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로에서 만든 시뻘건 쇳물(왼쪽)과 철근을 생산하고 있는 모습.
앞으로 나아가자니 엄청난 투자재원과 지역주민의 반발이 가로막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세계적인 경쟁에서 도태돼야 하는 현실에 현대제철은 처음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 과장의 개인史
서울에서 목포 방향으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린 지 1시간 만에 서해대교를 지나 송악 인터체인지에 다다랐다. 함께 내려간 현대제철 홍보실의 장영식 과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송악 톨게이트에서 통행요금을 받는 창구가 단 한 곳뿐이었는데, 지금은 6개로 늘었다”며 “이곳을 드나드는 차량이 그만큼 많아졌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장 과장은 당진제철소의 아픔과 재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었다. 1997년 한양대 금속공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반도체 재료 분야를 마다하고 기피 1순위이던 제철 분야를 선택했다. 조선, 자동차 등 중후장대한 산업에 쓰이는 ‘산업의 쌀(철강)’을 일구면서 한국 경제에 일조하고픈 소망 때문이었다.
석사과정을 마치면 그는 당진제철소의 연구원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당시 한보철강은 최첨단 기술로 알려진 ‘코렉스 공법’을 적용해 철을 제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해 1월 한보철강이 부도가 나고, 한국이 금융위기를 맞자 그의 미래에 덜컥 자물쇠가 채워졌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배운 것이 금속공학이어서 그는 ‘한국철강신문’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기자들이 쓴 원고를 교정하는 일이었다. 석사까지 마친 엘리트였지만 고난의 시대에 그에게 맞는 번듯한 자리는 없었다.
교정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던 첫날, 그는 기자들이 쓴 원고를 꼼꼼하게 고쳤다. 금속공학 석사 출신의 눈으로 고친 원고는 편집장의 눈에 띄었고, 철강신문 기자로 채용되는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6년간 그는 당진제철소 등 전국의 철강업체를 취재하는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당진제철소는 군데군데 잡초가 무성하고, 멈춰선 공장이 흉물스러웠어요. 저게 언제 다시 가동되려나 답답했는데, 지금 공장을 둘러보면 언제 그랬나 싶어요. 한보가 부도나면서 을씨년스럽던 지역사회도 주변 공단에 제철 관련 중소기업체들이 입주하면서 활기가 넘치고 있습니다.”
3년 전 현대제철 홍보실로 자리를 옮긴 장 과장의 개인사(史)를 듣고 있으니 그의 눈에 비친 당진제철소 재건의 의미가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한보가 망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는 연구원으로 10년의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물론 장 과장은 “그 덕분에 백면서생의 시야가 넓어졌다”고 자평하지만, 듣는 사람의 처지에선 인재가 흘려보낸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장 과장만 아픔을 겪은 것이 아닐 것이다. 구조조정으로 퇴출된 2000여 명의 공장 직원도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창 교육비를 대며 양육해야 할 자녀를 둔 아버지도 많았을 테고,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도 있었을 것이다. 임원 승진을 앞둔 부장도 있었을 것이고, 과장 차장으로 진급한 유능한 엘리트 사원들도 있었을 텐데, 이들이 품었던 꿈은 회사 부도와 함께 서해로 소리 없이 흘러갔다.
늦었지만 다행스럽게 현대제철이 공장을 인수, 예전에 당진에서 일했던 직원을 상당수 다시 불러들였다. 해외에서 일하던 직원들도 복귀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낸 세월을 다시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일까. 놓쳐버린 시간마저 복구하려는 직원들은 분주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로제철소 건설로 세계 유일의 자동차-철강그룹이 되겠다는 거대한 목표가 그들 앞에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