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장이나 납골당, 장례식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를 쓰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것의 기능과 중요성만은 결코 부정하지 못한다. 개연적 판단에 의한 위험·혐오 시설은 원천적으로 차단하되 수혜는 공유하겠다는 심산이다. 극단적인 이기심의 발로다.
인간 사회는 성품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 공존 공생한다. 살인, 방화, 납치, 약탈, 상해, 치상 등 온갖 범죄가 그치질 않는 복잡다난한 인간사. 심지어 혈연간의 갈등과 암투로 서로 치고받는 반인륜의 짓거리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어찌 보면 위험을 내포한 인간들이 핵 시설이나 쓰레기 하치장보다 더한 폐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미지의 불확실한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공존의 길을 가야 한다.
화장실은 필수적 혐오시설이다. 그래서 ‘측간’은 옛날부터 내실과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다. 하지만 요사이엔 안방과 지근한 거리에 두고 애용하고 있지 않은가. 안방과 붙은 화장실의 편의성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부부만의 요새, 침상에서 눈에 보이는 곳에 그 역겨운 화장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정화장치라는 기술력의 발달과 개념의 변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신체 또한 마찬가지다. 신체의 여러 기관 가운데 대표적인 ‘혐오시설’이 외음부다. 분뇨의 배설구가 한데 모여 있어 때론 악취가 진동한다.
게다가 결코 예쁘지 않은 생김새의 흉물이 웅크리고 있다. 무성한 수풀은 더욱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기간시설이 아닌가. 종(種)의 맥을 유지하는 위대한 생산시설이요, 찬란한 에너지로 역동적 삶을 꾸리게 하는 고부가가치 시설이다.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나 생리적 기능만큼 이상적인 지방자치제는 없다. 수없이 많은 다양한 기관이 서로 공조하며 말없이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인체. 도무지 다툼이나 갈등도 없다. 이타(利他)를 통해 이기(利己)를 도모하는 이상적 공생의 전형을 본다. 항상성(恒常性·homeostasis)과 되먹이기 기전(feed-back mechanism)과 같은 신통한 자율적 공조체제를 통해 생의 이치를 긍정적으로 유도하는 효율성은 신비 그 자체다.
입처럼 맛을 즐기는 호강시설도 있고 지저분한 배설물을 내보내는 혐오시설도 있다. 그러나 어느 기관 하나 건강에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그중에서도 성기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생산시설은 없다. 마찰만으로 무형의 쾌감을 산출하는 위대함, 게다가 새로운 생명을 빚어내는 경이로움. 이렇듯 소중한 인체 부품인데도 반드시 은폐해야 하는 운명은 어디서 기인된 걸까. 못생긴 외모와 원천적 수치심 때문일 게다.
남녀 성기의 입지만큼은 정말 절묘하다. 얼굴의 이목구비 언저리나 사지 끝에 위치한 성기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안면의 ‘자연환경’ 훼손은 말할 것도 없고 코끝의 냄새는 또 어찌할 것인가. 손만 마주 잡거나 발가락만 마주 댄 채 이루어지는 섹스는 정말이지 썰렁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여인들의 내밀한 현시 욕구 때문에 성기 치장 기술자가 등장하고 음모(陰毛)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업종이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면 브래지어처럼 성기 가리개가 시시각각 유행을 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거대한 몸체와 양다리 사이의 가파른 협곡에 기막힌 레저시설을 설치했다. 풀숲 무성한 산을 등지고 따스한 오줌 흘러내리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풍수지리상 기막힌 땅이다. 비록 분뇨 하치장이 인접한 탓에 주거지로선 적합하지 않지만 쾌감과 종(種)을 창출하는 생산시설로는 최적의 입지다.
첫째, 그곳은 몸을 밀착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위치이며 둘째, 접근해 진입할 수 있는 루트가 실로 다양하다는 점, 그리고 셋째, 대면위(對面位)를 취한 채 온몸을 흔들어댈 수 있는 유일한 천혜의 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기의 입지조건 덕에 좌충우돌, 우왕좌왕하는 방중술(房中術)의 온갖 동작으로 혼비백산, 허겁지겁의 휘황한 알맹이를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까고, 좁히고, 키우고, 집어넣는 남녀 성기의 시설 및 성능 개선공사보다는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성기 및 관련 시설을 탐구적으로 접근해 성구(性具)를 잘 다루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