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영하 20도! 잔인무쌍한 살인자는 뭘 먹고 어디 숨었는고?”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05-03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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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밤중에 남의 집에 뛰어들어 강도 살인을 저지른 무도한 범죄자가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나왔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교도관과 경찰, 헌병에 보병까지 연인원 1만여 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의 추적에도 흔적 하나 나오지 않자 당국은 곤경에 빠진다. 장검을 들고 탈주한 사형수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공포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가고, 언론의 질타는 극으로 치닫는데….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1933년 1월 심종성이 탈주한 직후 경찰들에게 배포된 그의 수배사진(작은 사진)과‘ ‘별건곤’ 1933년 4월호에 실린 ‘죄와 벌과 인생 : 탈옥수 심종성과 공범 김봉주의 범죄 이면 비화’ 기사.

    1931년 10월26일 새벽 3시, 평양 선교리에서 정육점을 겸한 잡화상을 경영하는 임극환은 상점에 딸린 집에서 애첩 안태준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변두리 이면도로의 맨 끝 집이라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인적 또한 드물었다.

    “쨍쨍!”

    늦가을 한기가 을씨년스러운 쥐 죽은 듯 고요한 거리에 짧고 차가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극환은 새벽하늘을 가르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잡화점 뒷문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처 전등불을 켜기도 전에 누군가가 침실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주위가 어두워 괴한의 정체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두 개는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매끈하게 빠진 일본도 한 자루와 짧고 굵은 식도 한 자루였다. 임극환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잠결에 살기를 느꼈는지 뒤늦게 안태준이 눈을 떴다.

    “으악!”

    안태준이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지르자 식도를 든 괴한이 달려들어 안태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괴한이 제지해도 안태준은 악을 쓰고 몸을 비틀며 거세게 저항했다. 애첩이 봉변을 당하자 이부자리에 앉아 떨고 있던 임극환이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일본도를 든 괴한이 임극환을 때려눕혔다. 괴한들은 두 사람을 돌아눕히고는 등에 올라타 철사로 양손을 동여맸다. 반항하면 뒤통수든 등이든 마구 후려쳤다. 부부는 양손을 완전히 결박당한 후에야 비로소 저항을 멈췄다.



    부부를 제압한 두 괴한은 손전등을 켜고 집안을 뒤졌다. 현금은 임극환의 지갑에 든 3원20전밖에 없었다. 장사하는 집에 현금이 그것밖에 없을 리 없었지만 아무리 때리고 협박해도 임극환은 끝내 현금을 숨겨둔 장소를 일러주지 않았다. 두 괴한이 임극환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안태준은 식도를 든 괴한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주위가 어두워 흐릿하게 윤곽만 보였지만, 분명 익은 얼굴이었다. 윽박지르는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니 분명히 ‘그’였다. 식도를 든 괴한의 정체가 ‘그’인 것을 알아차리자, 양손을 결박당한 후 줄곧 침묵을 지키던 안태준은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네가 이런 일을 또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풀려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안태준이 소리치자 두 괴한의 눈빛에는 돌연 살기가 돌았다. 식칼을 든 괴한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안태준에게 다가가서 철사로 목을 감고 힘껏 잡아당겼다.

    “오냐.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로구나.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

    식칼 든 괴한이 안태준의 목을 조르는 동안 일본도를 든 괴한이 같은 방법으로 임극환의 목을 졸랐다. 철사로 목을 졸린 부부가 몸을 뒤척이며 살려고 발버둥치자, 두 괴한은 손으로는 철사를 힘껏 당기면서 발로는 부부의 가슴과 배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침실은 순식간에 부부의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시뻘건 선혈로 흥건히 젖었다. 부부는 한참이 지나서야 숨이 멎었다.

    3원20전을 위한 살인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1931년 10월 살인 혐의로 체포된 직후의 심종성과 김봉주.

    임극환 부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두 괴한은 집과 상점을 샅샅이 뒤져 쇠고기, 옷가지, 담배 등 돈 나갈 만한 물건은 죄다 끌어 모았다. 140점이나 되는 물건을 훔쳐 커다란 보따리 두 개에 가득 채웠건만 부피만 컸지 실속이 없었다. 강탈한 물건을 다 합쳐봐야 100원에도 못 미쳤다. 평범한 월급쟁이 두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100원은 두 사람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큰돈이 아니었다. 괴한들은 부엌에 내려가 찬장에 놓여 있던 떡을 배불리 먹은 후에야 보따리를 한 짐씩 짊어지고 유유히 범행 현장을 빠져나왔다.

    두 괴한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긋하게 평양 중심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동교를 건너 파출소 앞을 지날 때, 마침 순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순사는 험상궂게 생긴 두 사내가 꼭두새벽에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 가는 것을 미심쩍게 여겼다.

    “등에 진 것은 웬 짐이냐?”

    “아, 이거요. 이삿짐이에요.”

    순사는 꼭두새벽에 남자 둘이서 이사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보따리를 풀어볼 것을 요청하자 아니나 다를까 두 괴한은 보따리를 집어던지고 줄행랑을 놓았다. 순사는 곧장 추적해 식칼을 들고 침입했던 괴한을 붙잡았다. 일본도를 들고 침입한 괴한은 동료가 체포된 틈을 타 가까스로 탈출했다. 파출소로 연행해 문초하니 괴한은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붙잡힌 괴한은 강도전과 3범인 심종성이라는 자다. 그의 자백에 의해 당일 오전 공범인 평양부내 대찰리에 사는 살인 전과자 김봉주마저 체포했다. 그와 동시에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서는 즉시 검사가 출동하여 현장 검증을 했다. 사체는 당일 오후 자혜의원으로 보내 부검에 들어갔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27일자)


    김봉주는 공범인 심종성이 검거되는 광경을 목도하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천연덕스럽게 자고 있다가 정보 수집차 출동한 경관에게 체포됐다. 경관은 김봉주의 대담무쌍한 행동에 범인을 거저 잡고도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검사가 현장검증에 나섰을 때, 혈흔이 낭자한 범행 현장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안태준의 어머니가 외동딸의 죽음을 원통해하며 대성통곡해 피와 곡성이 낭자한 살풍경을 이루었다.

    범인이 자백한 범행은 이번 살인강도 외에 강도 네 건, 강도 미수 다섯 건, 절도 다섯 건이 있다. 김봉주는 살인폭행강간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은전(恩典)을 입어 12년으로 감형돼 작년 6월에 가출옥한 자요, 심종성은 강도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역시 경성형무소에 복역하다가 금년 1월 가출옥한 자다.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출옥한 후에는 강도단을 조직하여 돈벌이를 하자는 약속을 맺었다가 심종성이 가출옥한 후 이행한 것이다.

    금년 6월 김봉주와 심종성은 용강군 진지동 금융조합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가 모의 도중 발각돼 경찰의 문초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둘은 한 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형무소 동무 두 명에게 10월27일 밤 한천금융조합을 습격하자는 편지를 발송하는 한편 남산정에 사는 간수 이와모토(岩本)의 집에 대낮에 침입해 습격에 사용할 일본도를 절취했다. 그러나 하루 전날 임극환 부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한천금융조합 습격 계획은 미수로 돌아갔다. (‘조선일보’ 1931년 10월28일자)


    일주일 후 심종성과 김봉주는 강도살인절도죄로 예심에 회부됐고, 예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공판에 회부됐다. 이듬해 12월 평양지방법원은 가출옥 기간에 무고한 부부를 잔혹하게 살해한 심종성과 김봉주에게 나란히 사형을 선고했다. 두 피고인은 범행사실은 인정하지만 사형은 지나치다고 즉각 항소했다.

    사형수 탈주

    심종성과 김봉주의 항소심 공판은 1933년 1월16일 오전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렸다. 심종성은 집에서 차입해준 흰 저고리, 검정 바지 차림에 짚신을 신고 법정에 나타났다.

    개정 직후 심종성은 재판장에게 관선 변호사를 믿을 수 없어 다른 변호사를 선임하겠으니 공판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뚱딴지 같은 요구였다. 심종성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변호사가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질이 나빴기 때문이다. 강도전과 3범이 가출옥 기간에 겨우 현금 3원20전, 물품 100원어치를 강탈하려고 선량한 양민 두 사람을 극악무도하게 살해했는데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재판장은 꺼림칙했지만 피고인의 목숨이 달린 공판인지라 심종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판을 21일로 연기하고 폐정을 선언했다.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임극환 부부를 살해하고 도주하던 심종성과 김봉주가 경찰의 검문을 받고 체포된 평양 대동교의 당시 풍경.

    오후 12시30분, 공판이 싱겁게 끝나자 평양형무소에서 피고인을 호송해온 무라카미(村上) 간수부장은 조선인 간수 한 명과 함께 심종성과 김봉주를 재판소 구내 유치장으로 데리고 갔다. 규정에 따라 두 피고인은 형무소에서 호송차량이 올 때까지 포승과 수갑에 묶인 채로 각기 딴 방에 유치됐다. 두 피고인을 유치한 후 조선인 간수는 다른 피고인을 데리러 재판소로 돌아가고, 무라카미 간수부장 혼자 남아 유치장을 지켰다.

    얼마 후 무라카미 간수부장은 용변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쪼그리고 앉을 때 거치적거리는 장검은 허리춤에서 풀어 책상과 벽면이 마주친 곳에 세워두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간수생활 22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미결수 호송차량을 기다렸다.

    오후 2시30분, 호송차량이 도착했다. 무라카미 간수부장은 열쇠 뭉치를 꺼내들고 형무소로 돌려보낼 피고인들이 감금된 유치장 철문을 차례로 열었다. 심종성이 감금된 유치장 문에 열쇠를 꽂자 열쇠가 헛돌았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자물쇠가 풀려 있었다. 무라카미 간수부장은 무언가 대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설마 하는 희망을 품고 묵직한 철문을 열어젖히자 마지막 기대는 무참히 사라졌다. 유치장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사형수 심종성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무라카미 간수부장은 죄수가 탈주한 즉시 발견하지 못하고 오후 2시 반경 죄수를 감옥으로 돌려보내려고 유치장을 열어보았을 때 비로소 죄수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도 설마 탈주야 하지 않았겠지 하는 기대로 혹시 다른 간수가 형무소로 돌려보낸 것은 아닌지 조사했더니 죄수는 형무소에도 없었다. 재판소로 파견된 7명의 간수는 그때서야 비로소 탈주한 죄수를 허둥대며 찾아 나섰다. (‘동아일보’ 1933년 1월17일자)


    심종성을 찾느라 재판소 유치장이 벌집 쑤셔놓은 듯 소란스러워졌을 때 무라카미 간수부장은 ‘아차’ 하며 허리춤을 더듬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어야 할 장검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앉아 있던 책상 주위를 뒤져보았지만 장검은 그곳에도 없었다. 무라카미 간수부장이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형수 심종성은 유치장을 빠져나와 간수의 장검을 훔쳐 탈주한 것이었다.

    무라카미 간수부장이 대경실색하여 형무소에 급보하자 형무소 당국은 즉시 간수 전부를 비상소집하여 수색에 나서는 한편 심종성의 탈주 사실을 평양경찰서와 대동경찰서에 통보했다. 오후 네 시 두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경찰은 평양부내 전역에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치고 검거에 주력했다. 늦은 밤까지 경관과 간수 떼거리가 동서남북으로 몰려다녀 평양부내는 때 아닌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일보’ 1933년 1월18일자)


    간수와 순사가 경계망 구축을 끝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탈주한 시간이 정확지 않아 탈주범이 경계망 안쪽에 있을지 이미 빠져나갔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두 팔이 포승에 묶이고 양손에 수갑을 찬 심종성이 어떻게 바깥쪽에서 자물쇠로 굳게 잠근 형무소 문을 열었는지, 어떻게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재판소를 빠져나갔는지, 어디로 도주했는지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사형수가 탈주한 것도 문제였지만, 부민의 안전이 더 문제였다. 1월 평안도 기온은 영하 20℃를 오르내렸다. 가벼운 홑옷 차림으로 땡전 한 푼 없이 매서운 평안도 혹한을 뚫고 도주하자면 민가에 침입해 약탈과 절도를 일삼을 게 분명했다. 더욱이 포승에 묶이고 수갑을 찼다곤 하나 심종성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장검이 들려 있었다. 현금 3원20전을 강탈하려고 무고한 부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전력에 비춰보면 장검을 든 심종성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탈주범에 대한 형무소의 수사권은 수감자가 탈주한 지 48시간만 인정됐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면 형무소 당국은 어떻게든 48시간 안에 탈주범을 검거해야만 했다. 평양형무소 데라카와(寺川) 소장은 심종성이 탈주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하더라도 기필코 형무소가 주축이 돼 탈주범을 체포해야 한다며 간수들을 독려했다. 소장의 지시에 따라 형무소에는 최소 인원만 남고, 나머지 200여 간수는 48시간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탈주범을 추적했다.

    춤추는 대수사선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심종성 탈주 사건의 발원지인 평양복심법원.

    심종성의 탈주 사실이 밝혀진 지 10시간이 지난 1월17일 오전 12시30분, 평양형무소 간수 200여 명, 평양경찰서와 대동경찰서 순사 300여 명, 보병 77연대 소속 헌병대 20여 명 등 도합 500여 명의 군경 합동수사대는 탈주범의 종적을 찾아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해 초조해하던 그때, 평양역전파출소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20대 후반의 사내가 나타났다.

    “서성리 철도 건널목을 건너다가 큰칼을 가진 강도를 만나 현금 3원을 강탈당하고 그 자가 휘두른 칼에 맞아 부상했소이다.”

    부상한 사내는 험상궂게 생긴 강도가 장검을 휘두르며 돈을 강탈한 후 창광산 쪽으로 달아났다고 제보했다. 심종성이 탈주한 후 처음 들어온 소식이었다. 피해자가 나타나자 수사는 아연 활기를 띠었다. 수사본부는 서성리로 수사대를 파견하는 한편 창광산을 관할하는 보병 77연대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서성리로 출동한 수사대는 철길 옆에서 탈주범이 신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짚신 한 짝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새벽 5시, 형무소 간수와 경찰 500여 명, 보병 77연대 소속 군인 400여 명 등 도합 900여 명의 무장 군경이 창광산 주위를 에워쌌다. ‘제1차 탈주범 심종성 체포작전’은 77연대 나카지마(中島) 연대장이 직접 나와 지휘했다. 900여 군경이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샅샅이 훑어 올라갔으나 탈주범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 창광산 정상에서 900여 명의 군경이 모여 대책을 숙의하고 있을 때 평양역전파출소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탈주범의 칼에 맞았다는 사내는 대동군 용산면에 거주하는 스물여덟 살 석문옥으로 그날 밤 평양역전 ‘사랑시장’에서 만취하도록 술을 먹고 지나가는 행인과 싸웠는데,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것을 정신이상과 일종 호기심으로 헛고발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선일보’ 1933년 1월18일자)


    같은 시간 재판소 구내 유치장에서 또 한 짝의 짚신이 발견됐다. 어느 쪽이 탈주범이 신었던 짚신인지, 과연 탈주범이 신었던 짚신이 맞기나 한지 단언하기 어려웠다. 900여 명의 군경합동 수사대는 취객의 거짓 제보로 영하 20℃ 혹한의 창광산 정상에서 허탈하게 아침을 맞았다.

    1월17일, 탈주 이틀째. 아침 일찍 수사대를 태운 평양경찰서 트럭 한 대가 심종성의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군을 향해 출동했다. 수사대는 일가친지 집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구석이 발견되면 닥치는 대로 검거해 경찰서에 가두고 문초했다. 호구조사로 특별한 단서를 찾지 못한 수사대는 고향 마을에서 무기한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평양경찰서와 대동경찰서는 일반 사무를 중단한 채 심종성의 사진 1000여 장을 인쇄해 전 대원에게 나눠주고 탈주범 수색에 총력을 기울였다. 심종성이 평양부내에 잠복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창광산 부근 서성리, 암정, 평천리 방면을 수색했다. 500여 명의 무장 군경이 수색 지역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샅샅이 뒤졌으나 조그만 단서 하나 찾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

    1월18일, 탈주 사흘째. 수사권이 소멸되는 오후 3시까지 탈주범을 검거하기 위해 200여 평양형무소 간수는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가며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500명의 무장 군경은 모란봉을 에워싸고 수색 작전을 전개했지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수사 활동은 18일에도 의연하게 계속되어 범인의 친척 관계자 20여 호의 가택 수색을 하는 동시에 평양부내외의 빈집이란 빈집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수색했다. 이와 동시에 평양에서 범인의 고향인 평원까지 약 60리 되는 가두에 경찰관을 배치하여 수색했지만 범인의 종적은 묘연했다. 오후 3시 탈주범 수사에 나섰던 200여 간수들은 수사권이 상실되어 수사에서 손을 떼고 평양형무소로 돌아갔다. (‘동아일보’ 1933년 1월19일자)


    탈주한 지 50여 시간이나 지나도록 심종성이 밥 한 술 못 먹고 영하 20℃의 추위에 노숙하고 있을 리 없었다. 필시 어디선가 누군가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간수들이 형무소로 돌아가자, 수사본부는 탈주범이 미결감에 있을 때 한 방에 있다가 석방된 38명의 행적을 추적하고 심종성의 친척 다수가 모여 사는 중화군 상원읍으로 수사대를 트럭 두 대에 나눠 태워 보내는 등 수사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형무소의 수사권이 소멸된 직후, 서성리에 사는 양씨와 김씨가 수사본부에 찾아왔다. 심종성이 탈주하던 16일 오후 창광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회색 바지에 흰 저고리를 입고 빡빡 깎은 머리에 모자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산을 넘어가는 험상궂게 생긴 사내를 보았다는 제보였다. 양씨와 김씨가 보았다는 사내가 탈주범 심종성이었다면, 심종성은 아직 평양부내 모처에서 은둔하고 있을 개연성이 컸다. 수사본부는 심종성이 평양부내에 숨어 있는지 북으로 도주했는지 남으로 도주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사흘째 밤도 꼬박 지새웠다.

    침묵의 행진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주범 심종성을 찾기 위해 보병 400여 명, 헌병 20여 명이 동원됐던 평양 보병 제77연대 사령부.

    1월19일, 탈주 나흘째. 300여 명의 군경 합동수사대가 평양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탈주범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평원군, 대동군, 중화군, 상원군 등지로 출동했던 수사대는 맥없이 돌아와 “아무것도 없다”는 간단한 보고만 되풀이했다.

    언제까지고 일반 사무를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틀간 전면 중단했던 일반 사무를 재개했다. 탈주범 수사는 사법고등계 형사와 비번인 경관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나흘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탈주범은 이미 도의 경계를 넘었을 수도 있었다. 평안남도 경찰부는 인접한 평안북도와 황해도, 심지어 경성에까지 탈주범 수배를 요청했다.

    칼을 들고 달아난 사형수, 살인강도범 심종성은 어디로 갔나! 바람처럼 사라진 그가 필경 어디서 강도질을 하거나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먹을 것을 강탈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칼 가진 흉한은 이미 84시간이나 어디론가 침묵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날개가 없으매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요, 남다른 재간이 없으매 땅속에 꺼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경관, 간수, 헌병, 군대가 총동원된 1000명이 넘는 수사반이 평양부내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수색하고, 그의 주소지인 평양에서 고향인 평원까지 폭으로 60리 길이로 100리에 달하는 넓은 수사망을 펼쳤으나 쥐는커녕 이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그물에 그는 걸리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어찌나 영리한지 평범한 탈주범처럼 친족을 찾는 일도 없었다. 평양부내외에 거주하는 그의 친족은 20여 호. 도주 사실이 알려진 즉시 무장 경관들이 20여 호 친척집을 철야로 지키며 그가 오기만 기다렸으나, 그는 이 그물 속으로도 기어들지 않았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살인강도범에다 성품이 잔인무쌍하고 얼굴조차 험상궂게 생긴 심종성은 지금까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신고 어디에 숨었는고.

    그가 들고 뛴 칼로 언제 누구의 목숨을 해칠지 모르니 그야말로 날개 가진 맹호를 벌판이 아니라 길거리에 내놓은 셈이어서, 부민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고 농후해 가는 부외 탈출설은 인근 농촌까지 불안에 떨게 할 형편이다. (‘동아일보’ 1933년 1월20일자)


    1월20일, 탈주 닷새째.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심종성이 여태껏 포승에 묶이고 수갑을 차고 있을 리 없을 텐데, 심종성은 물론 포승과 수갑조차 종적이 묘연했다. 심종성이 손톱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닷새째 침묵의 행진을 계속하자 다양한 추측이 제기됐다.

    첫째, 은닉설. 어떤 자가 심종성을 비밀리에 은닉해두고 수사가 멈추기를 기다려 멀리 도망시키려 한다. 둘째, 동사설. 심종성이 탈주해 산으로 들로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어느 곳에서 동사했다. 셋째, 자살설. 체포되면 사형은 떼어놓은 당상이므로 심종성은 처지를 비관해 이미 자살했다….

    탈주범이 100시간이 넘도록 꼬리가 잡히지 않은 것은 범죄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 초유의 탈주 성공자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수사 전망을 묻는 질문에 평양경찰서 후루카와 서장은 이렇게 답했다.

    “아직 아무런 단서도 못 얻었소. 18일 밤부터는 지구전을 시작했소. 수사를 시작한 지 70~80시간이 지났어도 단서가 없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지만 잡을 자신은 있소. 다만 시일이 짧을지 길지가 문제요. 가능한 한 속히 체포해 부민 여러분의 불안을 떨쳐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지켜봐 주시오.” (‘조선일보’ 1933년 1월21일자)


    1월21일, 탈주 엿새째. 심종성이 탈주한 지 벌써 120여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사본부는 창광산과 모란봉 포위 수사, 부내외 빈집 수사, 하수도 수사, 일가친지 연행수사 등 생각할 수 있는 수사기법은 죄다 시도했지만, 탈주범을 체포하기는커녕 조그만 단서 하나 찾지 못했다. 이날도 평양경찰서 무장 수사반은 보통강변에 산재한 빈민부락을 수색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대동경찰서 역시 무장 수사대를 트럭에 가득 태우고 심종성의 고향인 평원군에 파견해, 심씨 집성촌 60여 호와 인근 촌락은 물론 산간에 있는 독립가옥까지 일일이 수사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발로 뛰는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첩보활동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안남도 경찰부는 심종성이 개성에 잠입해 형무소 동료 김모의 방에 숨어 지내는 듯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개성경찰서에 엄밀히 수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평안남도 경찰부의 요청을 받은 개성경찰서 나가타(永田) 서장은 사법계 형사를 불러놓고 심종성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비밀리에 수사방침을 협의했다. 나가타 서장의 지시를 받은 형사대는 곧 개성부내 각 방면으로 활동을 개시해 심종성의 침입 여부를 엄밀히 수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3년 1월23일자)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500여 명의 무장 군경이 에워싸고 탈주범 수색작전을 벌였던 모란봉 일대.

    1월22일, 탈주 이레째. 평안남도 경찰부는 심종성이 고향인 평원군 덕산면 방면으로 도주했다는 또 다른 첩보를 입수했다. 평안남도 경찰부 조(趙) 보안과장은 무장 경관 100여 명을 인솔하고 덕산면으로 달려가 삼정리에 수사본부를 설치한 후 목격자를 탐문했다. 때마침 구봉산에서 토끼잡이를 하던 소년 6명이 수배 사진의 심종성과 똑같이 생긴 어른을 산속에서 보았다고 제보했다. 수사대는 구봉산을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제2차 탈주범 심종성 체포작전’에 돌입했다. 구봉산 주위에 경계망을 완성했을 때 날이 저물어 본격적인 수색작전은 다음날로 연기했다.

    158시간 만의 검거

    1월23일, 탈주 여드레째. 아침부터 구봉산 주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평안남도 경찰부 조 보안과장 이하 100여 명의 경관은 지난밤 영하 20℃의 혹한을 견디며 산기슭에서 노숙했다. 날이 밝자 무장 수사대는 본격적인 수색에 나섰다.

    오후 1시, 여드레 동안 교묘히 자취를 감췄던 탈주범이 드디어 꼬리를 잡혔다. 수사대는 산 밑에 숨어 있던 ‘괴한’을 발견하고 즉시 체포했다. ‘괴한’은 부들부들 떨 뿐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어디다 내다버렸는지 탈주할 때 들고 나간 장검은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수사대는 수갑을 채우는 것으로는 안심이 안 돼 온몸을 밧줄로 동여맸다. 100여 명 무장 경관은 구봉산 아래에서 만세를 부르며 천신만고 끝에 탈주범을 체포한 감격을 나눴다. 오후 6시 ‘괴한’을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평원경찰서로 돌아오니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평원경찰서 유치장에는 세 시간 전 약전리에서 체포된 진짜 심종성이 코를 골고 자고 있었다. 이 횡액에 걸렸던 사람은 평원군 한천면에 사는 현문을이다. 그는 구봉산을 사기 위해 이틀 동안 구봉산 주위를 배회하다가 연령과 인상이 심종성과 비슷한 관계로 이런 봉변을 당했다. (‘동아일보’ 1933년 1월26일자)


    1월23일 오전 조 보안과장이 이끄는 수사대가 구봉산 주위에서 탈주범 체포작전을 벌이는 동안, 평원군 약전리에서는 또 다른 체포작전이 진행됐다. 여드레 동안 종적이 묘연하던 심종성은 그날 아침 돌연 평원군 중교리에 사는 외삼촌 안윤겸의 집에 나타나 밥을 청했다. 안윤겸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심종성은 부엌으로 들어가 솥에서 끓고 있는 설익은 밥을 몇 숟가락 퍼먹고 집을 빠져나왔다.

    안윤겸의 아내, 곧 심종성의 외숙모는 조카가 탈주한 여드레 동안 경찰이 수시로 찾아와 조사하는 바람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자기 손으로 차려준 것은 아니지만 심종성이 자기 집 밥을 먹고 달아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안윤겸의 아내는 심종성이 사라진 즉시 이웃에 사는 임병섭 순사 집에 찾아가 그 부인에게 그날 아침 일어난 일을 일러줬다.

    임병섭 순사는 평원경찰서의 지시에 따라 심종성이 탈주한 직후부터 줄곧 안윤겸의 집을 감시했는데, 아침식사를 하려고 잠시 자기 집에 간 사이 심종성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었다. 이야기를 건네들은 임병섭의 아내는 곧장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남편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임병섭 순사는 밥상을 물리고 곧바로 뛰쳐나가 심종성의 행방을 추적했다. 혼자서 심종성을 추적하던 임병섭 순사는 심종성이 장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평원경찰서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다.

    오전 8시 임병섭 순사로부터 심종성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평원경찰서는 즉시 평안남도 경찰부에 보고했다. 평안남도 경찰부는 즉시 평양대동경찰서와 경찰부 보안과 경관으로 조직한 수사대 80여 명을 트럭에 가득 태우고 탈주범이 출현한 평원군 약전리로 출동시켰다. 안윤겸의 집에서 설익은 밥을 먹고 사라진 심종성은 오전 9시 같은 마을 이명원의 집에 또다시 나타나 음식을 강탈해 먹고 평원군 해소면 방향으로 달아났다. 중교리에 도착한 수사대는 이명원의 제보에 따라 달아난 심종성을 뒤쫓았다. 수사대는 오전 10시 평원군 약전리 길 위에서 심종성을 만났다. (‘조선일보’ 1933년 1월24일자)


    80여 명 무장 경관을 길 위에서 조우한 심종성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품고 있던 장검을 꺼내들었다. 심종성이 장검을 미친 듯 휘두르자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수사대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더욱이 대치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5일장이 서 있었다. 섣불리 밀어붙였다가 심종성이 장터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무고한 양민이 피해를 당할 수 있었다. 수사대는 심종성에게 무기를 버리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심종성은 장검을 휘둘러 공기를 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긴장된 대치상태가 한 시간 남짓 흘렀을 때, ‘탕탕’ 하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경관이 쏜 총알은 심종성의 왼쪽 발목에 정확히 명중했다. 심종성은 ‘으악’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졌다. 연인원 1만명의 경관이 동원되고 평안부민 전체를 밤마다 공포에 떨게 했던 심종성의 탈주극은 158시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심종성은 체포될 때 방한모를 쓰고 검정색 덧저고리와 회색 바지 위에 다시 흰 바지를 덧입었고 조선버선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영하 20도나 되는 추운 밤을 8일 간이나 노숙한 관계로 온몸에 동상을 입어 발음도 분명치 않았다. 평원경찰서에 유치된 상태로 치료 중인데 총상과 동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평양으로 호송되리라 한다. (‘조선일보’ 1933년 1월26일자)


    총격으로 발목에 상처를 입은 심종성은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오후 3시 평원경찰서 유치장에 인치됐다. 여드레 동안 배고픔과 추위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경관의 추적을 따돌리려는 정신적 고통으로 몹시 지친 듯 심종성은 동상과 총상의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유치장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오후 8시, 평안남도 경찰부 관(關) 경부가 심종성을 깨워 문초를 개시했다. 심종성은 총 맞은 자리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소독을 잘 해주지 않아 더 아프다고 문초하는 경관에게 성화를 해댔다. 더구나 1년여 만에 먹어본 담배의 새로운 향취에 취한 듯 연방 담배를 달라고 졸라서 담배를 얻어 피우며 유치장에 벌떡 드러누운 채 문초를 받았다. (‘동아일보’ 1933년 1월26일자)


    심종성은 1년2개월간의 미결수 생활보다 8일간의 탈주범 생활이 더 고생스러웠는지 몸이 쇠약해져 인상조차 변할 정도였고, 발은 얼어서 썩어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래도 의식만은 또렷해 도주과정을 묻는 대로 고분고분 답변했다.

    고난의 행군

    시간을 앞으로 돌려 1월16일 오후 12시30분, 공판기일을 21일로 연기하는 것으로 항소심 공판이 끝나자 심종성은 평양형무소에서 미결수 호송차량이 올 때까지 재판소 구내에 있는 유치장에 인치됐다. 심종성이 유치장 안으로 들어가자 호송 간수는 묵직한 철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그런데 그 ‘철컥’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예전 복역기간 7년 동안 들었던, 이번에도 1년2개월째 수천, 수만번 듣고 있는 자물쇠 소리와는 분명 달랐다. 심종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는지도 몰랐다.

    쇠창살이 쳐진 조그만 창 틈으로 밖을 엿보니, 문 앞을 지키고 앉아 있던 일본인 간수가 저고리를 벗고 장검을 풀고 황급히 화장실로 갔다. 심종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문을 조용히 밀어보았다. 철문은 힘없이 열렸다. ‘옳거니!’ 뛸 듯이 기뻤지만 심종성은 덤비지 않고 침착하게 철문을 빠져나왔다. 사방을 살핀 후 포승에 묶이고 수갑을 찬 채 간수가 풀어놓은 장검을 들고 유치장을 빠져나왔다.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유치장 주위에 간수와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재판소 남문을 빠져나와 동정(東町)과 철도연변을 거쳐 평남가도로 들어섰다.

    심종성은 대동군 남형제산면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어느 산속으로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자기 몸을 구속하는 포승을 애써서 풀어버리고 수갑을 돌에 쳐서 깨뜨렸다. 그때서야 평양에서는 경관이 비상소집 되고 수사망을 펼쳐놓았다. 이미 20리 밖 산속에 있는 심종성을 부내에서 경관과 헌병, 군대까지 1000명이 아니라 1만 명이 찾아 나섰던들 발견할 재주가 없었다. (‘동아일보’ 1933년 1월26일자)

    해가 저물자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몹시 추웠다. 영하 20℃의 한기는 피부를 뚫고 뼛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게다가 배가 고팠다. 온종일 뛰어다녔지만 아침밥을 먹은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심종성은 차디찬 산속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밤이 새도록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을 돌고 돌았다. 산을 돌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뛰쳐나와 이 고생을 할까.’

    ‘이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까.’

    1월17일, 밤새 걸어 겨우 동사(凍死)를 면한 심종성은 날이 밝자 대동군 금제면 장현리로 내려왔다. 길거리에 엿장수의 엿판이 놓여 있었다. 하루를 꼬박 굶은 심종성은 2원어치나 되는 엿판을 통째로 훔쳐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강서군 태면 제촌리로 들어갔다. 그날밤도 밤새도록 걸어서 가까스로 동사를 면했다.

    1월18일, 하루 종일 걸어서 평원군 청산면 청용리로 들어갔다. 빈 방앗간이 있어 사흘 만에 새우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방앗간이라고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얼어 죽을 염려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1월19일, 원충산을 넘어서 ‘소구지’라는 촌락에 들어가 한학경이라는 주민의 집을 찾아갔다.

    한학경의 조카 염중식은 사상사건에 연루돼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상태로 예심을 받고 있었다. 심종성은 같은 감방에서 지내던 염중식에게 소구지에 사는 외삼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심종성은 한학경에게 자기도 염중식과 같은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최근 출옥했노라고 속이고 그 집에서 묵었다. 사흘째 엿만 먹고 연명하던 심종성은 16일 아침밥을 먹은 이후 근 90시간 만에 따뜻한 밥을 먹고, 훈훈한 방안에서 이불을 덥고 잤다. (‘동아일보’ 1933년 1월26일자)


    1월21일,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먹고 이틀 동안 지내던 소구지 한학경의 집을 떠났다. 한학경은 길을 떠나는 조카의 친구에게 조심해서 가라며 옷가지, 버선, 방한모 등을 챙겨주었다.

    정처 없이 발길 닫는 대로 걸었다. 걷다보니 고향 가는 길이었다. 그날밤은 상여를 놓아두는 상엿집에서 잤다.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이틀 따뜻한 구들에서 자고 나니 온기 없는 한데서는 잠들기 어려웠다.

    1월22일, 하루 종일 걷다가 밭 가운데 무너진 원두막에 불을 놓고 그 옆에서 밤을 새웠다. 고향이 코앞이었다. 일가친척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다.

    1월23일, 고향 마을 용호리로 가서 아침 8시 외삼촌 안윤겸의 집을 찾아갔다. 어릴 적 그처럼 잘해주던 외삼촌이었건만 탈주범이 된 조카가 찾아오자 낯빛을 붉혔다. 밥을 달라고 해도 도리질치며 난색을 표했다. 그냥 나오려는데 부엌에서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솥뚜껑을 열어 설익은 밥을 몇 숟가락 퍼먹고 외삼촌 집을 나왔다.

    잔뜩 굶주린 배에 곡기가 약간 들어가니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 밥을 달라고 요구했다. 손에 든 장검을 보았는지 주인은 순순히 밥을 차려왔다. 48시간 만에 밥을 배불리 먹고 이명원의 집에서 나왔다. 해소면 방향으로 정처없이 걷는데 약전리 부근에서 수사대가 들이닥쳤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칼을 휘둘렀지만 날아오는 총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왼쪽 발목에 총을 맞고 쓰러지자 수십명의 순사가 달려들었다. 비로소 끝이었다.

    1891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심종성은 탈주 당시 마흔세 살이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넉넉지는 않았으나 먹고 살기가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심종성은 천성적으로 도박을 좋아해 자나깨나 노름에 미쳐 살았다. 도박범으로 경찰에 붙들린 것이 흉악한 살인자가 된 첫걸음이었다. 도박을 해도 보통사람과 달리 10원이면 10원, 100원이면 100원 주머니에 있는 대로 한꺼번에 다 걸어 잃으면 잃고 따면 따는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소 있던 재산은 도박으로 전부 소비해 버리고 차차 곤궁해지자 자연 절도질을 상습적으로 하게 되고 심지어 강도질까지 하게 되었다. (‘죄와 벌과 인생’, ‘별건곤’ 1933년 4월호)


    심종성에겐 안태준이란 열네 살 연하의 첩이 있었다. 안태준은 정숙지 못한 여자여서 같은 동네 사는 열 살 연상의 임극환이란 사내와도 정을 통했다. 물론 임극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안태준은 임극환과 영원히 달콤한 생활을 꾸려가려 심종성이 강도짓 한 것을 경찰에 밀고했다. 심종성이 경찰에 체포되자 안태준은 남은 세간과 집을 팔아 임극환과 함께 평양부내 선교리로 옮겨와서 수육과 술장사를 하며 재미나게 살았다. 반면 심종성은 간부(間夫·샛서방)를 둔 첩의 신고 탓에 강도죄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간의 옥고를 마치고 출옥한 심종성은 변심한 첩이 자기를 감옥에 처넣고 선교리에 와서 산다는 말을 들었다. 분대로 하면 당장에 연놈을 뜯어먹어도 시원치 않겠지만, 오직 입과 배가 원수라 꾹 참고 좋은 말로 자기의 어려운 형편을 하소연하며 임극환에게 얼마간 돈을 좀 달라고 청했다. 추악하기 짝이 없는 임극환은 심종성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죄와 벌과 인생’, ‘별건곤’ 1933년 4월호)


    달리 살아갈 도리가 전혀 없는 심종성이 재차 삼차 청구했지만 임극환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심종성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오랫동안 사귄 김봉주를 찾아가 울분을 털어놓았다. 김봉주도 여자의 변심 때문에 나름대로 상처가 깊은 사내였다. 김봉주는 1893년생으로 심종성보다 두 살 아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한 심종성과 달리 김봉주는 중학을 나온 인텔리 청년이었다. 한때는 강원도에서 보통학교 훈도로 일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라 여교원이 흔치 않았다. 젊은 두 남녀는 어느 틈엔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어찌 믿을 수 있으랴. 깊은 땅 속에 뿌리내린 꽃도 열흘이 못 되어 시들거늘, 깊지 못한 계집의 가슴에 피었던 사랑의 꽃이야 얼마나 갈 것이랴. 애인의 변심. 매일 만나는 어제의 친구요 동료는 오늘의 연적이 되었다. 김봉주는 너무나 깊이 실망하고 너무나 강렬히 질투한 나머지 마침내 연적을 찔러죽이고 변하기 쉬운 계집의 정조를 강제로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심종성 공범 사형수 김봉주’, ‘동아일보’ 1933년 1월28일자)


    김봉주는 살인폭행강간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으로 감형돼 1930년 6월 가출옥했다. 변심한 애인 때문에 교사에서 일개 살인 전과자로 전락한 김봉주는 심종성의 하소연에 깊이 동정했다. 결국 두 사람은 임극환의 집에 가서 강제로라도 돈을 빼앗자고 의기투합했다.

    1931년 10월26일 새벽 3시, 심종성과 김봉주는 식도와 일본도를 들고 임극환의 집에 잠입했다. 임극환 부부를 결박하고 현금 3원20전과 귀중품을 챙겨 도주하려 했다. 결박당하고 절도 광경을 지켜보던 안태준은, 전 남편이자 당장에는 흉기를 든 강도인 심종성에게 “네가 이런 일을 또 하고 무사할 줄 아느냐? 풀려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안태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심종성은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겼다.

    ‘안태준이 누구냐? 일찍이 남편인 나를 경찰에 고발해 징역을 시킨 여자가 아니냐? 잊을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된 지금에 와서 안태준이 무엇이 미안해 고발을 주저하랴! 안 되겠다. 뒷일을 위해.’

    심종성은 성큼성큼 안태준에게 다가가 목을 힘껏 졸랐다.

    “오냐.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로구나.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

    초라한 최후

    사형수 심종성의 ‘프리즌 브레이크’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심종성은 체포된 지 이틀 후인 1월25일 평양경찰서로 호송됐다. 여드레 동안의 굶주림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엄청난 양의 밥을 먹어치웠고, 그러면서도 평양경찰서 유치장은 밥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발목에 경미한 총상을 입었을 따름이지만 경찰에서건 검찰에서건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아파서 앉아 있을 수 없다고 벌렁 드러누워 신문을 받았다. 경찰과 검찰이 여러 차례 탈주경로 검증에 나섰지만 심종성이 탈주 도중에 내다버린 수갑, 포승, 짚신 등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여드레 동안의 탈주 행각으로 심종성에게는 기존의 강도살인절도죄에다 도주죄와 엿 2원어치를 훔친 절도죄가 추가됐다. 하지만 두 사안을 추가로 기소하면 1심재판부터 다시 열어야 했다. 검사는 추가로 기소하든 기소하지 않든 재판 결과가 사형이긴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 도주절도죄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2월20일 오전 11시, 심종성과 김봉주는 평양복심법원 형사법정에서 하쿠다케(百武) 재판장 심리, 요코다(橫田) 검사 입회로 공소공판 심리를 받았다. 피고인 심종성은 상처에 차도가 없어 그대로 자리에 누운 채 심리를 받아 법정이 생긴 이래 첫 번째 기록을 세웠다. 이미 사형을 각오했는지 서슴지 않고 도주하던 경로를 설명했다. 선교리 임극환 부부 살해 사건에 이르러서는 피고인 두 명이 살해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고자 언쟁을 벌였다. 이로 미루어 두 피고인은 아직도 사형을 면해 보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듯도 보였다. 요코다 검사는 두 피고인에게 1심과 같이 사형을 구형했다. (‘조선일보’ 1933년 2월3일자)


    심종성과 김봉주는 2월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나란히 사형을 선고받았고, 5월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마저 기각해 6월27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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