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은 이동하는 허브(hub)였다.
- 교차로에 서서 예수를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으로 알렸다.
-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한국이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바울은 기독교를 누구나 말 걸 수 있는 보편 종교로 키워냈다.
통념을 깨뜨리는 소리 이방인의 사도
이와 같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자명하고 마땅한 세계에 사뭇 도전적인 출사표를 던진 인물이 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예수 추종자들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그 운동에 투신한, 바로 사도 바울이다. 이방인의 사도! 극적인 회심 이후 스스로 사도가 된 이 예외적인 인물은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며 등장했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천명은 이미 자기-타자, 중심-주변이라는 고대 세계의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리는 파격이었다. 그는 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누구나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언했다. 어느 모로 보나 낯선 선언이었다. 그것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을 특정한 땅과 그 땅의 신, 그 신을 예배하는 종교와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정체성에 대한 당대의 어법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의 통념으로 보면 쓸모없는 존재였던 이방인들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유대인의 고유한 유산을 그들과 공유하고, 이방인과 유대인 위에 새로운 공동체 원리를 세우고자 했다.
바울은 문명이 교차하는 대도시를 오가면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바울의 다문화적 배경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세계가 우리 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이래 우리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근대 국가들과 여러 지역을 잠식해가는 강압적이고 도도한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편승하려는 욕망과 지역의 저항적인 문화 전략들이 충돌하고 공모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민 공동체, 이주 노동자, 정치 망명객, 난민 등 각양각색의 이방인들이 공존하는 다문화, 다민족 사회가 늘어가지만 폭력과 차별, 편견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연대를 확립해 더욱 정의롭고 더욱 나은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우리 시대가 아직도 씨름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행보는 유사한 상황들과 그 해법에 대한 고대 말기 버전처럼 보인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때론 깊은 울림을 준다. 바울과 그의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기독교를 넘어 바울 보기
신약성서와 기독교 외경들에서 바울은 예수의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베드로와 맞먹거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4세기 무렵 확정된 기독교 정경(신약성서)의 거의 절반을 바울의 편지들이 차지했다. 기독교 운동을 ‘예수는 부활하셨다’라는 하나의 선언으로 집중시킨 바울의 신학이 복수의 기독교 운동 가운데 확고하게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수가 새로운 집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바울은 그 집의 주춧돌을 놓고 골격을 세웠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대에 바울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예수처럼 바울도 온존하는 세상과 불화했다. 사람들을 선동해 새로운 대열로 이끌었으며, 오래된 관습에 저항하고 위선과 단호히 맞섰기 때문이다. 으레 그렇듯이 거센 반발, 물리적 공격, 집요한 의심이 그를 괴롭혔다.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 기독교 내부의 만만찮은 적수들도 자주 걸림돌이 됐다. 역사적으로도 바울은 누구에게나 복음의 사도, 즉 ‘좋은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예수의 소박하고 순수한 복음을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 체제에 순치시키고 나약한 죄의식으로 타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바울이라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러한 혐의는 바울이야말로 “나쁜 소식의 전달자(the Dysangelist)”라는 니체의 전복적 표현에서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가부장적 도덕과 여성에 대한 편견, 노예제도에 대한 보수적 태도, 반유대주의 등 기독교 역사의 권위적이고 부정적 측면들을 모두 바울 탓으로 돌리는 상투적인 담론은 여전히 통용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바울에게 투사하고, 예수를 순수한 원형으로 복원하려는 하나의 신화적 작업이다. 한편 최근의 연구들은 부정적 바울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이 바울이 직접 쓴 편지보다는 후대 교회 상황에 맞게 각색한 바울 전승에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직접 쓴 편지의 모순적이고 애매한 태도까지 다 문제 삼을 까닭은 없다. 기독교 역사와 거의 등치된 바울이나 완전무결한 바울이나 모두 구체적 시공간을 살았던 인간 바울을 보기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바울은 기독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우며, 기독교 역사의 무게를 덜고 그 자신의 시대로 되돌려놓을 때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대략 기원후 50년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은 막 태동하던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과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자, 그 시대와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다. 학계에서 대체로 합의하는 바울의 친서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은 자기 시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바울로 안내하는 길잡이다(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야기의 대부분은 바울 사후에 기록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이름을 빌린 편지들보다는 주로 바울의 친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바울은 그가 살았던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적 지평에 뿌리박고 있다.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새로운 정신사적 흐름, 유대인들의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과 종교가 바울이라는 한 인간 안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의 전형적 인물로서 어떻게 자기 시대의 언어로 문화의 창조자가 됐는지 보자.
헬레니즘 세계와 디아스포라 유대인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 혹은 323년 알렉산드로스의 사후)에서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문화사적으로 헬레니즘 세계는 다문화 상황이 지속되고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의 헤게모니가 유지된 로마제정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복을 통해 갑자기 출현한 이 ‘하나의 세계’는 당시 지중해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체감한 세계의 크기와 그들이 경험한 세계의 이미지를 바꾸어놓았다. 세계는 더 이상 예측가능하고 질서정연하며 동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서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각자의 언어와 관습, 저마다의 법에 따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도 바뀌어갔다.
헬레니즘 세계의 도시들은 모델이 된 그리스 도시들과 겉보기에는 비슷했지만, 자세한 경관은 훨씬 복잡하고 더 개방적이었다. 그 속에는 강제이주를 당한 피정복민, 기회를 찾아 식민도시에 정착한 이민자, 정복전쟁에 고용되어 떠도는 용병, 부역에 동원된 노동자, 유랑하는 배우, 정치 망명객, 멀리서 끌려온 노예들, 도망친 노예, 떠돌이 예언자, 철학교사 등 다양한 배경과 사정, 이질적 욕망을 가진 뿌리 뽑힌 존재들이 뒤엉켜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 전쟁이나 정복에 의해 고향땅과 가족 형제, 신전과 종교로부터 유리된 사람들에게는 폭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불안한 세계였다. 각 도시의 신과 도시의 질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옛 관념들은 더 이상 그 질서가 유지되지 못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확대된 세계 속에서 엄습하는 불안과 절망에 빠지거나, 더 확장된 새로운 삶의 지도와 틀을 갈구했다. 마치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사람들과 같았다. 이제 돌아갈 고향땅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지, 새로운 고향땅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그 세계는 고대의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이었으며, 이따금 절호의 기회도 되었다. 예수와 바울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예수를 통한 만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세계 속에서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그러한 헬레니즘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던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현재 터키 소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히타이트 시대에 창건된 타르수스는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제국에 귀속되었다가 기원전 66년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동서 문화의 교차지요, 많은 철학자와 시인을 낳은 유서 깊은 도시였다. 타르수스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키드누스 강을 따라 지중해 교역과 연결됐으며 로마의 주요 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 특산품으로 킬리키움(cilicium)이라고 불리는 양탄자가 유명한데, 바울도 양가죽이나 천으로 천막을 만들어 팔던 가업을 물려받았다. 바울은 선교활동 중에도 공동체에 신세지지 않으려고 계속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땅에 터를 둔 농부가 아니라, 기술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일하고 살 수 있는 도시의 수공업자였기에 가능했다.
바울이 염두에 둔 세계 자체가 도시들이 그물처럼 연결된 헬레니즘 세계였으며 주요 청중도 도시민이었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은 대부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아, 아카이아의 코린토스, 소아시아의 에페수스, 갈라티아의 안키라와 같은 로마 속주의 수도들이었다. 이러한 대도시들은 문화적 인종적 계급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했다. 바울이 성장과정과 생활환경에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집단, 여러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끊임없이 그들과 교유했다는 의미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 밖에 살았지만 율법을 엄수하던 바리사이파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서 8일째에 할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천막기술뿐 아니라 토라도 배웠다. 율법을 지키는 데 흠이 없는 바리사이파요, 혈통적으로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다고 자부했다. 헬레니즘 도시 문화 못지않게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도 바울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탈중심적 행로와 경계 넘기
이처럼 바울은 두 세계,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았던, 그야말로 경계인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의 세계가 교차하는 도시환경은 많은 것을 자기화하고 적응, 동화시킬 수 있는 바울의 탄력적인 정신의 요람이었다. 그는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었고 기독교 운동에 투신하고도 대부분의 삶을 여러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 위에서 보냈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겠다면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진리와 소명에 눈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 뒤의 바울은 어떤가? 갈라디아서의 자전적 기술에 따르면 회심 직후 그는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던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 운동의 권위자인 예수의 사도들, 생전에 예수를 알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자기 경험을 누구와 의논하거나 공식적인 중심에 의뢰해 인준받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바울은 바로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왔고, 3년 만에야 예루살렘을 찾았다. 보름간 베드로와 함께 지내며, 야고보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조용한 방문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지척에 두고도 머뭇거리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바울의 행로는 중심을 확대하기보다는 외부를 무한히 넓혀서 급기야 외부와 내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탈중심적 방식이었다.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바울은 킬리키아,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 로마제국의 동쪽 도시 곳곳에서 계속 여러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여행자였다. 로마제국의 훌륭한 도로와 토목기술 덕에 여행이 일상화했더라도, 길 위의 갖가지 위험, 추위와 굶주림을 감수해야 했다. 바닷길에 배가 난파해 여러 날 망망대해에 떠 있던 적도 있었다. 도시에서는 이방 사람과 동족들 모두에게 여러 번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렇게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고난과 수고의 결실을 가지고서야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회합의 쟁점은 이방인 기독교 신자의 할례 문제였다. 비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바울은 일부러 할례를 받지 않은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의 의견은 단호했다. 이방인 신자의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 기독교인이 누리는 자유를 다시 빼앗는 것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팽팽한 설전 끝에 이방인 신자는 할례가 필요 없지만, 음식 금기를 비롯한 몇몇 율법조항은 지켜야 한다는 타협적인 중재안이 나왔다. 예루살렘 회합은 갈등의 불씨를 남긴 채 일단락됐다.
터키 고대도시 에페수스 중심부의 도서관 유적.
유대인들과의 충돌 배경에는 할례와 율법 문제 외에 좀 더 미묘한 사정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낯선 도시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에 들르곤 했다.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했던 것과 상충되지만, 당시 유대교 회당의 정황은 그 의문을 해소해준다. 크로산의 주장처럼 바울은 이방인에게 선교할 때, 완전한 유대인이나 순수한 이교도가 아니라 ‘하느님 경외자’ 또는 ‘하느님 공경자’로 알려진 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교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이방인들로서, 유대인 회당 구성원의 일부였다.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 속에서 형성된 히브리인들의 보편적 유일신 신앙과 윤리적 생활은 헬레니즘 시대 새로운 정신적 출구를 찾는 이들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헬레니즘 문화에 젖은 유대인들이 있었듯이, 이런 저런 이유로 유대인에게 공감하는 이방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며 경제적으로 후원하거나, 회당 건축 기금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율법 준수와 할례의 의무는 없지만 유대교 회당의 일원이었던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피상적인 인식과 달리 헬레니즘 시기 유대교는 민족적 편협성을 넘어 일종의 자기 발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에게 말을 거는 것도 오직 바울의 창안은 아니었다.
바울은 도시의 회당에 먼저 들러 유일신 신앙과 히브리 성서에 익숙해진 이방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에 상당한 타격을 줬을 것이다. 유대인 처지에서 보면 바울의 선교는 유대인의 유산을 가로채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해주던 완충지대마저 잠식하는 것이었다. 서로 가까웠던 만큼 갈등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중간지대를 먼저 겨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울은 제3의 중간지대를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경계를 넘는 지렛대로 삼은 셈인데, 이들이 기독교 확산 과정에서 점차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끊임없는 탈중심적 여정과 이방인과 유대인의 중간지대를 포섭하는 현실적이고 기민한 선교전략은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성공비결이 됐다.
새로운 식탁의 이상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인과 유대인, 나아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문제는 구체적인 사회생활의 문제이기도 했다. 누구와 어떻게 빵을 나눌 것인가? 사람들이 자기편을 확인하는 가장 소박한 방식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신에게 바친 제물을 함께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례적 절차였다. 집단적 정체성은 단순하게 말하면, 함께 빵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빵을 나눌 없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일 수 있다. 디오도로스(Dio-doros)의 기록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 유대인들은 “어떤 종족과도 빵을 나누어 먹거나 선의를 보이지 않기 위한 이질적인 율법을 도입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다신교 사회의 다른 신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신의 제단에 오른 음식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정결법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음식과 접촉을 엄격히 금한다. 이교신의 제단에 올린 음식을 먹는 것은 당연히 금지됐다. 음식과 식사법에 대한 금기는 단지 오염의 논리만이 아니라, 공동식사가 함의하는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도 관련된 것이다. 겸상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
기독교는 바울에 의해 세계종교로 거듭났다.
이 일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루살렘 회합 후 얼마 안 되어 베드로가 바울이 있던 안티오키아를 방문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베드로, 바울, 바르바나가 만나 여러 비유대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바울이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며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 제자들이 들어오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자리를 피했고,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바르바나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바울은 격분해서 베드로 면전에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위선자라고 크게 나무랐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식탁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관련한 껄끄러운 이야기를 공적인 편지에 굳이 기록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기독교의 일원이라면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음식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공동체의 원칙과도 관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권위 있는 사도였기 때문에 더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빵을 나눌 수 있는 동질적인 집단이라 해도 내부적으로 다시 빵을 분배하는 방식은 세밀하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연회나 공동식사 자리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식사의 장소, 좌석의 배치, 음식의 종류와 고기의 부위, 포도주의 등급 등은 엄격한 위계에 따라 정해지고 배치됐다. 그것은 하위 계층에게는 공공연한 모욕과 굴욕의 의식이었다. 후견인과 수혜자들이 피라미드식으로 연결된 후견인 제도가 발달했던 로마제국 안에서 많은 수혜자를 거느린 명망 있는 후견인의 식사는 철저히 서열에 따라 구조화돼 있었다. 그것이 당시의 정상적인 공동식사의 양상이었다.
초기 기독교에도 공동체 식사가 있었다. 예수의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세례와 함께 초기 교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중요한 종교 의식이었다. 성찬식은 보통 모든 공동체의 성원이 함께 모여 배불리 먹는 식사 뒤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례로 마무리되곤 했다. 바울은 이러한 성만찬을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는 평등한 사랑의 잔치로 규정했다. 그것은 주류문화의 공동식사와 같으면서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차이가 공공연히 확인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차이가 작동하지 않는 자리로서, 일종의 저항문화였다. 주류 세계의 연회와 구별되는 이러한 성찬식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계기는 역설적으로 코린토스 교회의 성찬식이 차별적인 바깥 사회의 축소판과 같이 전락했을 때였다.
고린도전서의 증언에 따르면 성찬식 모임 날 코린토스 교회의 부유한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일찌감치 와서 자기들끼리 흥청망청 먹고 취하도록 마셨다. 남루한 옷을 입고 노동에 지쳐 뒤에 온 하층민 신자들은 먹다 남은 빈 식탁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남의 잔치에 온 것처럼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를 입었다. 바울 공동체는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코린토스 교회는 비천한 노예나 하층민, 수공업자나 상인들, 사도들과 여러 교회를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집단이었다. 코린토스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그들 사이의 반목과 파벌, 분쟁에 대해 반어적 어법으로 경고하곤 한다. 특히 성만찬 상황을 전해 들은 바울은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라며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현실을 세심하게 직시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릴 것, 미리 식사가 필요한 사람은 집에서 하고 올 것이 방안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성만찬이 가난하건 부유하건, 주인이건 노예건 모두 똑같이 형제의 친교를 나누는 평등하고 열린 식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식탁의 이상은 온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끈기 있게 공동체 안에 그 원칙이 살아 있게 하고자 노력했다. ‘환난을 다 겪어도 곤경에 빠지지 않고 가망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 투지를 가지고, 바울은 여러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하며 때로 단호하게 질책하는 수고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민족, 인종, 계급, 성별을 넘어 보편적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과의 끊임없는 불일치 속에서 확인하고 조율해나간 바울 공동체의 지속적 과정이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됐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기”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하며 시작한 바울의 새로운 여정은 갓 기지개를 켠 기독교의 향방을 확고하게 탈민족적이고 탈중심적인 형태로 결정지어 놓았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경계를 가로질러 그것들을 상대화하고 모두에게 차별 없이 말 건넬 수 있는 보편적 종교의 실험이었다. 그 안에서 예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이 되었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했고, 정결법과 관습에 근거한 금기와 계율에 저항했다. 관습이나 도덕, 법을 완전히 초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엄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동족에 대한 친애의 마음조차 훌쩍 넘어섰다는 뜻도 아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돼서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민족에게 더 애틋했다. 동족이 기독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를 바랐고,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저주도 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바울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세계시민이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진리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 했다. 이처럼 언뜻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 바울 안에 공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바울 식의 보편성은 특수성과 차이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특수성과 우연적 차이들을 무심히 가로지르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지적처럼 바울의 보편주의 실험은 철학의 개념적 보편성과도 다르고, 모든 게 헛되다는 허무적 보편주의와도 달랐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은총(신의 무조건적 사랑)의 사건과 기독교적 주체의 내적 확신에 정초한 보편주의였다. 바울에게 그것은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모든 경계를 가로질러 모두에게 말을 건네는 사랑이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이상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두 문화 사이의 경계인으로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살며 길러진 바울의 탄력성과 개방성을 통해서 더 널리 전파되고 좀 더 실천적 모습으로 구현됐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들, 경계인들, 뿌리 뽑힌 자들에게 바울의 기독교는 새로운 푯대요 희망이 될 만했다. 그 푯대는 특정한 지역과 민족, 계급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모두를 포괄하고 모두를 각성시킬 수 있었다. 바울에게 기독교라는 새로운 울타리는 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과 믿음 외에 어떤 영토도 경계선도 없는 울타리였기 때문이다. 바울 당대에 기독교인의 숫자는 지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넘어 이방인에 대해 자신을 개방했던 바울의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 실험은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 다민족 풍토에서 점점 더 적합성을 얻게 될 터였다. 자기 땅을 벗어난 디아스포라적 존재들이 새로운 문화의 창조적 주체가 된 이 과거의 사례는 과연 우리도 그들처럼 온전히 시대와 대면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한다.
참고문헌
●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
● 요아힘 그닐까, ‘바울로’,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8.
● 알랭 바디우, ‘사도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현성환 역, 새물결, 2008.
● F. W. 월뱅크, ‘헬레니즘 세계’, 김경현 옮김, 아카넷, 2002.
● 존 도미니크 크로산,‘하나님과 제국’, 이종욱 옮김, 2007.
● 게리 윌스,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김창락 옮김, 2006.
● 마틴 헹엘, ‘신구약중간사’, 임진수 역, 살림,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