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지리산 소년’으로 알려진 오카리나 연주자 한태주와 함께 음악 작업을 하기 위해 지리산에 머물 때, 한태주의 할머니가 걸핏하면 “시끄럽다”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궁리 끝에 김광석은 할머니를 위해 트로트 곡을 기타로 연주했더니 할머니가 몹시 좋아했고 그 뒤로는 대접이 확 달라졌다는 것이다.
록 기타리스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것은 뜻밖이었다. 대부분의 록 음악인에게 트로트(혹은 ‘뽕짝’)는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연주하는 것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김광석이 연주한 ‘비 내리는 고모령’을 들은 사람이라면 ‘트로트도 다루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찌와 TJ라는 듀오가 있다. 하찌는 가스가 히로후미라는 본명을 가진 일본인 기타리스트인데,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강산에의 음반이나 한대수의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한 사람’이라고 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좀더 부연하자면 1970년대 일본의 전설적 록 밴드인 카르멘 마키 앤 오즈(Carmen Maki · Oz)를 음악적으로 이끈 ‘기타의 거장’이다.
하찌와 TJ는 2년 전쯤 결성된 그룹인데, 지난해 ‘장사하자’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앨범을 발표했다. 이 곡 역시 트로트를 기본 모티프로 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하찌는 “제가 워낙 여러 가지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하다보니까 이렇게 흘러온 것 같아요. 영국, 미국, 브라질, 아프리카 음악까지 두루 유랑을 했는데 요즘은 아시아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아시안 팝이라고 할까요?”라고 말했다.
트로트 르네상스
이런 사례들은 ‘진지한’ 음악인이 트로트를 음악적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경우로 현재의 트로트 리바이벌 열풍과는 별 관련이 없다. 아무도 김광석이나 하찌를 ‘트로트 가수’라고 부르지 않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트로트를 ‘진짜’ 트로트라고 할 수는 없다. 트로트계에서 이런 움직임을 반길 것 같지도 않다. 그렇지만 트로트가 진지한 음악적 실험의 대상이 되는 현상은 트로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시각이 변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실제로 지난 몇 년 대중가요계의 트렌드를 점검하는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가장 눈에 띄게 약진한 장르가 트로트였다. 특히 ‘트로트의 신데렐라’로 등장한 장윤정의 활약은 모든 장르를 통틀어보아도 가장 돋보였다. 2004년 ‘어머나’로 깜짝 히트를 기록한 장윤정은 2005년 상반기에는 ‘짠짜라’를, 하반기에는 ‘꽃’을 발표하면서 정상의 인기를 이어 나갔다. 지금 그녀는 한달 평균 20~30개의 ‘행사’에 출연하면서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곤드레만드레’를 불러 젊은 트로트 가수의 붐을 이어간 박현빈은 ‘트로트계의 신형 엔진’이라 불리면서 ‘남자 장윤정’의 지위에 올랐다. 장윤정과 박현빈의 상업적 성공은 ‘젊은 취향의 트로트’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제 ‘젊고 밝고 경쾌하고 발랄한 트로트’는 시대의 대세다.
이들 외에도 트로트를 시도하는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탤런트 이재은이 발표한 ‘아시나요’는 단발로 끝났지만 박주희는 ‘럭키’(2001)에 이어 ‘자기야’(2006)를 통해 장윤정의 라이벌로 급부상했고, 여성그룹 LPG(Long Pretty Girl)와 뚜띠는 ‘캉캉’과 ‘짝짝짝’을 통해 트로트 붐에 동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