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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숲 속 산방에서 꽃뱀과 동거 중입니다”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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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반짝반짝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연필로 손바닥 공책에 이렇게 적었다. 충청도, 구룡산, 법주리, 구구산장, 살쾡이 똥, 생강꽃차, 민들레, 다람쥐와 꽃뱀, 북두칠성, 까치와 까마귀, 해인(海印), 편지, 혼혈아, 호아빈(평화), 벌레, 옥수수와 누룽지, 장작패기, 풍경, 우편집배원…. 이 단어들로 도종환 시인을 그려봐야겠다.
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살다가 시가 된 사람들이 있다. 시를 읽다보면 한 인간이, 구체적인 한 인물이 시 속에서 살아 숨쉬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연인, 친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 평범하게 살았지만 비범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 시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시 속에서 되살려낸다. 시 속에서 그들은 모두 한결같다. 성자와 청소부,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이 모두 한결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시는 아름다운 조화이기도 하다. 도종환(都鍾煥·53) 시인이 살고 있는 산방으로 가는 마을에서 나는 시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시집 ‘접시꽃 당신’에서부터 최근의 ‘해인으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적으로 이미 유명한 시인이면서도 소월의 시에 나오는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과 같이 살았다. 참으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삶이다. 부러운 삶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법주리’라는 마을 이름을 보고서 나는 무릎을 쳤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말이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법주리

압구정동, 상계동과 같은 동네 지명에 익숙한 사람들은 법주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덜컥 걸린다. ‘법이 머문다’는 말은 어렵다. 법이 머무는 곳은 불가의 절이거나 암자이리라. 그리고 그곳에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이 마을에는 시인이 그 법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시인은 아닐까. 법주리 초입에 내려 큰 나무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까마귀가 낯선 사람의 침입을 경계한다. 마치 동네사람들에게 다 알리려는 듯이 울어댄다. 개가 짖는 것 같다.



한적한 오후다. 마을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을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형세였다.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청주에서 보은 쪽으로 피반령을 넘어서서 지방도 변에 위치한 법주리는 도로를 마주 보고 두 개의 큰 당나무가 있고, 그 나무 아래에 돌부처가 모셔져 있다. 법주리라는 마을 이름은 아마도 이 돌부처에 머무는 법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법주리에서 구룡산 쪽으로 난 길을 걸어간다. 혹시 도종환 시인을 찾아갈 일이 있다면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가기를 권한다. 좁은 산길을 차를 몰고 갔다가 낭패를 본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견인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산길이다.

시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이 마을에서 나는 한마음을 놓았다. 고속도로에서 밀리는 차량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이 이곳에서 풀어졌다. 이렇게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다 시인 덕이다. 시인은 이렇게 세파에 찌든 중생의 마음을 보듬어주었다.

마을의 초입에 있는 돌부처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배고프니 밥 주랴, 배고프니 법 주랴”

어제 낮엔 양지 밭에 차나무 씨앗을 심고

오늘 밤에 마당에 나가 별을 헤아렸다

해가 지기 전에 소나무 장작을 쪼개고

해 진 뒤 침침한 불빛 옆에서 시를 읽었다

산그늘 일찍 들고 겨울도 빨리 오는 이 골짝에

낮에도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지만

매화나무도 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고요하였다

- 시 ‘산가’ 전문

이 시는 시인의 요즘 생활을 잘 보여주는 풍경화다. 시인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낮과 밤, 볕과 별이 모두 시인의 품에 머물고 있다. 한 인간이 어떻게 한 우주가 되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좋은 시처럼 그가 사는 곳이 좋았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곳으로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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