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다큐멘터리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⑦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8·18 도끼만행 사건

  • 오세영| 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2/12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도끼만행 사건 이튿날 판문점 옥외에서 열린 경비장교회의. 북한 장교가 부상한 북측 경비병의 사진을 보여주며 언성을 높이고 있다.

박철 중위는 도끼눈을 하고 멀어져가는 미군 지프를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박철 중위는 신경질적으로 초소 안을 배회했고 그럴 때마다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군화 앞에 날카로운 쇠못이 박혀 있었다. 그는 하전사로 복무하던 중에 근성을 인정받아 군관이 된 이른바 직발군관이다. 그 전해 6월에 유엔군 측 경비부사령관 윌리 핸더슨 소령이 북한 경비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박철 중위의 쇠못 구두는 악명을 떨쳤고 그날 이후로 그의 쇠못 구두는 미군들 사이에서 신형무기로 통하고 있었다.

“철저히 감시해.”

박철 중위는 지시를 내리고 제5경비초소를 나섰다. 제8경비초소를 둘러본 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제4경비초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박철 중위가 제5경비초소를 나서는데 한 무리의 관광객이 유엔 측 건물인 자유의 집에서 나왔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인 판문점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돼 있었다. 어쩌다 들르는 남한 견학단은 잔뜩 긴장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데 비해서 미국 관광객들로 보이는 무리는 거리낌 없이 희희낙락하며 제멋대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박철 중위는 싱글거리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미국인에게 인상을 써 보이고는 휑하니 지프에 올라탔다.

남북 지도자의 머릿속



베트남전쟁은 1975년 4월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공산당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6·25전쟁이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첫 번째 전쟁이라면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첫 번째 패전을 기록한 전쟁이다.

그 무렵 한국은 심각한 내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에 이어 10월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국민은 맹렬하게 저항했고 정권은 인기가 땅에 떨어졌으며 해외에서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래도 미국이 손을 댄 전쟁인데 설마…. 그런데 설마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몰렸고 국민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반면에 북한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김일성은 일당독재를 확립했고 북한 주민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시끄러운 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더욱 고무적이었다. 끈질기게 밀어붙이면 미국도 결국 손을 들고 만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더구나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면서 남한에는 이제 2사단만 남은 상태였다.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북한이 남침을 하면 핵무기를 쓸 것임을 시사하며 북한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베트남에서 철군의 명분을 찾기에 급급하던 미국의 경고가 이미 여러 차례의 벼랑끝 전술로 재미를 본 북한에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면서 날씨보다 더 뜨거운 전쟁의 열풍이 1976년 여름의 한반도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권력을 확립한 김일성에게 남은 문제는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를 정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한 흐루시초프에 의해 사후에 격하됐고, 중국의 마오쩌둥도 후계자 류사오치와 린뱌오에게 차례로 배신을 당했다. 역시 믿을 것은 혈육밖에 없는 것 같았다. 김일성은 장남 김정일에게 권좌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김정일은 1974년 2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정치국은 당 규약을 해석하고 당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기구로,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국의 결정에 반하는 행위는 ‘반동’으로 처단된다. 그런 최고 권력기구에 공산국가에서는 ‘새파란’ 젊은이 축에 드는 33세의 김정일이 당 원로들을 제치고 입성한 것이다. 공산국가에서는 권력서열 순으로 정치국 회의에 입장한다. 새로 정치국 위원이 된 김정일은 주석 김일성, 부주석 김일, 정무원 총리 이종옥,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에 이어 정치국 회의에 다섯 번째로 입장했다. 당당하게 권력 5위에 오른 것이다. 김정일은 1975년부터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주도하며 차츰 자기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무렵부터 김정일을 ‘당중앙’이라 호칭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제1차 권력승계로 본다.

2/12
오세영| 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
연재

다큐멘터리 -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더보기
목록 닫기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댓글 창 닫기

/05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