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8·18 도끼만행 사건

  • 오세영| 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

    입력2010-11-03 13: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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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에블로호 납치, EC121 정찰기 격추. 해상과 공중에서 거듭 미국의 허를 찌른 북한은 1976년, 이번엔 육상에서 미국의 뺨을 후려쳤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을 급습, 2명의 미군 장교를 살해한 것. 이번만큼은 미국도 강경대응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국 미루나무 제거라는 상징적 보복에 그치고 말았다. 오히려 한국군 특전사 요원들이 미군 몰래 북한군에게 본때를 보여줬다.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현장.

    유난히 더웠던 1976년의 여름은 8월로 접어들면서 폭염을 더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 측 제3경비초소에 이른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미루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엄청나게 큰 키에 무성한 잎은 시계(視界)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제5경비초소에서 전혀 관측되질 않겠는 걸.”

    “그렇습니다. 제3경비초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부중대장 마크 바레트 중위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바로 앞에 있는 유엔 측 제3경비초소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초소로 통하는 곳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북한 측 제4초소에서 수시로 도발을 감행하는 상황에서 퇴로가 북한 측 제8경비초소와 제5경비초소에 막혀 있어 마치 적지 한가운데 고립된 형국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큰 사고 없이 지낸 것은 언덕 위의 유엔 측 제5경비초소에서 제3경비초소를 관측하고 있다가 이상이 감지되면 즉시 경비병력을 출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문제가 생겼다. 제3경비초소 부근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면서 제5경비초소에서 제3경비초소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지를 쳐야겠다. 노무자들을 부르게.”

    미루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보니파스 대위가 결정을 내렸다

    “경비장교 회의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장소가 장소인 만큼 바레트 중위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권했다.

    “그럴 필요 없어. 즉시 작업을 지시하게.”

    보니파스 대위는 더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 성큼성큼 지프로 향했다. 지프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끔 방향을 튼 채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만큼 제3경비초소는 긴장이 감도는 곳이다.

    신중한 성격의 보니파스 대위가 그답지 않게 서두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국 근무 임기가 만료된 상태로 후임자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후임자에게 어려운 일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미루나무가 있는 위치가 유엔군 측에서 관할하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판문점 안에 분계선이 생긴 것은 1976년 8월18일에 일어난 이른바 ‘도끼 만행’ 이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는 유엔 측과 북한 측이 자유롭게 오갔고 필요한 곳에 경비초소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는 통행이 자유로웠지만 그래도 잠정적으로 정해놓은 분계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미루나무는 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면상으로는 분명히 유엔 측 관할구역이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꼭 북한 측 관할처럼 보인 것이다.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은 제주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프는 속도를 높이며 제3경비초소를 빠져나왔다. 지원기지까지 가는 동안에 북한 측 제8, 제6, 그리고 제7경비초소를 지나쳐야 하는데 그 앞을 통과할 때마다 북한 경비병들의 사나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그만큼 유엔 측 제3경비초소는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쇠못 구두’의 사나이

    북한 측 제5초소는 한국적십자 건물 바로 앞에 위치해서 도발적으로 출입문을 노려보고 있다. 그곳에서 보니파스 대위 일행을 줄곧 감시하고 있던 북한 판문점 경비대 소속 박철 중위는 신경질적으로 쌍안경에서 눈을 뗐다.

    “저 미제국주의 놈들이 왜 저기서 어물쩍거리는 거야!”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도끼만행 사건 이튿날 판문점 옥외에서 열린 경비장교회의. 북한 장교가 부상한 북측 경비병의 사진을 보여주며 언성을 높이고 있다.

    박철 중위는 도끼눈을 하고 멀어져가는 미군 지프를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박철 중위는 신경질적으로 초소 안을 배회했고 그럴 때마다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군화 앞에 날카로운 쇠못이 박혀 있었다. 그는 하전사로 복무하던 중에 근성을 인정받아 군관이 된 이른바 직발군관이다. 그 전해 6월에 유엔군 측 경비부사령관 윌리 핸더슨 소령이 북한 경비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박철 중위의 쇠못 구두는 악명을 떨쳤고 그날 이후로 그의 쇠못 구두는 미군들 사이에서 신형무기로 통하고 있었다.

    “철저히 감시해.”

    박철 중위는 지시를 내리고 제5경비초소를 나섰다. 제8경비초소를 둘러본 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제4경비초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박철 중위가 제5경비초소를 나서는데 한 무리의 관광객이 유엔 측 건물인 자유의 집에서 나왔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인 판문점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돼 있었다. 어쩌다 들르는 남한 견학단은 잔뜩 긴장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데 비해서 미국 관광객들로 보이는 무리는 거리낌 없이 희희낙락하며 제멋대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박철 중위는 싱글거리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미국인에게 인상을 써 보이고는 휑하니 지프에 올라탔다.

    남북 지도자의 머릿속

    베트남전쟁은 1975년 4월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공산당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6·25전쟁이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첫 번째 전쟁이라면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첫 번째 패전을 기록한 전쟁이다.

    그 무렵 한국은 심각한 내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에 이어 10월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국민은 맹렬하게 저항했고 정권은 인기가 땅에 떨어졌으며 해외에서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래도 미국이 손을 댄 전쟁인데 설마…. 그런데 설마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몰렸고 국민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반면에 북한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김일성은 일당독재를 확립했고 북한 주민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시끄러운 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더욱 고무적이었다. 끈질기게 밀어붙이면 미국도 결국 손을 들고 만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더구나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면서 남한에는 이제 2사단만 남은 상태였다.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북한이 남침을 하면 핵무기를 쓸 것임을 시사하며 북한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베트남에서 철군의 명분을 찾기에 급급하던 미국의 경고가 이미 여러 차례의 벼랑끝 전술로 재미를 본 북한에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면서 날씨보다 더 뜨거운 전쟁의 열풍이 1976년 여름의 한반도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권력을 확립한 김일성에게 남은 문제는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를 정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한 흐루시초프에 의해 사후에 격하됐고, 중국의 마오쩌둥도 후계자 류사오치와 린뱌오에게 차례로 배신을 당했다. 역시 믿을 것은 혈육밖에 없는 것 같았다. 김일성은 장남 김정일에게 권좌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김정일은 1974년 2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정치국은 당 규약을 해석하고 당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기구로,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국의 결정에 반하는 행위는 ‘반동’으로 처단된다. 그런 최고 권력기구에 공산국가에서는 ‘새파란’ 젊은이 축에 드는 33세의 김정일이 당 원로들을 제치고 입성한 것이다. 공산국가에서는 권력서열 순으로 정치국 회의에 입장한다. 새로 정치국 위원이 된 김정일은 주석 김일성, 부주석 김일, 정무원 총리 이종옥,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에 이어 정치국 회의에 다섯 번째로 입장했다. 당당하게 권력 5위에 오른 것이다. 김정일은 1975년부터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주도하며 차츰 자기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무렵부터 김정일을 ‘당중앙’이라 호칭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제1차 권력승계로 본다.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절단된 미루나무. 도끼만행 사건 1년 뒤 촬영한 것이다.

    “옵니다!”

    과연 그들 중 한 명이 천천히 다리 위를 건너오고 있었다. 미군들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발포 여부는 현장 지휘관이 결정하기로 돼 있다. 이미 소총을 결합해 놓은 64인의 결사대원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김종헌 소령은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북한군이 발포를 하면 지체없이 응사한다. 그리고 발포 없이 접근할 경우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절반 이상 넘어서면 공격의사로 간주하고 선제 발포를 명령할 생각이었다. 총격이 벌어지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전사 대원들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오던 북한군이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이쪽을 노려보더니 돌아섰다. 기싸움에서 특전사가 이긴 것이다. 미군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공병들은 다시 엔진톱을 작동시켰다. 톱날이 또 부러지기를 몇 번. 마침내 오전 7시45분에 12m 높이의 거대한 미루나무는 잘려나갔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래도 무사히 임무를 달성했다. 미군들은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64인의 결사대에겐 은밀히 부여된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북한군이 유엔군 지역에 불법으로 설치한 초소를 때려 부수는 것. 물론 미군 지휘부는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64인의 결사대는 평소 유엔 측 제3초소를 배후에서 위협하던 북한 측 제5초소와 제8초소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소총은 이미 결합해놓은 상태였다.

    한국군 보복에 北 침묵

    “한국군이 총을 갖고 있다!”

    “한국군이 미쳤다! 다 때려 부순다.”

    긴급 무전이 날아들면서 폴 번연 작전의 성공을 기뻐하던 캠프 키티호크 상황실은 일시에 공포 분위기로 변했다. 한국군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더구나 초소 파괴를 거부하는 미군 운전병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일도 있었다. 미군 지휘부는 화가 폭발했다. 강경 보복을 자제하기로 한 워싱턴의 결정이 한국군의 일개 현장 지휘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다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상황은 미군 수뇌부의 우려와는 달리 별 탈 없이 종결됐다. 북한군은 일절 반격을 하지 않았고 현장에 진입했던 병력 110명은 무사히 철수했다. 그리고 작전이 종결된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에서 대표 한주경을 통해 미군 장교가 피살된 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는 김일성의 친서를 유엔 측 수석대표 마크 푸르덴 해군 소장에게 전달했다. 크고 작은 도발사건으로 점철된 정전 23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다.

    이어 8월25일, 북한은 사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공동경비구역도 분할할 것을 제의했다. 원래는 유엔 측에서 제의한 것인데 이로써 판문점에도 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군사적으로는 데프콘2부터 전쟁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1976년 8월21일에 ‘군사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던 셈이다. 64인의 결사대가 참가한 미루나무 절단 작전은 흔히 한국의 엔테베 특공작전으로 불린다. 엔테베 특공작전은 한 달 보름 전인 1976년 7월3일, 이스라엘 특공대가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으로 날아가서 억류돼 있던 인질들을 구출해낸 작전이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3800㎞를 날아간 데 비해서 한국군 특전사는 트럭으로 30분 거리의 판문점에 진입한 것이지만, 전면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든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도끼만행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군 박철 중위는 그다운 최후를 맞았다. 8년 후인 1984년 11월23일 판문점에서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의 외교관 바실리 야고브레비치 마싸작이 한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군 경비대와 탈출을 도우려는 유엔 경비대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때 유엔 경비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한 북한군 군관이 바로 박철 중위였다.

    문 닫은 세습왕국

    그 후 북한의 권력세습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를 통해서 정치국 서열 4위, 비서국 서열 2위, 그리고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로 올라섰고 호칭도 ‘당중앙’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세습에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김정일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면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그리고 김일성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997년 10월8일 당 총비서직을 승계하면서 명실상부한 김정일 시대를 연다.

    북한이 폐쇄주의를 고집하는 동안에 한국은 개혁과 개방으로 경제적 풍요를 이뤘고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화를 달성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최초의 나라가 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됐다.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랐지만 처음부터 올바른 방향을 선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3월에 천안함 폭침사건이 발생했다. 4월과 6월에는 이용철과 이제강 등 2명의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죽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요직 중의 요직으로 꼽히는 자리. 이제강 제1부부장은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문가들은 권력구조 개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지난 9월 44년 만에 노동당 대표자회의를 열고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3대 세습의 길을 연 것이다. 세습이 이어지는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공산권은 붕괴했고 대한민국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지구촌의 리더로 부상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여전히 문을 굳게 닫고 있는 북한이다.

    세습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금기시되는 일이다. 김일성은 서두르지 않기로 하고 유일지도체제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한 현실은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것은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필요에 따라 긴장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장기집권과 세습통치에 적절히 이용해나갔다.

    대표적인 긴장 완화 사례로는 1972년 7월4일의 남북공동성명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 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남과 북은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남북공동성명은 그해 가을에 유신이 선포되면서 짧은 해빙 무드를 종결지었다.

    감시와 탄압이 심해질수록 민주화 열기는 고조됐고 체포와 구금이 줄을 이었다. 1976년으로 넘어오자 꼭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쾌거는 답답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한 모금의 청량제였다.

    贊세습 vs 反세습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1970년대 후반 30대 초반이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은 창광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평양 거리는 평소에도 사람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지만, 계속되는 더위 때문인지 그날따라 더 한산해 보였다. 묵묵히 창광거리를 내려다보던 무관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모스크바에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수상을 역임한 남일이 지난 3월 트럭에 치여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남일은 휴전협정 당시 북한 대표였고 나중에 소련대사도 지낸 거물인데, 소련대사관에서 그의 죽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소련 시민권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련대사관은 남일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어쩌면 권력세습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권력세습의 밑그림이 천천히 그려지고 있었다. 김정일이 당중앙으로 추대되면서 당 원로들이 하나둘씩 이선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정권 수립 이래 줄곧 제2인자 자리를 지켜온 최용건은 와병으로 거의 활동을 못하고 있었고(1976년 9월19일 사망), 최현은 5월14일에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오진우에게 넘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부주석 김일도 활동이 예전만 못했다. 소련대사관 무관은 이들이 세습을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파악했다.

    무관은 세습을 지지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나머지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부총리 김창주와 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봉주, 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우,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현수 외에 계응태, 강성산, 전병호, 한성룡, 서윤석을 꼽은 무관은 계속해서 신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을 필두로 김만철 상장, 오극렬 상장, 백학림 상장, 이을설 상장, 주도일 상장 등 군부 실세들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렸다.

    이번에는 세습을 반대하는 인물들을 꼽을 차례다. 무관은 항일 빨치산 출신의 당 원로로 당서열 3위인 부주석 김동규를 시작으로 차례로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김동규는 6월에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만 우대하면서 당 원로들을 노쇠했다고 비난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최현과 김일, 그리고 오진우 등이 김정일의 뜻이 잘못 전달된 것이라며 김정일을 거들었지만 김동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기회에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놓을 생각이었다. 김동규가 워낙 대차게 나가자 김일성도 한발 후퇴해 김정일에게 당 원로에게 사과할 것을 명령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그 후 앙금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비서 유장식. 대표적인 당 이론가로 꼽히는 그는 7·4남북공동성명 때 서울을 방문하면서 남쪽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인민무력부 부부장 장정환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의 삼촌이면서도 김정일의 세습에 반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의문사를 당한 남일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바다, 하늘…이번엔 땅에서?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도끼만행 사건 직후 판문점은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든 취재경쟁의 현장이었다. 땅바닥에 엎드려 메모를 정리하는 외신기자.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며 무관실 요원이 들어섰다.

    “뭐 좀 알아낸 게 있소?”

    무관이 보고서를 덮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쩐 일인지 그 동네 사람들이 모조리 이사를 갔습니다. 아무래도 북한 당국이 강제로 보낸 것 같습니다.”

    역시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단 말인가.

    “현장을 살펴보니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여 도저히 교통사고가 날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농로의 폭도 트럭이 다닐 수 없을 만큼 좁았습니다.”

    평양 교외의 한적한 시골길에서 트럭에 치여 죽은 게 이상해서 무관실 요원을 현장으로 보낸 것인데, 사고 현장은 트럭이 다닐 수 없는 좁은 농로일 뿐 아니라 사고를 낸 운전사도, 목격자도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인은 명확하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시신을 그곳에 내다버린 것 같습니다.”

    요원이 현장을 살피고 돌아온 의견을 가감 없이 전했다. 살해라면 세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련에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진 남일이 강력하게 반대하면 세습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세습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습은 북한 내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소련에서 염려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습을 완성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내부 결속을 다지려 할 것이다. 이럴 때 효과적인 방법은 외부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번에도 예의 벼랑끝 전술을 구사할 것인가. 무관은 긴장이 되었다. 벼랑끝 전술은 언젠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번에는 북한이 어디를 노릴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가.

    북한이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가. 아무래도 그것이 보고서의 핵심이 될 것 같았다. 베트남의 공산화로 북한 군부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고 공공연하게 ‘해방전쟁’을 입에 담았다. 7월23일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남북한 교차승인과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했다. 남과 북을 유엔이라는 국제무대로 끌어들여 한반도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북은 ‘영구 분단 획책’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며 남북관계를 강경일변도로 밀어붙였다. 여기에 군부 강경파들을 고무시키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미국 의회가 1973년 11월 대통령의 해외파병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전쟁이 임박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전쟁의 징후는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럼 우리 몰래 중국과…? 당시 소련은 중국과 영토분쟁을 겪으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있었고 서로 북한의 환심을 사려고 원조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무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련이나 중국이나 지금 또 다른 전쟁을 획책할 상황이 아니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결국 개입하게 될 것이고 일본의 재무장도 불 보듯 했다. 일본의 재무장을 초래할 수 있는 동북아의 불안정은 소련과 중국 모두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바다(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와 하늘(1969년 정찰기 EC121 격추)에 이어 이번에는 땅에서…? 뭔가 불길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건 확실한데 도무지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무관은 답답한 심사를 추스를 생각에 창가로 향했다. 느낌이 그래서일까. 무거운 기운이 거리를 걷는 평양 주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즈음 무슨 일이 꼭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는 평양도 서울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참담한 워게임 시뮬레이션

    용산 미8군 상황실에 모인 주한 미군 수뇌부의 얼굴에 짙은 고뇌가 서렸다. 워게임(War Game) 시뮬레이션 결과가 예상한 것보다 휠씬 나빴던 것이다.

    “심각하군. 석 달 만에 주전선이 붕괴될 거란 말이지.”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대장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렇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90일을 기점으로 전세가 급격히 우리 쪽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임 참모장 싱글로브 소장 역시 표정이 밝지 못했다. 정보장교로 전쟁 전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던 싱글로브 소장은 나중에 미군 감축안을 놓고 카터 대통령과 대립하다 해임되는 강경파 군인이다.

    상황실에는 주한미군사령관과 참모장 외에 부사령관 번즈 공군 중장, 한미1군단장 쿠시만 중장 등 고급 장성을 위시해서 주한미군사령부의 작전참모와 정보참모, 그리고 상급부대인 태평양사령부에서 파견된 정보책임자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세계를 여러 개의 권역으로 나눠놓고 분쟁에 대비하고 있는데, 각 사령부에서는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해서 작전계획을 작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실시한 워게임 시뮬레이션 결과가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북한이 전면 남침을 시도했을 때 미군의 증원 없이 서울 방어가 가능한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지상군 24개 사단과 594대 전투기를 주축으로 하는 북한의 전투력에 대항해서 28개 한국군 사단과 미 2사단, 그리고 한국 공군과 주한 미 공군의 전투력을 구체적인 수치로 환산해서 슈퍼 컴퓨터에 입력,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해본 것이다. 추가로 증파되는 미군을 제외한 것은 미군의 해외파병이 여의치 않은 현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예상한 것보다 휠씬 나빴다.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90일을 기점으로 전세가 급격히 북한으로 기울면서 19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216일 만에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끝날 것임을 워게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가정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상황이 벌어지면 주일 공군과 오키나와의 해병대는 즉시 투입할 수 있고, 하와이의 25사단도 빠른 시간 내에 출동태세를 완료할 수 있습니다.”

    싱글로브 참모장이 워게임 결과에 너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즉각 참전할 것임을 여러 차례 천명했고, 1969년의 포커스 레티나 훈련과 1971년의 프리덤 볼트 훈련을 통해 이것이 빈말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76년부터는 매년 갖기로 한 팀스피리트 훈련도 두 달 전에 첫 번째 훈련이 실시됐다. 미국은 베트남 공산화로 자신을 얻은 북한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거듭 경고하고 있었다.

    위기의 그림자

    그러나 북한이 전면전을 감행해올 경우 과연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미국 내 반전여론은 여전히 높았고 대규모 지상병력을 파병하려면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1976년은 남과 북의 국력이 역전되기 시작할 무렵이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북한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주먹은 우리가 더 세다”고 큰소리친 김일성의 말은 괜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임 한미1군단장인 홀링스워드 중장이 제안한 ‘9일 속결전’. 북한이 전면전을 시도하면 처음 5일 동안 B-52 폭격기를 하루 1000회 출격시켜 북한을 초토화하고 나머지 4일 동안 지상군을 투입해서 9일 만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구상이었다. 제공권을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음을 과시한 계획이지만 그만큼 지상전력이 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퇴역을 앞둔 노장군의 목표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북한의 강경파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이며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는 상황에서 본토의 지원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일상적인 진지 구축 외에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참모가 휴전선에서 특별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1976년은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다. 북한은 절대 그런 호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틸웰 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내부 결속을 목표로 뭔가 일을 벌일 것만 같은 분위기에서 8월로 접어들며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후텁지근한 날이 계속됐다. 과연 한국은 이번에도 위기를 무사히 넘길 것인가.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여태껏 겪은 위기보다 휠씬 더 심각한 위기가 될 것이다.

    8월18일은 아침부터 날이 화창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대위는 출발을 명령했다. 사흘 뒤면 한국 근무도 끝이다. 미루나무 가지치기는 마지막 임무가 될 것이다. 인솔자 보니파스 대위, 부중대장 바레트 중위 외에 통역을 맡은 한국군 김 대위와 경비병 7명, 그리고 가지치기를 할 노무자 5명을 태운 트럭은 캠프 키티호크를 빠져나와 제3경비초소로 향했다.

    운명의 8월18일

    대성동 마을을 통과한 트럭은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섰고 제2경비초소를 지나 제3경비초소에 이르렀다. 제3경비초소에 도착하자 긴박감이 전해졌다. 앞뒤로 북한 측 제4경비초소와 제8경비초소, 그리고 제5경비초소에 둘러싸여 마치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보니파스 대위는 문제의 미루나루를 올려다봤다. 12m가 이렇게 높은 것인가. 오늘따라 가지들이 더 무성한 것 같았다. 저 무성한 가지들을 제거해야 제3경비초소의 안전이 보장된다. 보니파스 대위는 작업을 서두를 것을 지시했다. 노무자들이 신속하게 사다리를 설치했고 경비병들은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기동타격대를 대기시켜 놓았지만 그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5분쯤 지났을 무렵 트럭 한 대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오더니 북한군 군관 2명과 전사 9명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북한 경비원들이 옵니다.”

    바레트 중위가 경계태세를 취하며 보고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군관 중 한 명이 박철 중위임을 알아봤다. 매우 호전적인 박철 중위는 미군들 사이에서 유명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건가?”

    박철 중위가 인상을 쓰며 보니파스 대위에게 다가왔다.

    “관측에 방해가 되는 가지를 치고 있다.”

    보니파스 대위의 답변은 한국군 김 대위를 통해 박철 중위에게 전달됐다. 보니파스 대위는 미루나무의 위치가 잠정적 관할선에 따라 유엔 측에 속했기에 경비중대장 직권으로 보수작업을 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하고 북측에는 통고하지 않았다. 잠정적 관할선은 나중에 경계선으로 확정되는데, 문제의 미루나무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쪽에 치우쳐 있기는 해도 분명히 유엔 측 관할구역이었다.

    북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애매한 지형으로 인해 착각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북한군이 처음부터 호전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북한군은 말없이 가지치기 작업을 지켜보기만 했다. 개중에는 노무자에게 가지 치는 방법을 조언하는 자도 있었다.

    북한군이 출동하면서 고조된 긴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라앉았고 가지치기 작업은 속도를 냈다. 그러나 시계를 확실하게 확보하려면 더 잘라내야 한다. 보니파스 대위는 손을 댄 김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죽여!”…3분여 만에 상황종료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북한 경비병에게 피살된 두 미군 장교의 유해가 1976년 8월20일 본국으로 떠나기 위해 수송기에 옮겨지고 있다.

    “그만! 그 이상 자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돌연 박철 중위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작업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귀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보니파스 대위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당장 내려오라!”

    보니파스 대위가 물러서지 않자 박철 중위는 가지를 치고 있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향해 소리쳤고 겁에 질린 노무자들이 슬금슬금 사다리를 내려왔다.

    “작업을 계속하시오!”

    보니파스 대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1년간의 판문점 근무를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양보를 유약의 신호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보니파스 대위가 강경하게 나오자 박철 중위가 험악한 인상으로 병사를 불렀다. 그의 지시를 받은 병사는 황급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달려갔다. 지원병을 데리고 오려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기동타격대에 연락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레트 중위가 긴장해서 다가왔다. 판문점에 근무한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바레트 중위는 이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보니파스 대위는 물러서지 않았다. 공갈에 밀리면 끝이 없다. 틀림없이 경비장교 회의에서 생떼를 쓰고 나올 것이다.

    눈치를 보던 노무자들은 슬금슬금 다시 사다리로 올라갔다. 빨리 작업을 끝내고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 판단한 것이다.

    “저기!”

    갑자기 경비병이 소리쳤다. 북한군들이 우르르 밀려왔는데 줄잡아 30명은 될 것 같았다. 미처 대피할 틈도 없었다. 북한군은 신속하게 사방을 에워쌌다. 그제야 보니파스 대위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터질 듯한 긴장이 감돌았다.

    박철 중위는 손목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더니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보니파스 대위는 그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 위험하다. 빨리 여기를 떠야 한다. 그러나 이미 퇴로가 차단당한 상황이었다.

    “죽여!”

    박철 중위가 소리치자 북한군이 일제히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에게 달려들었다. 그중 한 명은 달아난 노무자들이 놓고 간 도끼를 집어들더니 도끼로 보니파스 대위를 찍었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빚어진 충돌이 ‘도끼만행’으로 명명되는 순간이었다.

    쓰러진 보니파스 대위에게 무수한 발길질이 집중됐다. 황급히 유엔 측 제3경비초소로 쪽으로 대피하던 바레트 중위도 북한군에게 잡혀 집중구타를 당했다. 두 사람 외에 미군 경비병 4명과 한국군 경비병 2명이 부상했는데, 불과 3~4분 만에 상황이 종료되는 바람에 출동한 기동타격대가 구조할 틈도 없었다.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는 헬기로 긴급 후송됐지만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마침 자유의 집에서 무비카메라로 근방을 촬영하던 미군 상병에 의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고, 세계는 북한의 잔인한 행동에 공분했다. 나중에 북한은 그것을 가지고 도리어 미군이 도발을 유도한 증거라고 우기기도 했는데, 아무튼 지난 23년 동안 판문점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됐지만 미군 장교가 맞아죽은 것은 처음이었다. 한반도는 급속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또 얻어맞은 미국의 대응은?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도끼만행 사건 직후 나무 절단 작업의 경비를 위해 투입된 공수1여단. 미국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동소총과 수류탄,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작전을 벌인 것이 드러나 한미 간에 갈등이 일었다. 출동 직전 특전요원들을 격려하는 박희도 여단장(오른쪽).

    긴급연락을 받은 워싱턴 특별위원회 멤버들이 속속 지하 상황실로 도착했다. 키신저 국무장관이 백악관을 비운 포드 대통령을 대신해 위기관리팀을 소집한 것이다. 포드 대통령은 석 달 뒤에 있을 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 소집된 공화당 전당대회 때문에 캔자스시티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했소. 장교 2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소.”

    키신저 국무장관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워싱턴 특별위원회에서 그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벌써 몇 번째입니까. 북한 영토를 폭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윌리엄 하일랜드 국가안보 부보좌관이 강경대응을 주장하고 나섰다.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스코크로프트는 포드 대통령을 수행해서 캔자스시티에 있었다.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은?”

    키신저 국무장관이 할러웨이 합참의장 서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책을 정하기 전에 그 점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었다.

    “북한이 전면전을 기도할 것 같은 징후는 없습니다. 일단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 작업을 강행하고 차후에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해군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북한의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제한 보복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할러웨이 해군대장이 제한 보복을 주장했다.

    “아무튼 이번에도 군사정전위에서 항의하다 마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 동조하고 나섰다. 키신저는 CIA 국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중앙정보국의 의견을 확인할 차례였다.

    “아직 정확한 의도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우발적인 사고라고 보기에는 동원된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CIA도 의도적 도발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무를 베어버리는 정도로는 부족하겠군.”

    결론을 내린 키신저가 대통령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도끼만행을 고의적 도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우발적인 사고로 볼 것인가. 당시 위싱턴의 수뇌부는 고의로 보고 전면전을 불사하는 강경대응을 주장한 반면, 서울의 스나이더 미국대사와 스틸웰 주한 미군사령관은 우발적인 사고로 보고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중론이 옳은 선택이었지만, 당시는 더는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경책도 만만치 않게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패한 후로 미국은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전해인 1975년 캄보디아가 미국 민간 상선을 나포하고 승무원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도 미국을 우습게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강하게 대응했다. 즉각 해병대를 출동시켜 구조에 나섰다. 끌려다니다가는 한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린 푸에블로호와 정찰기 EC121 사태. 그리고 강경하게 대응한 상선 마야구에즈호 사태. 그렇다면 미국이 이번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세계는 숨을 죽이고 한반도를 지켜봤다.

    남북 모두 비상사태 돌입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1976년 9월9일 북한 경비병들이 JSA 군사분계선 유엔군 측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초소에서 집기를 꺼내고 있다. 유엔군 측 지역에 있던 북측 초소 4개를 새 협정에 따라 북측이 인원과 장비를 동원해 철거했다.

    데프콘 3가 발령나면서 서울 거리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쟁 위험 정도에 따라 5단계로 나뉜 데프콘(DEFCON)을 발령하는데 데프콘이 한 단계 격상되어 데프콘 3-라운드 하우스-가 발령된 것은 초유의 상황이었다(한국은 평시에도 데프콘 4를 유지하고 있었다).

    데프콘 3가 발령됨에 따라 휴가병들은 서둘러 귀대했고 실탄을 지급받은 병력들이 전방 진지에 투입됐다.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서울 시민들은 위장망을 치고 질주하는 군용 지프들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공설운동장마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열렸고 시민들은 김일성의 허수아비를 화형시키며 북한을 규탄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훈시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미국의 대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전시는 물론 평시 작전권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다.

    북한군도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북한군은 8월19일 오후 5시를 기해 전투태세에 돌입했고 평양은 전시체제로 전환됐다. 평양 시민 30만명이 일시에 지방으로 하방(下放)되면서 갑자기 도시가 텅 빈 느낌이었다. 전쟁에 대비해 소개한 것이지만 이번 기회에 성분이 나쁜 자들을 평양에서 추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학생들은 교도대로 소집됐고 각 가정은 비상 배낭을 준비했다. 등화관제로 거리는 어둠으로 변했고 생필품 확보를 위해서 배급도 당일제가 됐다. 주민들은 전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장 미군이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의 그림자가 평양의 밤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운데 20일 아침이 밝았다. 그 사이에 미국은 미드웨이를 비롯해서 항공모함 3척을 한국 해역으로 급파했고, 오키나와의 F4 팬텀 대대와 괌의 B52 전략 폭격기, 그리고 본토의 F111전폭기 대대를 한국으로 이동시켰다. 물론 푸에블로호 납치 때도 그랬고 EC121 격추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미국이 꼬리를 내릴 것이라 장담할 순 없었다. 최근 들어 미국은 강경 분위기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전쟁이 벌이지는 것이 아닐까. 긴장이 고조되면서 유신을 반대하는 남한의 시위도, 세습을 반대하는 북한 내부의 움직임도 뒷전으로 물러나게 됐다.

    美 공병-韓 특전사 연합작전

    8월20일 오후 11시45분. 서울 용산의 주한미군 상황실.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 대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싱글로브 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합참에서 작전을 승인했네.”

    합참의장 서리 할러웨이 제독의 작전승인은 리스닝 사일런스(Listening Silence) 시스템에 의해 주한미군사령부의 상급부대인 태평양사령부의 게일러 제독과 예하부대인 한미 1군단 쿠시먼 중장, 미 육군 2사단 브래드 소장에게도 동시에 전달됐다.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고 명명된 작전은 병력을 투입해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것. 그나마도 사전에 군사정전위를 통해 통보하는 형식으로, 여태껏 검토된 보복조치 중에서 가장 강도가 약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루나무를 폭격하는 것도 고려됐지만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지점을 폭격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공병을 투입해 절단키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또 한번 뜨뜻미지근하게 대응키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작전 계획은 주한미군사령부의 몫. 스틸웰 사령관은 현장 지휘를 판문점 경비대대장 비에라 중령에게 맡겼다. 그런데 폴 번연 작전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어떻게 대응하는 게 효율적인지를 똑똑히 보여줬다.

    8월21일 오전 6시. 문산 부근 미군기지 캠프 스탠튼. 20여 대의 UH1 헬리콥터가 먼지를 일으키며 차례로 연병장에 내려앉자 대기하던 미 2사단 9연대 브라보·찰리 중대원들이 신속히 탑승했다. 알파 중대원들은 이미 트럭을 타고 공동경비구역으로 출발했다. 이들 9연대 병력은 폴 번연 작전을 수행하는 공병대가 북한군의 기습을 당할 경우 즉각 투입돼 공병과 경비병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탑승에 앞서 중대장이 비감한 얼굴로 중대원들에게 “인식표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번과 이름이 적힌 인식표는 전사한 병사의 신원을 확인하는 표지다. 인식표를 확인하라는 지시는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함을 의미한다. 헬기에 탑승한 미군들은 비감한 심정으로 멀어져가는 기지를 내려다봤다. 사단장은 이미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21일을 기해서 데프콘 3를 다시 데프콘 2로 격상했다.

    같은 시각 캠프 키티호크. 공동경비구역 경비대의 후방기지인 캠프 키티호크에 110여 명의 무장 군인이 잔뜩 굳은 얼굴로 집결해 있었다. 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담당할 제2공병대대 브라보 중대 소속 공병 16명과 보병 2사단 9연대 알파 중대에서 차출된 경비병 30명. 그리고 그들을 특별 경비하기로 한 한국군 특전사 대원 64명이었다.

    당시는 평시 작전권도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진 데다 피살자도 미군 장교들이어서 한국군은 폴 번연 작전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런데 스틸웰 장군이 폴 번연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 공병대의 경비를 한국군에게 맡기면서 한국군이 드디어 상황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

    한국군 지휘부는 미군을 지키기 위해 현장에 투입되는 64인의 결사대를 특전사에서 선발했다. 그런데 미군은 특전사가 휴대하는 무기를 몽둥이로 한정했다. 한국군은 태권도를 잘하니까 상황이 발생하면 육탄으로 저지하라는 말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지로 들어가는 부하들에게 곡괭이 자루만 들려보내라는 게 말이 되는가. 한국군 지휘부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스틸웰 장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소한 충돌도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령이라도 부하들을 맨몸으로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한국군 지휘부는 미군 몰래 무장키로 했다. 64인의 결사대는 권총, 그리고 분해해서 감춘 M16 소총을 지니고 출발했다. 선제공격은 하지 않지만 안전이 위협을 받으면 교전도 불사할 각오였다. 지휘부는 그 판단을 현장 지휘관 김종헌 소령에게 일임했다.

    64인 결사대의 비밀 임무

    점검을 마친 비에라 중령이 출발명령을 내리자 트럭 23대가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속으로 나아갔다. 미군은 한국군들의 배낭 속에 분해된 M16 소총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오전 6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트럭은 3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북한 측 초소는 모두 비어 있었다. 공병들은 즉시 절단 작업에 들어갔고 특전사 대원들은 사주경계에 나섰다. 신속하게 절단을 마치고 북한군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정말 공병 대대장의 호언대로 미루나무를 5분 만에 절단할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스틸웰 대장의 질문에 공병 대대장은 “단 5분”이라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 공병들은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엔진톱을 서둘러 가동시키며 절단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마철에 물기를 잔뜩 머금은 미루나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톱날이 자꾸만 부러지면서 공병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5분은커녕 30분이 걸려도 일을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미군들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북한군이 나타났습니다!”

    전방을 경계하던 특전사 대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현장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어림잡아 200명은 될 것 같은 북한군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쪽에 집결하고 있었다. 저들이 다리를 건너오면 몽둥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군이 휴대한 권총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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