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행정가형’ 자승 vs ‘정치가형’ 명진 충돌 내막

소통은 간 데 없고 불신만 나부껴

  • 안기석│출판국 기자 daum@donga.com│

    입력2010-04-28 18: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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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가형’ 자승 vs ‘정치가형’ 명진 충돌 내막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

    ‘소통과 화합’이라는 돛을 올리고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자승호(號)’가 서울 강남 봉은사의 ‘명진풍(風)’ 역풍에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해 10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사상 처음으로 조계종 의회 격인 종회 의원들의 계파 연합에 의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자승스님은 취임식 전후부터 지역, 계층, 남북, 이념, 종교 여부를 떠나 소통과 화합을 이루기 위해 폭넓은 행보를 보여왔다. 불교계의 중흥을 이루고자 하는 불자들의 기대로 자승호는 한동안 순풍을 안고 달리는 듯했다.

    한편으로 그동안 주지가 바뀔 때마다 분쟁의 대상이었던 봉은사는 현 주지인 명진스님이 전임 총무원장이던 지관스님의 권유로 ‘무혈입성’한 뒤 재정투명화 등 사찰 개혁으로 신도수가 늘어나고 재정수입이 불어나 불교계 안팎의 시선을 모아왔다. 특히 고(故)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불교 대표로 참석해 불교의식을 치렀던 명진스님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강도 높은 시국비판을 해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동안 총무원은 조계종의 항로를 ‘수행, 포교, 교육’ 3대 분야 강화로 정했고 봉은사는 사찰개혁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 불교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만큼 양측이 충돌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자승스님과 명진스님은 오랜 친분을 유지해온 사이다.

    총무원과 봉은사 사이에 짙은 먹구름이 깔리기 시작한 것은 3월11일 오후였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법정스님의 입적으로 불교계를 비롯한 전국이 추모 분위기에 젖어있던 때,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종법안을 49대 21로 통과시킨 것이다.



    ‘부자절’로 불리는 봉은사는 그동안 특별분담금사찰로 지정돼 일정한 분담금만 총무원에 내면 됐다. 그러나 직영사찰로 전환되면 총무원장이 주지를 겸임하고 주지는 재산관리인 기능만 맡게 된다.

    명진스님은 3월14일 오전 11시 봉은사 법왕루에서 열린 일요법회에서 “신도들과 소통 없이 결정된 직영사찰 전환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후 명진스님은 매주 일요법회에서 ‘여권의 외압설’과 ‘정권과의 야합설’을 제기하며 총무원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였다.

    총무원은 처음에는 여권외압설이 근거가 없다며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의혹 제기의 수위가 점차 올라가자 명진스님 발언 중 사실과 다른 대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소통을 강조한 자승스님이 평소 친분이 두터운 명진스님과는 소통이 끊어진 것일까. 많은 네티즌이 불교 관련 인터넷 매체에 비판과 지지의 댓글을 올렸고 불교계 내에서도 ‘봉은사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까웠던 두 사람의 관계는 왜 악연으로 바뀌었으며 봉은사 사태의 실체는 무엇일까?

    대조적인 사판승과 수행승

    자승과 명진, 두 스님의 성격과 행적은 대조적이다.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자승스님은 차분하고 치밀한 ‘행정가형’이고, 명진스님은 격정적인 ‘정치가형’이다. 자승스님이 배려심이 강하고 친화력이 있다면, 명진스님은 의협심이 강하고 카리스마형이다. 총무원에서 행정 일을 담당하는 사판승 출신 자승스님이 보수적이라면 선원에서 수행하는 수좌 출신인 명진스님은 진보적인 편이다.

    총무원장이 되기 전까지 자승스님의 행적은 총무원 행정직과 종회의원 활동이 주를 이룬다. 주로 불교계 내부의 일에 종사하다보니 사회적으로 알려진 일화는 별로 없다. 자승스님이 서울 관악산 연주암에 있을 때 등산객들에게 무료로 비빔밥을 제공한 일이 회자될 정도다.

    ‘행정가형’ 자승 vs ‘정치가형’ 명진 충돌 내막

    봉은사의 조계종 직영사찰 전환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이 3월28일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열린 일요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자승스님은 1972년 해인사에서 지관스님에게 사미계(입문용 계율)를 받고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에게서 구족계(승려용 계율)를 받았다. 동화사와 봉암사에서 잠시 수행하다가 수원포교당에서 주지를 시작, 삼막사와 연주암 주지를 지냈다. 총무원에서는 1984년부터 교무국장과 호법국장, 재무부장과 총무부장 등을 거쳤다. 1992년에 10대 중앙종회 의원으로 진출해 중앙종회 사무처장을 거쳐 12대와 13대 종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중앙종회 의장을 맡았다. 그 사이에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인 과천종합사회복지관장을 지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2004년에 은사인 정대스님이 설립한 은정불교문화진흥원 이사장을 맡았다. 이처럼 총무원의 행정요직과 중앙종회 경험을 두루 쌓은 뒤 33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대중연설에 능한 명진스님은 ‘운동권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이한 행적에 따른 일화도 많다. 안동의 재래시장에서 건강이 악화된 도반에게 먹이려고 쇠머리고기를 들고 다닌 이야기나 성철스님과 대면하여 당돌하게 법거량(法擧揚·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을 한 이야기 등은 꽤 알려져 있다.

    명진스님은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군대에 갔다 온 뒤 1974년 법주사 탄성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혜정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975년부터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망월사 용화사 등지에서 오랫동안 수행생활을 했다. 1987년에는 불교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개운사 주지를 지냈고 이듬해 대승불교승가회장을 맡았다.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회의 상임위원을 지냈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이듬해에는 본부장을 맡았다. 2005년 봉은사 선원장을 거쳐 다음해 주지를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 실업자지원센터 이사장, (재)윤이상평화재단 제2기 부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제2기 공동대표 등을 맡기도 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두 사람의 만남

    이처럼 성격이나 행적이 판이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인연에 대해서는 명진스님이 3월21일 일요법회에서 밝힌 적이 있다.

    “걸망을 지고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돌아다니다가 1986년 해인사 승려대회를 계기로 사회와 종단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지금의 총무원장인 자승스님과 인연이 남다르게 깊어졌습니다.”

    이와 관련해 황찬익 봉은사 문화사업단장은 “1984년경 해인사 선방에서 두 분이 처음으로 만난 것으로 안다. 두 분이 모두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어서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특히 명진스님은 가족과 친인척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본 것이 인생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봉은사 일요법회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죽음 앞에서도 존재의 덧없음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음만한 스승이 없습니다. 저는 여섯 살 무렵에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봤습니다. 그 스산한 풍경들은 머릿속에 지울 길이 없이 각인되어 그때부터 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저는 너무 빨리 죽음과 고통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어진 아버지와 외할머니, 삼촌들의 이른 죽음은 끊임없이 저를 삶과 죽음, 고통의 문제와 절박하게 맞서도록 했습니다.”

    명진스님은 해군에 복무 중 탑승한 군함이 전복하면서 목숨을 잃은 동생으로 인한 충격도 컸다고 한다. 최근 일요법회에서 천안함 실종 해군들을 거론하며 동생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명진스님이 기거하는 봉은사 주지방에 들어서면 뒤편에 두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나는 스님이 출가한 직후의 앳된 얼굴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1987년 민주화운동 때 시위를 하다 전경들에게 저지당하는 모습이다. 죽음을 화두로 삼아 실존적 고민을 하던 명진스님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행정가형’ 자승 vs ‘정치가형’ 명진 충돌 내막

    조계종 총무원 스님들이 3월11일 서울 강북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 스님의 빈소를 조문한 뒤 나오고 있다.

    명진스님은 해인사 선방에 머물던 시절에 대구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민중불교운동연합의장 출신인 서동석 불교포커스 논설위원은 “당시 대구 경북대병원 앞에 ‘마당깊은집’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는데 운동권 출신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명진스님도 그곳에 드나들었다”고 회상했다.

    최근 대구 동화사 주지 선거 후보로 나선 성문스님은 자승스님과 명진스님을 모두 잘 아는 사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중앙승가대 1기 출신이고 자승스님이 2기였어요. 자승스님은 의연하고 조용한 편이었고 명진스님은 순발력이 뛰어났습니다. 1983년에 비상종단운영회의를 운영할 때 자승스님도 참여했지요. 그 후 대승불교승가회를 명진스님과 함께 만들었는데 자승스님은 뒤에서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지요.”

    “제가 스님을 원장으로 만들겠다”

    명진스님도 자승스님과 남다른 사이였음을 밝혔다.

    “1992년 봉암사에서 한철 살고 왔을 때 자승스님은 ‘앞으로 조계종은 명진스님이 책임져야 한다. 제가 스님을 원장으로 만들겠다. 지금부터 준비하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판에 관심이 없다. 스님이나 하세요’하고 웃고 말았지요. 그 뒤로 여러 인연관계로 때에 따라 반대 입장에도 서고 같은 입장에도 서면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명진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 때는 봉암사 선방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참여했다. 그때 불전에 가사를 바치며 “이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산문을 떠나겠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의 3선 시도로 촉발된 1994년 종단개혁은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해 탄압받은 월주 총무원장 체제를 복원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개혁세력이 종단을 장악하자 반대세력들에 대한 청산 작업이 시작됐다. 봉은사 관계자의 말이다.

    “이 와중에 개혁세력 편에 서지 않은 정대스님과 자승스님이 징계위에 회부되었는데 당시 개혁회의 상임위원이던 명진스님이 구명운동에 나서 중징계를 면하게 되었어요. 그때 중징계를 당해서 승적을 박탈당했다면 오늘의 총무원장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대스님과 자승스님이 징계위에 회부된 데 대해서는 반개혁 쪽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연주암 주지였던 종상스님을 밀어내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유도 있었다.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자승스님이 자리를 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때는 정대스님의 상좌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사이가 벌어졌던 종상스님을 자승스님이 주도하는 화엄회에 모신 것은 대단한 친화력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명진스님은 개혁종단에서 종회의원 활동을 하다가 다시 선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기도 했다. 이즈음 연주암 주지를 맡고 있던 자승스님이 연주암에는 선방이 없음에도 명진스님을 선원장으로 임명하고 소정의 활동비를 지급했다고 한다. 자승스님이 은사로 모시던 정대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되는 데에도 명진스님이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신밧드사건’이다. 2001년 2월경 당시 주지 2명과 종회의원 2명 등 4명이 저녁 식사 후 2차로 서울 신사동 대로변에 있던 신밧드라는 룸살롱에 갔다가 이를 우연히 본 불자가 인터넷에 이 사실을 올리면서 문제가 됐던 사건이다. 당시 참여불교재가연대에서는 정대 총무원장을 찾아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당시 두 종회의원이 자승스님과 명진스님이었는데 체질상 술을 못하는 ‘비주류파’였던 자승스님은 거의 거론되지 않고 ‘주류파’였던 명진스님이 주로 거론됐다. 한 재가불자는 “명진스님은 당시에 이미 유명했고 자승스님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봉은사 주지가 된 것은 지관스님 작품

    명진스님이 봉은사 주지가 된 것은 전임 총무원장이던 지관스님의 작품이다. 지관스님이 총무원장에 입후보했을 때 명진스님은 라이벌이었던 정련스님의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에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뭔가 뒷거래가 있지 않으냐는 추측도 있었다. 명진스님의 말이다.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으로부터 봉은사 주지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제가 선거 때 반대편에 서 있었는데 맞지 않다’며 세 번 거절했어요. 그런데도 지관 스님이 ‘명진 수좌가 아니면 봉은사에 들어가기 쉽지 않아. 좀 들어줘’해서 제가 지관스님께 ‘스님, 전례같이 큰절 주지가 관례적으로 원장스님에게 드리는 돈은 못 드립니다. 대신 정말 주지 잘 보냈구나 하는 말씀 듣도록 해드리겠습니다’고 말했지요.”

    명진스님은 1994년에 이루고자 했던 종단개혁을 봉은사에서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주지직을 맡았다고 한다. 사찰개혁을 통해 종단을 개혁하는 파급효과를 일으키자는 원력을 세우고 천일기도를 마쳤다. 이와 함께 박원순 변호사가 책임자로 있는 희망제작소에 봉은사 개혁 청사진 마련을 의뢰, 여기서 나온 방안을 참고해 재정을 공개하고 사찰 운영에 신도들이 참여하도록 했다.

    지난해 총무원장선거 당시에는 명진스님이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천일기도가 끝난 후 명진스님은 홀연히 강원도 선방으로 떠나버렸다.

    봉은사 관계자는 “지난해 초부터 추대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명진스님은 ‘나는 표 달라고 굽신거리기도 싫고 돈도 없을 뿐 아니라 봉은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개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자승스님과의 인연은 봉은사 주지로 온 이후에도 이어졌다. 자승스님이 은정불교문화진흥원 이사장을 맡게 되면서 연주암에서 서울 시내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기가 불편하니까 봉은사에 방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선거 와중에 본인이 봉은사에서 거주하겠다고 요청했어요. 지체 없이 제가 쓰는 방 앞방을 내주었습니다. 중앙종회 의장까지 지낸 거물급 스님이 앞방에 있는 것 자체가 부담되지만 내주었지요. (자승스님은) 그 방에서 선거운동 했고, 사람들도 만났고, 총무원장이 됐어요.”

    명진스님은 일요법회에서 재미있는 일화도 공개했다.

    “지난 총무원장선거 때 자승 원장이 저를 찾아와 ‘스님, 제가 총무원장 출마하기로 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해요. ‘전에는 날 보고 총무원장’하라고 하더니 본인이 나간 거야?’ 하니까 ‘스님은 종정 하셔야죠’ 그래요. 그래서 종정 되는 꿈만 꾸고 있다가….(청중 웃음) 아무튼 내가 반대 뜻을 가진 스님들의 동의를 받아오면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부주지 진화스님이 자승스님 선거대책본부로 들어가서 열심히 했습니다. 저도 진화스님 보고 이왕 돕는 거 후회 없이 하라고 말했어요. 진화스님과 저도 아는 인연 모르는 인연 다해서 도왔습니다.”

    진화스님은 공약팀장을 맡아 자승스님을 도왔다. 명진스님이 기여한 것에 대해서는 총무원 측에서도 “당시 명진스님이 가만 계신 것만 해도 도와준 겁니다”라고 인정했다. 명진스님은 강원도 선방에 있다가 자승스님 총무원장 취임식에 참석해 축하했다.

    “당선 후 취임식에서 소통과 화합이라는 슬로건으로 종단을 운영하겠다고 말했어요. 젊은 원장이지만 우리 종단이 화합 분위기에서 출범했으니 희망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국불교 중흥을 해보자고 약속까지 했지요.”

    직영사찰 전환件으로 마찰

    두 사람 사이에 적신호가 울린 것은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총무원장이 봉은사 주지와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직영사찰을 추진하자 명진스님은 총무원장의 의도를 곰곰이 새겨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청와대 및 여권의 외압-봉은사 직영사찰 전환-명진스님 제거’라는 의혹 쪽으로 결론내리고 일요법회에서 ‘포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총무원 측에서는 명진스님이 봉은사에 대한 애착이 지나친 나머지 생긴 오해라고 반박했다.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문제는 이미 10년 전부터 조계종 내에서 거론된 사안으로 종단 발전을 위해 재정 충당과 포교벨트화를 위해 추진하는 것이지 명진스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자승 총무원장은 공식석상에서 명진스님의 임기 보장과 직영사찰 첫 주지 임명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행정가형’ 자승 vs ‘정치가형’ 명진 충돌 내막

    명진스님이 봉은사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다.

    자승 총무원장은 2월 중순경 총무부장과 기획실장을 불러 사찰부동산관리법과 승려법 및 직영사찰 전환건(件)을 종회에 상정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직영사찰 전환건은 (준비가) 좀 부족하고 부담이 되더라도 일단 상정한 뒤 통과되면 시간을 두고 정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지시를 받고 기획실장은 2월24일경 직원들에게 문안 작성 검토를 지시했다. 직원들은 주말인 2월27일경 안건을 작성한 뒤 3월3일 종무회의에 올렸다. 당시 안건은 현재 특별분담금사찰인 서울 도선사와 봉은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전환하고 직영사찰인 경북 경산 선본사(갓바위)를 특별분담금사찰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안건이 의결되고 나서 3월8일 열리는 중앙종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직영사찰 전환건을 의결하기 전날인 3월2일 저녁 도선사 문중인 청담문도들에게 이 사실이 흘러나가 문중회의가 열리고 그 후 총무원에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봉은사는 도선사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종무회의에서 안건을 종회에 상정하기로 의결한 후 총무부장인 영담스님이 직접 명진스님에게 ‘직영사찰 지정 축하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명진스님의 말이다.

    “영담스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기쁜 소식 전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봉은사는 이제 직영사찰로 바뀌었습니다. 하하하’ 했어요. 나는 그때 직영이 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알아서들 해’하고 말았지요. 그 다음에 부주지 진화스님이 쫓아와서 ‘봉은사를 직영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나는 직영이 뭐냐고 물었어요. 그때까지 감을 못 잡았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에….”

    명진스님은 그날 오후 3시에 민족공동체추진본부를 법인으로 만드는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총무원장이고 당연직 이사장이 명진스님이 대표이사를 맡는 회의였다. 총무원장실에 들어갔다가 직영 문제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제가 다른 얘기를 하다가 ‘직영 어떻게 된 거요. 스님 뜻이 실린 거요’라고 하니까 ‘내 뜻이 실리지 않고 어떻게 했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당해 사찰 주지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직영한다는 게 뭐냐. 날보고 나가라는 소리네. 사표를 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하고 화를 내고 나왔습니다.”

    한편 봉은사 부주지인 진화스님은 다음날인 4일 종회 총무분과위원회에 참석해 종무회의에서 종회에 넘긴 직영사찰건 상정을 5대 4로 부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저는 현 총무원 집행부가 선거 때 선본사를 직영사찰에서 해제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일단 약속대로 안건으로 올리기는 하되 도선사와 봉은사 직영사찰건과 함께 올려 부결되면 종회에 책임을 미루려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안건 상정이 부결되자 끝났다고 안심했지요.”

    봉은사만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案 상정

    그런데 총무원 집행부에서는 정작 총무원장이 올린 안건이 부결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기획실장 원담스님의 말이다.

    “애당초 집행부는 종단개혁과 관련된 사찰부동산관리법과 승려법은 반드시 통과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직영사찰 전환건은 종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맡기자고 했어요. 그런데 상정조차 부결되자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총무원 집행부에서는 2차 직영사찰안을 올렸는데 여기서 문중의 반발이 심했던 도선사는 빠지고 봉은사만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안으로 변경됐다. 이때부터 두꺼운 ‘오해와 불신의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진화스님은 “2차 상정할 때 도선사는 빼고 봉은사만 올리는 것을 보고 어떤 의도가 있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원담스님은 “오해할 수 있겠지만 도선사는 청담스님이 일군 공이 큰데다가 조계종을 세우는 데 기여한 점을 들어 총무원장이 직영사찰로 정하는 것을 미루자고 했다”고 밝혔다. 자승 총무원장은 봉은사만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안을 상정하기 전인 3월9일 은정불교문화진흥원에서 명진스님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대화를 명진스님은 3월21일 법회에서 폭로했다.

    “오후 4시쯤 자승 원장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원장이 커피숍에서 기다린다기에 내가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갔더니 원장이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고 했어요. ‘이 일을 왜 하는 거요? 누구 작품이요? 영담스님 작품이요, 원담스님 작품이요?’ 하니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참회합니다’ 했어요. 기가 막혔습니다. ‘어디서 압력 받은 거 아니요? 강남 한복판에서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나를 정리하라는 것 아니요’ 하니까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고 했어요. 그럼 직영 지정은 귀신이 씌어서 했나요? 그랬더니 원장이 ‘귀신이 씌었나 봅니다’ 했습니다.”

    이 발언에 대해서는 총무원 측에서도 사실 여부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봉은사 측에서는 “이날 명진스님이 총무원장에게 책임지고 부결시키라고 했는데 총무원장은 알겠다고 해놓고 이틀 뒤 직접 참석한 자리에서 통과시켰다”고 주장했다. 총무원 측에서는 “부결시키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으며 자승스님이 명진스님에게 직영사찰 주지든 특별분담금사찰 주지든 사시던 대로 계속 사시면 된다”고 임기 보장에 대한 언질을 줬다고 주장한다.

    봉은사 측이 제기한 의혹

    ‘행정가형’ 자승 vs ‘정치가형’ 명진 충돌 내막

    2008년 6월6일 이명박 대통령이 불교종단지도자를 청와대에 초청해 오찬을 하고 있다.

    봉은사 측에서는 직영사찰건이 상정된 날의 정황에 대해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만들기 위한 ‘작전’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3월11일 투표 당일 아침에 참석을 독려하는 문자메시지를 집행부가 종회의원들에게 보냈다. 둘째, 총무원장이 직접 참석한 것만으로도 종회의원들을 독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셋째, 27개 안건 중 법정스님의 입적으로 상황이 바빠지자 저 아래에 있던 직영사찰건을 위로 올려 사찰부동산관리법과 직영사찰건만 통과시키고 승려법과 나머지 안건은 다음 회기로 미루고 서둘러 폐회했다.

    이에 대해 총무원 측에서는 “문자메시지를 돌린 것은 확인 결과 총무원장이 소속된 화엄회 간사가 집행부를 도와달라는 차원에서 화엄회 회원들에게만 종회 참석을 독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총무원장이 참석한 것은 주요 안건이 있을 때는 총무원장이 참석해서 의원들 질문에 답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집행부에서 참석을 건의한 데 따른 것이다”고 답변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직영사찰안건은 49대 21로 통과되고 선본사 직영해제건은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된 것이다. 총무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직영사찰건은 투표를 앞두고 한 의원이 총무원장에게 ‘봉은사가 직영사찰로 전환돼도 현 주지 임기를 보장하느냐’고 질문하자, 총무원장은 임기를 보장할 뿐 아니라 첫 직영사찰 주지까지 맡길 생각이 있다고 답변했어요. 화엄회 회원이 22명, 무차회 회원이 16명, 보림회 회원이 13명, 무량회 회원이 16명, 나머지가 5명, 비구니가 10명인데 화엄회뿐 아니라 다른 계파 회원도 찬성한 겁니다. 선본사는 1994년 개혁종단 때 모순 덩어리였던 선본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해서 그 후 잘 운영되고 있는 만큼 그 상징성을 더 지속시킬 필요가 있는 것으로 종회 의원들이 판단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시켜 집행부도 놀랐어요.”

    종회에 참석한 총무원장이 봉은사 현 주지의 임기를 보장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은 직영사찰법을 통과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그러면 임기를 보장할 것이면 왜 사전에 상의하거나 언질을 주지 않은 것일까. 원담스님의 말이다.

    “원장스님이 어떤 스케줄을 가지고 추진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직영사찰법이 통과돼도 바로 시행하지 않고 명진스님의 임기가 끝나는 11월 이후에 추진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회에서 결정할 사안에 대해 미리 당사자와 상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거겠죠. 실제로 통과되고 나면 봉은사 측과 의논해 의견을 수렴해서 시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명진스님의 생각은 다르다.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터트리지 않았으면 임기 보장도 못 받았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

    직영사찰 주지 임명권에 대해서도 봉은사 측은 “직영사찰 주지는 임기를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봉은사 발전과 관련된 어떤 중장기 계획도 세우거나 추진해나가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명진스님은 4월11일 일요법회에서 직영사찰로 지정된 조계사 신도가 직영사찰의 폐해에 대해 보낸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명진스님은 봉은사 개혁 사례를 통해 종단 변화를 유도해나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봉은사 발전을 위해 ‘온몸을 다 바치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반면 총무원에서는 종단개혁은 종단 차원에서 재정을 확충해 종합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실현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원담스님의 말이다.

    “명진스님이 봉은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봉은사도 종단 발전 차원에서 조계사처럼 기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강남 요지에 있는 봉은사는 직영사찰로 전환돼도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요.”

    봉은사 측에서도 조계종 종단 차원의 발전을 위해서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해야 한다는 합리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전 공론화 과정도 없이 급하게 발의하고 추진한 배경에는 정치적 외압이나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양측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명진스님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일요법회에서 용산철거민 참사, 검찰의 중립성 문제 등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소망교회 장로 출신인 점을 들어 ‘거짓말하는 이명박 장로’를 거명하며 불자들의 정서를 자극하기도 했다.

    이런 명진스님을 여권에서 불편해 한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해 11월20일경 김영국 조계종 대외협력위원이 명진스님을 찾아와 전했다는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말이 공개되면서 ‘정치 외압설’이 급부상했다.

    지난해 11월13일 오전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자승 총무원장과 안상수 원내대표가 만난 자리에서 안 대표가 자리에 앉자마자 ‘현 정권에 비판적인 강남 부잣절 좌파주지를 그냥 놔둘 수 있느냐’고 했다는 것.

    이에 대해 원담스님은 “안 대표의 발언에 대해 우리도 불쾌하게 생각한다. 안 대표의 지역구가 과천이므로 자승스님과는 15년의 친분이 있어 편하게 말한 것으로 보지만 총무원장에 대한 결례라고 본다. 그러나 총무원장이 그것을 외압으로 여겼다는 것은 무리다. 명진스님도 밝혔듯이 원장스님은 ‘임기가 보장되어 있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으로 안다. 그리고 용산참사 유족들에게 명진스님이 1억원을 전달한 것에 대해 원장스님은 ‘봉은사는 재정이 공개돼 있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쓸 수 없다.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준 것을 3년 동안 모은 것인데 그걸 원장이 뭐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고 하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책비판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원담스님은 사견임을 전제로 명진스님의 일요법회 발언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나도 두 번 정도 여권과 정부 인사들로부터 명진스님의 발언에 대해 우려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려일 뿐이지 외압으로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책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거나 정권 퇴진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총무원장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지요. 총무원 집행부는 그래도 균형감각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적 스님을 주지로 임명했어요. 4대강 개발에 반대하는 수경스님을 화계사 주지에 재임명했고 실천승가회의 핵심인 학생운동권 출신 토진스님도 얼마 전에 조계사 주지로 임명했습니다.”

    명진스님은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던 자승스님을 이 대통령의 ‘하수인’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그 근거로 지난 대선 때 당시 종회의장이었던 자승스님이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함께 명진스님을 만나 당시 이명박 대통령후보를 법회에 초청하도록 종용했다는 것, 촛불시위 당시 불교종단지도자들이 청와대에 갔을 때 ‘각하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합니다’고 언급했다는 점, 힐튼호텔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건배사를 했다는 것, 지난해 12월24일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과 함께 충청도에 내려가 마곡사를 비롯한 주지스님들에게 세종시에 대한 도움을 부탁했다는 것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총무원 측은 보도자료 등을 통해 반박했다.

    “2007년 10월13일 자승스님이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함께 간 것은 사실이지만 봉은사 현안이었던 주차장 문제를 이야기하는 차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후보를 법회에 소개해달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소나기 발언은 다른 종단 관계자가 한 말이다. 총무원장이 충청도에 내려간 것은 조계종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서였고 저녁 먹는 자리에 박형준 정무수석이 찾아와 세종시에 대한 입장을 설명했다. 힐튼호텔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자승스님은 총무원장으로서 여야뿐 아니라 각계각층 사람을 만나는데 특정 시각으로 사실을 짜 맞추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명진스님도 김영국씨에게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은 ‘싱거운 사람들’ 이라고 무심하게 흘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건이 총무원장 직권으로 상정돼 종회에서 통과된 것을 보고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정치외압’이 작용했다고 추측했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치외압

    ‘정치외압설’에 대한 불교계 내부 의견은 갈리고 있다. 최근 결성된 불교자주실천운동본부는 안상수 대표의 발언은 불교의 자주성을 침해한 것이라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정계 은퇴와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 및 총무원장의 참회를 요구하며 서명운동과 시국법회를 주도하고 있다.

    반면 조계종 교구본사주지협의회와 종회, 원로회의 등에서는 봉은사 직영사찰건 통과에 대한 적법성을 강조하며 정치외압설을 주장하는 것은 종단의 정체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불교단체대표자모임에서는 청와대나 여권의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한편 명진스님이 총무원을 비난한 것에 대해서는 토론회 개최 전까지 비방을 자제하기로 합의한 사항에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는 난항을 거듭하다 4월30일에 열기로 15일 의견을 모았다. 원담스님의 말이다.

    “총무원이 단위사찰과의 토론회에 응하기로 한 것은 큰 결단입니다. 그런데 토론회 성사 때까지 상호 비방하지 않기로 합의했는데 명진스님이 그것을 깨버렸으니 토론회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불교사회단체들이 어떻게 보면 봉은사에 우군들인데 이번에 비방 자제 합의를 깨버리니까 돌아서잖아요. 어쨌든 토론회를 통해 오해는 풀고 대안을 찾아야죠.”

    앞으로 조계종단이 안정을 찾고 올바른 항로를 찾아 계속 순항하기 위해서는 키를 쥔 선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총무원장은 지난 1월29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청와대불자회 신년법회에서 ‘눈썹 역할론’에 대한 흥미로운 법문을 말했다.

    “청나라 학자 유곡원이 ‘안면문답’이라는 책에서 쓴 것을 보면 안면에 있는 눈 코 귀 입이 어느 날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한다. 맨 위에 있는 눈썹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있으니 눈 코 귀 입이 눈썹을 쫓아내자고 했지만 오늘날까지 눈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기 바란다. 여기서 안면이라는 것은 장관 수석비서 등 청와대와 각 부처에 있는 핵심 심장부에 있는 분들이다. 눈썹은 안면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자리에 있다. 우리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눈썹을 밀어버린다면 그 얼굴의 균형이 깨지고 눈 코 귀 입의 형상도 망가질 것이다. 눈썹이라는 것은 어느 단체의 장이기도 하고 나라를 이끌고 가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눈 코 귀 입이 역할 하기에 따라서 눈썹의 역할이 빛나기도 하고 눈썹이 안면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가만히 있어도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그때 눈썹이 휘날리지 않도록 눈 코 귀 입은 더 열심히 보좌하고 잘해서 국가가 발전하고 국민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부탁드린다.”

    이날 발언의 취지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불자들이 대통령을 잘 보좌해서 나라 발전과 국민 평안에 기여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계종이라는 종단의 눈썹은 총무원장이다. 총무원장인 자승스님은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다. 명진스님은 총무원장이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총무원장 임기 동안 소나기가 아니라 장마비로 계속 내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총무원장인 자승스님이 조계종의 얼굴이 균형을 잡도록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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