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분권화 점조직으로 진화, “전세계 70개국에 네트워크 구축”

  • 기획·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번역·최원재│연세대 정치학과 석사과정 wonjaekun@hotmail.com│

    입력2010-05-03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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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 편집자의 말

    ▲3월 중순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와 소말리아 반군 알샤밥과의 협조 관계 확인, 3월22일 미 해군 정보국 “예멘 해역에서 알카에다의 공격 가능성 증가” 경고.

    ▲3월29일 39명이 사망한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테러와 관련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알카에다와 체첸 반군의 연계 가능성 제기.



    ▲4월4일 41명이 사망한 이라크 주재 이집트 대사관, 이란 대사관, 독일 대사관 관사 연쇄 자살폭탄테러에 대해 이라크 내 알카에다 연계조직(AQ-I)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

    ▲4월9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는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 지부(AQIM), 오는 6월 개최되는 남아공 월드컵 미국-잉글랜드 전을 폭탄테러 할 것이라고 공개 경고.

    9·11테러 이후 8년 7개월. 그러나 알카에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한 달간 쏟아진 알카에다 관련 소식은 최근 들어 이 조직이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기까지 지역조직과의 연계 하에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지난해 11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후드 군사기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과 성탄절의 노스웨스트 여객기 테러 시도로 큰 충격을 받은 미국은 알카에다의 활동방식 변경과 관련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관련 첩보를 사전에 효과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미국 정보당국의 무능에 대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진노는 매서웠다.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앞둔 상황에서 테러 문제는 우리에게도 더는 남의 일이 아니다. 2004년 김선일씨 피살사건이나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원 피랍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2008년 9월 국회 정보위원회가 공개한 국가정보원 대외비 문건에 따르면 이전 5년간 테러를 모의하거나 정보수집, 테러자금 모금, 탈레반 연계 마약원료 밀수출 혐의 등으로 적발돼 강제퇴거 등의 조치를 받은 사례가 모두 19건 74명에 달한다.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알카에다 지도부를 분쇄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들은 막대한 군사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걸쳐 포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들 조직의 확산은 대(對)테러 전쟁을 날이 갈수록 어렵게 만들고 있다. 국제사회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권한이 분산된 점조직으로 변모한 알카에다의 진화 때문이다. 테러에 가담하는 조직원들의 국적이 다양하고 그 출생이나 성장배경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도 미국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2009년 연말 이어진 테러 시도로 서방세계가 공포에 휩싸인 이래, 미국의 관련 정부당국은 이러한 알카에다의 진화를 더욱 정밀하게 확인하기 위한 대대적인 분석작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미 의회조사국(CRS)이 2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Al Qaeda and Affiliates : Historical Perspective, Global Presence, and Implication for U.S. Policy)’이다.

    알카에다의 역사적 기원과 성장과정, 현재 능력에 대한 평가, 지역별 연계조직 현황과 테러활동 내역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보고서는, 단순한 테러조직으로만 생각하기 쉬운 알카에다가 실제로는 이슬람권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적 급진운동으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일부 대목에서 미국 일방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눈에 띄지만 비교적 냉정한 관점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알카에다는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진화해왔다. 그 당시만 해도 알카에다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항했던 전사들이 주축을 이룬 중앙집중형 조직이었고 대부분 이집트인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조직의 테러음모는 대부분 최고지도부로부터 하달되거나 그들의 승인을 받았다. 일부 분석가들은 9·11 이전의 알카에다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CEO로 둔 기동성 있는 기업체와 유사했다고 묘사한다. 빈 라덴은 조직 전체에 명령을 내렸고 하부조직들로부터 아이디어를 흡수해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알카에다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점증하는 국제사회의 압박과 자신들 내부의 필요에 따라 알카에다는 이제 분산된 글로벌 네트워크, 혹은 다양한 층위의 독립성을 가진 이념 운동의 연합체로 변모했다. 빈 라덴이나 아이만 알자와히리로 대표되는 핵심지도부는 파키스탄 북서부 산악지역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바, 이들은 여전히 지시를 내리고 조직원을 충원하며 선전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예멘이나 소말리아 등에서 활동하는 알카에다 지부나 연계조직들은 해당 국가의 정치지형에서 매우 중요한 권력 중심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일부 지부에서는 여전히 자금이나 훈련, 무기 등을 지원받고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파키스탄에 있는 핵심지도부는 이제 전략적 지침이나 정당화 명분, 글로벌 차원의 투쟁 목표를 제공하는 역할만을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 고위당국자들은 지난 수년간 알카에다가 지휘체계가 분산된, 중심이 불분명한 조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평가해왔다.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어느 분야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투쟁중심을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고 있는 것 같다는 평가였다. 알카에다의 조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일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가 이들을 더 식별하기 어렵고 더 치명적인 조직으로 만들 수 있다는 평가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오늘날의 알카에다 네트워크는 스스로 급진성을 띠게 된 자립적인 성격의 조직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과 파키스탄에 은거하고 있는 핵심지도부 사이의 연계, 혹은 지부들 사이의 연계는 지엽적이거나 단기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 당국자들에 따르면 이들 알카에다 세포조직과 협력자들은 70개국에 걸쳐 존재한다. 이들 조직의 구성원들은 출신국가를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해외를 떠돌며 훈련과 교육을 받은 다른 구성원들의 도움을 받아 급진적 이슬람주의의 길을 걷는다. 많은 경우 이러한 알카에다 연계조직의 분산은 빈 라덴 일당의 거시 전략과 맞아떨어진다. 이들은 그간 폭력을 통해 전 세계에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자는 지하드(聖戰)에 더 많은 무슬림이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종교운동의 전위대로 자신들을 탈바꿈하는 방안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카에다’라는 이름이 기초 혹은 근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바, 이를 기반으로 그 구성원들이 지리적으로 분산된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알카에다의 기원과 목적, 현재 활동상황, 앞으로의 전망을 이해하는 것은 미국의 전략과 정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 변화해가는 알카에다의 특성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갖는 함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그 위협의 실체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길이다. 본토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물론 의회의 입법 및 감독과정, 정부 각 분야의 정책조율, 해외원조 결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진행돼야 한다.

    이 보고서는 알카에다의 역사와 각 하부조직의 활동현황 및 능력, 주요 지역별 알카에다 지부에 관한 분석에 초점을 맞췄다. 이 보고서는 상황에 따라 업데이트될 것이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AQ-I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활동은 2009년 9월 미 국방부 보고서에서 “리더십이 상당부분 손실되고 대부분의 인구 밀집지역에서 출현이 줄어들었다”고 기술한 바와 같이 크게 축소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AQ-I는 바그다드와 다른 지역 정부 건물을 향해 대량 인명살상 공격을 주기적으로 실행하고 있지만 그 빈도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AQ-I는 이라크 국적자들이 운영과 인원 모집을 담당하는 토착 조직으로 점차 진화했고, 이들은 이라크 국내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집중해 외국이나 중동지역에서의 행동에는 흥미나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

    정책적 함의

    그럼에도 만일 이라크의 수니 아랍인들(이들은 이라크 내 미군 주둔과 시아파 무슬림이 지배하는 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폭동의 핵심이다)이 현재 진행 중인 정치 과정에서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소외당하게 되면 이라크 내 AQ-I의 영향력은 급상승할 수 있다. 이러한 우려는 2010년 1월 이라크 시아파 지도자들이 입후보자 500명의 자격을 박탈하면서 점증하고 있다. 자격을 박탈당한 입후보자 대부분은 수니 아랍인으로 2010년 3월7일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불법으로 규정된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을 지지했다는 것이 후보자격 박탈 사유였다. 입후보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반응은 이라크 총선 성공 여부와 전체 안보환경 변화에 중요한 변수다. 특히 미군 철수계획의 속도와 여지를 고려함에 있어 중대한 함의를 갖고 있다.

    # 북아프리카·사헬 지역: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부 지부(AQIM)

    이슬람 마그레브 지역의 알카에다(AQIM·Al Qaeda in the Lands of the Islamic Maghreb, 혹은 AQLIM으로도 알려져 있다)와 그들의 분파 및 자발적 세포조직은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역에 주된 위협이 되고 있다. 알제리 치안군의 압박으로 인해 AQIM은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알제리 수도 밖으로 점차 옮기고 있다. 알제리 내의 광활한 사하라 지역 여섯 곳과 산발적으로 분포하는 사헬 인접지역은 AQIM이 그들의 지역적 야망을 발전시키고 작전을 수행할 최적의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알제리 인접국인 튀니지와 모로코는 몇몇 신병 모집을 제외하고는 AQIM이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고 있다. 양국은 AQIM이 토착세력에 작전능력을 전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수년간 주요 테러공격을 받아본 경험은 없으나 양국과 모리타니아 정부는 알카에다 세포조직 및 연계 테러리스트들을 계속 몰아내고 있다.

    AQIM의 알카에다와의 ‘통합’ 선언 혹은 ‘충성’맹세가 실체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AQIM이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지도자들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명목상의 연계만으로도 상호이익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알카에다는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을 빛낼 수 있고, AQIM은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어쨌든 2006년 알카에다와의 ‘통합’ 선언 이래로,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AQIM의 반서구 및 반정부 주장은 미국, 프랑스, 스페인에 맞서는 지하드를 수행하자는 호소와 맞물려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의 작전은 지리적으로 알제리와 사헬에 국한돼 있고, 공개된 공식정보에는 AQIM이 미국 본토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된다는 견해는 없다.

    알제리

    AQIM의 기원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이슬람 정치 정당의 선거승리를 뒤엎은 군부 쿠데타에 따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치안군이 교전을 벌이던 시기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은 알제리 체제를 이슬람 국가로 바꾸려고 추구했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무장 이슬람 단체 GIA는 당시의 주된 테러 위협 세력이었다. 1998년 GSPC(살라피스트 선교전투단체)라는 이름의 조직이 GIA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테러에 반대해 GIA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2003년 GSPC는 압델말리크 두르크델(아부 무사브 압둘와두드로도 알려져 있음)의 지도하에 알카에다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 2006년에는 다시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 지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알카에다와의 ‘통합’을 선언한다.

    AQIM은 주로 납치로 인한 몸값과 무기, 마약, 차량, 담배의 밀수, 그리고 인신매매를 통해 자금을 모은다. 이들은 또 소규모 자금을 유럽 내 세포조직으로부터 조달한다. AQIM은 인터넷상에서 고성능 비디오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다. 2006년 AQIM은 정부와 치안군, 알제리 내 외국인 노동자들을 노린 공격을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2007년 이들은 ‘이라크식’ 전략을 채택했으며, 그 결과 4월에는 정부청사(수상관저와 내무부)와 교외지역의 경찰서에, 12월에는 헌법재판소와 유엔 건물에 동시다발적인 폭탄공격을 감행했다. 9월에는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노린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상대적인 소강상태를 거쳐 2008년 여름부터는 치안군을 노린 공격이 급증했다. 이 시기에 벌어진 경찰학교 자살폭탄 테러로 40명 이상이 사망했다.

    2009년 들어 치안군으로 인해 수도에서 작전 수행이 어렵게 되자 AQIM은 그 외 지역에서 공격을 시도했다. AQIM은 현재 치안군 숫자가 줄어든 상태인 북동부 카빌리에의 베베르족 주거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6월에는 총을 든 괴한들이 수도 알제에서 30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매복해 경찰 24명을 사살했고, 7월에는 호송부대를 습격해 최소 14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수많은 국제적 테러 음모가 알제리인들과 관련돼 있다. 199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은 아흐메드 레쌈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입국하려다 체포됐고,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폭탄테러 시도와 관련한 속칭 ‘밀레니엄 모의(Millennium Plot)’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캐나다에 있는 그의 일당 등 다른 알제리인들도 GIA나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었다.

    2003년 1월 6명의 알제리인이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해독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독극물 리신을 소량 소지한 채 체포됐다. 2009년 10월 프랑스에서는 한 알제리계 프랑스인 형제(그 가운데 한 명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재직 중이었다)가 AQIM 등 테러집단과 연계된 범죄활동을 벌인 혐의로 정보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알제리는 국제 테러리스트 공급처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으며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영국에서 알제리인들이 AQIM 소유 혹은 그들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물품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돼왔다.

    사헬 지역

    서아프리카 사헬 지대에서 AQIM은 점차 활동량을 늘려가고 있다. 사헬 지대는 모리타니아에서부터 차드까지 뻗어 있으며, 넓고 듬성듬성하게 인구가 분포하는 북쪽 국경지역은 치안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AQIM은 알제리와 말리 국경을 따라 이동 훈련소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헬 지역 국가들의 구멍 뚫린 국경을 활용해 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모리타니아와 말리에서 군대 혹은 경찰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왔다.

    납치 위협은 이 지역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2007년 한 AQIM 제휴단체가 프랑스인 관광객 4명을 살해했고 이 사건으로 다카르 랠리가 취소됐다. 2008년에는 AQIM이 12명의 모리타니아 병사를 사살했고 니제르 유엔특사와 캐나다인 동료가 납치당했다. 2009년 납치된 캐나다인과 다른 유럽 관광객들이 말리에 억류되었으며 수개월 후 몸값을 주고 풀려났다. 영국 정부가 알카에다 조직원 혐의를 받은 급진적 성직자를 석방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AQIM은 영국인 인질을 참수해버린다.

    2009년 6월 모리타니아의 미국인 구호단체 요원들은 AQIM이 자신의 소행이라 주장한 납치시도 중에 피격당했으며, 8월에는 모리타니아 수도 누악쇼트의 프랑스대사관 부근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이들은 AQIM 요원의 체포에 참여한 말리 군장교들도 암살했다. 알제리군과 프랑스의 공중정찰 지원을 받아 말리 군이 AQIM과의 전면전을 선포한 뒤 벌어진 일이다. 2009년 11월에는 중무장한 세력이 니제르 중부에서 미국대사관 직원을 납치하려 시도했다.

    사헬 지역 AQIM의 구성원 대부분은 알제리 국적인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지만, 세네갈, 가나, 나이지리아, 베넹은 물론 모리타니아, 니제르, 말리 출신도 있다. 이들 집단은 작전을 위해 협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각자의 역할과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이들 사이의 차이점은 앞서 설명한 2008~09년 사이의 납치작전 결과 때문에 발생한 듯하다. 영국인 인질은 지하드 명목으로 처형됐지만 다른 인질들은 몸값을 받고 풀려났다. 이렇듯 몸값을 요구한 단체는 다른 AQIM 조직과는 달리 성전(聖戰) 자체보다는 범죄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데 치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책적 함의

    AQIM의 위협에 맞서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대에 위치한 국가들을 도우려는 미국 정책담당자들의 노력은 식민지 유산과 지역적 세력균형을 고려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제리, 모리타니아, 니제르, 말리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이들 국가 국민은 외세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에도 불구하고 해당 국가 정부들은 대부분 급증하는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피비린내 나는 독립전쟁을 벌였던 알제리는 특히 외국의 개입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알제리는 석유와 가스 자원에 힘입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접 국가들보다 나은 형편이고, 스스로를 지역의 패권국가로 여긴다. 알제리는 지역 내 테러방지 회담을 주관했으며, 사헬 지대에서의 몇몇 대(對)테러 작전을 위해 공중지원을, 말리에는 군사원조를 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이 지역에서 폭력적인 극단주의에 대응하는 수많은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2002년 미 국무부는 차드, 니제르, 말리, 모리타니아의 국경안전, 군사 및 대테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범사헬이니셔티브(Pan-Sahel Initiative·PSI)를 발족한다. PSI 프로그램은 오로지 안보 분야에서의 능력을 제고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05년 부시 행정부는 일명 트랜스 사하라 대테러 파트너십(Trans Sahara Counterterrorism·TSCTP)으로 알려진 후속 프로그램을 발표한 바 있다. 개발원조와 공공외교, 대테러 군사훈련을 통합한 TSCTP는 “개개의 국가와 지역적 능력을 향상시키며… 특히 청년층 및 농촌에 거주하는 빈곤층에서 새로운 테러전투원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려는 시도들을 분쇄하고, 이에 대응해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자유로운 안전지대를 건설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TSCTP의 주관부서는 국무부지만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국방부를 포함한 다른 기관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 지역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사헬 지대의 국가들은 무장폭동, 강도, 불법 밀거래 등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 외에도 다양한 안보위협에 직면해 있다. 일부 국가들은 미국의 정책이 이렇듯 다른 안보위협에 대응하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고, 다른 이들은 이러한 태도가 극단주의의 부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미국의 대응이 민간과 군사 분야의 지원이 적절히 혼합된 이상적인 형태를 벗어나 지나치게 군사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이들 국가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 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지역은 과거 20년 동안 테러에 상당히 취약한 지역으로 부상해왔으며, 국제 테러집단을 위한 피난처로 여겨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허술한 국경과 공항 및 항구에서의 느슨한 보안검사, 허약한 법 집행기관들은 주된 우려사항이다. 이 지역 내의 정치, 인종, 종교분쟁은 테러집단에 도움이 되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인력과 기술 부족으로 인해 테러활동을 감지하고 차단하는 데 취약한 아프리카의 치안유지능력은 테러 위협을 다루는 데 있어 최대의 장애물이다.

    1989년 수단에서 국가이슬람전선(NIF)이 정권을 잡은 이래 아프리카 내 테러 건수는 급증하게 된다. NIF는 익히 알려진 국제 테러조직과 개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으며, 수단 정부의 치안 분야도 국내 및 국제 테러집단을 사실상 방조해왔다. 수단은 또한 주요 테러리스트들의 피난처가 되어왔는데 여기에는 알카에다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도 포함된다. 빈 라덴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항전 점령 당시 아랍인 지원자들의 주요 자금원 역할을 맡았던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단을 작전기지로 활용했다. 많은 분석가는 수단에서 머무른 5년 동안 빈 라덴이 알카에다의 기반을 닦았다고 주장한다. 알카에다가 동아프리카 지역을 뚫을 수 있게 된 것은 테러조직에 대한 NIF의 조기지원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동아프리카 지역은 아프리카의 국제 테러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아프리카에서는 미국의 국익을 노린 드라마틱하고 과감한 테러가 발생한다. 1998년 알카에다가 저지른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대사관 폭파사건으로 미국인 12명을 포함한 229명이 사망했고 5000명 이상이 부상했다. 2002년 11월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케냐 뭄바사에서 발생한다. 알카에다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들은 폭발물을 실은 4륜 차량을 이스라엘인 소유의 파라다이스 호텔로 몰고 들어갔는데, 이 사건으로 10명의 케냐인과 3명의 이스라엘인이 사망했다. 1995년 6월 이슬람 극단주의자 집단인 가마이슬라미야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있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 주재 대사관 폭탄테러 용의자인 탄자니아 출신 알카에다 조직원 아메드 칼판 가일라니.

    미국과 소말리아의 인접국가들, 소말리아 내부의 몇몇 단체는 소말리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확산되는 데 대해 우려감을 표명한 바 있다. 1990년 중반 수도 모가디슈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는 이슬람 법정이 등장했다. 이들 법정은 사실상 지방정부 역할을 했고 자신들의 민병대를 이용해 판결을 강제했다. 중앙정부의 부재는 이 나라 전체에 군벌이 퍼지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소위 이슬람단체를 포함하는 소말리아 군벌은 종종 재편성의 과정을 겪거나 그냥 사라져버린다. 이들 단체의 리더십과 조직 구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명성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소말리아 내 급진 이슬람단체로는 크게 세 단체가 알려져 있다. 알이티하드알이슬라미(이슬람연합), 알이슬라(개혁), 알타블릭(신의 전달자)이 그들이다. 2001년 9월말 부시 행정부는 알이티하드알이슬라미를 테러 관련단체로 지정하고 대통령령에 따라 그들의 자산을 동결했다. 부시 행정부 당국자들은 알이티하드알이슬라미가 알카에다와 연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몇몇 지도자가 소말리아에서 벌어지는 테러행위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위에 언급된 어떤 단체도 현재 활동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가 있는 히즈브알이슬람의 지도자 셰이크 하산 아웨이스는 알이티하드알이슬라미의 지도자였다.

    이슬람법원연맹(ICU), 알샤밥

    몇몇 관찰자는 만약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군이 이슬람법원연맹(ICU)를 축출하려 개입하지 않았다면 ICU가 모가디슈를 무력 점령함으로써 소말리아가 해외 테러리스트들의 안식처로 사용되는 것을 종식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ICU의 축출로 남쪽 중부 소말리아에 치안 공백이 생겼으며 이로 인해 알카에다와 연결돼 있는 소말리아 지휘관들이 ICU에 소속돼 있던 전투원 다수를 자신의 휘하에 넣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 군에 저항하는 ICU 전투원들은 곧바로 외국 테러단체와 연계되어 있는 소말리아인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단체 알샤밥(‘청년’이라는 뜻)에 가입한다. 여기 가담한 이들 가운데는 20여 명 이상의 소말리아계 미국인도 포함돼 있었는데, 이후 소말리아에서 에티오피아 군과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후에는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알샤밥과 알카에다는 소말리아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과도연방정부와 많은 수의 과거 반정부 무장 이슬람단체가 알샤밥과 알카에다와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히즈브 알이슬람이 과도연방정부 편에 서면서 알샤밥은 히즈브알이슬람과 그 지도자 셰이크 아웨이스와 동맹을 맺을 수 없게 됐다. 또 다른 이슬람 민병대인 아흘루순나왈자마도 과도연방정부와 동맹을 맺고 현재 알샤밥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항해 알샤밥도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2010년 2월1일 하산 알투르키가 이끄는 라스캄보니는 알샤밥과 통합해 ‘알샤밥 무자헤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서로 공조하면서 과도연방정부를 공격해왔고 지난 2년 동안 외국인 전투원들과 긴밀히 협력해왔다.

    과거 2년에 걸쳐 미국이 알카에다 및 알샤밥 지도부에 가한 공세는 이들 조직을 약화시켰다. 소말리아 내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수배자 3명 가운데 2명은 각각 2007년과 2009년에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알샤밥의 고위지휘관들도 사망했다. 미국의 공격으로 인한 지도급 인사들의 죽음으로 알샤밥 지도부는 동요를 일으켰다고 전해지며 알샤밥과 알카에다의 연계가 약화될 개연성이 있다. 알카에다가 이 지역에 익숙한 대체인물을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지명수배 중인 3명의 알카에다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미대사관 폭파사건 주모자인 하룬 파줄뿐이다.

    알샤밥의 리더십

    알샤밥의 지도자들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미국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훈련과 전투참여 경험이 있는 아흐멧 압디 고데인은 소말리랜드 준 자치지역의 핵심지휘자다. 2009년 9월 그는 “오사마여 분부만 내리십시오”라는 제목의 영상을 내보내 빈 라덴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선언한다. 고데인은 이 영상에서 빈 라덴에게 그가 공헌할 수 있는 바를 제시하고 있다.

    미국 테러리스트 명단에 있는 소말리아 남부 출신의 무크타르 로보우는 2009년에 밀려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전히 알샤밥 핵심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임 대변인이었다. 역시 소말리아 출신으로 미국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이브라힘 하지 자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과 전투를 한 경험을 갖고 있다. 하산 알투르키는 에티오피아의 오가덴클랜의 일원이며 지하드를 선언한 뒤 해외 전투원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2004년 그는 미국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갔다.

    알샤밥의 지도자로 거론되는 또 다른 인물로는 아덴 아이로가 있었다. 아이로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상당히 과장됐는데 그는 사실상 조직 내 지도부 위치에 있지 않았다. 아이로는 반정부 성향이 강한 소말리랜드에서 4명의 구호요원을 살해했고, 모가디슈에서는 압둘카디르 야야라는 소말리아 학자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아이로가 미국의 공습으로 2008년 5월 사망한 이래 반군의 공격은 거세졌고 조직 내 가입자 수도 증가했다.

    알샤밥의 출현과 세력 확장에 일조한 실수 가운데 하나는 ICU의 리더십에 극단주의자와 성전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알샤밥의 리더십을 조기에 파악해 타깃으로 삼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2008년 3월 미 국무부는 알샤밥을 해외 테러단체 가운데서도 특히 주의를 요하는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체로 지정했다.

    정책적 함의

    알카에다는 미국의 국익과 동아프리카 내 동맹국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다. 반면에 알샤밥은 소말리아 시민들과 과도연방정부,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AMISOM)에 공격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2월2일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장은 미 상원 정보특위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알샤밥과 동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당분간 지역적 목표에 계속 집중할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프리카 주재 알카에다 혹은 알샤밥 지도자들이 미국 영토와 소말리아에 거주하는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목표를 재조정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니애폴리스 등 미국으로부터 수십 명의 소말리아계 젊은이가 아프리카로 떠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말리아에 가서 무장활동에 가담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미국 대테러 당국자들은 알카에다가 소말리아 혹은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이들을 선발해갔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의회에 전달했으나, 몇 명이 혹은 어떤 목적으로 미니애폴리스를 떠났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09년 초반 미 당국자들은 미국 본토를 노린 작전이 계획됐다거나 임박했다는 ‘신뢰할 만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미국 시민이 알샤밥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미국에 기반을 둔 소말리아 테러 자금지원 체계와 관련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이 같은 우려는 일정부분 2008년 10월 푼트랜드와 소말리랜드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범 가운데 미니애폴리스 출신의 미국계 소말리아인이 있었다는 사실 을 근거로 한 것이다. 2009년 12월 과도연방정부 장관 3명과 시민 수십 명이 사망한 모가디슈 폭탄테러는 덴마크 출신 소말리아인의 소행이었다. 과거 수십 년간 많은 소말리아인이 언론인, 인도주의단체 종사자, 교사로 일하고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난 2년간 이 가운데 다수가 폭동과정에서 치안유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현재까지 과도연방정부의 새 지도부를 지원하고 있는데, 현 정부의 지도자는 2006년 말 에티오피아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쫓아낸 인물과 동일인물이다(역자 주 - 셰이크 샤리프 아흐마드 현 소말리아 대통령은 과거 ICU의 지도자였으며 2006년 12월 에티오피아의 전쟁에서 패한 뒤 케냐로 망명한 적이 있음).

    소말리아가 직면한 정치 및 안보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행정부가 고려해볼 수 있는 한 가지 선택지는 이슬람 주요파벌의 장로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몇몇 분석가는 이슬람운동의 온건한 요소를 강화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알샤밥은 오로지 이들 장로들이 지지하는 또 다른 이슬람운동에 의해서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알샤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몇 명은 유엔과 미국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등록돼 있다. 혹자는 이들을 테러리스트 명단에서 삭제하는 대신 폭동의 중단이나 조약 체결 같은 양보를 받아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도연방정부가 창설된 지부티 회담을 추진한 핵심인물 가운데 한 명은 유엔 테러리스트 명단에 들어있는 소말리아인이다.

    알샤밥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테러를 계속하기로 결심한 바 있으며 협상에 참여할 의도가 없다. 이러한 극단적인 지도자들에게 맞춤형으로 집중된 처벌과 암살을 통해 온건파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는 길을 닦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거꾸로 이러한 선택이 단기간에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있으며 서구세계에 반대하는 폭력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또 다른 선택지로는 이들을 전쟁범죄 명목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C)에 보내는 방법이 있다.

    극단주의자들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치적, 군사적 수단을 모두 동원한 소말리아 주도의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과도연방정부, 소말리랜드, 푸트랜드와 다른 소말리아 온건세력이 연합을 형성해야만 알샤밥 내 극단적인 세력들이 성장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외부세력보다는 소말리아 국민의 지지를 얻을 개연성이 높아 보이고, 인접 국가들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알샤밥이 내전을 일으키며 앞세우고 있는 명분 즉, 외세의 주둔이라는 구실을 없애버릴 수 있게 된다.

    # 동남아시아에서의 알카에다와 급진 이슬람단체

    1990년대 들어 알카에다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눈에 띄게 진출했다. 이곳에 알카에다 지부를 세우면서 알카에다는 인도네시아의 제마이슬라미야연대(JI network) 같은 자생적인 폭력집단을 만들고 강화시켰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들어 동남아 지역의 정부 당국들은 알카에다와 JI, 그에 동정적인 단체들을 급격히 감소시킨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은 호주와 함께 이 지역 국가들의 대테러 능력 확충을 위해 지원했고 때로는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폭력적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약화된 핵심 요인은 다음과 같다. ▲대체적으로 온건한 동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 성향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발전 ▲다수 국가에 존재하는 민주적 정치시스템 ▲폭탄 공격으로 무슬림 민간인들을 살해한 JI 급진파들의 계산 착오 ▲폭력단체를 근절하기 위해 자원과 국민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정부의 능력. 이러한 관찰에서 벗어나는 사례는 필리핀 남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은 급진 이슬람단체들이 계속되는 파벌 간 분쟁에 시달려왔다. 2002년 이래 미국은 필리핀 군에 조언 및 보조하기 위해 이 지역에 많은 부대를 파견해왔다.

    알카에다와 제마이슬라미야

    9·11테러 이후 미국은 동남아에서 알카에다와 연계하고 있다고 알려진 급진 이슬람단체 JI에 주목하게 됐다. 2001년 직전 알카에다는 동남아 세포조직을 이용해 9·11을 포함한 국제 테러활동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파음모의 주모자로 유죄판결을 받은 람지 유세프 같은 알카에다 조직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에 들어 JI와 알카에다는 상생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두 단체는 회원자격도 유사하다고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민다나오의 훈련소를 공유하기도 했고 알카에다가 JI에 상당한 자금을 제공한 일도 있다. JI가 알카에다가 사용할 탄저균을 개발하기 위해 과학 분야 전문요원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던 사례처럼 인력도 공유하고 있다. 두 단체가 공동으로 작전을 계획하고 동남아 공격을 함께 실행한다고 알려져 있다.

    알카에다와 광범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JI 구성원들은 9·11테러 당시 비행기 납치범 2명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과 2000년 콸라룸푸르와 방콕은 9·11 공격 음모를 논의하기 위한 주요 전략회의 장소였다. 2002년에는 알카에다 조직역량의 20%가량이 동남아에 집중됐다.

    알카에다와 JI 지도자들은 최소 두 차례 중요 회의를 위해 동남아에서 모였다. 우선 2000년 1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미국 구축함 콜호 공격계획과 9·11 항공기 납치가 거론됐다. 2002년 1월 방콕에서 열린 회의에는 알카에다 대표가 참석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벌어진 폭탄테러를 모의했다고 전해진다. 9·11 항공기 납치범 두 명과 2005년 4월 9·11 음모와 관련해 유죄판결을 받은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2000년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세포 조직원과 만난 일도 있다. FBI는 말레이시아 세포 조직원들이 무사위를 위해 현금 3만5000달러와 신용보증서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9·11테러와 미 구축함 콜호 공격에 가담한 다수의 알카에다 요원이 1999년과 2000년에 콸라룸푸르를 회의 혹은 거주지역으로 사용했다. 생포된 한 알카에다 지도자는 말레이시아가 통행과 회합을 위해 이상적인 장소라고 판단한 이유로 이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걸프 주변 국가 시민들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수년 동안 JI 요원들을 감시, 체포, 살상함으로써 동남아 각국은 알카에다와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는 호전적인 JI 파벌을 상당히 약화시켰다고 자신하게 됐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 들어 알카에다와 JI의 연계는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이후 JI는 방향을 틀어 먼 미래에 군사력을 갖춰 이슬람 혁명을 지원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반서방주의 포교 등의 장기 전략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벌작전이 지휘, 통신, 자금모집 구조를 적절히 약화시킨 이래 JI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와 술루섬, 인도네시아에서만 활동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이들 지역은 모두 무슬림 인구 밀집지역이다.

    2009년 9월 인도네시아 당국은 세포조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누르딘 모하메드 톱을 사살했다. 자신의 조직이름을 ‘말레이군도’에서 ‘알카에다 지하드 협회’로 바꿨던 톱은 2009년 7월17일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메리어트와 리츠칼튼 호텔 동시 폭파사건의 주동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당시의 폭탄공격은 4년 만에 성공한 반서구 테러였다. 이 작전의 정교함 때문에 톱과 알카에다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됐고,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알카에다 사이의 연계를 입증하는 내용이 담긴 노트북이 톱의 은신처에 발견되어 그러한 의혹은 더욱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알카에다와 JI 분파조직의 연계

    노트북에는 또한 호텔 폭파사건의 테러범 모집책으로 여겨지는 샤이푸딘 주흐리 빈 아흐마드 자엘라니가 예멘에서 공부하는 동안 알카에다에 지원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샤이푸딘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예멘에 머물면서 급진화됐다고 여겨진다. 한때 톱을 대신하기도 했던 샤이푸딘은 인도네시아 당국과의 교전 중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동남아시아 테러리즘 전문가인 시드니 존스는 자카르타 호텔 폭파사건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으로 톱이 알카에다와 구조적으로 연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라고 서술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톱의 사살현장에서 복원된 증거들은 그가 알카에다와 연계했으며 중동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인도네시아의 반테러 파견대인 88여단장 사우트 우스만 나수티온은 톱과 그의 세력 상당수가 죽거나 생포됐지만 새로운 세포조직이나 분파가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에 폭력의 역사가 있었던 술라웨시와 말루쿠 같은 지역이 주 위험지역이라는 것이다. 나수티온은 이러한 단체들이 현재 인원을 모집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으며, 현재 인도네시아 당국이 수감 중인 148명의 테러리스트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자마자 테러조직에 재가입하거나 새로운 단체를 만들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당국자들은 테러범들이 출소해 자국에서 분쟁의 근원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향교육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454명의 무장세력 구성원이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352명이 투옥됐다.

    2010년 1월 파키스탄 당국은 와지리스탄 남쪽과 북쪽 국경 부근에서 다원화 민병대에 대응한 미국의 미사일 공격으로 필리핀 국적 민병대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한다. 아부 사이프와 JI 사이에 연계가 있다고 알려진 폭탄제조 전문가 압둘 바시트 우스만의 명백한 죽음은 알카에다 파키스탄 지부와 동남아시아 민병대 사이에 유대가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 1월17일 미 정부는 2002년 발리 폭탄테러 혐의를 받던 함발리를 워싱턴의 법정에 세울 것을 고민한다. 2002년 200명 이상이 사망한 발리 폭탄테러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함발리는 2003년 태국에서 체포됐으며 2006년 이후 관타나모에 수용 중이다. 1월20일 미국 정부는 함발리를 인도네시아 법정에 세우기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송환요청을 거부했다.

    알카에다와 종종 유대관계를 맺은 또 다른 동남아시아 집단으로 아부 사야프가 있다. 이들은 파벌에 의해 움직이는 소규모 무슬림단체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서부 끝자락과 술루섬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다. 1990년대 초에는 아부 사야프가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와 연관이 있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자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부 사야프는 살인 및 납치에 관한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2002년 이후 미국이 지원하는 필리핀 군사작전의 압박으로 아부 사야프의 무장세력은 1000명 규모에서 2000년대 후반에는 200~300명 선으로 준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이후 아부 사야프는 JI 혹은 더 큰 규모의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같은 단체에 협력해 마닐라 폭탄테러 사건을 포함한 공격을 벌였다.

    2002년 이래 미국은 필리핀 남부에 병력을 투입해 아부 사야프와 싸우는 필리핀 정부군에 조언해왔다. 이 작전에서 미국은 필리핀 군에 P-3 정찰기를 포함하는 군사정보·통신 지원, 미 해군특수부대(Navy Seal)의 필리핀 지상군 파견, 필리핀 군과의 합동훈련, 필리핀 군의 작전계획 수립 보조, 필리핀 군과 공동으로 대민 지원 계획 실행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지역에서의 의료지원, 수질정화기 설치, 농산물 시장과 학교 개보수 같은 대민 지원은 지역 내 아부 사야프의 지지를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책적 함의

    동남아에서의 테러조직 활동은 완전히 제거되진 않았지만 거의 진압된 것으로 보이며, 이슬람 테러집단의 위협은 주로 서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위협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반응은 통상 그들 국가의 안정성이나 국내 정치에 가해지는 위협의 강도에 따라 다르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신속히 민병대를 진압하고 미국이나 호주와 정보를 공유했으나, 인도네시아는 자국 시민들에게 가해진 위협의 심각성이 드러난 이후에야 JI 진압에 착수했다.

    미국은 동맹국 호주와 더불어 여러 수단을 동원해 이 지역의 반테러 노력을 장려하고 추진하며 지지해왔다. 이러한 노력의 사례로는 인도네시아의 엘리트 대테러부대에 자금과 훈련을 지원한 일, 필리핀 남부에서 아부 사야프와 전투를 벌이는 필리핀 군을 위한 자문부대 파견, 말라카 해협의 안보환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지역해상안보구상(Regional Maritime Security Initiative) 발족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정보공유작전 증대, 인도네시아 군부와의 관계 재정립,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상당량의 원조 제공 등이 있다. 또한 2001년 이래로 태국과 미국은 반테러 협력을 실질적으로 증대시켜왔다.

    동남아에서의 반미 테러와의 전쟁은 부시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오바마 행정부에도 매우 민감한 외교적 사안이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상호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국가들은 안보현안과 국내 정치적 고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만 했다. 동남아의 급진적 이슬람주의자가 소수이기는 하지만 대다수 국가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군대 주둔을 반기지 않는다. 이는 주류 이슬람 및 세속적 민족주의단체에 모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곳은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주둔함에 따라, 또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미국이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다’는 인식이 동남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확산됨에 따라 급격히 증가한 반미감정은 이 지역 국가들이 자국 내 안보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검토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동남아에서 이슬람주의 테러활동을 축소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한계가 있어 이러한 사례가 과연 다른 무슬림 세계에서도 활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은 이슬람주의 민병대와의 교전에 있어 확실히 책임지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만이 이들 테러 세력이 서구인을 노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정권과 국민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알카에다의 글로벌 전략과 장기적인 정책 함의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나온 알카에다 지도자들의 발언이 시사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과 추종자들을 세계적 이슬람운동의 무장 수호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알카에다와 수많은 협력자는 무슬림 세계의 문제에 대한 비(非)무슬림의 ‘간섭’을 종식시키고 수니파 이슬람법의 해석에 따라 무슬림이 지배하는 사회로 세상을 탈바꿈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일부 알카에다 지도자들의 발언은 단계적 투쟁을 옹호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투쟁목표는 미국과 외국군대를 ‘이슬람 영토’에서 축출하는 것이며, 이와 유사한 목표로 ‘부패한’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이슬람 율법에 의해서만 통치되는 정부를 세우는 것을 들고 있다. 일부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이나 시아파 무슬림과의 투쟁을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알카에다 조직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원을 호소하고, 때로는 민족주의 정서를 활용하거나 지역의 비극을 조작해 자신들의 의제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사마 빈 라덴이 수립한 전제조건이 “이슬람 국가를 움직이고 고무하며 동원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카에다 지도자들의 발언이나 알카에다의 공격행동은 대체적으로 무슬림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표와 언론 모니터링을 통해 나타나는 국제여론을 살펴보면, 일부 무슬림 다수국가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불만족은 상당히 높지만 일부 알카에다 협력조직의 분파주의적 주장과 알카에다에 영향을 받은 테러집단의 완고한 공격성향이 알카에다의 호소력을 깎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빈 라덴, 자와히리, 그 외 각 지역 지지자들의 성명에서 나타나는 완고하고 반민주적인 어조가 세속적 개념의 정부를 지지하는 무슬림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알카에다의 발언을 분석한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이들 집단과 개인이 자신들의 행동을 종교적으로 허용된 것으로 간주하며 외부위협에 대한 수세적 반응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카에다는 또한 자신들의 목적을 완수하는 것만이 이슬람 세계의 슬픔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호소하면 이슬람 집단 기저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들이 당면한 정치적 현실은 스스로를 무슬림의 수호자로 묘사하고자 했던 그간의 노력을 훼손하는 행동을 취하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2004년 12월 빈 라덴은 이라크전쟁이야말로 성전주의자들이 미국을 물리칠 수 있는 “귀중하고 유일한 기회”라고 주장하며 이라크 내 폭동을 ‘제3세계 전쟁’에서의 핵심적인 전투라고 묘사했다. ‘제3세계 전쟁’이란 십자군-시온주의자 연합이 이슬람 국가에 대항한 전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라크 알카에다 지부가 세운 수많은 전략적 선택은 핵심집단에 대한 지지를 훼손했다. 종파전쟁을 부추기는 결정을 내리거나, 이슬람 교의를 일부 지역에서 엄격하게 강요하거나, 일부 수니파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와 시민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이 집단의 심각한 지위 하락을 불러왔고, 이들은 2007년 이후 이라크 치안군, 수니파 연합, 미군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알카에다 사우디 지부는 2003~07년 작전에서 처음에는 자국 내 외국자본 시설을 공격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미군의 주둔이나 다른 외세 개입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알카에다 지도자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사우디 치안당국자들은 알카에다가 그들 공격의 초점을 외국 목표에서 사우디 치안군으로 변경하는 순간 정부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해 제거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강력한 치안작전 수행 외에도 사우디 정부는 알카에다가 치안장교를 공격한 사례 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해 알카에다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소말리아의 경우 알카에다에 협력하는 알샤밥 전투원들이 외세의 개입과 과도연방정부에 반대하는 소말리아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집결했다. 그러나 알샤밥은 유엔식량계획(UNFP)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인도주의적 구조 활동을 차단시켜버렸고, 이로 인해 소말리아 내 식량사정이 악화되면서 다수 소말리아인의 생존을 위협할 여지가 발생했다.

    ▲동남아의 경우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JI의 2002년 발리 폭탄테러는 인도네시아 정부로 하여금 미국과 호주의 반 테러 공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역추적을 통한 사살작업에 착수하도록 했다. 인도네시아 등에서 계속되는 JI 소탕작업은 알카에다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민병대 파벌이라는 JI의 능력을 현저히 감소시킨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중반 이래 JI는 단기적으로는 민병대의 폭력 전략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분석가는 미국과 동맹국의 대테러 노력이 성공할지 여부는 이슬람 국가 대중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사례들은 현재 혹은 잠재적 지지자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알카에다의 행동과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 미국의 대테러 정책을 성공시킬 열쇠임을 시사한다. 거꾸로 알카에다 조직원들 역시 무슬림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인기가 없는 미국과 그 동맹국의 정책을 부각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듯 복잡한 역동성과 방정식이 꾸준히 국제분야 정책결정자들을 괴롭히는 것이야말로 알카에다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당면한 현실이며, 이는 결국 앞에서 설명한 대로 지역적 맥락을 더욱 정밀하게 살핀 맞춤형 접근법을 요구하고 있다. 한 지역 혹은 하나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했던 대테러 정책이 다른 곳에서는 완전히 역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배경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 12월10일(현지 시각) 미군기지 내 최악의 총기참사로 기록된 텍사스 주 포트후드 미군기지 애도식에 참석해 추모연설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알카에다의 형태는 바뀌어왔으나 그 전략적 목표는 여전히 동일하다. 미국과 미국의 국익, 해외에 체류 중인 미국 시민들을 공격하고자 하는 오사마 빈 라덴 일당의 야망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2009년 8월 존 브레넌 백악관 국토안보 보좌관은 “알카에다는 적응력이 있으며 대단히 끈질기다는 게 입증됐고 국가의 입장에서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고 언급했다. 2009년 9월 미 상원 국토안보 및 정무 위원회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은 알카에다 핵심부가 작전상의 음모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으며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작전요원을 모집하고, 훈련하며, 이동시키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 정부의 조치가 상당부분 효과를 발휘하면서 파키스탄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알카에다 ‘집단’ 자체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의 군사 및 첩보작전은 그 핵심부가 9·11테러처럼 대규모 재앙을 몰고 올 만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상원 정보특위 직전에 열린 2009년 안보위협 청문회에서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장(DNI)은 “알카에다는 1년 전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며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진술했다.

    당시 많은 분석가는 집합적 알카에다의 계획 수립 및 작전수행 능력의 부재는 지난 24개월 동안 이들이 겪었던 심각한 리더십 손실 때문이라 추측한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초부터 9월 말까지 파키스탄에서 무인공격기를 띄워 총 39회의 미사일 공격을 실시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8년 5월에 같은 종류의 공격을 36회 가했다. 이 공습으로 칼리드 하비브, 아부 라이드 알리비, 아부 카바브 알마스리, 우사마 알키니 등 13명의 알카에다 고위 지도자가 사망했다.

    블레어 국장에 따르면, 이렇듯 짧은 시간에 다수의 지휘자가 사망함에 따라 알카에다는 동일한 수준의 작전 경험을 가진 대체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원 정보특위의 2010년 연례 안보위협 보고에서 국가정보국은 “대(對)테러 압박이 알카에다의 피신처에 가해지는 동안 핵심 장교진과 작전 간부진은 이 조직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으며 알카에다는 공격을 감행할 능력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전세계의 많은 소규모 테러조직이 알카에다와 제휴하고 있지만, 동시에 알카에다 운동은 무슬림 공동체 내에서 정통성 위기를 맞으면서 더 장기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블레어 국장은 “미국이 무슬림 세계에서 알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 집단에 반대하는 여론을 확산시키는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왔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보복이라는 의미에서 알카에다의 행동에 찬성했던 무슬림들이 극단적 행동에 반대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르단 암만의 호텔 세 곳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나 이라크에서의 무고한 시민살상은 알카에다에 대한 엄청난 반감을 몰고 온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요르단대학교 전략학연구소가 암만에서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후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단지 20%만이 알카에다를 ‘정당한 저항 집단’이라고 보았다(2004년 조사에서는 67%).

    혹자는 알카에다의 행위에 버팀목을 제공해준 무슬림 신학 해석이나 종교적 정당화, 전략적 고취가 모두 공격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2년 동안 많은 저명한 종교석학과 전직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이 운동의 무차별적인 전략과 이념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이 가운데는 알카에다의 급진 지도자였던 사이드 이맘 알샤리프와 사우디 셰이크 살만 알오우다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무슬림 공동체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카에다는 계속적으로 잠재적인 신병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비슷한 목표와 철학을 가진 다른 단체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들을 지원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블레어 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카에다는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주요 지부와 지하드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일부 알카에다 지부와 지하드 네트워크는 미국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의도와 그럴 만한 능력을 보유해왔다. 몇몇 지역적 중심점과 동맹은 지난 2년 동안 힘과 독자성이라는 측면에서 발전해왔으며 자신들의 지역 밖에서 벌어지는 작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과거 2년 동안 알카에다와 제휴한 집단들이 수많은 치명적인 테러를 저질렀음에도, 파키스탄의 핵심부는 작전적 효율성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상위 지휘관들의 사망과 미국의 첩보활동 협력자들이 가하는 지속적인 압박으로 인해 알카에다 핵심부는 대규모 공격을 조종할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분석가들은 2008년 발생한 두 번의 공격, 즉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 저지른 주이슬라마바드 덴마크대사관 자살폭탄 테러와 이슬라마바드 메리어트 호텔에 대한 폭탄테러 사건을 주목한다. 이 사건에서 알카에다 핵심조직은 대규모 공격을 실행하기에는 명백히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줬고, 분석가들은 이로 인해 알카에다의 조직력에 대해 일부 의문을 품기도 했다. 또한 알카에다가 신병 모집이나 자금 동원에 때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증거도 있다. 2009년 6월 아프가니스탄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아부 알야지드는 자국 내 알카에다 조직원들에게 식량이나 무기 등의 보급품이 부족하다는 내용의 음성메시지를 배포한 바 있다.

    2009년 한 해 동안 시도된 소규모 테러 공격, 즉 11월 텍사스주 포트후드에서의 총격 사건이나 12월 해외에서 출발한 미국 항공기를 폭파하려고 기도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작전이 알카에다나 그 연합이 더 이상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대규모 재앙을 불러일으킬 만한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보고 있다. 이들 분석가들은 알카에다와 목표를 공유하는 개개인의 파괴력이 사실상 하강국면에 접어들었고, 조직 역시 자신들의 지속적인 작전수행 가능성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반면 소규모 테러가 중심이 되는 최근의 경향으로 미루어보아 조직이 더욱 신중하고 정교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알카에다 조직이 협력자들이나 동조자에게 비교적 작은 규모의 행동을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크고 참혹한 공격을 위한 계획과 준비를 국제사회의 감시에서 벗어나 은폐하려는 것 같다는 분석이다. 2010년 1월20일 상원 사법위원회에 출석한 로버트 뮐러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폭탄테러 사건이 보여주듯 우리가 접하는 위협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또 위험해지고 있다”고 발언했다.

    현재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대(對)테러 정책이나 프로그램이 알카에다의 위협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국무부 대테러 조정센터의 실무책임자 대니얼 벤저민은 2010년 1월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사건은 우리가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조직해야 할지 제반 사항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며 “2009년 하반기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 역시 우리의 대응시스템 가운데 어떤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적합하지 않은지 재확인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 알카에다의 기원

    알카에다의 초기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은 1957년 7월 태어났다. 그는 예멘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해 굴지의 건설회사를 세운 부호의 17번째 아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수니파지만, 빈 라덴은 제다에 있는 킹압둘아지즈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투쟁적 이슬람주의 관점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수니 이슬람운동의 대표 격에 해당하는 무슬림 형제단(the Muslim Brotherhood)의 핵심이론가 사이드 쿠틉의 동생인 무하마드 쿠틉 밑에서 수학했다.

    빈 라덴의 또 다른 스승은 무슬림 형제단 요르단지부의 주요인물인 압둘라 알아잠이다. 일부 전문가는 그가 1979~8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대항해 벌어진 지하드를 설계한 당사자라고 지목하고 있다. 당시 그는 소련의 침공을 비(非)무슬림 세력이 신성한 무슬림 영토와 민중을 정복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이 시작되자 빈 라덴은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알아잠의 진영에 합류한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전쟁에 대비한 아프간 무자헤딘(무장세력)과 아랍 지역 신병 모집책 등에게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1984년 아잠과 빈 라덴은 아랍, 유럽, 미국에서 신병을 모집하는 조직망과 자금을 동원할 사무소를 설치함으로써 ‘막탑 알키다마트’로 불리는 원조체계를 조직화했다. 많은 전문가는 이 막탑이라는 조직망이 장차 알카에다의 근간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막탑 조직망을 반(反)소련 성전을 위한 조직원 모집 수단으로 이용했던 또 다른 주요인물로는 이집트의 이슬람 단체인 알지하드의 영적 지도자 우마르 압달 라흐만(‘눈먼 지도자’로도 불림)이 있다.

    빈 라덴은 대(對)소련 전쟁 기간 벌어진 1986년 잘랄라바드 전투와 1987년 외국인 자원자들의 소련 기갑부대 정면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빈 라덴은 전투 중에 자신이 소련의 화학무기 공격에 노출돼 경미한 부상을 당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미국 당국자들은 이들 지원병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축출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공헌자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비아프간 지원병 모집을 막기 위한 어떠한 명시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물론 당국자들은 미국이 비아프간 지원병을 직접 지원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부인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암암리에 아프간 무자헤딘, 특히 소련군과 싸우는 이슬람 근본주의 아프간 파벌에 자금(1981~91년 사이에 30억달러) 및 무기(파키스탄 경유)를 지원했다.

    결국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이들 무자헤딘 활동이었다. 빈 라덴, 아잠, 압달 라흐만 등이 미국의 중동정책이나 이스라엘 지원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 중 누구도 공개적으로 미국에 대한 직접 공격을 옹호, 착수, 계획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의 지배가 끝을 향해가던 1988년, 빈 라덴과 아잠, 그 일당들은 자신들이 구축해왔던 이슬람 지원병 조직망을 어떤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당시 이 조직망의 규모가 1만~2만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산하지만, 이들이 모두 알카에다의 테러행위를 지지하거나 참여한 것은 아니다. 아랍어로 기본, 기초라는 뜻을 가진 ‘알카에다’라는 명칭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잠은 이 조직이 무슬림이 위협을 받는다고 인식되는 그 어떤 장소에도 즉각 개입할 수 있는 이슬람식 신속 대응군이 되길 원했다. 반면 빈 라덴은 알카에다의 행동원들을 각각 고국에 파견해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왕족 같은 세속적이고 친서구적인 아랍지도자들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수행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빈 라덴과 아잠의 이러한 견해차이로 인해 알카에다 조직 내부의 이집트인들에 대한 빈 라덴의 영향력은 증대됐다. 이집트 국적인 압달 라흐만은 알카에다의 자원을 동원해 이집트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또 다른 친밀한 이집트 국적 측근으로는 이집트 내 알지하드 조직의 작전 지휘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있다. 압달 라흐만처럼 자와히리도 투옥된 적이 있지만 1981년 10월 벌어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암살과 관련해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1985년 이집트를 떠나 아프간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과거에 익혔던 약학기술을 활용해 소련과의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한다.

    아잠은 1989년 암살되는데 혹자는 빈 라덴이 세력다툼을 해결하기 위한 이 암살에 가담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잠의 죽음 이후 빈 라덴은 막탑의 자금과 조직 메커니즘을 장악한다. 1990년 압달 라흐만은 수단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95년 10월에는 1993년 있었던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테러 모의혐의로 기소당한다. 자와히리는 이후 빈 라덴과 함께 행동했고 여전히 빈 라덴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다.

    위협이 펼쳐지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알카에다 서열 2위로 불리는 아이만 알자와히리.

    1990년 8월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대(對)소련 전쟁에서 사실상 미국의 동맹이었던 빈 라덴을 미국의 가장 적극적인 적(敵)으로 바꿔놓는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완료된 1989년 2월 이후 빈 라덴은 고향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그는 사우디 당국자들에게 로비를 벌여 이라크 침공으로부터 사우디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 전투부대를 유치하려는 계획을 막고자 했다. 대신 무자헤딘을 육성해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축출하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생각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들에 의해 거절당했고, 이를 계기로 사우디 왕족과 빈 라덴의 관계는 틀어진다.

    미군 50만명이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1991년 1월16일~2월28일)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됐다. 주로 공군으로 구성된 6000여 명의 미군은 2003년까지 이라크 봉쇄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우디에 주둔했다. 1991년 이후 사우디 주둔 미군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고 주둔 위치도 사우디 군사시설로 한정돼 있었음에도, 빈 라덴과 그 추종자들은 미군이 신성한 이슬람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았고 사우디 왕족 또한 그러한 점령을 방조했다고 규정한다.

    1991년 사우디 지도자들과의 불화 이후 빈 라덴은 아프리카 수단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그는 알카에다 민병대원을 관리하고 훈련시키는 한편 발칸, 체첸, 카슈미르, 필리핀에서의 지하드 작전이나 미국을 노리는 작전에 쓰일 장비들을 구입한다. 90년대 초반 동안 그는 아라비아이슬람개혁운동본부(MIRA)의 사드 파키 같은 런던 내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빈 라덴은 미국과 이집트의 압력을 받은 수단 정부가 1996년 5월 그를 쫓아내기 전까지 계속 수단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탈레반을 도와 아프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었고, 탈레반은 1996년 8월 아프간의 수도 카불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빈 라덴과 자와히리는 이슬람 정권이 권력을 잡는 유일한 길은 세속적인 정권의 후원자인 미국을 해당지역에서 축출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빈 라덴과 자와히리는 알카에다가 미국의 안보에 있어 전 지구적인 위협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휘했고, 이는 2001년 9월11일의 공격으로 정점을 찍는다. 이 기간에 알카에다는 무슬림 세계 전체에 걸쳐 반정부적 성격을 지닌 급진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친 연합체로 진화한다. 미국 당국자에 따르면 알카에다의 세포조직이나 일당은 지금도 70개국 이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무렵부터 9·11 이전까지 알카에다가 미국이나 미국의 국익에 대항해 취한 행동은 다음과 같다.

    ▲1992년 소말리아 희망회복작전으로 배치를 기다리던 미군 100명이 머물던 예멘의 호텔 폭파사건을 자신들의 소행이라 주장. 사망자 없음.

    ▲1993년 2월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모의 사건의 폭탄제조자로 알려진 람지 아흐마드 유수프 등 핵심인물들에 관한 정보는 이들이 알카에다와 연관됐을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음. 위에서 언급했듯 압달 라흐만은 이 공격과 관련해서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된 바 있음.

    ▲1993년 10월 미군과 전투를 벌인 소말리아 집단의 무장을 자신들이 담당했다고 주장. 1993년 10월 모가디슈에서 미군 특수부대 18명 사망.

    ▲1995년 6월 에티오피아에서 벌어진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 이집트의 투쟁적 이슬람주의자 집단에 의해 시도된 이 사건에 알카에다 요원이 도움을 준 것으로 추정됨.

    ▲1995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훈련센터 폭발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4명의 사우디인이 방송에 출연해 빈 라덴과 다른 급진 이슬람주의자 지도자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 미국인 5명 사망.

    ▲9·11위원회 보고서는 알카에다가 1996년 6월 사우디 다란 부근의 코바르타워 복합단지 폭파사건에 관여했을 수 있다고 지적. 그러나 루이스 프리 당시 FBI 국장은 이 공격을 사우디의 시아파 반대파와 이란 정보요원들의 소행으로 판단했음. 미국 공군병사 19명 사망.

    ▲알카에다는 1998년 8월 300여 명이 사망한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 폭파사건 주모자로 추정됨. 1998년 8월20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 라덴의 훈련소에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했으나, 몇 시간 차이로 그를 놓친 것으로 알려져 있음.

    ▲1999년 12월 미국과 요르단 당국자들은 각각 요르단 내 성지와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노린 알카에다의 계획을 저지함.

    ▲2000년 10월 알카에다 행동원들이 예멘 아덴항에 정박해 있던 미군 구축함 콜(Cole)호에 대해 배를 이용한 자살폭탄 공격을 시도. 구축함 손상 및 수병 17명 사망.

    # 아프가니스탄

    9·11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알카에다 지도부의 주요거점이었지만, 이후 8년에 걸친 미국 주도의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노력으로 알카에다는 적극적인 행동보다는 폭동을 촉발하는 역할에 한정돼 있다. 제임스 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2009년 10월4일 CNN에 출연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전투원 숫자의 ‘최대 측정치’가 100명을 넘지 않으며, 군사기지도 없다고 밝혔다. 이 평가가 정확하다면 알카에다의 그 어떤 국제 테러 계획도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시작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군 및 국제안보지원군(ISAF) 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탈 장군이 2009년 8월30일 발표한 아프가니스탄 상황 ‘초기 평가서’는 존스 보좌관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맥크리스탈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반정부 전투원들은 아프간인이며…이들은 해외 전투원의 도움을 받는다…(이들은) 물질적, 전문적, 이념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보고서는 또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알카에다와 협력조직들은 해외전투원, 자살폭탄 테러리스트, 기술적 원조를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고 있으며, 이념적 자극, 훈련, 자금지원을 제공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전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들은 아랍인, 우즈벡인, 체첸인을 포함한 소수의 알카에다 요원만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생포되거나 사살 당했다고 말했다. 맥크리스탈 보고서는 “주요 아프간 반정부 집단(예를 들어 잘랄루딘 하카니와 그 아들인 시라즈 하카니의 조직망)은 알카에다 및 파키스탄 소재 반정부집단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카니 조직망은 아프간 동부에 위치한 코스트, 파키타, 팍티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카불에서 벌어진 몇몇 주요 폭탄테러를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카니 조직망이 세계적 야심을 갖고 있다거나 인력과 자원을 더 넓은 범위의 알카에다 목표에 제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내 주요 반정부집단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렸던 탈레반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아프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가했다. 탈레반의 지도자인 물라 우마르나 집권 당시 그를 도왔던 많은 고위참모는 현재도 생존해 있으며, 파키스탄 내 피신처에서 반정부행동을 실행하려 노력하고 있다. 아프간 당국자들은 우마르 등 탈레반 고위인사들이 퀘타와 그 주변에 근거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들을 ‘퀘타 슈라 탈레반(QST·‘슈라’는 지도부회의라는 뜻)’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는 우마르와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거리를 두고 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알카에다와의 친밀한 관계가 아프간 국민의 지지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반정부 세력으로는 과거 무자헤딘 당의 지도자였던 굴부딘 헤크마타야르가 이끄는 히그(HIG·‘굴부딘의 이슬람정당’이라는 뜻)가 있다. 국무부는 히그를 외국 테러조직으로 지정해두고 있다. 이들이 알카에다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헤크마타야르는 1960년대 카불대학교의 이슬람주의 학생 지도자였을 당시부터 아프간 파벌의 주요 지도자였으며, 그의 관심사는 국제적 테러리즘이 아닌 아프간 국내정치에 맞춰져 있다. 아프가니스탄 의회의 총원 249명 가운데 40명은 히그 당원이었지만 이들은 반정부적 활동을 포기하고 아프가니스탄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서약했다. 미국과 아프간 당국자들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2009년 헤크마타야르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히그의 대표자들과 접촉해 공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회담을 가져왔다고 밝힌 바 있다.

    # 파키스탄

    미국 당국자들은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이 파키스탄 영토에서 무사히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과 이들이 인구밀집지역인 펀자브 지역은 물론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따라 작전을 펼치는 수많은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탈레반 지지자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져나온 알카에다 병력은 파키스탄에 잔존하고 있으며, 이들은 반(反)서구, 반(反)인도 공격을 감행하는 토착 파키스탄 테러단체와 상호보완적으로 광범위하게 연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알카에다의 창립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다른 고위인사들과 함께 파키스탄 북동부에 숨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무슬림들에게 미국의 파키스탄(및 아프가니스탄) ‘점령’이나 미국과 결탁한 정치인과 장교들에 대항해야 한다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알카에다는 파키스탄 서부에서 외국 출신 극단주의자들이 테러작전 훈련을 받는 병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설에 의하면 2009년 무렵 150명에 달하는 서구인이 파키스탄 서부에서 테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2009년 후반 파키스탄 서부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알카에다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면서 이들 병영의 규모는 축소되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된다.

    2007년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위협을 분석한 국가정보국의 평가서는 알카에다가 파키스탄 연방부족 자치지역(FATA)의 은신처를 이용해 테러작전 지휘자, 알카에다 최고지휘부 등 미 본토 공격 능력의 핵심요소들을 유지하거나 소생시켜왔다고 결론 내렸다.

    2009년 3월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의 핵심목표는 알카에다와 파키스탄에 있는 은신처를 붕괴시키고 해체해 무찌른 뒤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알카에다가 미국의 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협을 대표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2009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파키스탄 방문기간에 가진 현지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파키스탄 당국자들이 긴급수배 중인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미국의 우려를 예리하게 표명한 바 있다.

    “2002년 이래 알카에다는 파키스탄에 은신처를 마련해왔다. 나는 파키스탄 정부에서 아무도 그들의 은신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을 정말 잡고 싶지만 잡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알카에다가 왜 귀국에 은신처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이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좀 더 솔직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 ‘알카에다와 그 연계조직’

    알카에다 지도부 공격을 위해 활용되는 미군의 무인항공기 프레데터.

    파키스탄 당국자들은 클린턴 장관의 이러한 발언에 격노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2001년 이래 다수의 고위급 인사를 포함해 약 500명의 알카에다 탈주자 신병을 미국에 인도했다. 극단주의자 네트워크를 붕괴시키려는 파키스탄의 노력이 일정부분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국경 근처의 파키스탄 서부 부족지역에서는 흔히 ‘파키스탄식 유화정책’이라고 불리는 정책으로 인해 반미 테러주의자들이 이득을 본 것으로 판단되며, 파키스탄에서는 알카에다가 수년 동안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파키스탄과 미국의 몇몇 안보당국자는 파키스탄 정부가 종교적 무장세력이나 알카에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파키스탄 육군의 형편없는 폭동제압 능력과 파키스탄 정부의 취약한 정통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당국자들은 파키스탄군이 2009년 후반 서부 부족지역에서 벌인 알카에다·탈레반 토벌작전의 결과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 작전에 20만명의 정규군과 준군사조직을 동원했다. 이들은 또한 국경 부근의 극단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미국의 무인항공기 공격과 파키스탄의 군사적 압박이 이들 조직의 간부진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면서 알카에다의 활동이 상당부분 저지당했다고 주장한다. 2009년 8월 알카에다에 협조적인 파키스탄 탈레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의 죽음(미국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은 주목할 만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도심을 노린 일련의 자살폭탄 공격은 이들 전투집단의 회복력을 보여준다. 더욱이 일부 분석가들은 무인정찰기 폭격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은폐가 쉬운 파키스탄 도시 지역으로 숨어들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해당지역 일반 주민들의 반미감정이 악화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이와 함께 파키스탄 군부는 알카에다와 다른 무장조직 지도자들이 일부 피신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부 부족지역으로 지상공격을 확장하는 데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책적 함의

    9·11테러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 지구에 걸친 반테러리즘 노력의 일환으로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중대한 군사작전을 실행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이른바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Peace)’이 그것이다. 이 작전은 인접국가인 파키스탄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알카에다의 위협을 무효화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주둔을 지지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이웃 파키스탄이 계속적으로 미국과 서구에 위협을 가하는 ‘테러리즘의 진원’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최근 공개된 증거들은 9·11 당시 항공기 납치범들이 2001년 초반 파키스탄 서부에 근거를 두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영국 정부가 수사한 가장 심각한 테러 음모의 75%가 파키스탄 내 알카에다와 연관이 있다고 추산했다. 2008년 11월 뭄바이 테러 이후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의 긴장관계가 1년 이상 지속되자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알카에다의 파키스탄 ‘연합체’ 하에 있는 단체들이 남아시아 전역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인도에서의 또 다른 대규모 테러를 통해 지역 내의 주요 핵무장 국가인 두 나라가 전면전을 일으키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파키스탄 내 알카에다의 위협을 다루는 미국의 정책은 제한적이다. 반미감정은 파키스탄 대부분의 지역에서 절정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미국이 이슬람과 전쟁을 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민주화 과정을 지원하는 데 있어 진지하지 않으며, 무인항공기 폭격과 파키스탄 내에서의 다른 수상한 비밀작전은 국가주권의 침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파키스탄에 대한 획기적이고 장기적인 경제개발 원조는 두 나라의 신뢰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정책이다. 2009~14년 회계연도 동안 파키스탄에 매년 15억달러의 비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법안이 최근 인준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의 대테러 및 대반정부투쟁 작전을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상당량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은 공식적으로 파키스탄 영내에서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 없으며, 미국에 대한 불신과 지독한 안보환경은 미국 당국자들이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중단기적으로 미국의 전략은 대규모 경제개발 원조를 지속하고, 파키스탄이 적절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며, 목표지점에 대해 신속하게 무인항공기 공격을 가하는 방식에 의지할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의 발전을 공고히 하는 한편 그 지도자들에게 영토 내의 알카에다 및 그 동맹세력에 계속 압박을 가하라고 경고하는 방식이다.

    #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

    2009년 1월 예멘에 근거지를 둔 알카에다에 영감을 받은 무장단체들은 사우디와 예멘의 알카에다 ‘지부’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알카에다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고 있다고 발표한다. 이른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의 등장이다. AQAP라는 이름은 원래 2003년부터 2007년 사이에 사우디아라비아를 휩쓴 일련의 테러를 주도했던 무장단체 이름이다. 당시 이 단체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은 대부분 아프가니스탄에서 대(對)소련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군인이나 이후 다른 지역의 무슬림 관련 분쟁에 참여했던 전사들,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훈련소를 수료한 사우디인들이었다. 이들 훈련된 요원들은 각 지역 조력자들과 협력해 일련의 자살폭탄 테러와 암살 공격, 외국인과 사우디 치안군을 상대로 한 납치작전 등을 벌였다.

    이 사우디판 AQAP는 사우디 치안군이 벌인 장기간의 대테러 작전에 의해 대부분 와해, 파괴됐다. 사우디의 안보당국은 이후 AQAP 요원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멘으로 도망쳤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렇게 예멘으로 도주한 요원들은 최근 그곳에서 조직의 재가동을 위한 기초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예멘에서 이들은 자국 내 안보문제에 허덕이고 있는 예멘 정부의 처지를 역이용해 알카에다 연합체의 지도부에 가입하게 된다. 대부분은 이들을 단순히 ‘예멘의 알카에다’라고 부르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남아라비아 반도의 알카에다 조직’이라고 부른다. 이 조직의 리더는 2006년 악명 높은 탈옥사건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당시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23명의 테러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보안상태를 자랑하는 예멘 수도 사나의 감옥에서 탈출했다.

    예멘 알카에다는 초기에 알리 압둘라 알살레 예멘 대통령 앞으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무장대원들을 최우선적으로 석방하고, 미국과의 협력을 중단하며,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이슬람법을 온전하게 적용하고, 예멘 무장대원들이 외국 군대에 맞서 지하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이라크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알카에다에 영감을 받은 신세대 극단주의자들은 외국 및 서구의 이해관계는 물론 예멘 정부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2008년 예멘 주재 미국대사관을 노린 두 차례의 공격은 미국인 한 명을 포함해 17명의 사망자와 예멘인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2009년 초 사우디-예멘 지부의 합병을 선언한 뒤 AQAP는 예멘 내 목표를 타격하는 한편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 많은 공격을 감행했다. 그 가운데는 사우디 정부 대테러 작전의 지휘자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 빈 압델아지즈 알사우드 왕자의 자살폭탄 암살 미수 사건도 포함된다.

    2009년 크리스마스 비행기 폭탄테러가 일어나기 6개월 전에 한 미국 당국자는 AQAP가 세력과 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2009년 2월 데니스 블레어 정보국장은 “예멘이 성전주의자(jihadist)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국내외 공격계획이나 테러리스트 훈련, 요원활동을 용이하게 해줄 알카에다의 잠재적 작전기반이 재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9년 4월 미 상원 국토안보 및 정무위원회의 증언에서 마이클 라이터 국가대테러리즘센터(NCTC) 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알카에다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예멘은 핵심적인 전쟁터이며 알카에다가 공격계획, 신병 훈련, 요원 활동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잠재적 지역적 작전기반이다…AQAP가 강력해질 경우 알카에다 지도자들이 증가일로인 이 단체의 해외전사들을 국제적 테러활동에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2009년 5월 스티븐 캐피스 CIA 부국장은 예멘을 방문해 살레 대통령과 회담을 갖는 등 오바마 행정부 관료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정부기관 전문가들은 당분간 AQAP가 예멘과 사우디 내부공격에 집중할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대부분의 분석자들은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국익을 위협하는 AQAP의 영향력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2009년 크리스마스에 노스웨스트 항공기 253편 폭파미수 사건으로 예멘은 다시 대중의 관심영역으로 들어왔으며, 이 사건은 2008년 사나에서 벌어진 미국대사관 공격 등 다른 테러 시도가 택하지 않았던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인 대테러작전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높이고 있다.

    정책적 함의

    2010년 1월20일 제프리 펠트먼 국무부 근동담당 부차관보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 증언에서 “2009년 12월25일의 테러 모의에 관한 증거들은 AQAP가 미국을 포함해 아라비아 반도 밖에서 미국과 동맹국에 충분히 독자적으로 공격을 가할 능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오바마 행정부는 12월25일 테러미수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멘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증대해왔고, 2010 회계연도에서 관련법을 개정해 국무부가 집행하는 대(對)예멘 원조를 5250만달러에서 6300만달러로 증액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를 위한 추가재원은 국무부와 의회 세출위원회 위원들과의 협의를 통해 마련될 수 있으며, 봄 회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추가법안이 통과되면 신규자금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3호기 사건은 예멘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대테러 정책이 가진 딜레마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대테러작전의 협조자로 미국은 예멘 정부와 치안군에 눈을 돌렸지만, 예멘 정부는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슬람주의자 정치인이나 이슬람 무장세력을 은닉하고, 이용하며, 일정 부분 의지하고 있다. 2009년 1월 살레 대통령은 “상대가 알카에다라도 대화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들이 무기를 버리고 이성적으로 돌아온다는 전제하에서라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는 사이 예멘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선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이 예멘 정부와 외세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경고하고 다녔다. 반면 항공기 테러미수 사건으로부터 수주 후 미 행정부 당국자들은 예멘에 미군을 대규모 파병할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고, 이는 미국이 예멘으로부터 협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멘의 테러정책 수행능력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대테러리즘 기법과 수사절차에서 상대적으로 발전해왔고, 이에 힘입어 사우디 정부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역공을 펼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멘의 경우 미국 정부는 이들의 첩보, 보안, 법집행 능력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 뒤처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예멘 정부의 부실한 능력 혹은 의지는 AQAP 조직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락을 주고받고 작전을 실행하는 것을 막는 난제로 작용한다. 사우디 정부는 자국 내 AQAP 해체를 정책의 핵심목표로 설정해두고 있지만, 예멘 정부의 의지는 다르다. 역사적으로도 예멘 중앙정부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고, 더욱이 많은 전문가는 AQAP의 활동이 활발한 외곽지역에서 이들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살레 대통령의 능력이 최근 상당부분 줄어들었다고 평가한다.

    아라비안 반도에서 AQAP의 위협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고 수감된 테러 용의자들을 적당한 시기에 고국으로 송환하려는 미 행정부의 계획에 시사점을 던져준다. 관타나모 수용소 수용인원의 90%가량은 예멘 출신이다. 과거 예멘 형법체계가 갖고 있던 한계나 사우디아라비아로 송환된 옛 관타나모 수감자들에 대한 부실한 교화시도를 감안하면, 예멘과 사우디 출신 수감자들을 지속적으로 송환하는 것이 과연 권장할 만한 일인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AQAP의 리더는 예멘 출신이지만 그 부대장과 또 다른 전임 부대장은 2007년 11월 관타나모 수용소로부터 송환된 사우디 국적자들이었다. 이들은 사우디 정부가 후원하는 교화사업에 통과한 뒤 예멘으로 돌아가 예전의 호전적인 상태로 복귀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2009년 12월28일 프랭크 울프 미 공화당 하원의원은 관타나모 수감자들을 ‘불안정한’ 국가로 돌려보내지 못하게 하는 행정조치를 요청하는 서한을 행정부에 보낸 바 있다. 이후 많은 의원이 수감자들을 예멘으로 넘기지 말 것을 요구했고, 오바마 행정부는 관타나모 수감자들을 예멘으로 보내는 작업을 보류했다.

    #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에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AQ-I)는 남아시아 지역을 제외하고는 알카에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제휴조직이었다. 그러나 2006년 후반에 들어서자 이라크 수니파가 AQ-I에 등을 돌리고 미군을 도와 AQ-I의 활동과 영향력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2011년 말 완료 예정인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 로드맵을 발표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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