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험사기극을 꾸미다 실수로 어머니를 죽인 경찰간부, 전관예우 문제와 부동산 투기의혹으로 낙마한 감사원장 후보자, 서로 다른 두 사건에서 가족이기주의의 유령을 본다.
-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섬겨 제 몸을 살찌우는 이기주의.
- 이 유령은 사람됨, 이타주의, 품격은 싫어하고, 그 대신에 낙하산 타고 요직 차지하기, 뒷돈 받아 챙기기, 개발 정보 빼내 돈 될 만한 땅 사재기, 원칙주의에 물타기 따위를 좋아한다.
- 가족부양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각종 불법과 탈법으로 우리 사회가 멍들어간다.
하나, 경찰간부 A씨가 제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다. 그동안 계좌와 행적 추적을 통해 밝혀진 것은 A씨 어머니가 최근 주식투자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빚을 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주식투자 실패와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사채 이자로 허덕이는 것을 보고 A씨는 보험설계사로 일한 어머니와 상의해서 척추장애 때 6000여만원을 보상받는 보험에 들고 범행에 나선다. A씨는 가족에게는 강도사건으로 어머니 척추가 다쳤다고 설명하고 보험회사에는 뺑소니 사고로 위장하려 했다고 진술한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지만, 핵심은 경찰간부 A씨가 주식투자 실패로 생긴 어머니의 빚을 갚으려는 목적으로 보험사기를 치려다가 사고로 어머니를 죽게 한 엉뚱한 패륜사건이다.
다른 하나, 감사원장 후보자로 지명되었다가 주저앉은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을 유지해왔고, 공직기강 분야의 깊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매사에 공정하고 소신 있는 자세로 어떤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맡은 바 소임을 훌륭히 수행해왔다”고 주장했지만, 야당은 물론이거니와 여당 내부에서도 전관예우 문제와 관련해 치명적인 흠결이 있다는 여론이 일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났다. 그는 검사로 있을 당시 15년간 9차례 이사를 다녔다. 이사가 아니라 서류상의 전출입신고였다. 부동산 투기 혐의가 따를 수밖에 없다. 두루미는 미역 안 감아도 새하얗고 까마귀는 먹칠 안 해도 새까맣다는 명언을 남긴 그였지만 인사청문회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낙마했다. 그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위법을 저지른 것은 아닐 터다. 한 집안의 식솔들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부양책임의 무거움을 가졌고, 아마도 그 무거움이 그를 법이 정한 것을 넘어서서 행동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 탈법 뒤에는 가족이 있다.
아들, 새로운 현실
가족이란 대개는 한지붕 아래 사는 부모와 자식들로 이루어진, 혈연관계로 묶인 소집단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을 때 나는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기뻤고 다른 무엇보다 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작고 무력한 존재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내 삶은 내 자아의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젊은 시절에 자아는 내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었다. 아들의 탄생은 내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 생겨났음을 뜻한다. 그것은 나의 삶이 그전과는 달라져야만 한다는 확실한 이유가 되었다.
“나는 내 측근이 아닌 이상 타인에 대한 열정은 없다. 오직 나의 존재만이 내게 명백하고 본질적이며, 그것만이 내 관심을 받아 마땅하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아를 유일한 현실로 삼으려는 이런 성향과 일상생활에서 항구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티에리 타옹, ‘예비 아빠의 철학’)
나는 가족 안에서 아버지라는 위치를 점유한다. 내게 슬하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음을 뜻한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태만하거나 방기할 수 없는 숭고한 의무다. 나는 왜 아버지가 되려고 했을까? 나는 내 자아와 꿈과 의식을 옥죄는 아버지의 구속에 반항했던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의 원칙, 아버지의 가치관, 아버지의 훈육에 반발해서 가족에서 탈주한 청년이었다. 나는 혼자 불안정하게 떠돌았다. 존재 기반의 불안정에 지칠 무렵 나는 안정을 찾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었다.
“나는 아들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 이제부터 나의 삶이 오로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가 오직 아들만을 위해 살게 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자아를 상실하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병적으로 시달리는 노예가 되어, 자기 아이들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심지어 두려운 일이다.”(티에리 타옹, 앞의 책)
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병적으로 시달리는 노예’가 되지는 않았지만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서른 해를 살았다. 나는 아버지가 되려는 모험에 뛰어들기 전에 아버지 노릇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를 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자아는 사라지고,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자기 문제와 피로와 의문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티에리 타옹, 앞의 책)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가족에게서 나오고, 가족과 연루된 채 삶을 꾸린다. 가족이란 한 인간의 내면이 길러지는 기초 환경이다. 가족 내부에서 어머니는 희생의 표상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몸과 생명을 주고 젖을 먹여 길러낸다. 어머니의 가사노동은 대부분 자식들의 필요를 감당하는 노동이다.
“우스개 삼아 어머니를 업어보고 / 그 너무나 가벼움에 목메어 / 세 발짝도 못 걷네.”(이시카와 다쿠보쿠, ‘우스개 삼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짧은 시는 인고와 희생의 표상인 어머니의 노년을 보여준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고사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일러주는 유명한 고사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혼자 몸으로 맹자를 키운 어머니는 맹자가 그릇된 길로 빠질까 여러 차례 이사를 한다. 묘지 근처에서 시장으로, 다시 학교 옆으로. 그렇게 아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사하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는 어떤가?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 암청색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 주일 날씨 속의 노동으로 욱신대는 갈라진 손으로 / 불씨를 살려 불을 지폈다. / 누구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는 깨어나 추위가 갈라지고 부서지는 것을 들었다. / 방들이 따스해지면, 그는 부르곤 했다, / 그러면 나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었다, / 그 집의 만성적 분노를 두려워하면서, // 추위를 몰아내고 / 내 좋은 구두까지 닦아놓은 그에게 / 무심히 말하면서. /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 사랑의 엄격하고 외로운 과업들에 대해서?”(로버트 헤이든, ‘그 겨울 일요일들’)
이 시는 한겨울 새벽의 추위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 말없이 노동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다.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 자식들이 잠든 방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면 내 새벽잠이 그토록 아늑했을 것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엄격하고 외로운 과업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자식을 낳고 길러내는 일이다. 좋은 어머니와 아버지 밑에서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생물학적 본성말고 사람으로서의 중요한 도리와 덕, 그리고 윤리적 기질들도 배운다. 부모 노릇 하기의 고달픔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일 중의 하나다.
가족, 또 다른 마피아집단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 카프카는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이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독자 앞에 제시한다. 이로 인해 가족의 일상적인 삶이 갑자기 낯설고 비일상적인 상황으로 뒤집히고 만다. 처음에 가족들은 이 ‘벌레’를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아들이자 오빠로 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벌레’가 가족의 공동생활에 커다란 장애가 됨을 깨닫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다. 사실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했지만 자기동일성마저 잃어버리거나 손상된 것은 아니었다.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내뱉는 “이처럼 음악 소리에 감동을 받는데도 내가 벌레란 말인가?”라는 탄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흉측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그들 가족의 아들이고 오빠였다.
그러나 그는 벌레가 됨으로써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가족의 일상성에서 튕겨나간다. 가족이라는 영토에서 벗어나 타자로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가족들은 갑자기 가족 내부에서 타자가 되어버린 그를 불편해 하고 느닷없는 재앙으로 받아들인다. 그를 소외시키고 축출하는 가족의 이기적인 선택은 일체의 경제력을 잃고 일방적으로 가족의 부양을 받아야만 될 처지에 이르고 만, 재앙으로 전락한 그에 대한 가족의 단죄다. 누이동생은 벌레로 변신한 오빠 방에 신문을 넣어주고 음식도 넣어주는 등 연민을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는 주먹을 휘두르고 위협적인 눈초리를 보내고 오빠가 입에 대지도 않은 음식을 빗자루로 쓸어 담아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버린다. 아버지는 벌레를 향해 사과를 던지며 벌거벗은 혐오감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사과가 벌레의 몸통에 박혀 썩어가고, 결국은 소외되고 방치되다가 죽음에 이른다. 그 사체는 청소부 할멈에 의해 쓰레기로 처리되고, 가족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소풍을 떠난다.
카프카는 숭고함으로 포장된 가족이 실은 배제와 차별화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며, 억압과 폭력으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유기적 조직체임을 꿰뚫어본다. 카프카는 ‘변신’에서 가족 안에서 타자가 되어버린 자가 겪는 비범한 고독에 대해서 쓰며, 가족이라는 환상의 장막으로 뒤덮여 있던 그토록 잔인한 진실을 까발려 일러바친다. 바로 그것, 누구나 느끼지만 쉽게 말하지 못하는 그것, 가족이 마피아 집단과 마찬가지로 이익-착취-폭력에 의해 서로 얽혀 있는 더러운 관계임을, 아울러 우리가 그 ‘신성한’ 가족 내부에서 날마다 겪으며 견디는, 그 낯설고 끔찍하며 비일상적인 존재론적 고독에 대해서.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전형적인 하나의 가족이 의미하는 것은 일단 동물적인 관계다.”
가족이란 서로가 서로를 구순기(口脣期)적 욕망의 빨아들임으로 체화된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빨아들이고 빨아 먹히는 ‘검은 구멍’이 되는 관계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빨아먹는 검은 구멍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빨아먹는 검은 구멍이다. 그 상호적 빨아먹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탈주의 선을 타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장편소설 ‘그로칼랭’은 우울하고 슬프고 유쾌하게, 가족의 외부에서 가족의 의미를 곰곰 씹어보게 한다. ‘그로칼랭’은 카프카의 ‘변신’과 완벽한 역상(逆像)을 이룬다. 파리에 사는 서른일곱 살의 독신남자 미셸 쿠쟁은 통계 일을 하는 직장인인데, 한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드레퓌스를 짝사랑한다. 그러나 소심해서 그 주변만을 어슬렁거릴 뿐 제대로 말도 걸어보지 못한다.
공멸로 가는 폭주기차
“저번에 포르트 드 방브 역에서 구석에 어떤 아저씨 혼자 앉아 있는 텅 빈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나는 객차 안에 그 아저씨 혼자 앉아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당연히 그 옆에 가서 앉았다. 한동안 그렇게 가다보니 우리 사이에 어떤 거북함이 자리 잡았다. 온통 빈자리 천지였기에, 인간적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 초만 더 있으면 둘 다 자리를 옮겨 앉을 것 같았지만 나는 꼭 붙어 있었다. 그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것’이라고 했다. 그때 아저씨가 매우 간단하고도 훌륭한 행동으로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아저씨는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사진을 몇 장 꺼냈다. 그리고 소중한 가족을 소개하듯 사진을 한 장씩 보여주었다.”(로맹 가리, ‘그로칼랭’)
인구 1000만의 도시 파리의 텅 빈 지하철 안에서 주인공은 낯선 남자 곁에 꼭 붙어 앉는다. 고독과 대도시의 비인간화에 지친 주인공이 타자에게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낯선 아저씨가 ‘가족을 소개하듯’ 보여준 사진 속에는 사람이 아니라 젖소가 찍혀 있다. 아저씨는 그에게 말한다.
“이건 지난주에 산 젖소예요. 저지종이지요. 그리고 자, 이 돼지는 300kg이나 나가요.”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게 애정을 쏟는 아저씨의 얘기를 들으며 감동을 받는다. 또 다른 대목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여느 때처럼 내 자신감을 북돋기에 알맞은 사람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 사람은 불편해 보였고, 차량 안은 반쯤 비어 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다른 데 앉으면 안 됩니까? 자리도 많은데요.’ 인간과의 접촉이 거북한 것이다. 한번은 우스울 정도였다. 어떤 괜찮은 사람과 내가 뱅센으로 가는 텅 빈 객차에 함께 타서 긴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그대로 참다가 동시에 일어나 각자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끔찍했다. 전문가 포라드 박사에게 문의했더니 대도시권 주거 밀집 지역에서 천만 명에 둘러싸여 살면서 외로운 기분이 드는 것은 정상이라고 말해주었다.”(로맹 가리, 앞의 책)
주인공은 삭막한 인간관계에 진저리치며 외로움에 떨다가 거대한 비단뱀 그로칼랭을 데려다 동거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그로칼랭’은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남자가 고독을 견디기 위해 거대한 비단뱀을 가족 삼아 동거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로칼랭은 제 비단뱀 이름입니다. 제가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 애착을 보이지요. 교수님은 파리에 사는 비단뱀이 얼마나 고독한지 모르실 겁니다. 끔찍하지요. 절망적인 의미로 큰일이라 할 만한, 지독한 상황입니다.”(로맹 가리, 앞의 책)
사람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끔찍함과 ‘절망적인 의미로 큰일이라 할 만한, 지독한 상황’에서 탈주의 한 방편으로 연인을 만들고 가족을 만든다. 거대한 비단뱀마저 가족으로 받아들일 만큼 외로움이란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부자 되세요’의 뻔뻔함
우울하고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짚어보며 한동안 골똘해진다. 경찰간부 A씨는 효자였다고 한다. 감사원장 후보자였던 이도 한 가정에서 존경받는 아버지였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살인자로, 공직 부적격자로 전락하게 만들었을까. 두 사건에 대해 생각하면서 언뜻 우리 사회에 떠도는 가족 이기주의란 유령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이 유령들은 생존 처세술이란 가면을 쓰고 도처에 나타난다. 이 유령은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섬겨 제 뼈를 키우고, ‘부자 되세요’라는 말의 남용에 담긴 뻔뻔함을 빨아들이며 제 몸을 살찌운다. 이 유령은 사람됨, 이타주의, 품격은 싫어하고, 그 대신에 낙하산 타고 요직 차지하기, 뒷돈 받아 챙기기, 개발 정보 빼내 돈 될 만한 땅 사재기, 원칙주의에 물타기 따위를 좋아한다.
왜 그토록 많은 장관 후보자 역시 재산 증식과정이나 제 자식들을 위한 위장 전출입과 같은 위법과 탈법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은가? 왜 고위 공직자 청문회마다 위법 탈법 불법 사례가 끊이지 않고 들춰지는가?
고도성장기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공익보다는 개인이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우선하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탈법과 위법이 저질러졌는데, 그것들이 관행화되면서 죄의식이 옅어지고, 결국 한국사회는 탈법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탈법의 핵심은 이기심, 특히 가족이기주의다. 그 더러운 불길을 부채질한 것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능동적 탐욕이다.
우리를 그토록 뻔뻔함으로 내몬 것은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그릇된 배금주의, 승자가 모든 것을 취하고 패자는 철저하게 짓밟히는 천박한 승자독식사회의 파렴치한 가치관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라가 국가부도 위기를 겪으며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밀려나오며 우리 내면에 불안과 공포가 깃들었다. 그 결과로 이기심이 발호하고, 너나 할 것 없이 그 이기심이 시키는 대로 위법과 탈법을 저지르며 살아온 게 사실이다.
“이기심의 만연은 한국인들을 한편으로 범죄자의 길로 떠밀고, 다른 편으로는 정신병동으로 밀어넣는다.”(김태형, ‘불안증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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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저출산, 직업 안정성의 감소, 극단적 경쟁주의, 환경 문제 등등 난제를 안고 한국사회라는 기차는 미래를 불확실하게 하는 위기들이 도사린 고위험사회로 달려간다. 이렇듯 한국사회를 고위험사회, 혹은 불안증폭사회로 내몬 것은 내 가족만은 잘살아야 한다는 가족이기주의다. 가족이기주의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나 정의, 사회적 기회의 균등 따위가 들어설 틈이 없다. 가족이란 한 사회를 떠받치는 최소단위의 집단이다. 가족이 건강한 공동체로 바로 서야 공멸을 향해 달려가는 한국사회라는 이 폭주 기차를 정지시킬 수가 있다. 가족이기주의는 사회의 건강을 좀먹는 대표적인 병소(病巢)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가족이기주의라는 유령이 사라져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김태형 | ‘불안증폭사회’ | 위즈덤하우스, 2010
● 티에리 타옹 | ‘예비 아빠의 철학’ | 고아침 옮김 | 개마고원, 2008
● 로맹 가리 | ‘그로칼랭’ |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