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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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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사유들에 대한 단상

소설의 첫 대목인 위의 내용을 보면, 마치 파리 지도를 들고 거리거리를 답사하는 여행자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후 펼쳐지는 수기의 전모를 보면 여행 소설로서의 기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툴리에가의 숙소를 나와 생 자크 거리를 걸어가면서 만나는 이런저런 풍경은 결국 주인공 말테가 맡는 불안의 냄새, 곧 이방인 청년이 안고 있는 고독과 불안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공간적 디테일들일 뿐이다. ‘불안의 냄새’에 이르는 길, 이것이야말로 제목을 ‘수기’라 명명했지만 여행안내서가 아닌 소설로서의 정체성을 얻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1857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따른 현대소설의 탄생 이후 20세기 새로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게 될 어떤 것, 곧 ‘내면의 발견’이 발설되는 의미심장한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그 장소가 ‘파리’라는 것.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까닭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여느 때 같으면 멈추었던 곳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전에는 몰랐던 내면을 갖고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그곳을 향해 간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도 모른다.







릴케가 처음 파리에 왔을 때, 그는 이미 유럽에 어느 정도 알려진 스물일곱 살의 시인이었다. 어려서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어머니와 함께 살며 가톨릭재단의 독일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열여덟 살 때 처녀 시집을 출간했다. 스무 살 때 프라하 칼 페르디난트 대학에 입학해 문학·철학·법학 등을 접했고, 이듬해 뮌헨으로 유학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그는 평생 유럽 전역을 돌며 여행자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일찍이 노마드적인 삶을 실천한 셈인데, 이 소설의 무대인 파리는 그의 문학예술 인생에 큰 획을 긋는 체류지들 중의 한 곳이다. 그는 총 세 번 파리에 체류했는데, 이 소설의 첫 단락, 첫 문장인 ‘9월11일 파리 툴리에가’ 11번지에 처음 10개월간 체류했고, 이듬해 다시 돌아와 로댕의 문하에 들어가 바렌가의 비롱 저택에 머물며 로댕의 비서 생활을 했다. 그때 그는 로댕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끝에 ‘로댕론’을 집필하는데, 릴케의 예술론으로 유명한 ‘로댕론’의 핵심은 바로 ‘보는 법’과 ‘손의 사용’에 있다. ‘말테의 수기’는 두 번의 파리 체류 끝에 집필된 릴케 유일의 장편 소설로 파리 생활에서 겪은 정신적 육체적 과로와 쇠약으로 휴양차 떠났던 로마에서 쓰기 시작해 출간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그는 덴마크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도시를 거치게 되는데, 마침표는 세 번째 파리 체류 중에 찍게 된다.

이렇게 홀몸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면서부터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이웃을 가졌다. 이웃은 위쪽에 있기도 했고, 아래쪽에 있기도 했으며, 오른쪽에 있기도 했고, 왼쪽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 네 종류의 이웃을 한꺼번에 갖기도 했다. 내 이웃들 이야기만 써도 평생 작업거리가 될 만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 이웃들이 내 안에 만들어낸 증상들을 다룬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이야기, 곧 ‘수기’는 시인 릴케가 전 유럽을 떠돌며 겪은 인간과 종교, 문학과 예술, 나아가 대도시라는 근대의 문명에 대한 내면 일기이자 철학적 잠언록(아포리즘)인데, 흥미로운 것은 궁극적으로 이 글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총 7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수기’는 대부분 유년기 기억의 편린들과 체류지인 파리의 거리와 이웃들로부터 목격한 장면들, 그리고 살아오면서 풀리지 않았던 비의(秘意)들과 현재의 화자(작가)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예술적 사유들에 대한 단상들이다. 이렇듯 한 청년의 유년과 방랑의 기억들을 현재의 순수 의식 속에 환원시킨 ‘말테의 수기’는 소설사에 문제작으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내면의 발견’으로 20세기 현대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혁명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앞서 발표됐다는 점은 새삼 주목을 요한다. 특히 말테의 마지막 수기, 그러니까 말테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인 ‘돌아온 탕아’에 대한 삽화와 사유는 이 소설의 백미로 일독을 권한다.

돌아온 탕아 이야기가 사랑받기를 원치 않는 자의 전설이 아니라고 누구도 나를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어릴 적엔 집안 식구들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는 다른 것은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자라났다. 그리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가족들이 다정다감하게 대해주는 것에 길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소년이 되자 그는 그런 습관을 버리고 싶었다. (중략) 그가 그 시절에 원했던 것은 그의 마음의 진정한 무관심이었다. (중략) 보잘것없는 짤막한 첫 문장 한 마디를 쓰려다가 인생이 다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 사이에 좀 더 늙거나 성숙해지기는 했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기억 속의 모습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중략) 그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았으랴. 그는 이제 사랑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분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신동아 201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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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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