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일본의 새로운 힘, ‘선택과 집중’을 주목하라

서양 경제학자가 쓴 ‘일본 쇠퇴론’ 반박

  • 글·울리카 샤다│UC샌디에이고 태평양지역연구대학원 교수│번역·강찬구│동아시아재단 간사│

    입력2010-04-30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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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요타자동차의 대규모 리콜 사태 이후, 이른바 ‘일본 쇠퇴론’이 곳곳에서 운위된다. ‘신동아’ 4월호에 실린 보고서를 통해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고품질 신화의 붕괴와 만성적인 저성장으로 인해 일본 경제가 돌이킬 수 없는 하향세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1990년대 말 이래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통해 기존의 소비재 전자제품 대신 중간재 부품 등 고수익 부문으로 차근차근 이동해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분석이 대표적이다. 관계법령과 산업구조 전체를 재편하는 이 전략적 변화를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시장점유율과 무역수치로만 일본 경제의 오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다. 영문 계간지 ‘글로벌아시아’ 봄호에 실린 일본 산업경제 전문가의 관련 글을 번역, 게재한다. <편집자>
    일본의 새로운 힘, ‘선택과 집중’을 주목하라

    일본 교토에 자리한 첨단계측기기 제조업체 시마즈제작소 공장 내부. 시마즈제작소는 전 직원의 3분의 1가량을 연구개발 부문에 배치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대(對)일본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보고 있다. 자국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부품이나 소재뿐만 아니라 특수강 등 자재 조달하는 데 있어서도 일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일 당장 일본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가정해보자. 삼성은 더 이상 고급 LCD TV를 만들어낼 수 없게 될 것이며, 애플은 아이폰을 생산하지 못하게 될 테고, 보잉과 에어버스 또한 비행기 생산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일본 기업들이 경쟁우위를 잃었다는 말은 오늘날의 전 세계적인 부품 공급망 현실을 무시한 20세기식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면 스크린이나 휴대전화, DVD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등 고급 소비재 전자산업은 모두 이러한 상황의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2006년 일본 제조업 백서에 따르면 이 산업 부문에서 일본 기업들이 차지하는 세계시장 점유율은 2005년의 25%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이가 한국과 대만의 경쟁업체들이 이제 일본을 앞질렀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분명 이전에는 일본이 이러한 고급 소비재 전자제품 시장을 지배해왔으니까 말이다.

    고수익 부문으로 이동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2006년 백서는 또한 반도체, 회로기판, 레이저헤드 등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중간재 부문에서 일본 기업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거의 50%에 육박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고급접착제나 수지, 평면스크린을 어둡게 만들어 밝은 곳에서도 화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편광판 등의 부품 소재 제조 부문에서 일본 기업들은 66% 이상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자랑하고, 반도체나 LCD패널 생산에 필요한 고급기계 시장의 일본 기업 점유율도 50%가 넘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른바 ‘수익의 스마일리 곡선(smiley curve of profits·모양이 스마일리 아이콘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잣대로 들여다보면 사실 굉장히 반길 만한 현상이다. 이 곡선은 U자형 곡선으로서, X축은 한 제품의 생산과정에 나타나는 여러 단계를 보여주고 Y축은 그 단계마다 발생하는 수익마진을 나타낸다. 전자제품에서 U자형 곡선의 저점은 생산단계의 중간에 해당하는 단순한 제품조립 단계다. 다시 말하자면, 소비자가 TV 하나를 구매할 때 실제로 많은 마진이 돌아가는 것은 제품의 차별화를 가져오는 부품소재 등의 기본재 제조 부문과 소매점에서의 직접 판매 단계 양쪽 끝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 말 이래 일본의 선도적인 기업들은 이 스마일리 곡선의 저점에서 고점으로 옮겨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경주해왔고 이를 통해 업계 내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재조정해왔다. 이 같은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거친 기업들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차별화된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현재의 변화를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고 일부 산업 부문은 여전히 전환기에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부 기업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고급 가전제품 대량생산 체제에서 누렸던 비용우위가 이제는 다른 나라 기업들로 옮겨갔다는 현실을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고비용 생산구조를 가진 국가는 스마일리 곡선의 저점에 해당하는 단순한 조립단계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아직은 기술우위에 서기 위한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수익률이 훨씬 큰 기본재 제조 부문으로 옮겨가는 것이야말로 일본 기업이 추구해야 하는 위치 재조정 전략의 키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전략적 변화

    일본의 새로운 힘, ‘선택과 집중’을 주목하라

    카메라 필름이라는 전통 생산제품의 쇠퇴를 새로운 사업부문 개척으로 넘어선 일본 후지필름의 FPD 패널 공장.

    흔히 일본의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 무렵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일본의 주요 기업들은 과격한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화를 주저하던 기업들조차 부실채권 위기, 특히 2002년 금융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은행들이 부진한 기업들을 재편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함에 따라 변화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은행들이 대출을 받은 기업을 압박해 부진한 사업 부문을 정리하도록 함으로써 손실을 메우려는 상황에서, 일부 기업들은 고수익성 구조로 복귀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기회를 선지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덩치 큰 기업들은 군살을 줄였고 분리된 사업부문은 당연히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이렇듯 새로운 기업자산 시장이 발전하는 동시에, 1998년 외환법 개정을 통해 일본 내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가 사라졌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 도쿄 주식거래소 내 외국인 주식 보유율은 8%에서 28%로 증가했다. 이전의 대다수 얌전했던 주주와 달리 새로 등장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기업의 수익과 사업모델의 건전성을 눈여겨보며 고수익을 창출하는 데 기업 활동의 초점을 맞추도록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잭 웰치는 제너럴일렉트릭의 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한 바 있다. “1등이 아니면 2등이 되라, 아니면 고치든지, 매각하든지, 폐쇄하라”는 문장이었다. 이것이야말로 1990년대 말 일본 최대 기업의 총수들이 따랐던 모토다. 21세기 초반 일본 재계가 내세운 가장 두드러진 구호는 바로 ‘선택과 집중’이었다.

    비핵심 자회사들은 문을 닫게 하고,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매각하고, 경쟁사들로부터 분리된 기업들을 인수해 핵심사업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은 넘기 어려운 상법상의 규제 장벽에 직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1998년과 2006년 사이 일본은 매년 상법을 개정해가며 기업재편과 구조조정을 가능케 했다. 근로기준법 같은 관련법령 또한 개정됐다. 2006년에는 신(新)기업법이 구(舊)상법을 대신했고, 2007년에는 회계제도 개혁을 위한 일본판 사베인스-옥슬리 법(Sarbanes-Oxley Act)을 제정해 기업경영에 부여해준 자유에 걸맞게 주주들의 권리도 확장했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이 기업 활동을 위해 개선해온 법령 정비를 주시하지 못했던 이들은 이러한 새로운 제도가 어떤 환경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지배구조에 관한 이러한 법률 개정과 변화, 그에 따른 경영 인센티브의 확대는 일본 기업들이 기존의 전략을 버리고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게 되는 변곡점으로 작동했다. 당장 니케이500 지수에 상장돼 있는 기업 가운데 75% 내외가 일부 기존 사업 부문을 접거나 여타 사업 부문을 인수, 통합하거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의 방식으로 최소 한 번 이상의 구조개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수치는 미국과 비교해보면 더욱 극적이다. 1980년대 미국 대륙에 불어닥친 구조개편 열풍의 와중에는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중 절반 정도만이 회사 규모를 줄인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그만큼 일본의 ‘선택과 집중’ 물결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의 신(新)리더십

    이제까지 살펴본 전략적 위치 재조정을 통해 일본 기업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새로운 기술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첫째, 대기업들은 나아갈 방향을 다시 설정했다. 한 예로 파나소닉은 헤어드라이어와 반도체시장에서 발을 뺐다. 현재의 파나소닉은 ‘삶을 위한 아이디어(ideas for life)’라는 슬로건 아래 고급 가전제품 등 4개 분야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둘째, 방향 재설정을 마친 기업들은 이전에는 직접 자체 제작하던 투입 물자를 외부로부터 구매하는 방식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이들이 상당수의 부품제조 부문에서 손을 떼면서, 혁신적인 중소기업들이 성장해갈 수 있는 길을 터주게 된 것이다. JSR, 이비덴, 닛토덴코 같은 회사들은 일반 소비자에게 잘 알려진 기업들이 아니므로 쉽게 간과되지만, 실제로는 만만찮은 역량을 갖춘 신생 다국적 기업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대기업들도 과거에 부흥했던 사업을 청산하고 미래 사업에 주력하고 있는데, 후지필름홀딩스나 신에쓰화학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들은 이제 과거 20년 전 모습과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 토라이(TORAY)와 테이진(TEIJIN)은 더 이상 고루한 직물섬유회사가 아닌 소재개발회사다. 이들 두 기업은 세계 탄소 섬유 시장의 70%를 주무르고 있고, 각종 환경관련 필터와 의료용 인조박막 시장을 이끌고 있다.

    진짜 주목해야 할 것

    이러한 신(新)산업 위계구도의 등장은 ‘선택과 집중’의 노력이 일궈낸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 될 것이다. 일본이 경쟁우위를 잃었다고 보는 이들은 20세기 수출시장을 이끌었던 기업들의 행보를 토대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분명 일부 기업은 경쟁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방향 재설정 작업이 진행 중이며, 이 과정은 보통 족히 10년은 걸리는 일이다. 또한 남들과 차별화된 능력을 갖춘 신생 기업들이 부상하고 기존 기업들이 신생 산업부문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늑장을 부린 일부 기업들의 몰락을 상쇄했다.

    이들의 일차적 목표는 시장점유율이 아니다. 대신 이들은 수익을 지향한다. 이들의 새로운 강점은 관심을 갖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제품 분야에서 빛을 발한다. 누구나 아는 일본의 대기업들을 분석하는 데에만 집착하다 보니 일본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전략적 방향 재설정이 과연 어떤 방식을 통해 장기적인 수익창출로 현실화될 것인지는 판단 내리기에 아직 이른 감이 있다. 방향 재설정 작업의 결과물이 거시경제적 수치에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앞서 말했듯 게으름을 피우던 많은 기업이 여전히 방향 전환을 끝마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1998년과 2006년 사이에 벌어진 일본의 전략적 변화는 한 사건이나 한 법안, 혹은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기, 세계화, 내부로부터의 압박과 사회변화 같은 다층적인 변수들이 융합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그 핵심내용은 쉽게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잘못된 예측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최종 제품에만 강조점을 두는 무역통계의 숫자에 기대어 일본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것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영어 원문은 http://globalasia. org/V5N1_Spring_2010/Ulrike_Schaede.html 참조)

    *‘글로벌아시아(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나얀 찬다 예일대 교수, 후나바시 요이치 아사히신문 주필,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교수 등 다양한 국적의 석학들이 편집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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