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농축우라늄(HEU) 문제는 갑갑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새로운 정보가 없는지 계속 물으셨지만 정확한 답을 못했습니다. 관련기관도 뾰족한 답이 없었고, 미국으로부터 확정적이라고 할 증거나 정보를 받은 기억도 없어요.…초기에 미국측에 ‘HEU 문제에만 집착해서 몰아붙이면 더 위험하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습니다. 흔히 ‘잃어버린 4년’ ‘잃어버린 6년’ 얘기하는데, 결국은 내 말대로 돼서 핵실험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3월2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토론회에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말) “…요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HEU 문제에 대한 당시의 정보평가가 부정확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2002년 10월 켈리 차관보가 평양에 갔을 때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진짜 인정한 게 아니라, 통역상의 오류였을 거라고도 합니다.…분명히 말하지만, 2002년 여름 정보당국 사이에 의미 있는 견해 차이는 없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매우 결정적인(conclusive) 증거를 확보했고, 이전에 있던 이견은 사라졌습니다.” (4월5일 미국기업연구소(AEI) 포럼에서 존 볼튼 전 미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보의 말) 당신은 어느 쪽인가. 어느 쪽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2002년 10월 “북한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미국의 발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른바 HEU 문제. 2차 북핵 위기의 도화선이 된 이 문제의 진실게임이 4년 반이 지난 지금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당시 한미 양국의 관련 당국자들과 전문가 분석을 통해 ‘이라크전 이후 최악의 정보실패’라고 비판받는 HEU 문제의 실체를 파헤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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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자들의 시각은 간단하다. 2002년 미국이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북한을 압박해 공연한 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제네바 합의의 붕괴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및 영변 폐연료봉 재처리로 이어져, 결국 플루토늄을 통한 핵 개발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방아쇠는 조지프 디트라니 미 국가정보국 북한담당관이 당겼다. 2월27일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그는 “북한이 HEU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의 장비를 구입하고 있다는 정보는 높은 신뢰도를 가진 것이었다”면서도, “HEU 프로그램이 현존하는지에 대해선 중간수준의의 신뢰도(mid-confidence level)를 갖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정보 당국이 HEU에 대한 정보의 불확실성을 시인했다”며 ‘정보 과장’ 의혹을 본격 제기했다.
‘중간수준’이라는 말 한마디에 미국 언론이 이렇듯 강도 높은 의혹을 제기한 이유는 2002년 당시 부시 행정부가 만든 북한 HEU 관련 정보평가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위기가 불거진 직후인 11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의회에 제출한 정보판단 보고서다.
요약본만 공개된 이 보고서는 ▲북한이 약 2년 전부터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지난해부터 원심분리기 관련 자재를 다량 구입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완전 가동할 경우 ‘매년 2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있고 ▲‘2005년 무렵(mid-decade)’완전 가동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
최근 제기되는 의혹의 핵심은 바로 ‘이 보고서의 평가가 적절했는가’로 요약된다. 보고서는 북한의 HEU 프로그램이 생산 ‘공장(plant)’을 수년 내 완공할 정도로 진척된 것으로 판단했다. 디트라니 담당관의 ‘중간수준’ 발언은 이 때의 톤에서 한참을 물러난 것이다. 비판자들은 ‘예전에는 확실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당시의 판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궁금증은 ‘생산공장’ ‘매년 2기’를 언급한 CIA의 판단은 어떻게 나온 것이었을까’로 모아진다. 과연 그 근거는 무엇이었고, ‘2005년 무렵’이라는 시간계산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북한의 HEU에 대한 의혹은 19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 북한이 1998년 HEU를 이용해 핵실험에 성공한 파키스탄으로부터 관련기술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상자기사 참조). 이 무렵 미국은 통신감청을 통해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 12~20개를 입수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시도하고 있다는 징후이긴 해도, 핵무기 생산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일반인에게는 모호해 보이는 이 경계가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의미심장하다. 당시 한국측 정보당국 핵심에서 일했던 관계자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