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府’의 드라마틱한 쇠락
지금 신문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신문의 위기는 현저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전신인 한국언론재단이 2년마다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신문 가구구독률은 1996년 69.3%에서 2008년 36.8%로 드라마틱하게 하락하고 있다. 구독시간도 1998년 40.8분에서 2008년 24분으로 반 토막이 났다. 신문에 대한 신뢰도 또한 이미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뒤졌다. 금융감독원에 공시된 10개 전국종합지 등 36개 신문사의 2008년 매출도 2007년 대비 10.47% 줄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신문을 읽지 않아 신문의 미래도 캄캄한 상황이다. 신문 산업의 쇠락은 세계적 현상으로, 미국 트리뷴이 파산하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적자를 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주요 신문대국이 모두 광고시장 축소와 판매 부진에 따른 구조조정의 진통을 겪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에 이은 제4의 권력, 사회의 목탁으로 추앙받던 신문이 내리막을 걷게 된 건 디지털영상시대의 도래에 따른 미디어 소비자의 변화가 한 원인일 것이다. 보여주는 콘텐츠가 읽는 콘텐츠를 압도하게 됐다.
그렇다면 위기에 봉착한 신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문 정보의 경쟁력을 높이고 신문의 본래적 기능을 되살리는 방안이 유용할 것 같다.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 해답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정보의 편식, 인식의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균형적이고 심층적인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신문의 특징이었다. 사실 이러한 기능은 정보가 사회 발전을 리드하는 미래의 정보사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신문의 날 표어가 단순하다고 지적했지만 사실 그 표어대로만 신문을 제작한다면 신문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고 본다.
‘당신은 지금 세상을 읽고 있다’는 표어는, 신문은 읽는 즐거움을 통해 세상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는 그냥 기사가 아니라 ‘잘 쓴 기사’‘좋은 기사’가 중요하다. 읽는 즐거움을 주는 좋은 기사라야 달라진 독자에게 먹힌다. 사실 뛰어난 자질과 책임의식을 지니고 신문사에 입사한 기자들이 하루하루 마감에 쫓기며 세월을 보내면서 초발심을 유지하고 있는지 회의적이다. 일상의 일에 치여 살면서는 결코 좋은 기사를 쓸 수 없다.
그냥 기사로는 이제 안 통한다
‘사실을 전합니다, 진실을 전합니다’라는 표어는 한국 신문의 정파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실을 놓고도 일부 신문들이 자사의 이념지형에 따라 정반대로 보도하는 장면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로 보아왔다. 언론인의 주관성이 배제될 수는 없지만 직업 언론인이라면 전문가적인 여과과정을 거쳐 뉴스의 객관성을 획득해야 거기서 설득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럴 때 독자는 자신의 이념성향과 관계없이 그 기사를 신뢰하게 된다.
‘진실을 전한다’는 것도 녹록지 않은 일이다. 이 문제는 권력이나 거대한 집단과 종종 충돌하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부사장으로 재직 중인 밴 브래들리는 1972년 6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의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를 뒷받침해 1974년 8월 닉슨 미국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당시 사건 정보를 제공했던 비공개 정보원들로부터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진실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진실보도는 그런 것이다. 오늘날 진실보도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대기업 등 광고주와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언론사의 경영위기로 인해 상업적 이해가 걸린 사안에 대한 언론의 비판 기능은 크게 약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민은 신문의 날에 보낸 표어를 통해 당연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신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영상정보의 범람 속에서 완결성 높은 심층적인 활자뉴스는 오히려 그 가치가 더욱 빛날 수 있다. 기자와 신문사는 편견을 버리고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바쳐 ‘사실과 진실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뉴스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신문이 종이 산업에 머물지 않고 디지털 종합산업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