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EU 중앙은행. 유로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판에 한국이 미국과 좀더 가까워진다고 한들 그렇게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의 엘리트 관료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나머지 공부’를 했고, 교수 사회는 대부분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주부와 대학생도 부지기수이고, 한국에서 상영하는 주요 영화는 대부분 미국산이다. 도대체 뭐가 더 바뀐다는 말인가.
화가 K씨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미국 진출이라는 기회의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거대한 시장, 엄청난 수요 앞에서 그는 흥분하기보다 자신이 몹시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만간 한국에 남을 것인지, 짐을 싸서 미국으로 떠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13년 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멕시코의 영화감독들은 미국이라는 기회의 시장에 뛰어들었다. 미국으로 가는 담을 헐자면 멕시코로 들어오는 담(스크린쿼터)도 헐어야 했다. 할리우드 자본을 끌어들이면 세계적인 멕시코 영화가 탄생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지난해 6월 ‘KBS 스페셜’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의 멕시코를 방영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강택 PD는 “미국의 자본이 멕시코 영화관을 사들이고, 대부분 미국 영화를 상영하는 바람에 멕시코 영화계는 몰락했다”고 전했다.
영화전문지 ‘씨네21’에 따르면 지난해 멕시코 영화의 박스오피스 점유율은 4.7%. 그나마도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선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판의 미로’를 감독한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델 토로는 “NAFTA 체결 이후 모든 보호막이 무너지면서 영화도 상품처럼 취급됐고, 결국 황폐화됐다”고 말했다.
멕시코를 다녀온 이강택 PD는 ‘아마로 신부의 죄’를 감독한 카를로스 카레라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수차례 감독상을 수상한 유능한 감독이었지만, 지금은 CF감독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그도 다른 감독처럼 미국으로 건너가 또 다른 진화를 꿈꿨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는 “할리우드 자본이 원하는 해피엔딩 영화는 내가 그리고 싶은 세계가 아니다”며 “인간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싶지만,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급하다”고 털어놓더란다.
한국은 동아시아를 배반했다?
돈은 꼭 대가를 바란다. 할리우드의 돈을 갖다 썼으면 할리우드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무역장벽이 사라지면서 돈은 높은 곳(미국)에서 낮은 곳(한국)으로 물밀듯이 쏟아지겠지만, 사실은 그때부터가 위기의 서막인 셈이다.
나중에 돌아보면 돈은 물과 달리 낮은 곳(한국)에서 높은 곳(미국)으로 흘러들어간다. 양극화가 그런 것 아닌가. 게다가 돈 앞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느냐, 자본의 입맛에 맞출 것이냐 고민할 것이다.
10년 동안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2003년부터 한국의 FTA 전략에 대해 많은 논문을 발표한 한림대 최태욱 교수. 그는 지구상에 세 가지의 FTA가 있다고 말한다. 미국식, EU식, 개발도상국식이 있는데, 미국만이 상품뿐 아니라 농산품, 서비스(투자, 법률, 교육, 지적재산권 등)의 교역까지 협상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농산물과 서비스도 엄연한 상품이지만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한 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담고 있기에 어느 정도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 부분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으므로 협상 상대국의 저항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