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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여기 사는 즐거움’ ⑦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무주 적성산의 예술가 이익태와 두 여자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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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포기하자’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그렇게 빔은 이곳으로 이주했고 ‘풀(full)포기’한 대신 재미와 자유를 얻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교실 출입문 기둥에 쓰인 ‘풀포기’가 그 앞에 한들거리는 아기똥풀 같은 잡초를 말하는 줄 알았더니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자’란 구호였던 것이다.

‘저산’ 이익태는 예전부터 이단아였다. 이름 앞에 마땅한 모자를 씌우기가 어려울 만큼 온갖 일을 섭렵해왔다. 연출가였고 퍼포먼스 기획자였고 큐레이터였고 극작가였고 배우였고 사진가였고 화가였다!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자면 ‘아티스트’라고 붙이는 것이 타당할,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총체적인 모색을 통해 요즘은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라고 회화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 도중에도 저산은 숱하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흔들리는 풀잎에, 찻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찻잎에, 벗겨진 페인트에, 하늘이 비치는 고인 물에, 발밑에 뒹구는 돌멩이에 대고! 저산이 포착한 렌즈 안에는 늘 신비한 형상들이 잔뜩 들어 있다. 이목구비를 가진, 외계인 같기도 하고 정령 같기도 한 수수께끼의 생명들이 수시로 그렇게 저산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빔’이 기록한 ‘불자는 부처를 죽여야 해’를 표현한 그림이 100호 크기로 걸려 있다. 화면 중앙에는 연화대에 올라앉은 석가모니불이 놓였는데 부처의 얼굴 부분엔 끈이 흘러내린 낡은 가죽 구두 한 짝을 큼직하게 그려뒀다. 종교인에게는 신성모독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이런 무엄하고 신랄한 반동은 딴은 꽤나 통쾌하기도 하다. 우리 마음 안에 더께 앉은 때와 각질은 이런 충격적 방식이 아니고선 떨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저산 이익태는 천성적으로 기존 형식을 뒤엎는 ‘전복’을 모색하는 사람이다. 한곳에 붙어 있지 못하고 천방지축 떠돌았다. 남과 똑같은 짓은 죽어도 못하는 기질을 타고 났다. 그러자니 늘 새로운 실험에 빠져든다. 이제 예순이 넘은 그의 표정 안에는 그런 방랑인의 흔적이 여실히 새겨져 있다. 평생 아무것도 겁내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도전하며 살았다. 그림 재능은 중·고교 때 드러났다. 전국미술대회를 휩쓸며 상을 받았으나 미대에 낙방하자 드라마센터 연극학교(현재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에 입학한다. 연극연출로 방향을 튼 것이다. 듣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친구들과 더불어 ‘필름 70’이란 전위 영화그룹을 만든 것이 1969년이다. 기존 영화에 반기를 든 한국 최초의 아방가르드 실험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를 이때 만들었다.



“40분짜리 영화인데 지금 봐도 그리 촌스럽지는 않아요. 그 영화에서 내가 1인 5역을 했어요. 각본, 주연, 감독, 편집, 제작을 혼자서 감당했는데 당시 한국 뉴시네마 운동의 기수니 뭐니 하면서 전 매스컴이 관심을 보였지요.”

연출·연기·퍼포먼스·그림 섭렵

유현목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도 잠깐 하고, ‘하나의 그림자를 위한 열두 개의 촛불’이란 시극도 만들고 슬라이드와 영화 필름을 사용한 당시로선 파격적인 쇼 무대를 꿈꾸며 송창식, 윤형주와 어니언스 ‘리사이틀’의 연출도 담당한다. 1973, 1974년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분에 가작이지만 연달아 입선했으며 블랙코미디 형식의 ‘병태의 감격시대’(추송웅 주연)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는가 하면 당시 기발한 도전을 감행하던 ‘전위 해프닝 그룹’ ‘제4집단’(김구림, 정찬승, 정강자, 방태수)의 멤버로도 활약했다.

생활 방편으로 수많은 액션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연극(콜렉터의 캐리번 역)과 영화(김승옥이 각본을 쓴 ‘황홀’)배우로도 출연했다. 그냥 나열하기만도 버거울 만큼 여러 장르를 섭렵하면서 서른이 되었고 만 서른이 되던 1977년 돌연 미국으로 이민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익태란 이름은 잊혔다.

미국에서도, 한군데 정착할 줄 모르는 그의 방황과 열정이 달라졌을 리 없다. 아니 도리어 그는 점점 더 복잡한 이단아가 되어갔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LA의 반복적인 일상, 태어나고 성장한 문화권으로부터의 단절감, 정체성의 위기, 바둑판처럼 펼쳐진 거리풍경이 주는 몰개성(沒個性)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게다가 그의 처음 일터는 상업미술 대량생산공장이었다.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 배열작품처럼 반복 메커니즘으로 똑같은 물체를 그리는 일이었어요. 내가 유난히 남 따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요. 똑같이 그리는 게 싫어 눈에 안 띄게 살짝 다르게 그려놔요. 그런다고 늘 혼이 났고 마침내 쫓겨났죠.”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매달리기 시작한 때는 1989년 무렵이다. ‘스키드 로(skid row)’로 불리는 노숙자 거리를 주제로 사진첩(가제 Lost Angels)을 발간하기 위해 노숙자들을 필름에 담고 일종의 거리연극을 위한 스케치를 하다가 그림으로 비약됐던 것이다. ‘로스트 앤젤스’라는 제목은 그가 살고 있는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현실에서 추방당한 길거리 인생들을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진리도, 도덕도, 인간성도 없는 인간상에 겹쳐놓으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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