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핵무장론’을 반박한다

효과는 기대난망, 부작용은 기정사실…진정 원한다면 지금은 침묵해야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1-02-23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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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는 “신경 쓰지 않으면 사그라질 것”이라고 했다.
    • 다른 누군가는 “굳이 맞상대해봐야 도움 될 게 없다”고도 했다.
    • 그러나 말하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고 말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는 인식틀이 한국 사회 전체에 시나브로 굳어지면 언젠가 깊이 후회할 날이 올 수도 있다.
    • 2011년 동북아의 정치·경제·안보 구도 속에서 한국의 핵무장은 가능한 일인가. 이를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과연 애국인가.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핵무장론’을 반박한다

    2009년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한 추가 무역제재에 관한 결의안을 두고 표결을 진행하고 있다.

    해외의 원자력 관련 전문연구기관에 몸담고 있는 한 인사는 동료들에게서 “서울에서 핵무장 얘기가 거론되던데 보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연구소 내의 유일한 한국 출신이다 보니 모든 물음이 그에게 집중된 듯했다. 이들이 읽어보라며 보내온 링크는 모두 하나의 칼럼으로 연결돼 있었다. 1월11일 ‘조선일보’ 인터넷 영문판에 올라온 ‘Time for S.Korea to develop Its Own Nuclear Arms(한국이 독자적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시점)’이었다.

    “2004년에 한국의 핵 물질 추출 문제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회부됐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주요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공개적으로 주장할 정도라면 핵무장이 한국인들의 지배적인 여론으로 봐도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원자력공학 전문가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꽤 많은 사람이 인용하고 있어서 솔직히 좀 놀랐다.”

    문제의 칼럼은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1월11일자 신문에 기고한 ‘남이 핵 가져야 북이 협상한다’ 칼럼의 번역본이었다. 6자회담 당사국들이 북핵 폐기 시한을 정하도록 요구하고 그 안에 해답을 얻지 못할 경우 핵 프로그램에 나서겠다고 압박해야 한다는 골자다. 칼럼은 “한국의 지도자들은 우리가 핵을 가져야 북한이 비로소 굽히고 들어온다는 것을 우리 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설득하고 핵 보유를 공론화하는 용기와 슬기를 보였으면 한다. 그것이 한반도 비핵화의 첩경이며 요체다”라는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공개적인 핵무장 주장은 이내 같은 계열사 다른 매체로 이어졌다. ‘주간조선’은 직후 발행된 2140호 커버스토리를 통해 김 고문의 주장을 다시 옮겼고, ‘월간조선’ 또한 2월호에서 이스라엘의 핵개발 비화를 옮기는 형식으로 한국의 ‘자위적 핵무장’을 주장한 조갑제 전 대표의 글을 실었다. 김 고문은 2월8일자에 다시 “한국의 핵무기, 논의할 가치도 없다는 말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며 핵무장론을 이어나갔다. 북한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 핵실험을 감행하는 동안 정치권 일각에서 이른바 ‘자위적 핵무장’ 주장이 조심스럽게 언급된 적은 있지만, 유력 언론을 통해 이렇듯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주장이 반복되는 것은 초유의 일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한국의 정치권과 무수한 안보·핵 문제 전문가들은 ‘용기와 슬기’가 없거나 ‘북핵도 우리 핵’이라고 믿는 종북(從北)세력이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일까. 한국이 실제로 핵무장에 나선다면, 혹은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련 전문가들과 전현직 당국자들의 설명을 통해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한국의 핵무장이 가능한지, 무엇보다 이를 거론하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명확히 해두기 위함이다.



    북한 혹은 이란의 길

    “한국의 핵무장과 관련해 검토해야 할 질문은 크게 세 가지다. 핵무장이 필요한가, 이를 실행할 능력이 있는가,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손해와 이익이 발생하는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핵무장을 해봐야 의미가 없다면 필요가 없을 것이고, 필요가 있다 해도 그 후폭풍이 효과보다 크다면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대량살상무기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군 관계자의 말이다. 그의 설명을 원용하자면, 이른바 ‘P5’로 불리는 다섯 개의 기존 핵보유국 외의 나라가 핵무장을 준비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우선은 북한 혹은 이란의 길이고, 다음이 이스라엘의 길이며, 마지막으로 일본의 길이 있다.

    한국이 핵 보유를 추진한다고 가정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장애물은 각종 국제체제의 규제다.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상징되는 확산방지 체제가 한국의 핵 활동을 ‘현미경 수준으로’ 감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일련의 핵실험금지조약과 쟁거위원회(ZC), 원자력공급국그룹(NSG) 등도 핵무기 개발에 꼭 필요한 실험 감행이나 자재, 기술의 이전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꼽는 가장 직접적인 규제는 한국이 주요 핵 물질 공급국가와 체결한 양자협정이다. 핵연료 농축을 하지 않는 한국은 원자력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농축우라늄을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이들 국가와의 협정은 해당 국가로부터 수입한 핵 물질은 오로지 평화적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나라로부터 들여온 핵 물질이 무기 개발에 활용됐을 때만 협정이 파기되는 셈이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 사용된 핵 물질의 출처와 관계 없이 핵무기 개발 의혹이 확인될 경우 무조건 공급을 중단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원자력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핵무장론’을 반박한다

    한국의 독자 핵무장을 주장하고 나선 ‘조선일보’ 계열 매체의 기사와 칼럼.

    “한미원자력협정 등 관련 양자협정들은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다. 일방적으로 공급이 중단돼도 손해배상 요구나 이의제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핵 보유 국가들에 목줄이 딱 걸려 있는 셈이라고 할까. 자신들만이 핵을 오로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가장 막강한 규제장치로, 이들은 핵연료를 한꺼번에 많이 판매하지도 않는다.”

    한국이 보유한 연료 가공시설이 연간 550t 생산 규모임을 감안하면, 해외로부터 핵연료 판매가 끊길 경우 불과 1년 남짓이면 가동을 중단하는 원자력발전소가 생겨난다. 창고에 보관 중인 핵연료를 탈탈 털어봐야 3년이 지나면 20기의 원전이 모두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원자력발전 의존율이 총 전기생산량의 40% 이상, 전체 에너지량의 15%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누군들 생각해보지 않았겠나”

    원자력협정의 파기와 함께 해외 원자력발전소 수출도 불가능해진다. 원자력 원천기술이 없는 한국은 그간 아랍에미리트(UAE) 등의 원전 수주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관련 기업을 파트너로 끌어들인 바 있다. 협정이 붕괴될 경우 기술협력이 중단되므로 이러한 작업도 불가능해지고, 이미 맺은 계약은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가며 파기해야 한다.

    예상하기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각종 질환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데 쓰이는 의료용 방사성동위원소의 공급도 중단된다. 테크네슘 등 해당 국가로부터 바로 들여오는 원소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는 원소도 연료가 끊기면 만들어낼 수 없다. X레이와 CT 촬영, 방사선 항암치료 등이 한꺼번에 불가능해진다. 특히 이들 원소는 반감기가 매우 짧아 비축이 불가능하므로 수일 이내로 문제가 불거진다. 안보당국에서 일하는 한 전문가는 “전국적인 의료대란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장은 원자력 관련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NSG 등 앞서 거론한 수출통제 조약들은 원자력 전용 부품이 아니라 해도 핵 개발에 쓰일 수 있는 자재와 품목은 뭐든지 의심국가에 수출하지 않는, 이른바 ‘이중용도 품목 수출제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베어링이나 시계, 전화기 같은 경공업 제품은 물론 고무, 소금, 석고, 시멘트, 비료 등 기초재료까지 사실상 대부분의 공산품이 여기에 속한다. 산업기술 선진국이 대부분 가입해 있는 해당 조약이 한국을 의심국가로 지목할 경우 반도체와 자동차, 선박, 철강 등 주요 산업이 받을 타격은 거의 궤멸 수준에 이른다.

    유엔 안보리에 회부돼 제재를 받는 경우는 북한 사례에서 충분히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제재가 북한과는 전혀 다른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의 국가신용에 미칠 영향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2003년 우라늄 농축을 공식 선언한 이란은 북한과 달리 평화적 용도를 위한 농축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며 NPT에 남았지만, 국제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를 거론하며 신용등급 평가를 아예 중단한 바 있다. 투자등급을 ‘안정(stable)’에서 ‘긍정적(positive)’으로 상향조정한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 한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솔직히 누군들 핵 보유를 생각해보지 않았겠나. 그러나 무역의존도가 85%에 달하는 한국은 대외경제 의존도가 극히 낮은 북한이나 막대한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이란과 사정이 전혀 다르다. 한국이 핵무장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외국인 투자자들이 떠나고 주가 등 경제 지표가 곤두박질칠 텐데 국민이나 기업들이 수용할 수 있을까. 창피만 당하고 이내 철회하는 식으로 싱겁게 마무리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길?

    물론 이러한 ‘최악의 시나리오’에는 주요한 반론이 존재한다. ‘미국이 용인하면 상관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제3세계 국가가 핵을 개발하는 문제에 대해 그 체제의 성격에 따라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북한이나 이란의 사례와 달리, 역시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한 인도와는 시간이 흐른 뒤 핵연료 재처리 협정을 체결했고 이스라엘의 비밀 핵 개발은 뒤늦게나마 암묵적으로 용인한 것이다. 핵무장론을 주장하는 인사들 역시‘미국을 설득하면 가능한 문제’라는 인식을 내비치고 있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도 “미국이 용인한다면 NPT나 유엔 안보리는 물론 NSG 등 다른 확산방지 체제 역시 쉽게 행동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관련 논의에서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상당부분 성사가 어렵거나 유명무실해질 수 있기 때문. 한 비확산문제 전문가는 “모든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미국을 설득해 핵 보유를 용인받자’는 인식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상의해가며 핵을 개발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1950년대 프랑스와의 기술협력으로 독자적인 비밀 핵개발을 추진했고, 미국이 의심할 때는 ‘평화적 용도’라는 거짓말로 속였으며, 핵무장 능력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완료된 1960년대말에 비로소 워싱턴과 이를 묵인받는 내용의 비밀조약을 맺었을 뿐이다. 대외적으로 핵 보유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덧붙은 협약이었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미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제3세계 국가의 공개적인 핵 무장을 사전 혹은 중간과정에 승인해준 일이 없다. ‘미국을 설득해 동맹을 유지한 채로 핵 보유를 진행하자’는 생각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미국이 과연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한국의 핵무장을 사후에라도 용인 혹은 옹호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먼저 따져볼 사항은 한국과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차이. 주지하다시피 중동의 적성국들에 둘러싸여 고립돼 있는 이스라엘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핵이 없으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임을 미국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연이은 도발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경제력과 재래식 군사력을 자랑하는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워싱턴 정계에 미치는 유대인 사회의 강력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제정치 전문가는 “중동과 동북아에서 미국이 갖는 이해관계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미국은 교두보 이스라엘이 핵을 보유함에 따라 중동국가들을 대신 통제할 수 있는 카드를 얻었지만, 한국의 핵 보유가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사라진 중동은 미국에 참을 수 없는 악몽이지만, 핵무장을 불허한다고 해서 한국이 동맹을 파기할 리는 없다고 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례가 2004년 이른바 ‘핵 물질 실험 파문’이다. 2000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일부 직원들이 학문적 호기심으로 시도했던 우라늄 분리실험이 뒤늦게 불거져 IAEA에 회부된 사건이었다. 순수한 연구 목적이었던 데다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과거의 일이었지만, 이를 안보리에 회부해야 한다고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대응임무를 맡았던 외교통상부 고위관계자가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물러서려 했을 정도로 강경한 태도였다는 게 당시 상황에 관여했던 전현직 인사들의 한결같은 회고다.

    2004년의 경험

    이후 3개월간 30여 차례의 장관급 회의를 열며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대사관 직원들을 총동원하는 ‘사상 최대의 외교전’을 치르고, 청와대 핵심인사가 존 볼튼 당시 미 국무부 군축·안보담당 차관을 만나 담판을 지은 뒤에야 상황이 가까스로 진화됐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핵 없는 세계(nuclear free world)’를 대선 핵심공약으로 내세웠던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핵군축 협상 등 비핵화 노력에 기울이는 노력을 감안하면 미국의 입장이 2004년과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차이는 또 있다. 바로 중국의 존재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권 국가와 경제교류가 거의 없지만 한국은 총 수출액의 30%를 대중(對中) 부문이 차지할 정도로 긴밀한 의존관계를 맺고 있다. 2008년 상반기에서 2010년 상반기 사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가운데 대중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절반이 넘는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사후에나마 용인하고 국제사회의 제재 논의를 막아준다 해도, 중국의 독자 제재를 막기란 쉽지 않다. 북핵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칭하는 ‘남핵(南核)’에 대한 강도 높은 무역 제재다. 북한은 미국과의 교역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지만, 중국과의 교역이 흔들릴 경우 한국 경제가 입을 타격은 상상 이상일 수밖에 없다. 국제투자은행 서울사무소의 한 임원은 “한중 사이의 무역량이 지금처럼 커지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한참 늦었다”고 촌평했다.

    南의 선제 핵 공격 가능한가

    더욱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점점 명확해지고 있는 미·중 대립구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한국의 핵무장은 오히려 북핵을 용인하는 명분을 줄 공산이 크다고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로 2004년 핵 물질 실험 파문 당시 평양은 이를 남한 핵 개발의 증거라고 주장하며 예정됐던 3차 6자회담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활용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해 한국이 핵을 개발할 경우 북한의 비핵화는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서방의 한 비핵국가 외교관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선일보’의 칼럼은 핵무장을 통해 북한과의 빅딜 카드로 삼자는 ‘수단적 핵 보유론’인 듯하다. 그렇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이는 국제사회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남한의 발언권을 완전히 훼손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이제까지 북한의 비정상적인 행동 때문에 한국을 지지한 서방국가들이 순식간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수단적 핵 보유론’이 간과하고 있는 또 다른 질문으로는 한국에서 핵무장 논의가 공론화되거나 실제로 핵 보유에 성공한다고 해서 평양이 이를 위협으로 인식할 것이냐는 문제가 있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껴야만 핵 포기 맞교환을 결심할 텐데, 남측의 독자적인 핵 선제공격은 한미동맹의 붕괴 이후에나 가능한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더욱이 남북이 모두 핵을 보유한 상황에서라면 시간은 북한 편이라고 봐야 옳다.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미·중의 교차 경제제재로 인한 북한의 고통은 한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까닭이다.

    기술적으로는 문제없다지만

    앞서 보았듯 한국이 ‘이스라엘의 길’을 가려면 핵 문제를 공론화하기에 앞서 비밀리에 핵을 개발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핵 능력을 공개하고 이를 대북 압박수단으로 삼는다면 경제제재 등으로 인한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도 가능할 것이다. 인도나 이스라엘의 사례에서 보듯 개발이 끝난 핵무기를 두고 국제사회가 취할 수 있는 행보는 극히 제한돼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 이제부터는 과연 이러한 시나리오가 한국에 가능한 방식인지 따져보기로 하자.

    공학적으로만 접근하자면 핵무기 개발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고 핵공학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대표적인 우라늄 농축 방식인 원심분리법의 경우 5만~10만rpm(분당 회전수)에 달하는 가스터빈의 베어링 기술이 가장 어려운 과제지만 15만rpm도 간단히 실현해내는 한국의 기술력으로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더욱이 2004년 파문에서 확인됐듯 한국은 레이저를 이용한 농축기술에 대해 이미 경험을 갖고 있다. 핵탄두 설계를 위해서는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해놓은 핵분열 관련 컴퓨터 소스코드가 필수적이지만 이 역시 이미 PC버전이 나돌아 다닐 정도로 일반화된 게 현실이다.

    핵무장의 또 다른 조건인 미사일 탑재도 마찬가지다. 현무-3 등 한국이 보유한 크루즈 미사일의 경우 지름이 작아 핵탄두를 장착하기 쉽지 않지만, 그간 축적돼온 로켓 기술을 원용하면 1m 이상 충분한 직경의 탄도미사일을 독자적으로 제작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관련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사일에 실을 수 있도록 탄두를 소형화·경량화하는 작업도 한국의 선진적인 합금강 기술이면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작 문제는 우라늄 등 핵분열 물질의 확보다. 일각에서는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법(AVLIS)의 경우 2000년 소규모 실험실에서도 진행할 수 있었던 만큼 은밀한 농축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이 방법으로 90% 이상의 무기급 우라늄을 10~20㎏ 수준까지 뽑아내려면 규모가 엄청나게 커야 한다고 핵공학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이에 필요한 전력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원료에 해당하는 금속 우라늄을 구하는 것도 문제다. 현재 한국이 수입하고 있는 핵 물질에 대해서는 IAEA가 밀리그램 단위로 쓰임새를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핵을 개발하던 1950~60년대, 그러니까 NPT체제가 지금처럼 정교해지기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2000년 실험에 사용했던 금속 우라늄은 1970년대 민간기업이 들여온 인광석(燐鑛石)을 제련해 만든 것이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무기급 우라늄을 수십㎏ 농축해내려면 엄청난 양의 원석이 필요하다.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등장하듯 국제 암시장에서 핵 물질을 사오는 방법도 현재로서는 기대 난망. 관련 조사작업에 참여해 현지를 방문하기도 했던 한 관계자는 “소련이 무너졌던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는 그런 ‘재미있는’암시장이 잠깐 존재했지만 현재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고 말했다.

    일본의 길

    먼 길을 돌아왔지만, 정작 본론은 지금부터다. 앞에서 설명한 다양한 난제를 넘어 어떻게든 핵 보유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일본의 길이다.

    일본이 1970년대부터 미국의 양해하에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보유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40t 이상의 재처리 플루토늄을 상시적으로 보관하고 있고 연간 800t에 달하는 핵연료 생산능력을 자랑하는 일본의 핵 능력은 유사시 수개월이면 핵무기 1000개 이상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모두 구비해놓았다. 굳이 따지자면 핵무장의 직전 단계다. 전미과학자연합(FAS) 등 해외 전문가 단체들이 일본을 ‘사실상의 핵무장 국가’로 분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원자력협정을 통해 일본에는 허용한 재처리를 한국에는 불용한 이유는 바로 신뢰문제다. 일본이 이러한 신뢰를 얻기 위해 1967년 ‘비핵 3원칙’을 선언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 ‘핵 비확산의 리더’로 불릴 만큼 NPT 등 국제통제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왔고, 핵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는 국내법을 제정하는가 하면, 1994년 1차 북핵위기 직후에는 ‘핵 옵션을 검토했으나 가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비밀문서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 재처리는 온전히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폐연료를 재활용하려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일 뿐 다른 의도가 없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온 것이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에 관여하는 인사의 말이다.

    “스스로를 속여야 남을 속일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이라고 재처리로 사실상의 핵무장 효과를 누리자는 뜻이 아예 없었겠나. 이런 속내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아야 주변국과의 갈등 없이 언제든 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차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다. 이를 무시한다고 해서 다른 길이 열릴 리 없는 것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이 핵무장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현재 상황은 이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첩경이다. 당장 2014년 만료되는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진행 중이고, 한국은 여기서 파이로프로세싱(건식처리공법) 공동연구를 따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아무리 ‘다른 뜻이 없다’고 말해봐야 미국 의회의 누군가가 문제의 칼럼을 꺼내 들어 흔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절대무기의 아이러니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은 ‘일본의 길’을 따라 걸어왔고 IAEA와의 적극적인 협력은 물론 핵폐기물 처리기술의 공동연구나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유치 등을 통해 비핵화 의지를 과시해왔다. 섣부른 핵무장 논의가 그간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국책 연구기관의 안보문제 전문가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미국은 오히려 이런 발언을 속으로 반길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최근 한미 양국 사이에 논의되고 있는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 등 다른 연계분야도 영향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핵무장 공론화의 부작용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반면 그로 인한 기대효과는 희미하기만 하다. 2006년 북한 핵실험 직후 아소 다로 일본 외상과 나카가와 쇼이치 자민당 정조회장 등이 나서서 “핵 보유 논의”를 주장한 바 있지만, 이러한 논의가 미국과 중국에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상 핵 보유국’의 말이 그랬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지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한국의 무수한 전문가가 핵 보유를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어서다. 2월8일자 칼럼에서 김대중 고문은 “핵무장이 논의할 가치도 없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기자가 내린 결론은 “가치가 없다”다. 필요한 일인지도 의심스러울뿐더러, 누군가 원하는 이가 있다 해도 그 사실 자체를 잊어버려야 가능한 길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과연 이‘절대무기의 아이러니’를 모르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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