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는 집안이 편안하지 못하면 ‘밖에서’ 그들의 영혼을 진정시켜줄 무언가를 구할 수 있다. 친구 곁에서, 혹은 동료들 곁에서. 그러나 우리 여성들은 ‘고독의 방’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만 한다. 입버릇처럼 남자들은 그들이 군대에 나가 있는 동안 여자는 아무 위험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살림만 한다고 한다! 허튼 소리! 나는 오히려 세 번 전쟁에 나가길 바란다. 단 한 번 산고(産苦)에 시달리는 것보다도.
-에우리피데스, ‘메데아’ 중에서
1 ‘여성혐오증’에 걸린 사회와 소통하기 위하여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발레 ‘세헤라자데’
이는 고전문학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장면이다. 여성의 ‘대화를 통한 협상’ 요구 vs 남성의 끈질긴 ‘침묵시위’. 한쪽에서는 필사적으로 대화를 원하고 한쪽에서는 기필코 침묵을 사수하고자 하는, 남녀 관계의 영원한 딜레마. 그러나 ‘문학’은 언제나 ‘침묵’보다는 ‘대화’의 손을 들어준다. 침묵만으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갈등을 ‘이야기’로 풀려 하는 여성과 갈등을 ‘침묵’으로 은폐하려 하는 남성 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대화’의 승리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가 바로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에 등장하는 여성들이다.
‘천일야화’에서 왕비의 혼외정사를 뒤늦게 눈치 채고 분노와 상실감에 치를 떨다가 마침내 그녀를 죽여버린 샤리아 왕. 그는 아내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분노를 이 세상 모든 여성에게 확대시킨다. 매일 새로운 여성과 결혼해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날 그녀를 교수형에 처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현숙한 여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으며, ‘앞으로 취하게 될 여인들이 또다시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끔’, 아예 그녀들의 목숨을 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처녀들이 아무 죄 없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매일 한 명씩 죽어나가고 집집마다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자 대신의 딸 세헤라자데가 나선다. 자신이 직접 ‘신부’로 나서서 왕의 마음을 돌려보겠다는 것이다.
저는 딸을 잃게 될까봐 떨고 있는 이 도성 어머니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싶답니다. (…) 술탄께서 매일 새 결혼식을 거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버님의 중개를 통해서잖아요? 그러니 저에 대한 아버님의 따뜻한 사랑에 힘입어 간절히 부탁을 드리건대, 술탄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영예를 제게도 허락해주세요. (…) 저에게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전혀 두렵지 않아요. 만일 제가 죽는다면 그건 영광스러운 죽음일 거예요. 반대로 제 계획이 성공한다면 저는 이 나라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되는 거고요.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천일야화’, 열린책들, 2010,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