했다.
한편 채권자는, 골프장을 소유·운영하는 채무자가 회원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OO컨트리클럽 운영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고 주장하면서, 형사재판을 받는 동안은 물론 최근까지 채무자 회사를 상대로 각종의 민사소송을 제기하거나 심지어 채무자 회사의 임직원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등의 과정에서, 채무자의 채권자에 대한 탄압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제반 기록에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채권자는 이 사건 골프장 회원권을 취득한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채무자가 소유·운영하는 골프장을 이용해왔지만 회원의 권익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한 시기는 극히 최근이었습니다. 또한 채권자가 캐디들에게 망측한 행동을 한 것이나, 채무자가 채권자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경고한 것은 하나같이 채권자가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음이 각각 인정되고 있습니다.
과거 20여 년 동안 회원 권익 보호와 관련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던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캐디들에 대한 채권자의 성희롱 행위를 경고하는 취지의 통고를 받자마자 갑자기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채권자는 이 조직을 통해 채무자를 비방하고 모욕하거나 자기 변명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채무자가 회원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는 채권자의 주장을 과연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골프에서의 정의
재판장님,
채무자의 소송대리인은, 법의 이념은 정의이고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법률가의 사명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판단해 정의가 도출될 수 있도록 법리를 동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정의란, 적극적으로는 골프의 기본정신을 살리고 골퍼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의 골프를 하게 함으로써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갖게 해 결과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건전한 시민이 되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동시에 소극적으로는, 골프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골프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기의 경기보조원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문제 삼는 골프장 운영회사를 비방하는 등 명예를 훼손하는 골퍼라면 골프장을 운영하는 회사로서는 골프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채권자는 이 사건에서 보전의 필요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채권자는 30여 년간 회사를 경영해온 CEO로서 거래처 접대가 필수적이고, 특히 개인의 건강 사정상 술을 마시지 않아 골프 접대 외에 다른 적절한 거래처 접대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골프클럽의 본질적 속성이 사람들과 만나 상호친목을 도모하는 사교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골프장 운영주체는 클럽회원이 클럽에서 마케팅 활동을 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되고, 이를 방해하는 것은 영업방해와 업무방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한 구절만 보더라도, 골퍼인 채권자가 골프라는 운동에 대해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명백히 드러난다 할 것입니다. 즉 채권자에게 골프는 오로지 거래처 접대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아 골프 본연의 기본정신에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러한 채권자의 골프행위는 이 사건 회칙에 정해져 있는 OO컨트리클럽의 목적과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골퍼를 위한 다섯 원칙
재판장님,
이 사건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번 골프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하오니 해량해주시기 바랍니다.
골퍼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스코어만을 중시하는 골퍼와 스코어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골퍼입니다. 솔직히 말해 비(非)지성파와 지성파, 저질과 고상함, 골프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 함께 플레이하는 것을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사람과 흔쾌히 응할 수 있는 사람, 18홀 내내 멍청하게 휘두르기만 하는 사람과 골프를 현자(賢者)의 산책으로 삼는 사람, 돈을 긁어모으는 악취미를 가진 사람과 정신의 귀족 등등 여러 가지 말로 양자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흔히 졸렬한 사람은 골프를 할 때도 졸렬하다고 합니다. 차창 밖으로 빈 깡통이나 귤 껍질을 내던지던 사람이, 도로에 침을 뱉거나 지하철 안에서 다리를 쫘악 벌리고 앉는 비상식적이던 사람이, 골프장에서만큼은 상식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설적인 골퍼 해리 바든은 한 명의 진정한 골퍼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비록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 절대로 침묵해야 한다. 모든 골퍼가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한다. 헤드업이다, 스윙이 빠르다, 스탠스가 틀렸다 등등의 충고가 이어진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나 ‘어드바이스 금지’라는 골프 규칙에 위반될뿐더러 근거도 모호하다. 골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기다. 경의를 표하는 말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골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실례다.
둘째,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부드러워야 한다. 또한 자신이 즐기려면 다른 사람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골프 규칙은 두 가지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하나는 볼은 있는 그대로 플레이한다, 둘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틀림없이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자기를 선전할 여가가 있거든 한 개의 볼이라도 더 연습하라.
보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밝히는 채권자의 골프에 대한 태도가, 해리 바든이 말하는 골퍼의 조건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불을 보듯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사건에서 정의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안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채무자는 채권자의 이 사건 신청이 기각돼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