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깔린 숲 속에서 은밀하게 작전회의를 하는 훈련군 대대장 캠프.
주공을 맡은 미 8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할 주공으로 미 1군단을 정하고, 주공의 평양 점령을 돕기 위해 적을 엉뚱한 곳에 붙잡아놓을 조공 임무는 한국군 2군단에 맡겼다. 주공을 맡은 밀번 미 1군단장은 다시 평양 돌격을 담당할 주공으로 기동력이 좋은 미 1기병사단을, 목표점은 같지만 적을 붙잡아놓는 조공으로 미 24사단을, 예비부대로 영연방 27여단을, 그리고 잔병 소탕에나 참여하는 최후 예비부대로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한국군 1사단을 지명했다.
그러자 백 준장이 “내 고향이 평양이라 평양 공격 루트는 내가 가장 잘 안다. 평양 공격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다”며 거칠게 항의해, 밀번 1군단장은 미 24사단과 한국군 1사단의 임무를 바꿔주었다. 유후병력 소탕전에나 참여해야 할 한국군 1사단이 일약 조공이 된 것. 밀번 1군단장은, 주공인 미 1기병사단은 ‘경의선’ 상에 있는 개성-사리원-황주를 거쳐 최단거리로 평양을 공격하고 한국군 1사단은 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을 공략하도록 했다.
이러한 재조정 때문에 미 1군단의 출동은 10군단보다 늦어졌다. 10월7일 주공인 미 1기병사단이 38선을 넘고, 조공인 한국군 1사단은 10월11일에야 38선 너머로 북진할 수 있었다. 백선엽 리더십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투에서 미 육군의 패튼 장군은 전차와 보병부대를 혼합해 돌진하는 전법으로 독일 지역을 가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 1기병사단은 유명한 기동부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백 사단장은 공격 개시 전 밀번 1군단장을 졸라 미군 전차 10대(1개 전차중대)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한국군 보병과 미군 전차를 섞어 함께 돌격하는 ‘패튼 전법’을 구사해 재빠른 돌격에 나섰다. 나흘이나 늦게 출동했지만 한국군 1사단은 곧 미 1기병사단과 거의 비슷한 깊이에 전선을 만들었다.
주공보다 빨랐던 조공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군 1사단 병사들이 흥분했다. 이들은 미 1기병사단보다 먼저 평양에 도달하자며 “전진, 전진!”을 외쳤고, 그 기운에 전염된 미 전차중대원들도 덩달아 “위 고우(We go), 위 고우!”를 외치면서 최선을 다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한국군 1사단이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 육군 최고의 기동부대란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 1기병사단도 진격 속도를 높였다.
그로 인해 주공과 조공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지고, 미 1군단 사령부는 어느 부대가 먼저 평양에 도착하는지를 판단하는 ‘심판관’ 처지가 되었다. 미 1군단 사령부는 정찰기를 띄워 양쪽의 진격 속도를 살피며 돌격을 독려했다. 피를 말리는 듯한 이 경쟁은 10월19일 한국군 1사단이 주공과 조공의 합류점인 대동교 앞 선교리에 40분 먼저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자 한국군 1사단에 배속된 미 전차부대원들은 기쁨에 들떠 ‘Welcome 1st Cav. Division - from 1st ROK Division Paik: 한국군 1사단장인 백선엽은 미 1기병사단의 도착을 환영한다’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미 1기병사단이 도착하자 종군 사진기자단이 이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셔터를 누름으로써, 보병으로 편제된 한국 사단이 미국의 최정예 기동사단을 이긴 확실한 증거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으로 한국군 1사단은 ‘전진’이라는 별명과 ‘평양 입성 선봉부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렇듯 한국군 1사단이 평양에 먼저 도착한 것은 조공이 주공을 앞지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현실 전투에서 이러한 기적은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
▼ 제1부 첫째 날 - 벼락이 떨어져도 전투는 한다
이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고 3월28일 강원도 인제에 있는 육군 과학화훈련단(약칭 과훈단)을 찾아갔다. KCTC(Korea Combat Training Center)라고도 하는 이곳엔 매년 17~19개의 대대(훈련군)가 들어와 이곳의 전문대항군(대항군) 대대와 자유 공방전을 벌인다. 훈련군은 평소 자기 편제 부대에다 유사시 연대와 사단으로부터 지원받거나 배속 부대를 이끌고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