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리반의 모습들. 왼쪽과 가운데 그림은 18세기 삽화이고, 오른쪽 그림은 20세기 공연에서 칼리반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다.
또한 ‘태풍’에서 재미있는 점은 칼리반을 만나는 유럽인 모두는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 작품에서는 칼리반이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은 면모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극중 인물로서 칼리반은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과 지성의 폭을 지녔고, 자신의 개인사, 경험, 주장을 프로스페로와 청중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고 혹자는 공감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는 프로스페로의 딸을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프로스페로를 살해하려 시도하는 칼리반이 악한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페로의 딸을 취할 수 있었다면 “이 섬을 칼리반들로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칼리반은 만만치 않은 철면피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본능에 빠져 있는 자다. 프로스페로를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할 때 칼리반은 무서울 정도로 가학적이고 폭력적이다.
칼리반이 외양도 이질적인데다 악한임은 분명하나,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는 이 희곡에 나오는 다른 악한보다 사연이 있고, 흥미로운 악한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칼리반으로 하여금 제법 많은 말을 하게 해주었고, 그의 대사는 청중으로 하여금 경멸과 지탄을 한 몸에 받는 그를 주목하게 만든다. 프로스페로에게 말을 배워 욕하는 데에 잘 쓰고 있다고 빈정대는 칼리반은 보기보다 언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고, 그만큼 말하는 동물인 인간에 가깝게 느껴진다. 칼리반의 대사는 대개 외국인의 말처럼 어딘지 단순하고 모자란 듯 들리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 한에서 말의 힘을 십분 이용하고 있다. 칼리반이 프로스페로에게 따지는 장면 중 하나를 보자.
이 섬은 내 어머니 시코락스에 의해 내 것이오.
당신이 내게서 섬을 뺏었지만. 당신이 처음 왔을 땐
나를 쓰다듬고 소중히 여겼었소. 내게 들딸기 섞인 물을 주었고,
밤과 낮에 빛나는 저 더 큰 빛과 작은 빛의 이름도 알려주었소.
그래서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당신에게
이 섬의 특성을 전부 가르쳐주었지 (중략)
그랬던 것이 저주스럽구나! 시코락스의 모든 저주가
당신에게 떨어지기를!
여기서 칼리반은 (서구의 부계적 상속권과 대비되는) 모계적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해 그는 자기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이 영토를 선점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프로스페로가 섬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자신의 덕을 봤다는 것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프로스페로의 힘 중에서 주요한 요소인 마법을 의식한 듯이 자신의 어머니인 마녀 사이코락스의 마법을 들먹이는 것도 칼리반이 상황을 그런 대로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논리적인 언변 외에도 청중이 칼리반을 ‘인간적인’ 존재로 느낄 수 있는 요소로 그가 섬의 자연 환경에 대해 그 나름대로 감성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섬의 낯선 소리에 놀라는 유럽인들에게 칼리반은 자신의 섬이 본디 매우 신비로운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소리의 아름다움에 젖어 있노라면 행복하고, 소리가 멈추었을 때 행복한 꿈에서 깬 사람 모양 울고 싶어진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렇듯 아름다운 것에 둔감하지도 않고, 자신의 감성을 알맞은 비유로 표현할 줄 아는 칼리반의 모습은 그를 인간에 못 미치는 기형의 생물로만 보기 힘들게 한다.
‘태풍’에서 셰익스피어는 칼리반의 여러 모습과 목소리를 섬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반응과 함께 들려준 셈이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이 희곡에 등장했던 여러 유럽인보다는 타자라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고, 이들을 재현하는 일에서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