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전기공학자 문승일 - 사진

“다른 사람 표정을 담으며 내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 글·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 사진·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입력2007-05-02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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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교 읍내의 사진관집 셋째아들로 태어났지만 사진을 본격적인 취미로 삼은 건 불과 4~5년 전부터다. 서울시청과 광화문 등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으로 걸어 나가면 싱그러운 피사체들을 만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의 기쁨에 빠져있는 그들을 촬영하면서 그 또한 행복에 젖어든다.
    전기공학자 문승일 - 사진
    서울대 전기공학과 문승일(文丞佚·46) 교수의 연구실은 어딜 봐도 공학자의 방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책장엔 한국현대사, 세계사, 일본사, 교회사 등을 다룬 각종 역사서부터 ‘로마인이야기’ ‘겐지이야기’ ‘태백산맥’ ‘유림’ 같은 소설, 도올 김용옥 교수의 ‘요한복음 강해’, ‘진보와 야만’ 같은 최신 화제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인문서적이 꽂혀 있다.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서점에 나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구입하고, 2년에 한 번꼴로 책장을 깨끗이 비우고 다시 채운다고 하니 책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전기공학자 문승일 - 사진

    다락방 암실에서 현상 작업 중인 문 교수. 문 교수가 수줍게 꺼내놓은 ‘작품’의 색감과 느낌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든다.



    전기공학자 문승일 - 사진

    어릴 적부터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문 교수는 몇 해 전까지 서울대 아마추어 천문회(AAA) 지도교수였다. 문 교수 개인이 소장한 쌍안경으로도 종종 별을 관측한다.

    문 교수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어떻게 해서 쇳덩이가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지 신기했고, 빨갛게 불이 켜진 진공관 라디오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면 그 속에 난장이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라디오를 조립하고, 중·고등학교 때 모형 비행기며 모형 자동차, 모형 보트를 만들며 엔지니어의 꿈을 키웠다. 여름밤 옥상에 누워 바라본, 검은 하늘을 수놓은 별과 우윳빛 은하수는 그의 머릿속에 우주가 얼마나 넓으며,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수없이 많은 의문을 남겼다.

    “공학을 전공한 것은 우주의 원리를 알고 싶어서였어요. 그런데 전공만으로는 그 해답을 알 수 없더라고요. 결국 ‘내가 왜 이걸 하는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책을 읽는데, 옛날엔 여기서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요즘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동지’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책을 보죠.”

    연구실 한쪽 구석에 무전기가 있다. 문 교수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 머물던 시절, 아마추어 무선사(HAM) 자격증을 따고 LA 교민은 물론 한국과도 교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가슴 설레는 추억만 남았을 뿐, 귀국한 뒤에는 어디와도 교신할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전기공학자 문승일 - 사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문 교수가 짬을 내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졌다지만, 그는 우리가 놓치고 사는 소중한 순간들을 포착해 카메라에 담는다.

    문 교수는 대신 “음악과 사진에 푹 빠져 있다”고 말한다. 1993년 전북대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클래식 음악에 매료된 그는 스피커와 축음기, LP판 수집에 공을 들였고, 진공관과 앰프는 직접 제작해본 적도 있다.

    “클래식 중에서도 바이올린과 첼로 등 현악을 자주 들어요. 베토벤 사중주를 특히 좋아하는데, 클래식 음악은 책이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힘을 갖고 있더라고요.”

    전남 벌교 읍내의 사진관집 아들이던 문 교수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선 것은 4~5년 전 아내의 권유 때문이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아내는 사진을 취미로 삼으면 정서적으로 안정될뿐더러 외국 출장길에 만난 이국의 풍광을 오래 간직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아버지가 암실 작업을 하실 때 하얀 인화지 위에 마술처럼 불쑥 솟아오르던 사람의 얼굴에 까무러치게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후 출장길엔 카메라를 꼭 챙기고, 주말이면 옛 도시의 면모를 간직한 광화문 거리 같은 구도심으로 향한다. 그 사이 카메라도 여러 개 장만했다. 라이카, 캐논 EOS5, 롤라이 플렉스(2안 리플렉스) 등 10여 개에 이르는 카메라와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이라 덤으로 얻은 다락방에 마련한 간이 암실이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짐작케 한다.

    문 교수는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였다. 천연색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캐나다의 풍광, 빗방울 떨어지는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비친 젖은 거리,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해맑게 웃으며 휴대전화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는 젊은 여인들, 무엇인가에 시선을 빼앗긴 세 노인….

    전기공학자 문승일 - 사진

    10여 년 전부터 클래식 음악에 푹 빠진 문 교수가 중학생 딸과 함께 애지중지하는 LP판을 살펴보고 있다. 학창시절 엔지니어의 꿈을 키워준 모형 자동차는 요즘도 가끔씩 그에게 활력을 준다.

    “처음엔 컬러 슬라이드 필름으로 풍경이나 정물 사진을 찍었는데, 요즘은 사람을 찍는 게 흥미롭고, 컬러보다는 흑백사진이 깊은 맛을 내는 것 같아 좋아요.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의 표정을 영원히 담으면서 그 사람의 생각을 짐작하고, 그러면서 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죠.”

    문 교수는 ‘자연스럽게 드러난 마음의 표현’을 촬영하고자 대개 200mm 망원렌즈를 이용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마음의 표현이 더는 자연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문 교수는 “앤셀 애덤스와 같은 기술적 완벽성을 갖추고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 찍고 싶다”며 그거야말로 “입신의 경지”라고 말한다. 문 교수가 대학에서 은퇴할 때쯤 사진집을 한 권 완성하면, 그 자신뿐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사이 사진의 주인공이 된 뭇사람에게 큰 선물이 될 듯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좋고 즐거운 일이 하나쯤 있다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겠어요. 제가 관심을 가졌던 여러 취미는 제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고달프고 힘든 생활의 탈출구가 돼주었는가 하면 제 인생의 꿈을 펼쳐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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