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마크 트웨인

  • 조성규│연세대 명예교수· 전 한국 마크 트웨인 학회장 lykeion@hotmail.com│

    입력2010-04-29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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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가 쓴 작품은 독자를 바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독자의 중심에 들어가 변화를 바로 가져오지 못하고 독자의 주변부터 조금씩 변화시킬 뿐이다. 미국의 인종차별을 현재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데 남북전쟁 이후 130년이 걸렸다.
    •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에 마크 트웨인이 있다고 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2008년 7월14일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미국판)은 19세기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을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연례 기획으로 미국을 만들어낸 역사적 인물을 매년 한 사람씩 선정해온 타임이 이 특집의 7번째 인물로 마크 트웨인을 선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정치가이자 발명가인 벤저민 프랭클린, 제3대 대통령 제퍼슨, 제16대 대통령 링컨, 제35대 대통령 케네디, 제26대 대통령 루스벨트 그리고 탐험가 루이스와 클라크 등이 표지에 올랐다.

    타임은 마크 트웨인 선정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사람들의 정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둘째, 인종문제에 있어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셋째, 작품을 통해 오늘의 미국 독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면서 특집호 편집인인 리처드 스텐겔은 이같이 부연 설명했다.

    “그는 미국의 정치, 문화의 역동적인 전통을 이해하도록 해주었고, 점잖은 비평가 중 상당수가 논평하기 싫어하고 말하기 껄끄러운 진실을 발언할 수 있는 우리의 집단 무의식과 같은 별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작품 ‘허클베리 핀’으로 지난 세기 동안 인종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문학적 저술가의 DNA를 창시해낸 작가다.”

    필자는 때마침 1910년 4월21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이 대작가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해 그의 인간성과 작품을 되살펴보고자 이 글을 썼다.

    방대한 작품을 남긴 트웨인



    마크 트웨인(1835~1910·본명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의 실상은 국내 독자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평소 외국문학에 친숙한 친구에게 톰이나 헉(허클베리)이 나오는 소설 외에 트웨인의 작품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트웨인이 다른 작품을 쓴 게 있나”라고 되물었던 적도 있었다. 트웨인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톰이나 헉보다 덜 친숙한 이름인 건 분명하다.

    트웨인은 자신이 편집한 25권 전집을 포함해 40권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지난해 11월 ‘동물의 이야기’(The Book of Animals)가 출간되었고 미출간 유고를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마크 트웨인 전문 연구기관에서 정리 중이어서 더 많은 작품이 나올 전망이다.

    트웨인은 1835년 미주리 주의 플로리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전기 작가인 앨버트 페인에 따르면 트웨인은 죽기 얼마 전인 1909년 “나는 1835년에 핼리 혜성과 같이 태어났으니 1910년에 핼리 혜성(주기가 75년)과 함께 지구를 떠나지 않으면 내 생애 가장 큰 실망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던 4월21일 하루 전 핼리 혜성이 나타났고, 이 우연의 일치에 천문학자들뿐만 아니라 프레드 휘플 같은 회의적인 과학자조차 놀랐다고 한다.

    트웨인은 11세 때 아버지가 숨지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져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주리 주 하니발에서 견습인쇄공이 되었다. 이후 동부 몇 개 도시에서 인쇄공 노릇을 한 뒤 고향에 돌아와 증기선 파일럿 면허를 취득한다. ‘백경’ 저자인 허먼 멜빌이 그가 탄 포경선이 자기의 하버드나 예일대학이라고 말한 것처럼 트웨인에게도 미시시피 강은 하버드이며 예일대학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흑인들의 노래와 사투리, 그들의 대화 뉘앙스에 주의를 기울였고 미시시피 강의 배에서 만나는 사람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이 뛰어난 관찰력으로 그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의 정서나 위선적 가면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1861년 남북전쟁으로 미시시피 강을 오가던 1200척이 넘는 증기선이 발이 묶이자 그는 공화당원인 형을 따라 네바다주로 갔다. 네바다의 버지니아시티에는 수많은 광부가 광산에서 일을 하며 부자가 되리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도 처음에는 이 꿈을 좇다 곧 그 꿈을 버리고 ‘테리토리얼 엔터프라이즈’라는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로 2년 동안 일했다.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집.

    클레먼스(트웨인의 본명)는 이 지역 유일한 신문사였던 이곳에서 ‘조시’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얼마 뒤 ‘마크 트웨인’으로 필명을 다시 바꾸어 많은 기사를 썼지만 1864년 5월 갑자기 ‘테리토리얼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간 그는 근처 금광에서 일하다 당시 유명했던 아티머스 워드의 요청으로, 다니엘 웹스터라는 개구리와 도박사 짐 스마일의 이야기를 썼다. 원고가 늦어져 워드의 잡지에는 실리지 못했으나, 다행스럽게 이 원고는 1865년 11월18일 뉴욕의 ‘새터데이 프레스’에 실렸다. 이 ‘카리베러스군의 뜀뛰는 악명 높은 개구리’(The No-torious Jumping Frog of Calaverus County)가 출간되면서 그는 일약 전국적 인사가 된다.

    그가 신문기자 생활을 했던 서부, 특히 네바다는 풍토가 거친 곳이었으므로 사건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사를 쓴다 해도 독자들은 좀처럼 읽어주질 않았다. 따라서 독자를 얻기 위해 기사를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써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남부 작가들이 남북전쟁 전부터 즐겨 사용하던 과장기법인 ‘톨 테일’(Tall Tale) 기법이었다. 트웨인이 1863년 이 과장기법을 이용해 쓴 살인사건 기사가 문제되어 신문사를 사직했다는 설도 있다.

    강연과 연설의 귀재

    1866년 당시 하와이 군도는 샌드위치 군도라고 불렸는데 트웨인은 ‘새크라멘토 유니언’지를 위해 5개월간 하와이의 사업, 문화 및 자연 풍경에 대한 글을 써 보내라는 요청을 받았다. 1866년 10월2일부터는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샌드위치 군도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미국의 19세기는 ‘강연’ 또는 ‘연설’의 세기였다. 그는 특유의 느린 말투, 가끔 말을 안 하고 관중의 주의를 끄는 재주, 남부의 과장된 표현 등으로 직업적인 만담가가 되었고 하루에 400달러를 벌었다. 당시 하와이는 미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몇몇 나라가 탐을 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미국 신문사에 알리지 않았다면 오늘의 하와이는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트웨인을 유명하게 만든 첫 번째 책은 ‘지중해 유람기’(The Innocent Abroad·1869)였다. 퀘이커시티호라는 증기선을 타고 5개월간 구세계인 지중해, 흑해, 이스라엘 성지, 이집트 등을 유람하며 쓴 여행기록을 샌프란시스코의 일간지 ‘알타 캘리포니아’에 기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구세계를 보았고 구세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듯하다. 글 중에는 “철도 부설을 기분 좋게 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렵다. 그 사업은 지겹도록 오래 걸린다. 역마차를 마련하는 것은 무한하게 더 즐거운 일이다”라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지중해를 유람할 때 뉴욕 주 엘마이라 출신이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찰스 저비스 랭든을 만났고 이후 1867년 퀘이커시티호의 재상봉 행사에서 랭든의 누나 올리비아(리비)를 보게 된다. 1868년 8월 엘마이라의 랭든 가를 방문한 뒤 그는 5개월 동안 편지마다 번호를 붙인 184통의 연서를 리비와 주고받았고 욕설과 담배를 금한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1870년 2월 리비의 아버지 집에서 결혼했다.

    리비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때 부호가 된 사람으로 버팔로의 신문사와 좋은 집을 트웨인에게 주었다. 그 집에는 두서너 명의 하인과 모든 집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이런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1869년 출간된 ‘지중해 유람기’는 귀족들의 멸시를 받긴 했으나 2년 동안 많은 부수가 팔렸다. 1872년 ‘서부 유랑기’(Roughing It)를 출간한 뒤 그는 리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부 유랑기’는 ‘지중해 유람기’보다 좋은 책이고 글도 훨씬 좋다”라고 썼다. 자신을 서민의 작가라고 말한 그는 “천재들의 책은 포도주 같다. 나의 책은 물과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라고 자신의 책을 평했다.

    나의 시대는 도금시대

    이렇듯 순풍에 돛단배 같던 신혼생활은 곧 어두운 그림자에 덮인다. 장인이 위암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에 리비는 정신적 쇼크로 건강을 해친다. 1870년 8월에 장인이 돌아가 슬픔에 잠긴 리비에게 비극이 겹친다. 11월 출산한 장남 랭든 클레먼스는 미숙아였다(이 장남은 1872년 6월 생후 18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죽는다). 트웨인은 이 시기를 회상하고 생애에서 최악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트웨인은 1873년 찰스 워너와 공저로 ‘도금시대’(The Gilded Age)를 내놓았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시대를 ‘요란한 시대’라고 명명했으나 트웨인은 자신의 시대를 ‘도금시대’라 불렀다. 출간 뒤 두 달 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1870년대 부패한 그랜트 행정부 밑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비평적 기록으로 토지에 욕심을 부리는 사나운 야생 고양이 같은 은행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 탐욕스러운 중산계급이 등장한다.

    트웨인은 이 작품에서 “어떤 사람은 계급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영웅을 숭배하고,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돈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즉,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1874년 6월 차녀 클라라가 탄생하고 그 해 9월 하트포드의 새 저택으로 이사를 한다. 이 저택에서 그는 1891년까지 거주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3층으로 된 이 방대한 저택에는 일곱 명의 하인이 있었고 벽 속에 설치된 통화파이프를 통해 모든 하인과 통화를 했으며 최초로 가정용 전화도 설치했다. 뉴욕의 이름난 실내 장식가들을 불러 인도에서 수입한 금속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로 개조하고 끊임없이 많은 손님을 초대했다. 막내딸 지인도 태어나 딸 셋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불같은 성격, 물 쓰듯 하는 소비행태로 재력이 부족해 그의 가정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는 연구가 요즘 나오고 있다.

    그는 1876년 12월 ‘톰 소여의 모험’(Adventures of Tom Sawyer)을 출판한다. 누구나 이 작품은 소년들을 위해 썼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훗날 ‘애틀랜틱’지의 편집인이자 친구인 윌리엄 딘 하월스에게 “‘톰 소여의 모험’은 전혀 소년의 책이 아니네. 성인들에 의해서만 읽힐 것이네. 그것은 성인들을 위해 쓴 것이니까”라고 말했다.

    1878년 4월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에 간 그는 1879년 6월 ‘유럽 방랑기’(A Tramp Abroad)를 탈고하고 벨기에와 네덜란드 여행을 한 뒤 7월20일 런던에 도착했다. 그리고 1년 반 뒤 미국으로 돌아와 1880년 3월 ‘유럽 방랑기’를 출간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깨달음

    하트포드에 살면서 매년 여름 뉴욕 주 엘마이라에 있는 처형의 크워리 농장에 집필을 하러 간 그는 처형이 지어준 8각형의 동양식 정자 같은 서재에서 하루에 시가 40개비씩을 피우며 집필활동을 했다. 여기서 그가 겪은 한 일화가 있다. 농장의 식모인 60세의 흑인 메리 앤은 주인집 식구들보다 몇 발 떨어진 곳에 앉아서 말끝마다 큰소리로 웃었는데 하루는 트웨인이 물었다.

    “메리 앤은 이 세상에서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지? 탄식도 하지 않고 계속 웃기만 하니 말이야.”

    “주인영감님, 제가 걱정거리가 없다고요? 제 말씀 좀 들어보슈. 1852년인가 애들 아버지와 일곱 아이랑 코네티컷에 살고 있었다고요. 백인 주인이 애들 아버지를 팔아서 남쪽으로 보내고 일곱 아이도 팔려서 뿔뿔이 흩어졌죠.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나서 흑인부대가 북군을 위해 싸우던 중 제가 사는 농장에 진을 치고 야영을 하면서 아침밥을 해내라고 해서 빵을 구워 그들에게 주고 있는데 아이고, 하나님 맙소사, 내 아들 헨리가 분명한데 이마에는 상처가 있었죠. ‘여기서 뭣하고 있는 거냐?’했더니 아들이 살며시 낮은 목소리로 ‘엄마, 내가 돈 벌어서 엄마 사고, 아빠 사고, 동생들 다 사서 같이 살게 해드리겠어요’라고 했어요. 영감나리, 제가 아무 걱정 근심이 없다고요? 슬픔도 없다고요?”

    트웨인은 즉시 메리 앤의 이름만 성경 속에서 딸을 찾는 어머니 레이첼로 바꾸고 들은 대로 얘기를 적어 ‘실화’(A True Story)라는 제목을 붙여 애틀랜틱지에 보냈다. 애틀랜틱 편집인 하월스가 예찬한 이 단편은 사실주의적인 미국 사투리, 솜씨 좋은 이야기 전달의 기교, 강력한 일인칭 성격묘사, 미묘한 사회사와 사회비평 등으로 아직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트웨인이 미국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고 인종차별과 노예제도가 흑인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를 절실히 깨달았음은 분명하다.

    1880년대는 작가로서 트웨인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1880년 ‘유럽 방랑기’를, 1882년 1월에는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를 출간했으며 1882년 4월과 5월 미시시피를 다시 방문하고 1883년 5월 ‘미시시피 강의 생활’(Life on the Mississippi)을 내놓았다. 1885년 2월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을, 1889년 2월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The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를 출간했다. 이런 활동 외에 그는 1881년 페이지 식자기(Page Typesetting Machine) 개발에 투자를 하는 등 사업가의 면모도 보였다.

    이들 책 가운데 미주리 주의 평범한 사투리로 쓴 ‘허클베리 핀’은 대단한 걸작이다. 남북전쟁 이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제1장이 시작된다.

    “여러분은 저를 모르세유. ‘톰 소여의 모험’이란 이름의 책을 안 읽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책 읽지 않아도 괜찮아유. 이 책은 마크 트웨인이라는 분께서 썼어유. 그야 이 책 속에는 그분이 과장한 것도 있긴 있지유. 그러나 대체로 그분은 사실을 썼어유….”

    백인 소년 헉과 흑인 짐은 뗏목으로 미시시피 강을 타고 내려가 둘 다 자기 신분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백인 헉은 백인문화로부터, 흑인 짐은 노예제도로부터 도망치려고 마음속으로 계획 중이다. 단 둘이 친한 친구가 되어 뗏목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며 서로 웃고 얘기하며 강물 위로 흘러갔다. 헉은 짐이 가끔 한숨을 쉬며 “아! 가엾은 조니! 아, 가엾은 엘리자베스!” 하면서 우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헉이 아주 친하게 느껴진 순간, 짐은 마음을 놓고 헉에게 말했다. “헉, 난 노예가 없는 북쪽으로 달아나 일해서 돈 벌면 집사람 사고, 같이 또 일해서 아들과 딸을 사겠어. 만약에 내 아들과 딸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노예폐지론자에게 부탁해서 걔들을 훔쳐달라고 하지 뭐.”

    미스 왓슨의 노예 짐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헉은 미스 왓슨에게 일러바치겠다고 쪽지를 쓴다. 그러자 짐이 헉에게 “헉은 짐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지 뭐”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듣고 헉은 흑인도 백인처럼 가족을 그리워하는 걸 서서히 깨달아간다.

    “내 생각엔 검둥이도 우리 백인들처럼 제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같이 보이진 않지만. 그러나 그건 그렇다고 생각이 돼. (백인들은 왜 그렇다고 가르쳐주지 않았지?)”라고 생각하면서 헉은 “좋아! 그럼 내가 지옥에 가지”라며 미스 왓슨에게 쓴 편지를 찢어버린다.

    흑인도 인간이다

    이 짧은 말이 ‘허클베리 핀’의 절정이다. 다시 말해 백인의 윤리적 각성의 순간이다. 즉 흑인 짐은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떳떳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인간의 결속을 의미한다.

    돈을 많이 번 트웨인은 연 500달러면 일가족이 살기에 풍족했던 1880년대에 집 살림에만 연 3만달러를 썼고, 집으로 매일 손님을 초대했다. 날 때부터 허약했던 장남이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죽었지만 딸 셋이 태어났고 부인도 아직 건강했다. 1885년까지는 전세계로부터 존경과 칭송이 밀려왔다. “나는 이젠 살아났어. 돈 벌 거리가 너무 많아서 무서운 생각이 들어”라고 말했을 정도다.

    ‘허클베리 핀’은 넓게 읽히긴 했지만 매사추세츠의 콩코드에서는 인종차별이나 노예제도 때문이 아니라 저속한 언어와 바르지 않은 문법 때문에 무시당했다. 하지만 그의 천재적 능력을 통해,‘허클베리 핀’을 통해 미국 문학은 유럽의 아류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국의 언어로써 자국이 지니고 있는 심각한 문제의 일면을 표출하면서 아메리카는 비로소 참다운 의미의 문학작품을 가지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가 미국문학은 ‘허클베리 핀’이라는 한 권의 소설에서 시작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때까지 순탄하게 살았던 트웨인에게 어려움이 닥친다. 상상력이 풍부한 트웨인도 죽을 때까지 자신과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트웨인은 50세가 될 때까지 궁전 같은 저택에 살았다. 이때까지 이미 10여 권의 책을 출간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주의를 세련되게 공격했다. 호화주택에다 세 딸도 있고 예쁜 아내가 있으니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자를 나에게 보여 달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두 개의 세계에 직면해 있었다. 명성과 가족, 해학과 비통, 심한 성공욕구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트웨인은 심지어 글쓰기를 ‘펜과 종이의 노예’라고 싫어했다. 이런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여러 발명품에도 투자했다. 특히 페이지 식자기에 1890년까지 당시 돈으로 20만달러라는 거액을 투자했다. 이 때문에 1894년 트웨인은 파산한다.

    하지만 사업 실패는 빚 청산을 위해 트웨인이 창작과 강연으로 복귀하게 됐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트웨인과 페이지 식자기의 관계가 가장 밀접했을 때는 ‘코네티컷 양키’를 쓰고 있었다. 다른 소설과는 달리 저술에 4년 반이나 걸린 이 소설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과학기술에 대한 트웨인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코네티컷 양키’는 SF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출판 당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유럽 방랑기’ 출간 때부터 ‘적도를 따라서’(Following the Equator· 1897)에 정리된 세계일주 강연 여행(1895~96)을 떠날 때까지의 15년간이 작가 트웨인의 전성기다. 그 즈음 그의 인생에 몇 가지 파란이 닥친다. 1893년 미국은 경제공황을 겪게 되면서 1만6000여 기업과 철도회사, 은행 등이 도산했다. 그 여파로 트웨인이 운영하던 웹스터 출판사도 14만달러의 빚을 지게 됐다. 뉴욕타임스 한 부에 3센트, 보통사람의 연봉이 450달러 하던 시절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액수다.

    이런저런 일로 압박을 느끼다가 이제 남은 길은 파산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트웨인에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1893년 그는 유럽에서 혼자 귀국해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부사장 헨리 로저스(1840~1909)를 만났다. 로저스는 트웨인과 채권자 간 교섭을 맡는 등 최후까지 책임을 지고 그를 도와주었다.

    세계일주 강연여행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

    트웨인은 1895년 7월부터 1년간 빚을 갚기 위한 세계일주 강연여행에 나섰다. 뉴욕 주의 엘마이라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대륙을 한 달간 횡단하면서 23회의 강연을 했다. 8월23일 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시드니행 배를 타고 떠나 8월30일 호놀룰루에 도착했으나 콜레라로 상륙하지 못했고 9월11일 피지에 도착했다.

    ‘적도를 따라서’는 부인 리비와 딸 클라라도 동행한 마지막 긴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3권의 여행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지중해 유람기’나 ‘유럽 방랑기’같이 ‘초기의 즐거운 분위기’는 ‘적도를 따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적도를 따라서’를 쓸 때에는 마음이 내키지도 않고, 지친 듯이 여겨졌다. 여기에는 장녀가 24세로 세상을 떠난 이유도 있다.

    1895~96년의 세계여행은 하와이를 떠나 피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실론, 인도, 모리셔스와 남아프리카의 순으로 나아갔다. 트웨인은 이 원고에 관해 하월스 편집인에게 쓴 편지에서 정말로 진실된 말을 썼다. “난 최후의 책을 지옥에서 썼네. 그러나 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이 천국의 유람여행단인 척하면서 썼네. 어느 날 내가 그것을 읽고 그 거짓이 쾌활하다고 내가 속으면, 그 책이 독자를 속였다고 믿겠네. 넓은 바다와 인도를 제외하고 이 세계일주여행을 난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 이런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여행기는 단순히 ‘유쾌함’과 ‘불쾌함’만을 독자에게 주지 않겠다는 의향을 초월하고 있어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적도를 따라서’의 중심적 관심은 세 가지가 있다. 트웨인이 30년 만에 돌아온 하와이가 하나의 중심이다. 또 하나의 중심은 그가 곧잘 알아보는 돈과 정력을 가진 새로운 백인문화다. 세 번째 중심은 트웨인이 알고 싶어하는 영국 식민지 역사의 소름끼치는 무용담인 이방인 문화다.

    하와이 장(章)에서는 대농장 노동으로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학대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 때는 원주민과 마오리족 인구가 다수 살해당한 것을 회상한다. 인도에서는 세습적 계급제도가 고대부터 종교적으로 형성한 불공평한 행위를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에 용맹스럽고 교묘하게 반항한 보아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위의 모든 ‘불공평한 일’에 대해 쓸 때 그 반응은 ‘레오폴드왕의 독백’(King Leopold‘s Solilogue·1905)이나 ‘어둠 속에 앉아있는 사람에게’(To the Person Sitting in Darkness·1901)와 그 외의 말기 작품에 비하면 마치 약음기를 붙인 악기처럼 조용하다. 만 1년 동안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서 트웨인은 5개의 대륙에서 155회의 강연을 했다.

    세계일주 강연여행을 끝내고 트웨인 일행이 영국의 사우스햄튼에 도착한 것은 1896년 7월31일이다. 이후 1910년 4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년의 나날은 트웨인 자신에게나 훗날의 전기작가나 연구자에게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런던의 남서쪽에 위치한 길드포드의 셋집에 자리 잡고 곧바로 ‘적도를 따라서’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일에 집중하려던 순간, 트웨인 일가는 큰 불행을 맞는다. 영국에 남은 셋은 미국에 있는 장녀 수지와 지인을 불러 영국에서 재회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수지의 몸이 좋지 못해서 여행은 무리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에 부인 리비와 클라라가 급히 미국으로 출발했지만 둘이 아직 대서양에 있는 동안 8월18일 수지는 24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다. 병명은 척추골수염. 수지의 죽음은 트웨인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그는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 우주도 없어. 하나님도 없어. 다만 있다면 텅 빈 공간이 있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9월 중순에 리비와 클라라는 지인과 함께 영국에 돌아왔다. 일가는 첼시구역에 셋집을 얻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적도를 따라서’는 잘 팔리지 않았다.

    다음해 로저스에게서 웹스터 출판사의 부채가 완제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다가 로저스는 트웨인에게서 부탁받고 관리하던 돈의 일부를 운용해서 주식으로 5만달러의 이익을 냈다. ‘적도를 따라서’는 이 시점에서 3만부가 팔렸고 서평도 호의적이었다. 이제 부채도 없고 책도 반응이 좋다보니 다시 들떠서 투자를 시작하려 했다.

    어두웠던 만년의 작품들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톰 소여의 모험(클로드 라포엥트 그림)

    이런 상태는 트웨인의 창작 활동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1898년 여름 전 가족이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휴양지에 있었는데 트웨인은 이 시기에 많은 글을 썼다. ‘신비스러운 이방인 44호’(No.44, The Mysterious Stranger·1969 유고 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1906)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The Man That Corrupted Hadley burg·1900)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트웨인의 만년을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그때까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아주 어두운 분위기다. 이들 작품에는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에서 독자가 즐기던 트웨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정말 트웨인이 썼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 사회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비관적인 비판으로 일관하는 글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만년에 생각한 내용이 아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런 생각을 시작한 것은 25년에서 27년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1876년 하트포드의 조간에 영국의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번역한 12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The Rubiyt)가 실린 것을 보고 트웨인이 친구 하월스에게 연락한 적이 있다. 트웨인은 이 시를 대부분 암기하고 있었고 ‘루바이야트’를 모방한 20연의 시를 쓰기도 했다. 오마르 하이얌의 4행시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쾌락 추구를 권하는 주제인데, 이런 주제의 밑에 깔린 철학이 결정론적 철학이다. 결정론적 철학은 페시미즘과 통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1898년에 쓰여졌으나 부인 리비도 딸 클라라도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롭다며 출간에 반대했다. 이 작품은 리비가 이탈리아에서 죽은 다음인 1906년에 250부 한정판으로 익명 출간되었다.

    막내딸 지인의 지병인 간질 치료가 여의치 못해서 트웨인 일가는 미국에 가지 못했다가 1900년 10월에 귀국했다. 트웨인을 기다리던 기자들과 뉴욕 시민들은 마치 개선장군을 반기듯 환호했다. 트웨인은 당시 신문과 잡지에 사회비평이나 정치적 발언을 자주 발표했다. 그런 탓인지 그를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사회비평가나 사상가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귀국 후 트웨인이 힘쓴 것은 제국주의에 관한 비판이었다. 이것은 세계일주 강연여행에서 제국주의의 폐해를 잘 관찰했고,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혐오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뒤따라 당시 제국주의로 흐르는 듯한 미국에 대해 국내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특히 필리핀 침략에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지자, 1898년 10월 ‘반제국주의 연맹’이 결성되고 트웨인도 ‘반제국주의자’라고 스스로 말했다.

    말년의 그에게 가장 큰 타격은 부인 리비의 죽음이었다. 1893년 가을 따뜻한 겨울을 보내라는 의사의 권유로 트웨인은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교 셋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이것은 무익한 여행이었다. 배 여행으로 리비의 건강이 더 악화되었고, 그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부인은 1904년 6월에 심부전으로 이탈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새뮤얼 클레먼스라는 큰 어린이를 마크 트웨인이라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키워준 리비의 공적은 지극히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리비는 부인일 뿐 아니라, 마음의 벗이었고 트웨인의 인기를 조절하는 반향판(反響板)과도 같았다.

    오바마 탄생의 원동력

    작가가 쓴 작품은 독자를 바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독자의 중심에 들어가 변화를 바로 가져오지 못하고 독자의 주변부터 조금씩 변화시킬 뿐이다. 미국의 인종차별을 현재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데 남북전쟁 이후 130년이 걸렸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에 마크 트웨인이 있다고 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트웨인이 숨질 때 병상 옆에는 클라라가 있었다. 리비가 죽은 다음 트웨인의 자서전을 받아쓰던 이사벨라 라이안이라는 비서와 부부 같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작가의 명성에 상처를 입히는 사태는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10년 4월21일 오후 6시20분 공교롭게도 핼리 혜성이 밝은 빛을 내며 하늘에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트웨인은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뉴욕의 어느 장로교회에서 3000여 명의 조객이 모인 가운데 열린 장례식에는 평생 친구였던 하월스 편집인도 있었다.

    하월스는 트웨인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내렸다.

    “에머슨, 롱펠로, 로웰, 홈스. 나는 그들을 다 잘 알고, 모든 우리의 성인들, 시인들, 선견자들, 비평가들, 해학가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닮고, 다른 문인들을 닮았다. 그러나 클레먼스만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문학계의 링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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