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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100주년 마크 트웨인 재조명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마크 트웨인

  • 조성규│연세대 명예교수· 전 한국 마크 트웨인 학회장 lykeion@hotmail.com│

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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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되살아나는 미국 문단의 핼리 혜성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집.

클레먼스(트웨인의 본명)는 이 지역 유일한 신문사였던 이곳에서 ‘조시’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얼마 뒤 ‘마크 트웨인’으로 필명을 다시 바꾸어 많은 기사를 썼지만 1864년 5월 갑자기 ‘테리토리얼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간 그는 근처 금광에서 일하다 당시 유명했던 아티머스 워드의 요청으로, 다니엘 웹스터라는 개구리와 도박사 짐 스마일의 이야기를 썼다. 원고가 늦어져 워드의 잡지에는 실리지 못했으나, 다행스럽게 이 원고는 1865년 11월18일 뉴욕의 ‘새터데이 프레스’에 실렸다. 이 ‘카리베러스군의 뜀뛰는 악명 높은 개구리’(The No-torious Jumping Frog of Calaverus County)가 출간되면서 그는 일약 전국적 인사가 된다.

그가 신문기자 생활을 했던 서부, 특히 네바다는 풍토가 거친 곳이었으므로 사건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사를 쓴다 해도 독자들은 좀처럼 읽어주질 않았다. 따라서 독자를 얻기 위해 기사를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써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남부 작가들이 남북전쟁 전부터 즐겨 사용하던 과장기법인 ‘톨 테일’(Tall Tale) 기법이었다. 트웨인이 1863년 이 과장기법을 이용해 쓴 살인사건 기사가 문제되어 신문사를 사직했다는 설도 있다.

강연과 연설의 귀재

1866년 당시 하와이 군도는 샌드위치 군도라고 불렸는데 트웨인은 ‘새크라멘토 유니언’지를 위해 5개월간 하와이의 사업, 문화 및 자연 풍경에 대한 글을 써 보내라는 요청을 받았다. 1866년 10월2일부터는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샌드위치 군도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미국의 19세기는 ‘강연’ 또는 ‘연설’의 세기였다. 그는 특유의 느린 말투, 가끔 말을 안 하고 관중의 주의를 끄는 재주, 남부의 과장된 표현 등으로 직업적인 만담가가 되었고 하루에 400달러를 벌었다. 당시 하와이는 미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몇몇 나라가 탐을 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미국 신문사에 알리지 않았다면 오늘의 하와이는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트웨인을 유명하게 만든 첫 번째 책은 ‘지중해 유람기’(The Innocent Abroad·1869)였다. 퀘이커시티호라는 증기선을 타고 5개월간 구세계인 지중해, 흑해, 이스라엘 성지, 이집트 등을 유람하며 쓴 여행기록을 샌프란시스코의 일간지 ‘알타 캘리포니아’에 기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구세계를 보았고 구세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듯하다. 글 중에는 “철도 부설을 기분 좋게 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렵다. 그 사업은 지겹도록 오래 걸린다. 역마차를 마련하는 것은 무한하게 더 즐거운 일이다”라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지중해를 유람할 때 뉴욕 주 엘마이라 출신이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찰스 저비스 랭든을 만났고 이후 1867년 퀘이커시티호의 재상봉 행사에서 랭든의 누나 올리비아(리비)를 보게 된다. 1868년 8월 엘마이라의 랭든 가를 방문한 뒤 그는 5개월 동안 편지마다 번호를 붙인 184통의 연서를 리비와 주고받았고 욕설과 담배를 금한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1870년 2월 리비의 아버지 집에서 결혼했다.

리비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때 부호가 된 사람으로 버팔로의 신문사와 좋은 집을 트웨인에게 주었다. 그 집에는 두서너 명의 하인과 모든 집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이런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1869년 출간된 ‘지중해 유람기’는 귀족들의 멸시를 받긴 했으나 2년 동안 많은 부수가 팔렸다. 1872년 ‘서부 유랑기’(Roughing It)를 출간한 뒤 그는 리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부 유랑기’는 ‘지중해 유람기’보다 좋은 책이고 글도 훨씬 좋다”라고 썼다. 자신을 서민의 작가라고 말한 그는 “천재들의 책은 포도주 같다. 나의 책은 물과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라고 자신의 책을 평했다.

나의 시대는 도금시대

이렇듯 순풍에 돛단배 같던 신혼생활은 곧 어두운 그림자에 덮인다. 장인이 위암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에 리비는 정신적 쇼크로 건강을 해친다. 1870년 8월에 장인이 돌아가 슬픔에 잠긴 리비에게 비극이 겹친다. 11월 출산한 장남 랭든 클레먼스는 미숙아였다(이 장남은 1872년 6월 생후 18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죽는다). 트웨인은 이 시기를 회상하고 생애에서 최악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트웨인은 1873년 찰스 워너와 공저로 ‘도금시대’(The Gilded Age)를 내놓았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시대를 ‘요란한 시대’라고 명명했으나 트웨인은 자신의 시대를 ‘도금시대’라 불렀다. 출간 뒤 두 달 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1870년대 부패한 그랜트 행정부 밑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비평적 기록으로 토지에 욕심을 부리는 사나운 야생 고양이 같은 은행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 탐욕스러운 중산계급이 등장한다.

트웨인은 이 작품에서 “어떤 사람은 계급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영웅을 숭배하고,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숭배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돈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즉,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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