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인재 선발 기준 바꿔 메이저리그에 돌풍을 일으킨 혁신가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1-07-20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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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무명 선수 출신의 빌리 빈 단장이 부임한다. 그는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레드삭스와 같은 부자 구단보다 훨씬 적은 돈을 써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팀을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일으킨다. 빈 단장은 타율과 홈런보다는 출루율을 중시하는 새로운 선수 평가 방식을 통해 14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메이저리그에 새 바람을 불러왔다. 상식을 깬 발상, 자신의 조직에 적합한 인재 등용, 철저한 데이터 분석만 있다면 다윗도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빌리 빈이다.
    프로 야구단은 매우 복잡하고 방대한 조직이다. 매일 경기에 뛰는 1군 선수만 수십 명이고 이들을 가르치는 감독 및 코치진의 숫자도 적지 않다. 2군에는 더 많은 선수와 코치들이 있다. 경기장의 선수 및 코치들이 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업무 즉 구단 운영, 마케팅, 판촉, 구장 운영, 홍보, 선수단 수급, 트레이닝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총칭해 프런트(Front Office)라고 한다. 이 프런트를 이끄는 총 책임자가 바로 단장(General Manager)이다.

    한국 및 일본 야구와 미국 메이저리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야구단 내에서 차지하는 단장의 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저리그는 전형적인 ‘단장의 야구’다. 단장은 감독, 코치진, 선수단, 프런트 등 야구단 전체 조직 구성에 관한 전면적인 인사권을 쥐고 있다. 신인 지명 및 방출, 트레이드 역시 단장의 몫이다. 미국 야구계에서는 요리사의 손맛, 즉 감독의 경기 운영 능력보다는 단장이 트레이드나 신인 지명 등을 통해 좋은 선수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그 야구단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본다. 좋은 선수들을 확보할 때 다른 구단보다 돈을 적게 쓴다면 금상첨화다.

    반면 한국 및 일본 야구는 ‘감독의 야구’다. 단장이 감독의 거취에 미치는 영향력이 메이저리그보다 훨씬 작다. 대부분의 감독은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프런트에 크게 휘둘리지도 않는 편이다. 선수 트레이드, 신인 지명 등에도 감독의 입김이 상당히 발휘된다. 김성근 SK와이번스 감독, 오 사다하루(王貞治) 전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등이 감독의 야구를 시현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이처럼 단장의 위상이 높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다진 단장이 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근교 도시인 오클랜드를 연고지로 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Oakland Athletics)의 빌리 빈(Billy Beane) 단장이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통계를 이용한 과학적 야구 분석 기법인 세이버 메트릭스(Saber metrics)를 적극 활용해 1990년대 이후 만년 하위 팀에 불과했던 오클랜드를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명문 팀으로 만들었다.

    1901년 창단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에 속한 팀이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에도 손꼽히는 오랜 역사와 우수한 성적을 거둔 바 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3회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포함해 총 9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뉴욕 양키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이어 단일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 횟수로는 세 번째다. 그럼에도 1990년대 이후 구단주의 긴축 재정으로 좋은 선수를 영입하지 못해 약체 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가난한 팀의 놀라운 성적

    하지만 빈이 단장이 된 이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싼 선수단 전체 연봉(payroll)을 가지고도 5번이나 포스트시즌(2000~03년, 2006년)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연봉 순위는 30개 구단 중 25위, 29위, 28위, 23위에 불과했다.

    빈은 누구나 타율이 높고, 홈런을 잘 치는 타자만 선호할 때 득점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지표는 타율이 아닌 출루율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다소 뚱뚱하고 발이 느리더라도 선구안이 좋아 볼넷(사사구)을 고를 수 있는 선수를 대거 발굴했다. 이 공식을 투수에도 대입, 모두가 구속(球速)이 빠르고 방어율이 낮은 투수를 선호할 때 볼넷 허용 비율이 낮고 땅볼 비율이 높은 선수를 발굴해 재미를 봤다. 발굴한 저평가 유망주가 스타가 되면 부자 구단에 비싸게 팔아 막대한 이적료도 챙겼다.

    리그 꼴찌를 면치 못하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이를 통해 2000~03년 4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성과를 메이저리그 최고 부자 구단인 뉴욕 양키스 팀 연봉의 3분의 1도 안 되는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이뤄냈다는 점이다. 특히 메이저리그 최고 부자 구단 뉴욕 양키스가 오클랜드의 최고 강타자 제이슨 지암비를 천문학적인 돈을 주고 데려간 직후인 2002년에 거둔 성적은 더 놀랍다. 누구나 지암비가 없는 오클랜드의 2002년 시즌 성적이 곤두박질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클랜드는 양키스와 똑같은 103승(승률 0.636)을 올리며 메이저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 가장 돈 많은 구단과 가장 돈 없는 구단의 성적이 나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구계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독특한 선수 선발 방식,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율을 거둔 투자는 140년 메이저리그 역사의 최대 이변이자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빈은 140년 동안 불문율처럼 이어져오던 우수 야구 선수의 평가 기준을 재정립하고, 숨어 있는 저평가 인재를 발굴했으며, 이들을 적극 기용함으로써 독보적인 성공 신화를 이룩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하면서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빈의 놀라운 성공은 야구계는 물론 금융계, 비즈니스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2004년 미국 금융 월간지 ‘스마트머니’ 12월호는 미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파워 엘리트 30인을 선정했다. 1위는 최고의 투자자로 손꼽히는 세계적 거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2위는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차지했다. 30명 중 유일하게 경제 금융과 관련 없는 사람이 바로 빌리 빈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도 30명에 들지 못한 상태에서 빌리 빈이 포함됐다는 건 월스트리트가 얼마나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07년에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빈을 최고의 메이저리그 단장으로 선정했다. 2009년 미국 유명 스포츠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도 빈을 지난 10년간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단장 10명 중 한 명으로 뽑았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월스트리트의 이면을 잘 그려낸 베스트셀러 ‘라이어스 포커(Liar’s Poker)’의 저자 마이클 루이스는 빌리 빈의 이야기를 ‘머니볼(Money Ball)’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2003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빈의 이야기는 현재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빌리 빈은 누구인가

    빈은 1962년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태어났다. 곧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로 거주지를 옮겨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그에게 야구를 처음 가르친 사람은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다. 빈의 아버지는 복무를 위해 종종 집을 비웠다. 이 때문에 집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는 의욕에 불탔다. 빈의 아버지는 신병 훈련을 하듯 아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아버지와 함께 캐치볼을 하고 리틀 야구장을 누비는 건 어린 빈의 주요 일과였다.

    빈은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운동에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생 때는 야구, 풋볼, 농구 등 주요 구기 종목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빈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야구였다. 당시 명문 스탠퍼드대가 그에게 야구-축구 합동 장학금을 제시했지만 많은 이의 예상을 깨고 이마저 거절했다. 스탠퍼드대는 1980년대 미식축구 최고의 쿼터백으로 꼽혔던 존 엘웨이의 프로 데뷔가 임박함에 따라 그를 대신할 고교 선수를 뽑으려 했다. 대학 측이 내건 조건은 나쁘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 또한 대학 진학을 원했다. 그러나 빈이 선택한 곳은 메이저리그 무대였다.

    고교 마지막 해에 빈은 뉴욕 메츠 선수들과 조우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메츠 팀의 스카우터가 빈을 원정 팀 클럽하우스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리 마질리, 무키 윌슨, 윌리 백맨 같은 메츠의 스타 선수들에게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빈에게 “메츠는 네가 필요하다. 당장 빅 리그로 오라”고 부추겼다. 당시 메츠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던 명장 조 토레 감독도 빈에게 관심을 표했다. 어린 선수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빈은 1980년 뉴욕 메츠에 12만5000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외야수로 입단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그는 오랫동안 마이너리그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기껏 메이저리그에 올라와도 타석에서 제대로 된 스윙 한 번 보여주지 못한 채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선수로서의 빈은 자제력과 평정심이 매우 부족했다. 그는 삼진의 공포 속에서 어설프게 배트를 휘둘렀고, 번번이 투수에게 농락당했다. 1군 경기에 자주 출전하지 못하니 가끔 출전할 때 반드시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욕심이 앞서 항상 일을 그르쳤다. 결국 뉴욕 메츠는 그를 미네소타 트윈스로 트레이드했다. 여기서도 오래 머무르지 못한 그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거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까지 왔다.

    1990년 시즌을 준비하는 스프링캠프에서 빈은 은퇴를 결정했다. 그는 스카우터로 새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10년 전에는 모든 스카우터가 동경해 마지않던 유망주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이도 서른 줄을 향해 가는데 언제까지 무명 선수로만 지낼 수는 없었다. 이미 결혼도 했고 곧 첫아이도 태어날 예정이었다.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오른쪽)이 2월21일 구단의 외야수인 마쓰이 히데키의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만 5년 동안 148경기를 소화한 빈의 메이저리그 성적은 타율 2할1푼9리(홈런 3개)에 불과했다. 사실상 1군 주전 선수가 되는 게 불가능한 초라한 성적이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6시즌을 보낼 동안 그가 소속된 팀은 2번 월드시리즈에서 우승(1987년 미네소타 트윈스, 1989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했다. 하지만 1군 주전도 아닌 그가 포스트 시즌 엔트리에 들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2개의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챙기지도 못했다.

    훗날 빈은 스탠퍼드대 대신 메츠행을 선택한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돈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빈의 부모는 아들의 돈을 잘못된 부동산 투자로 모두 날려버렸다. 1980년의 12만5000달러는 꽤 큰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멘토’ 앨더슨 단장과의 조우

    선수 생명의 한계를 느낀 빈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샌디 앨더슨 단장에게 어드밴스 스카우트(advance scout) 업무를 담당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어드밴스 스카우트란 시즌이 시작되기 전 각 구단을 탐방하면서 향후 적수가 될 만한 팀들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는 사전 시장조사를 뜻한다. 1군 주전은 아니었지만 한때 상당한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던 주요 백업 선수가 갑자기 행정 업무를 맡겠다고 선언하자 구단은 당황했다.

    앨더슨의 당혹감은 더 컸다. 빈 이전에는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스카우터가 되겠다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더슨은 빈을 고용했다. 어차피 어드밴스 스카우트라는 업무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빈이 없다고 해서 팀 성적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아예 야구를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앨더슨은 원래 야구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다낭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예비역 해병대 장교이자,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1980년대 초 앨더슨은 우연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야구단의 재정 자문을 맡게 됐다. 그는 야구를 잘 몰랐지만 화끈한 추진력과 빠른 업무 처리 속도로 구단주의 마음을 사로잡고 단장으로 승진했다.

    1970년대부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보유해온 구단주 월터 하스 주니어는 돈 쓰는 일에 인색하지 않은 인심 후한 구단주였다. 1991년 당시 오클랜드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연봉이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그 덕분인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1989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1995년 월터 하스 주니어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운 구단주가 된 스티븐 스캇과 켄 호프먼은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그들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선수단 연봉이 지나치게 많다며 이를 줄이라고 앨더슨을 달달 볶았다. 구단주는 돈을 주지 않고, 팀은 어떻게든 꾸려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앨더슨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선수들을 싼 연봉에 데려올 방법 찾기에 골몰했다. 이때 그가 주목한 도구가 바로 세이버 메트릭스였다.

    세이버 메트릭스는 미국의 야구 저술가이자 통계학자인 빌 제임스가 1970년대에 창시한 방법론이다. 그 핵심은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를 통계학적,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다. 야구에서는 투수가 던지는 하나의 공에도 스트라이크, 볼, 아웃, 인플레이, 파울 등의 수많은 결과가 기록된다. 타자도 마찬가지다. 한 타석에서 삼진을 당할 수도 있고, 안타를 칠 수도 있으며, 사사구로 걸어 나갈 수도 있다. 한 타석, 한 투구, 한 경기 정도의 기록이 한 시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한 시즌 또는 지난 시즌과의 비교처럼 오랫동안 누적된 기록은 ‘통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이버 메트릭스는 이렇게 다년간 쌓인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선수의 재능을 평가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세이버 메트리션이라 부른다. 창시 직후인 1970년대에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으나 19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야구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빌 제임스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해 일정한 수의 단타, 2루타, 도루, 사사구, 아웃 등이 주어졌을 때 각 팀이 이를 통해 몇 점을 얻을 수 있는지 예측하는 공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팀이 창출한 점수(Created Runs)’라 명명한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팀 창출 점수=(안타+사사구)×총 잔루 수/(타석+사사구)

    이 공식에 따르면 한 팀의 득점력을 최대화하려면 OPS(출루율+장타율)가 높아야 했다. 빌 제임스 이전의 야구계는 타율과 도루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편이었다. 즉 사사구로 걸어 나가는 선수보다는 안타를 치는 선수를 선호했고, 발이 빨라 도루를 많이 할 수 있는 선수를 선호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제임스는 안타를 치건 사사구를 얻어내건 일단 1루 베이스에 도착하는 것, 즉 타자가 아웃을 당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앨더슨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의 조직 문화 전체를 출루율을 가장 중시하도록 서서히 바꿨다. 이를 통해 모든 타자는 선두 타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모든 타자의 최종 목표는 베이스에 도달하는 것이며,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은 나쁜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것, 가장 칭찬받아야 할 덕목은 사사구를 얻어 진루하는 것이라는 식의 암묵적 기준이 마련됐다.

    앨더슨은 선수들에게 사사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인성 훈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프로 야구 선수들은 약물, 도박 등의 위험에 노출된다. 고등학교 때 한가락 했던 선수일수록 타석에서 인내심과 자제력이 필요하다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내가 사사구 따위나 얻어내자고 프로에 온 줄 알아. 난 안타를 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야’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러다 보면 과거 빈이 선수 생활에 그랬듯, 무조건 안타를 치려는 욕심에 배트를 휘두르다 스트라이크가 아닌 삼진만 당할 뿐이다.

    1993년 앨더슨은 빈의 업무 능력을 인정해 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유망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빈에게 부여했다. 동시에 빌 제임스, 에릭 워커 등 유명 세이버 메트리션의 책을 소개했다. 당시 앨더슨은 빈이 세이버 메트릭스에 매료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빈은 이 새로운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는 앨더슨의 노선을 누구보다 더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됐다.

    ‘미다스의 손’으로 거듭나다

    앨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보고 빈이 ‘이런 건 내가 선수 시절에 생각도 못했던 방식이야. 말도 안 돼’라는 태도를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빈은 선수 시절부터 따라다니던 야구계의 모든 관습과 편견을 곧바로 떨쳐냈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빈은 1998년 드디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직에 올랐다. 멘토인 샌디 앨더슨이 미국 프로야구 부총재에 해당하는 중책을 맡아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앨더슨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버드 셀릭 메이저리그 커미셔너(Commissioner of Baseball·메이저리그의 최고 책임자, 한국 프로야구의 총재에 해당)를 보좌하는 부사장 역할을 했다.

    단장이 된 빈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야구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OPS를 중시하는 앨더슨 전 단장의 교훈을 계승하는 동시에 장래가 밝으나 다른 구단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유망주들을 스카우트하거나 트레이드하는 일련의 선수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또 싼값에 데려온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로 성장하면 그들을 부자 구단에 비싸게 팔거나, 신인 드래프트의 앞 순위를 넘겨받아 여러 명의 유망주를 대거 발굴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대표적 예가 빌리 테일러와 제이슨 이스링하우젠의 트레이드다. 빈은 1999년 시즌이 종반에 다다를 무렵 당시 37세의 노장 마무리 투수 빌리 테일러를 뉴욕 메츠에 팔았다. 9회 마지막 1이닝만 확실히 책임지면 되는 마무리 투수의 특성상 경험이 많은 노장 선수가 유리하다고 보는 게 일반적 통념이지만 빈의 생각은 달랐다. 빈은 빌리 테일러의 가치가 이미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의 몸값이 최고로 비싼 지금 그를 다른 팀에 보내 유망한 젊은 선수를 여러 명 데려오는 게 낫다고 믿었다.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빈은 테일러를 보내고 선발 투수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제이슨 이스링하우젠을 데려와 그를 마무리 투수로 삼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0년 이스링하우젠은 33세이브를 거두며 메이저리그 정상급 마무리 투수 반열에 올랐다. 반면 테일러는 메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한 해 뒤인 2000년 메츠에서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로 이적하며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했다.

    이스링하우젠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 빈의 트레이드는 계속됐다. 2002년 이스링하우젠의 성장 가능성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빈은 이스링하우젠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비싼 가격에 팔고, 저평가됐다고 판단한 빌리 코치를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영입했다. 시속 160㎞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가졌지만 신인의 고질병인 제구력 불안에 시달리던 빌리 코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새로운 선수로 거듭났다. 코치는 2002년 시즌에 44세이브를 올리며 대활약했다.

    빈은 한 해 만에 빌리 코치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보냈다. 대신 2002년 시즌에 부진을 면치 못했던 키스 폴크를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데려왔다.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빈의 선택은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년 전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던 빌리 코치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과 11세이브만을 기록했다. 반면 2002년 극도로 부진했던 키스 폴크는 무려 43세이브를 올렸다.

    타자 트레이드도 무척 성공적이었다. 강타자 제이슨 지암비를 뉴욕 양키스로 보내고 저메인 다이를 영입한 일, 자니 데이먼을 보스턴 레드삭스로 보내고 레이 더햄을 영입한 일, 미구엘 테하다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보내고 바비 크로스비를 택한 일 모두 대성공이었다.

    빈의 성공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영건 3인방’이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는 한국 프로야구로 치면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이 한 팀에 다 모인 듯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투수, 특히 1선발(에이스)의 가치가 귀중하다는 뜻이다.

    이 3년 동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는 다른 팀에서 한 명도 가지기 힘든 특급 1선발이 무려 3명이나 존재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신인이나 다름없는 젊고 싱싱한 선수들이었다. 마크 멀더(1998년 입단), 팀 허드슨(1999년 입단), 배리 지토(2000년 입단)가 그 주인공이다. 1년 간격으로 입단한 이 3명의 투수는 2001년부터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배리 지토는 직구 구속이 느려 많은 스카우트가 그를 데려오는 것에 반대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빈은 세이버 메트릭스의 통계를 들이대며 지토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이 3명이 거둔 승수는 무려 198승이다. 이 기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승리한 경기는 총 392경기. 영건 3인방이 4년 동안 오클랜드 팀의 전체 승수의 50.5%를 책임졌다는 뜻이다. 오클랜드가 2002년과 2003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1위를 하고, 2002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신기록인 20연승을 달성한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영건 3인방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 거둘수록 선수의 연봉은 치솟을 수밖에 없다. 한 명의 특급 선수 연봉도 제대로 대주기 힘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빠듯한 재정 형편상 3명의 특급 선수에게 모두 성적에 걸맞은 몸값을 주기란 불가능했다. 3인방 중 가장 많은 화제를 모았던 ‘커브의 달인’ 배리 지토는 2002년 사이 영상(Cy Young Award)을 받았다. 매년 최고 투수에게 부여되는 이 상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전설적 투수 사이 영을 기리기 위해 1956년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지토의 2002년 연봉은 50만달러에 불과했다. 부자 구단에서라면 최소 몇 백만달러, 최대 몇 천만달러의 연봉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의 연봉은 말 그대로 껌 값에 불과했다.

    결국 팀 허드슨이 가장 먼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마크 멀더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이들 모두 다른 팀에서는 오클랜드 시절의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특히 마크 멀더는 수술까지 받는 불운을 겪었다. 홀로 남은 배리 지토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이끌었지만 예전만큼 신통치는 못했다.

    2006년 시즌 이후 자유계약선수(FA)가 된 지토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영건 3인방과 오클랜드의 인연은 영영 끝났다. 지토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7년간 무려 1억2600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공교롭게도 배리 지토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떠난 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빌리 빈의 성공 노하우

    1)자사 조직에 적합한 인재상(像)부터 정립하라

    야구에서는 ‘5툴 플레이어(five-tool player)’ 선수가 각광받는다. 5툴 플레이어란 공을 정확히 맞히는 콘택트 능력을 비롯해 장타, 수비, 송구, 주루 능력을 모두 갖춘 선수를 뜻한다. 하지만 빌리 빈은 5툴 플레이어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만큼 연봉도 비싸기 때문이다.

    빈이라고 해서 5툴 플레이어를 싫어할 리 만무하다. 모든 포지션에서 최고의 선수들로 팀을 꾸리는 건 모든 단장의 꿈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운영하려면 팀의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만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 그는 5툴 중 꼭 필요한 2~3개의 툴만 있다면 그런 선수들로도 최고의 팀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에 따라 빈은 타율이 높고 몸값도 비싼 선수보다 선구안이 좋아 사사구를 많이 골라내는, 즉 출루율이 높은 선수를 선호했다. 출루율 높은 선수는 별로 비싸지 않은데다 타율 높은 선수 못지않게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선수를 고를 때 구단의 현재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인재상(像)부터 정립했다.

    그 다음에는 적합한 인재를 가려낼 수 있는 독특한 평가 기준, 즉 타자에게는 타율이나 홈런보다 출루율을 중시하게 만들고, 투수에게는 공의 속도를 높이기보다 사사구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등 해당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에 걸맞은 평가 기준도 확립했다. 이에 따라 비록 유명하진 않아도 잠재력이 풍부한 선수들을 대거 선발했다. 무명 선수였던 그가 메이저리그의 거물로 변신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구단이 뉴욕 양키스처럼 해당 포지션별 최고 선수로 팀을 꾸릴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해당 조직의 문화와 핵심 가치에 부합하는 인재가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문제는 이를 가려낼 수 있는 평가지표를 갖추고 있느냐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명문대 졸업, 토익 900점 이상, 학점 4.0 이상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직원을 선발하는 기업이 여전히 많다.

    소형 정밀 모터 분야의 세계 1위 기업인 일본전산은 밥을 빨리 먹고, 목소리가 크고, 화장실 청소를 잘하는 사람을 뽑는다. 세계 최초로 100만분의 1g짜리 톱니바퀴를 만든 일본의 주켄공업도 이력서를 빨리 쓰는 순으로 사람을 뽑는다. 남이 보기엔 최고 인재가 아닐지 몰라도 이들 기업은 명문대 졸업자가 많은 기업보다 우수한 성과를 냈다.

    현대 기업은 극심한 대내외 환경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인재의 정의도 시시각각 변한다. 당연히 인재를 뽑는 기준도 유연해져야 한다. 수백 년 전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의 기준은 밀로의 비너스처럼 몸매가 풍만하고 얼굴은 희고 둥근 여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네킹처럼 마른 몸매, V라인의 가늘고 작은 얼굴을 가져야 미인이다. V라인이 대세인 시대에 밀로의 비너스를 찾는 건 아닌지, V라인을 발굴할 만한 기준은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빈의 성공 사례는 이런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2)선두 기업을 무작정 모방하지 말라

    빌리 빈은 항상 강조한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첫 번째 행동은 뉴욕 양키스를 따라 하는 일이다. 양키스의 방식을 따라 하면 매번 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우리가 취할 행동을 세 번이나 반복할 수 있을 만큼 부자이기 때문이다.” 즉 남이 만들어놓은 규칙에서 승승장구하는 상대를 이기려면 기존의 방법대로 경쟁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관념을 대체할 나만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그는 이런 맥락에서 신인 선수나 트레이드 대상 선수를 고를 때 항상 해당 선수가 진정으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필요한 선수인지를 수백 번 자문했다. ‘그 선수가 진정으로 팀에 필요한 선수가 아니라 단지 성적이 좋고 인기가 많기 때문에 데려오려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라’ ‘내가 입단을 성사시키지 못한 선수 때문에 받는 충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잘못된 가격으로 사들인 선수 때문에 받는 충격은 오랫동안 극복할 수 없다’ ‘남이 트레이드하는 선수가 누구인지 신경 쓰지 말라. 내가 이 선수를 원하는지 확실히 결정한 다음 그의 뒤를 쫓아라’ 등은 빈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철칙이었다.

    오랫동안 몸값 비싼 선수들로 팀을 꾸려오면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낸 뉴욕 양키스와 달리 돈을 적게 쓰는 스몰 마켓(small market) 팀은 갑자기 많은 돈을 쓴다 해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가 많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뜻이다. 대표적 예가 볼티모어 오리올스다.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에 속한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같은 지구에 속한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가 공격력이 좋은 팀이라는 점을 감안, 화력에 화력으로 맞불을 놓기로 결정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2003~04년에 막대한 돈을 들여 강타자 영입에 나섰다. 미구엘 테하다에게 6년간 5400만달러, 하비 로페즈에게 3년간 2250만달러, 라파엘 팔메이로에게 2년간 1050만달러를 퍼부었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2003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에서 4위를 기록했다. 2008년에는 리그 꼴찌로 전락했다. 강타자 영입 후 득점력은 향상됐지만 수비 보강을 안 하다 보니 실점이 대폭 증가해 많은 투자가 성적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자사의 현실과 상황을 도외시한 채 무작정 업계 1위의 전략을 따라 하는 일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3)가치 투자의 요체를 잘 이용하라

    빌리 빈은 가치 투자(Value Invest ment)의 정석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치 투자는 워런 버핏 이전의 전설적 투자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으로부터 비롯됐다. 프랭클린은 ‘내재 가치에 비해 헐값에 거래되는 특정 기업의 주식을 매수해 그 기업의 가치가 적정 가치에 도달하면 파는 투자 행위가 투자의 정석’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가치 투자를 위해 투자자가 갖춰야 할 조건은 해당 기업의 내재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혜안과 그 기업이 적정 가치에 도달했을 때 추가 주가 상승을 욕심내지 않고 적시에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결단력이다. 빈은 이 능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다.

    그는 현재 가치로는 미흡하지만 장래 성장 가능성이 큰 선수들을 대거 발굴해 이들을 스타로 만들었다. 이들이 스타가 되면 더 이상의 추가 수익을 욕심내지 않고 부자 구단으로 이들을 보낸 후 여러 명의 유망주 및 돈과 교환했다. 2004년 그는 영건 3인방 중에서도 가장 많은 승수를 올렸던 마크 멀더의 몸값이 치솟자 그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보냈다. 대신 유망주 3명을 받아왔다. 받아온 유망주 중 한 명이었던 댄 해런은 다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그가 마크 멀더를 계속 데리고 있으려고만 했다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결코 댄 해런이라는 선수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몸값 비싼 선수들이 싼값에 매물로 나오는 시점을 잘 포착해 이를 적극 활용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성적을 보면 한 가지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시즌 초반부터 올스타 전이 열리는 여름까지는 성적이 5할 근처에서 맴돈다. 그러다 올스타 전이 끝나고 나면 성적이 많이 상승한다.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드 마감 시한인 7월 말이 되면 서서히 포스트시즌 진출이 불가능한 몇몇 팀의 윤곽이 그려진다. 해당 팀은 올해 시즌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보유한 몸값 비싼 선수들을 시장에 내놓는다. 비싼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나오면 빈은 이 선수들을 낚아채 후반기 성적 향상의 발판으로 삼는다. 말 그대로 주식시장에서 저평가된 주식을 거래하듯 선수를 거래한 셈이다.



    ●머니볼 :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마이클 루이스 저, 윤동구 옮김, 2006, 한스미디어)

    ●메이저리그에서 배우는 인재선발 전략(SERI 경영 노트, 2009.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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