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한마디의 파괴력
흥미로운 것은 전선(戰線)의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박근혜 전 대표의 대응전략이 이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본인이 직접 새로운 논쟁점을 만드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슈가 불거져도 곧바로 대응하기보다는, 여의도 정가가 모두 박 전 대표의 입만 쳐다보게 되는 타이밍까지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인 비판의 한마디를 던지는 식이다. 일단 발언이 나오면 친박 진영은 이 입장을 전체 의견으로 흔들림 없이 견지한다. 군사전략으로 비유하자면 진지전 혹은 참호전에 가까운 형식이다. 전선을 따라 두껍게 형성된 참호 속에서 몸을 숙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고개를 들어 정확한 솜씨로 상대전력의 핵심을 저격하는 방식에 비유할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미디어법, 세종시 문제에 관한 박 전 대표의 행보는 모두 이 패턴을 그대로 이어왔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인 데도 (쇠고기 수입) 협상을 전후해 정부가 국민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는 등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2008년 6월30일), “(한나라당 직권상정으로) 미디어법 처리를 위한 본회의가 열리면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참석할 것”(2009년 7월15일), “정치는 신뢰인데 신뢰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세종시 문제는) 원안대로 하고 필요하다면 플러스 알파가 돼야 한다”(2009년 10월23일) 같은 발언들이 그것이다. ‘모두가 목을 빼고 기다리는 시점’에서 나온 한마디의 파괴력은 컸고, 청와대와 친이계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군사이론의 현실 접목에 천착해온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박 전 대표의 이러한 행보를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진격해 들어오는 소련군을 상대로 취했던 이른바 ‘요새지대 전략’에 비유한다. 너른 평원 군데군데 자리한 중무장 요새에 핵심전력을 준비해두고 있다가, 소련군이 요새 사이를 지나쳐 진격하고 나면 그제야 요새를 나와 그 후미를 공격해 병참과 후속공격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방식이다.
동원 가능한 자원의 크기
눈여겨볼 것은 이 전략이 바로 당시 소련군의 기동전 개념에 대항해 마련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독일에 구데리안이 있었다면 소련에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있었다. 역시 대표적인 기동전략으로 분류되는 소련의 기계화 종심(縱深)작전 전략을 설계한 당사자. 이 전략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기동전에 맞서기 위해 순식간에 전차를 대량 생산한 소련군은 전세가 뒤집힌 1944년 독일을 향해 진격해 들어간다.
이렇듯 종심 깊숙이 치고 들어온 소련군의 전위를 후방 본진과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이 독일군이 택했던 요새지대 전략의 골자다. 이렇게 되면 갈 곳을 잃은 전위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없어 기동력과 파괴력을 잃고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의 전략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승승장구 사안을 밀어붙이던 청와대와 친이계가 박 전 대표의 작심발언 한마디에 비틀거리는 모양새는 이 전략의 핵심개념과 사뭇 닮았다. 채 수석연구원의 설명이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정치 전략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기동전의 핵심은 신속한 기동력과 확고한 공중 화력지원 우세에 있다. 그래야 기존의 전선 외에 돌파구를 열어 ‘새로운 전장’을 만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일군이 이 전략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완비된 철도시스템과 효율적으로 편제된 공군력 덕분이었다. MB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원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정부 요직의 핵심 측근들이 치고 나가는 지상전에 대통령 본인의 언급이라는 공중지원이 가능하겠지만, 자원이 부족한 박 전 대표로서는 수세적 행보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