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자유기업원이 대학생 2000여 명을 대상으로 ‘2010년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업인’을 설문한 결과 절반을 훌쩍 넘는 64.8%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았다. 특유의 뚝심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정 회장의 드라마틱한 삶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3월20일, 정 회장의 9주기를 맞아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가 생전에 살았던 서울 청운동 집에 현대가(家) 자제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변중석 여사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한국 경제사에 미친 여성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아들 정몽헌 일가와 함께. 왼쪽부터 변중석, 정몽헌, 정지이, 현정은, 정주영
변 여사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니 유독 여성지에서 다룬 기사가 많았다. 남편이 생전에 워낙 화제를 뿌린 인물이었던 데다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해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던 때문일 것이다. 변 여사 인터뷰 기사 중에서 ‘여성중앙’이 1985년 2월호 특집으로 게재한 ‘변중석 여사 스토리’가 변 여사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청운동 집을 찾은 기자는 우선 건설 재벌이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하는 소박한 콘크리트 2층 양옥집에 놀란다.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는 2층 슬래브 주택이었다. 다음은 기자와 변 여사가 나눈 문답의 일부다.(편의상 문장을 일부 축약했다)
▼ 여느 때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십니까?
“다섯 시면 모두 일어나지요. 회장님이 아무리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라 해도 아침이면 꼭 5시에 일어나십니다.” (아침 준비를 하느라 꽤 부산스러울 텐데도 집안은 조용하다.)
▼ 이 집에 사시는 분이 몇 분이십니까?
“회장님하고 나하고 둘밖에 없어요. 여태까지 막내가 있었는데 공부(미국유학)하러 갔어요. 손주들이 요 앞에서도 살고 저 건너에서도 사는데 회장님 뵐 시간도 없고 하니까 아침마다 오라고 해 2층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지요. 며느리들이 와서 거듭니다. 다들 워낙 바쁘시니까 모두 모일 때가 참 드물어요.” (마침 산책을 마친 정주영 회장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섰다.)
“(정 회장) 난 어제 밤 1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오늘 이 약속을 저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했어. 옛날에 내가 서울 처음 올라와서 밥 얻어먹던 쌀집 아주머니가 올해 아흔이셔. 그리고 나한테 돈 꾸어주던 오윤근씨도 아흔이신데 이 두 분을 모시고 저녁이나 대접하려고 했는데 오씨가 보름 전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쌀집아주머니랑 그 집 며느리, 아들들, 그리고 그때 쌀집에서 같이 일하던 이원재씨라고…, 한데 모여서 이야기하느라고 어제는 1시에 들어왔어. 그러느라고 오늘 이 약속을 얘기도 못했는데…. 저 사람 늘 ‘몸뻬’에 쉐타 차림이더니 오늘은 한복으로 되게 차리고 나왔군.”(일동 웃음)
▼ 이렇게 두 분 모시기는 더욱 어려운데 잘 됐습니다.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쓰십니까?
“글쎄요…, 저는 월급도 없고요(이때 정 회장이 “내가 매달 들여오는 월급이 당신 월급이지 뭐야” 해서 일동 다시 웃음), 여기저기서 모아 가져오시는 돈이 200만원가량 되는데 먼저 얼마를 쪼개 저축에 넣고 살림에 쓰지요.”
▼ 직접 회장님한테 타서 쓰십니까? 아니면….
“사무실에서 보내주지요. 큰며느리와 상의해서 살 것 사고 쓸 것 쓰고…, 가계부를 적지요.”
▼ 회장님 식사는 손수 지으십니까?
“서로 하지요. 며느리하고 일하는 아줌마하고….”
▼ 회장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시니까 남편감으로는 낙제점수 아닙니까?
“옛날부터 손님 같으시니까요.(웃음) 아침식사 때만 만나니까요.” (정 회장은 회사일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대건설 회장집이 이 따위냐”
당시 방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청에 변 여사는 “창피해서 어쩌나”를 되풀이하면서 1층 한쪽 구석으로 안내한다. 두 평도 채 안 될 것 같은 작은 방이었다. 한국 최고 재벌의 아내가 이런 방에서 자다니 기자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방 한쪽에는 이불 한 채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고 윗목에는 피난 때 부산까지 갖고 갔다는 낡은 재봉틀과 가족사진으로 가득 찬 사진첩 여남은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변 여사는 재봉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6·25 전엣것이라 구식이죠. (그래도) 웬만한 옷은 요즘도 이 재봉틀로 만들어 입을 수 있어요. 취미라고는 재봉틀질밖에 없어요. 명절 때 며느리들과 손자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게 큰 즐거움이죠. 이 재봉틀이 우리 집안 가보이고 저 사진첩은 내 밑천이죠.”
한편 남편 정 회장의 방은 2층 침대방이었다. 이와 관련해 같은 해 9월에 나온 ‘가정조선’에 두 사람이 층까지 달리해 각방을 쓰는 사연이 변 여사 육성으로 재미있게 소개됐다.
본래 변 여사 방은 2층 정 회장 옆방이었는데, 당시로부터 5년 전에 도둑이 들었던 모양이다. 변 여사는 아들 몽준의 혼사를 앞두고 있어 반지와 시계 같은 패물을 보관해놓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름이다보니 열어놓은 문으로 도둑이 든 것이다. 변 여사가 인기척에 잠이 깨자 도둑은 변 여사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휘발유를 뿌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불 질러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변 여사를 이불로 뒤집어씌웠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부들부들 떨 상황인데, 변 여사가 담이 큰 사람인 게 분명한 것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반격을 했다. 방안을 뒤지던 도둑의 두 손을 붙잡고 “뉘 집인지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소리 안 지를 터이니 타협적으로 하자”고 도둑을 달랬다. 하지만 도둑은 변 여사가 내놓은 패물과 200만원을 쥐고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변 여사의 눈과 입을 반창고로 가리고 전깃줄로 꽁꽁 묶었다. 그러면서 ‘딸라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변 여사는 “딸라 돈은 나도 이름만 들었지 못 봤다”고 맞선다. 그러자 도둑이 “무슨 현대건설 회장집이 이 따위냐”면서 투덜거리며 그냥 갔다는 것이다.
이튿날 이 소식을 들은 정 회장의 반응이 가관이다. 변 여사가 정 회장에게 “아이고 회장님 나 죽을 뻔했어. 도둑놈이 날 꽁꽁 묶어놓고 몽준이 패물 다 갖고 갔어요” 하니 정 회장은 아내 걱정은 고사하고 “왜 도둑놈을 내 방으로 안 데려왔느냐. 내가 돈 쪼금 줘서 타일러 보냈을 것인데”하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변 여사는 혹여 도둑이 남편 방에 가 해코지를 할까봐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는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타박을 받았으니 얼마나 서운할 일인가. 하지만 이런 일화를 기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변 여사의 육성은 경쾌하게 들렸다. 큰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호방함이 보였다. 그래도 ‘그때 그일’에 너무 놀라서 2층은 꼴도 보기 싫어 아예 아래층에 방을 잡았다고 하니 영락없는 연약한 아낙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내를 존경한다”
정 회장은 생전에 펴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아내를 존경한다”는 표현을 썼다.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이, 평생 변함없는 점들을 존경한다. (하기야)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도 할 수 없다.” 이어 “내가 돈을 번 것도 모두 아내 덕택이었다”며 “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사실을 알았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 회장은 생전에 인터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내는) 패물 하나 가진 적 없고 화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저 알뜰하게 간수하는 것은 재봉틀 한 대와 장독대의 장항아리들뿐이다.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그런 점들을 존경한다”면서 “어려웠던 고생을 함께 하면서도 하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했다. 가끔 임원 가족과 한자리에서 어울려 놀 때는 느닷없이 임원들에게 변 여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고는 정 회장 자신이 솔선수범해 절을 했다고 하니 평소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으로서는 최고의 애정표현이었던 셈이다.
변 여사가 얼마나 부자 티를 내지 않고 검박한 사람인지는 곳곳에 전하는 일화로도 확인된다. 생전에 그가 자주 들렀던 슈퍼마켓 종업원들도, 동대문시장 포목점 주인도 변 여사의 정체(?)를 잘 몰랐다고 한다. 어느 해 정초에는 복조리 장사가 조리 값을 받으러 왔다가 변 여사를 보고 “사모님 안 계시느냐”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변 여사가 단골로 다녔던 용산 청과물시장에서는 ‘인심 좋게 보이는 어떤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와서 과일과 채소를 대량으로 사서는 용달차에 싣고 운전사 옆자리에 타고 사라지면 그 할머니가 바로 현대그룹 회장 부인이다’는 말도 돌았다. 생전에 변 여사는 “내 앞으로도 차가 한 대 있지만 시장 봐가지고 용달차 타고 돌아오는 게 가장 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6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던 정 회장이 부부동반 만찬을 열었을 때, 만찬장 구석에 수수한 한복 차림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변 여사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 회장이 나타나 아내를 안내할 때에야 비로소 참석자들이 황황히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천만원도 쓸 사람”
고희를 맞은 1985년 부인(변중석)과 함께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
“가끔 회장님이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었으니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세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대답하죠. ‘걱정 마세요. 당신이 쌀 한 가마니를 누구에게 주라고 시키면 나는 두 가마니를 주는 사람입니다.’”
변 여사는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잘 못 깎는다는 그는 부산 피난 시절, 거리에서 포도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다보니 이익은커녕 밑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부러운 게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러운 거 하나도 없지요. 난 욕심이 없어요. 회장님은 ‘우리 몽구 어멈(정 회장이 변 여사를 부르던 호칭)은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을 줘도 하루에 다 쓸 거다’ 하세요. 사실 내가 그래요. 누가 와서 돈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요. 그래서 (회장님은) 나한테다 돈을 전혀 맡기질 않아요.”
인정이 많았던 변 여사는 1년에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아원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재벌가 아내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돈도 남편 주머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것이었다.
변 여사는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저금통장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액수야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받는 며느리들 마음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재벌가 식구가 되어 사치를 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리라. 변 여사는 또 며느리들에게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해야 하며,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매년 새해 아침에 한복을 한 벌 씩 지어 입히는 자상한 시어머니였다.
변 여사의 마음 씀씀이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남편이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으면서 집도 이곳으로 옮겨가자 밤샘하는 공장직원들의 밤참을 해다 먹였다. 나중에 현대의 규모가 커졌을 때는 직원식당 주방장을 자처하며 구내식당을 책임졌다. 현대사옥이 무교동에 있었던 시절, 변 여사가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있어서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는 직원이 드물었다고 한다. 변 여사는 1991년 병원에 장기입원하기 전까지 매년 메주를 쑤어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아예 경기도 덕소에 메주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했다. 남편의 기업이 커질 때마다 메주 수가 늘어났다.
얼굴 한 번 안 보고 결혼
변 여사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옥마리라는 곳이다. 정 회장 집과 2㎞쯤 떨어져 있는데, 결혼 전에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변 여사는 그 시절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계집애’라는 이유로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과 교회 야학을 통해 한문과 언문을 깨쳤다.
양쪽 집안 간에 다리를 놓은 이는 변 여사 친정과 한동네에 살았던 정 회장의 넷째 숙부다. 성품이 곱고 후덕한 변 여사를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조카 정주영이 결혼적령기에 이르자 맞선을 주선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23일 밤 변 여사 집에서 처음 대면했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총각의 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리는 것 아닌가. 사내는 놀라 얼굴을 감춘 소녀를 힐끗 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지만 그 시절엔 그렇게 이미 양가 친척들이 사돈을 맺자고 약속한 사이라면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친정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다. 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남자 쪽 집안이 너무 기우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당시 청년 정주영은 서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다고는 하지만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점원에 불과했다. 집안도 가난하고 시동생도 너무 많으니 친정어머니로선 딸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변 여사 가족도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 회장 쪽보다는 유복한 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딸을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은 변 여사의 큰오빠 인석씨가 정 회장 편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석씨는 정 회장보다 한 살 위로 송전보통학교 선배였는데, 예비신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변 여사는 결혼해 서울로 올라온 뒤로 친정식구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다. 변 여사가 출가한 직후 친정이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후 분단이 되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다.
정 회장은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 전인 일제 때라도 아내를 친정에 보내주지 그랬냐?”는 질문에 “허허, 그래 내가 못 가게 했지. 돈 벌어 가자고 밤낮 얼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구만”이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변 여사는 “아니에요. 친정 안 보내준다고 야속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당신도 이때껏 고향을 못 가보았잖아요”라고 답했다.
어떻든 두 사람은 1938년 1월8일 혼례를 올렸다. 정 회장 나이가 21세, 변 여사 나이 15세였다. 변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첫날밤, 무슨 사람이 이렇게 크고 무섭게 생겼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浮沈 많은 사업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
정말 3개월이 지나자 남편으로부터 서울로 오라는 기별이 왔다. 교통수단이 마땅하지 않던 시절이라 변 여사는 시집이 있는 강원도 통천에서 서울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남편을 만나 따라간 곳은 지금의 대학로가 있는 동숭동 뒷산 ‘낙산’이라는 산동네. 꼭대기 허름한 판잣집 문간방이 거처였다. 변 여사의 회고다.
“시골서는 아무리 못살아도 작은 초가집에서라도 살았는데…. 어찌나 서글프던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 시골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님이 ‘서울에선 다들 이렇게 산다, 얼마 동안만 참자, 남들처럼 우리도 곧 잘살 수 있다’고 달래시더라고요. 그래서 눌러앉기로 했지요. 하지만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남편의 사업은 굴곡이 많았다. 정 회장이 쌀가게를 하며 자리를 잡을 만하니까 일제가 1939년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경일상회’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한 지 3년이 못되어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자 난데없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리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직원의 실수로 불이 나 잿더미로 변했다. 남편은 굴하지 않고 평소 신용이 두터웠던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재기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서울에 다니는 승용차라고는 몇몇 귀족과 총독부 고위관리, 일본군 사령부 사단장과 참모장, 조선은행 등 큰 일본회사 몇 군데가 가지고 있는 게 전부였다. 수리공장이 별로 없다보니 차가 고장 나면 고관대작들의 발이 묶였다. 빨리 고쳐주는 곳이 최고였다. 정 회장은 열흘 걸릴 것을 사흘에 고쳐주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며 수리비를 많이 받았다. 장안의 고장난 자동차들이 정 회장이 운영하는 신설동 ‘아도서비스공장’으로 몰려들었다(아도서비스란 애프터서비스의 일본식 발음).
정 회장이 현대그룹의 모체가 되는 건설업을 시작한 것은 광복 후다. 광복 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사업에 나선 그는 건설업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한 번에 거래하는 돈은 기껏해야 30만~40만원 정도인데, 건설업자들은 1000만원씩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정 회장은 1948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해체하고 직원 대여섯 명으로 ‘현대건설’이라는 새 간판을 내걸었다.
정주영은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세 번이나 가출을 시도하며 주어진 운명에 맞선 젊은이였다. 무엇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절대 긍정의 소유자였다. 그의 ‘18번’은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평소에도 “겨울은 밤이 길어 좋고, 여름은 해가 길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렇다보니 현대그룹 회의석상에서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금기시됐다. ‘안 된다’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정 회장이 부하 직원들을 다스리는 방식도 혹독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자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호칭도 ‘아버지’나 ‘아빠’가 아니라 ‘회장님’이었다.
엄부자모(嚴父慈母)
엄한 남편을 모시고 사는 변 여사는 늘 조마조마했다.
“아이들도 아버지가 무서우니까 무척 어려워했어요. 자나 깨나 조심 조심이었죠. (아버지)묻는 말씀에나 대답할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항상 나를 통해서 얘기했지요. 아이들을 감싸고도는 것이야말로 내가 집에서 해야 할 큰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용돈 1만원을 달라고 하면 5000원만 주라는 것이 남편의 지시(?)였지만, 변 여사는 꼬깃꼬깃 몰래 감춰둔 돈을 자식들에게 건네주곤 했다.
생전에 한 기자가 “자식들 키울 때 속상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자 변 여사는 “속을 썩여도 욕 한마디 안 하고 지냈다. 원래 내가 속상할 땐 말을 안 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젖을 물리고 애와 함께 울었으면 울었지 누구한테 말을 안 했다. 오죽하면 시집와서 회장님이 벙어리를 데리고 왔다 했을까”라고 답했다. 변 여사의 말이 이어진다.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 기를 때가 가장 어려웠다. 여럿이다 보니 별 놈 다 있잖은가. 회장님은 늦게 귀가하시니까 집안 돌아가는 사정은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내 책임이 무거웠다. 회장님이 애들 야단칠 때는 내가 야단을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내 잘못인 것 같고…. 애들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자식을 아홉이나 두었으니) 수험생활을 9번이나 한 셈이다.”
시동생들도 큰형님을 무서워하다보니 의논할 일이 있으면 모두 형수인 변 여사를 통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여성중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변 여사는 정 회장을 “손님 같은 남편”이라고 했다. 잦은 출장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비우고 부부동반으로 출장을 간다 해도 하루 종일 아내를 호텔방에 두고 자기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무심한 남편이었다. 남편의 부재를 견디는 변 여사의 유일한 마음 다스리기는 ‘기도’였다. 남편이 현장에 나가 밤을 새울 때, 자신도 밤을 새우며 남편 하는 일이 잘되기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1985년 2월호 ‘여성중앙’ 기사에 소개된 기도문의 일부다. 구구절절 가슴을 따뜻하게 하면서 힘을 주기도 하는 기도문이라 다소 길지만 인용해본다.
‘주여, 약할 때 자기를 분별할 수 있는 강한 힘과 무서울 때 자기를 잃지 않는 위대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힘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도록 가르쳐주시옵소서. 웃을 줄 아는 동시에 울음을 잃지 않는 힘을, 미래를 바라보는 동시에 과거를 잃지 않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을 다 주신 다음에 이에 대하여 유머를 알게 하여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시고, 자기 자신을 너무 중대히 여기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소박하다는 것과, 참된 지혜는 개방적인 것이요, 참된 힘은 온유한 힘이라는 것을 명심토록 하여 주시옵소서.’
변 여사는 기도문을 몇 번이고 외고나면 남편이 지구 반대쪽에 가 있을 때라도 집안이 훈훈해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기도문을 신문지 서너 장 펼친 것만한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어놓았을 정도다. 그리고 9남매가 사는 집집마다 기도문을 안방에 걸어놓고 며느리들도 읽게 했다고 한다.
변 여사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남편에게 아침식사를 차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종일 종종걸음 했다. 정 회장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잠을 설쳐가며 만든 순두부를 아침식사에 내놓기도 했다. 정 회장이 생전에 순두부 마니아였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변 여사는 옛 두부 맛을 내기 위해 강릉에서 바닷물을 길어와 그 물로 순두부를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 가끔 자식들 집에 방문해서도 고추장, 된장 담가주고, 반찬 해주느라 가만히 앉아 쉬지를 않았다고 하니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 모습 그대로다.
생전 변 여사는 자신의 저녁일과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하는 아줌마하고 텔레비전을 봐요. 특별히 좋아하는 프로는 없고 뉴스를 열심히 보는 편인데 회장님이 나오면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아요. 회장님이 오셔야 잠자리에 드는데 10시고, 11시고 대중없어요. 집에 돌아와도 신문만 보시다가 주무세요.”
무간섭의 내조
생전에 변 여사는 남편이 모든 일을 워낙 잘 알아서 해 자신은 그저 “네, 네” 하고 살았을 뿐이라고 했다. 남편이 집안일에 일절 신경 쓰지 않도록 도와준 것밖에는 달리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들들에게 기업을 맡길 때도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난 뒤에야 아내인 자신에게 통보(?)를 해주어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사는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내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회장님이 회사에서 돌아와서 휘파람을 불면 회사 일이 잘되나보다 하고 신경질을 내시면 돈이 달리나보다 했지요. 회장님은 당신 마음대로 사는 분이죠. 저는 부담이 없어서 그것이 더 좋아요. 내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는 양반이죠. 물론 선물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회장님하고 같은 밥상머리에 앉아본 적도 제대로 없고요. 워낙 시동생들도 많고 자식도 많고 하니까 해먹이는 데 바빠 뭐가 뭔지 모르게 세월이 이렇게 후딱 갔어요. 당신 따라 나도 같이 바쁘게 살다보니 오늘에 이른 것이죠. 그래도 평생 만족하고 살아왔어요.”
‘변 여사는 정 회장이 여자를 좋아해 밖에서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소문을 들어도 그저 미소만 지을 뿐 한 번도 남편에게 제동을 걸지 않아 ‘보살’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변 여사는 일생을 화 한번 내지 않고 살았을 만큼 무던했던 것은 물론 외부사람들에게도 관세음보살 같은 음덕을 많이 베풀었다고 한다.’(‘우먼센스’ 2004년 5월)
변 여사의 이런 마음은 남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 회장이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자 ‘주간조선’(1992년 12월)에서 ‘아내가 본 후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후보 아내들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변 여사는 당시 기고한 글에서 ‘남자는 자상하고 가정적인 것보다 밖에서 남자답게 일을 해야 맛이 나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런 나를 두고 ‘무간섭의 내조’라고 말하는 것을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다음은 글의 일부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었을 때 그분 몰래 어떤 차인지 타보기도 했다. 대견스럽기도 했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 생각으로는 ‘과연 될까’하는 일을 많이도 이루었다. … 조선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살아오면서 참으로 신통하게 여겨지는 일이 하나 있다. 옛날 서울의 낙산에 살 때, 하루는 남들처럼 한강에 놀이를 갔었다. …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보트를 타다가 그분의 서툰 노질로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그런 사람이 엄청난 최대의 조선소를 지었다니…. 마음먹은 것은 꼭 달성하려는 의지와 일을 시작하면 지칠 줄 모르고 밀어붙이는 힘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분은 일하는 데서도 호랑이 같다.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이 닥치면 두 눈에서 불꽃같은 것이 튀는 걸 나는 안다. 맥없는 눈초리는 본 적도 없지만 애당초 내가 싫어했다. … 남들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 비결은 간단하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이다. 언제나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 신문을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 시간을 알뜰하게도 쓴다. 혼자서 열심히 공부한 것도 많다. 이런 양반이 정치인이 되어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해선 안 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던 양반이라 나는 정치를 하는 데도 큰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진심은 통하듯 큰 뜻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록 남편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내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남편의 심정이 어떨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내가 보내는 무한대의 존경과 사랑이야말로 남편으로 하여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끄는 원천이 아닐까.
생전 변 여사는 쉽게 이혼하는 젊은이들의 세태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때는 한번 시집가면 그 집에서 살다 죽어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애들은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래도 타일러야지요. 남자들은 애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달래고 구슬려 가면서 살아야지. 참고 살면 또 좋은 일도 있고. 남자나 여자나 한 40은 넘어야 철이 들어요. 그러니 철나자 망령이라잖아요.”
가장 큰 슬픔
건강하던 변 여사는 맏아들 몽필씨가 198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 충격으로 건강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1990년에는 4남인 몽우씨마저 자살로 생을 마치자 더는 버틸 힘을 잃었는지 이듬해 병원에 입원해 임종할 때까지 1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5남인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마저 대북사업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2003년)했으니 변 여사는 생전에 3명의 자식을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다.
고인은 앞서 소개한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슬픔은 두 아들과 큰며느리를 먼저 보내야 했던 일이다. 그때마다 그분(정 회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인과응보야. 결국 돈은 인간의 목적도 행복도 아니야’하며 침통해했다’고 적고 있다.
고인은 입원 초기에는 간간이 바깥나들이도 했으나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고혈압에 뇌세포 파괴에 따른 운동장애는 물론 기억력 상실을 앓았다. 말년에는 거의 의식이 없어 2001년 남편 정 회장과 2003년 몽헌 회장 사망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변 여사는 2007년 8월17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묻힌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함께 묻혔다.
● ‘가정조선’ 1985년 9월호 ‘가정조선이 만난 사람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부인 변중석 여사’
● ‘여성동아’ 1992년 12월호 ‘현대그룹 ‘고모’로 불리는 정희영이 최초로 털어놓은 ‘올케 변중석 오빠 정주영’ 패밀리의 공개 안 된 종교와 집안 얘기’
● ‘여성조선’ 2007년 9월호 ‘조강지처의 표본 : 10년 투병 끝에 작고한 현대가 안주인 변중석 여사의 검박한 인생 86년’
● ‘여성중앙’ 1985년 2월호 ‘본지완전독점 138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 스토리: “처음으로 속 이야기 다 털어 놓았습니다”
● ‘여원’ 1987년 3월호 ‘입체분석: 삼성 이별철 회장의 아내, 박두을 vs 현대 정주영 회장의 아내, 변중석: ‘분홍 저고리’와 ‘몸뻬’의 1900년대 한 시절’
● ‘우먼센스’ 1996년 5월호 ‘독점: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의 7년 투병에 얽힌 눈물겨운 사연 독점공개: 외로운 병상에서 파킨슨씨병과 싸우고 있는 변 여사의 감동 투병생활’
● ‘우먼센스’ 2004년 5월호 ‘본지특종2: 고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 15년 만에 본지가 최초로 만났다!: “아산병원 특별병동에 있는 그녀는 의외로 건강한 모습. 치매나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과 달랐다”’
● ‘주부생활’ 2006년 6월호 ‘현대가의 어머니 변중석 여사: 17년째 아산병원에 입원 중인 근황’
● ‘주부생활’ 1987년 7월호 ‘책속의 책: 삼성 이병철 회장 부인과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부인 내조 50년 비교 박두을·변중석’
● ‘주간조선’ 1992년 12월10일 ‘대선특집 후보 부인이 본 남편’
● ‘필’ 1997년 12월호 ‘8년째 입원중인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 ‘의식 또렷하고 가끔 외출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