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대표적인 ‘인디 아이돌’로 통하는 장기하와 얼굴들. 이들은 음악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른쪽) 인디 밴드 최초로 1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린 크라잉넛.
상황이 바뀐 건 2008년 이후다. 데뷔 앨범을 내기도 전에 이미 스타가 된 장기하의 스타덤은 다시 인디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심지어 최근 음악에 관심도 없던 386세대가 그에게 열광했다.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시사 프로그램에서까지 다뤄질 정도였다.
장기하뿐만 아니라 요조, 국카스텐, 검정치마, 브로콜리너마저 등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이 더불어 나름의 지분을 확보했다. 사람들은 다시 인디 음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건 문화게릴라로서도, 실력파도, 라이브 중심도 아니었다. 그냥 인디 음악이었다. 개념은 사라졌다. 아이돌의 대척점으로서 인디 음악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질문해보자. 지금, 인디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창작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에픽하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은 씨가 말랐다. 사실 그게 뮤지션의 정의이기도 하다. 음악을 만들어서 연주하고 부르는 이들. TV에서는 갈수록 보기 힘든 뮤지션을 통칭해서 한국 사회는 인디라고 부르고 있다. 즉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보니 그 안에는 다양한 삶이 공존한다. 대부분의 삶은 힘들다. 이는 1980년대 헤비 메탈 밴드나 1990년대 이후 인디 밴드들이나 마찬가지다. 이진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여느 연예인의 죽음보다 많은 관심과 애도를 받았던 이유는 그가 힘들게 음악을 하며 지내온 삶의 상징처럼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웬만한 음악인들이 되도록 회피하고 싶어 하는 ‘곤궁한 현실’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던 몇 안 되는 이였다. 연봉 1000만원만 되면 계속 음악을 하겠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털어놓곤 했다.
3집 ‘굿바이 알루미늄’을 냈을 때는 그 목표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면 될 듯싶어 앨범을 또 만들었다고 했다. 앨범이 발매된 2008년 당시 고인의 나이는 서른여섯. 대기업 과장급 나이다. 굳이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그 또래 직장인의 평균 연봉을 생각하면 1000만원이라는 목표는 아찔할 정도다.
그는 음악말고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소속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음악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유통수수료를 제외하곤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원맨 밴드였기에 저작권료 또한 고스란히 그에게 귀속됐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나름의 히트곡도 있었다. ‘절룩거리네’ ‘스끼다시 내 인생’ ‘치킨 런’ ‘나를 연애하게 하라’ 같은 노래들은 홍대 앞을 넘어 비교적 많은 이에게 알려진 노래들이었다. 즉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