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갑습니다. ‘신동아’에서 연속 기획강연으로‘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라는 뜻 깊은 자리에 초청해주셨습니다. 제가 ‘한국 지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화유산을 전공하는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얘기할까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2년 전에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 ‘우리시대 장인정신을 묻는다’라는 연속강좌를 열어 책으로 펴낸 바 있습니다. 건축, 사진, 음식, 복식 등 이 시대의 장인 여섯 분의 이야기인데 그 책 첫머리에 실린 저의 글을 나중에 읽어보니 아주 부실한 내용인지라 이걸 언제고 보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늘 개정판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웃음) 우리 사회의 미래를 탐색하는 연속 강좌의 주제와도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장인정신을 이야기할 때 먼저 이와 연관되는 개념으로 작가정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어요. 벌써 30년 넘은 일이네요. 그때는 우리 시대의 작가정신을 묻는 이야기는 많았어도 장인정신을 묻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필요한 것은 작가정신이었어요. 하나의 예술작품에서 작가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치명상이었습니다. 이후 작가정신과 개성이 많이 구현되었고, 작가정신이 고갈되고 형식적인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있던 국전 같은 공모전이 결국은 사라지게 됐습니다. 또 그만큼 우리 문화와 예술이 발전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새로운 의문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작가정신에 대한 요구는 장인정신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작가정신이 너무나 고양되고 상상력이 남발되는 상황에 이르자 그 뿌리를 이루고 있었던 장인정신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생겨난 거지요. 사실 작가정신이란 장인정신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근본이 흔들리고 있으니 다시 장인정신을 묻게 된 것입니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
작가정신과 장인정신은 서로 보완적 관계입니다. 작가정신이 작가의 개성과 상상력과 창의력이 존중된 거라면 장인정신에서 존중되는 것을 무엇일까요. 남다른 기술과 재능을 갖고 있는 장인들이 자신의 작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건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습니다. 작가정신이나 창의력이라는 이름 아래선 대충 해놓고 끝내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장인정신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인정신이 외형적으로 나타난 결과를 말하라고 하면‘디테일(detail·세부양식)’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20세기 최고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s van der Rohe)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고 했어요. 건축이건 미술이건 음악이건 문학이건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것이고 그것은 장인정신이 끝까지 구현돼 이뤄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작가정신, 장인정신을 나누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술과 기술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에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천하의 명작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을 볼까요. 이 운학문을 고려 사람들이 특히 좋아했어요. 창공에 나는 학과 새털구름. 박물관에 가보면 이런 운학문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한 마리, 어떤 것은 두 마리, 조금씩 달라요. 여러 마리를 그리자니 복잡하고, 적게 그리자니 서운한 거지요. 그런데 운학문매병을 그린 이는 완벽한 모형을 그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지요. 이분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단에 7개씩 42개의 원창을 만들면서 원창 안에 있는 학은 위로 올라가고 원창 밖에 있는 학 23마리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그렸어요.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돌려봐도 학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변화가 있어요. 질서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한편 질서에 얽매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건 장인적인 기술만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창의력이 들어간 거지요.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면 용이 용틀임을 해서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물고 있고 그 위로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입니다. 이것은 본래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향로 모양과 같은데, 수반(水盤) 위에 한 마리 오리가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을 모시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이 그 박산향로의 아이디어를 불교적 이미지와 합쳐서 용이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고 그 위로 봉황이 날고 있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형태미만 알고 있고 그 디테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향로 뚜껑의 네 겹 산봉우리와 향로 몸체인 네 겹 연잎의 잎사귀마다 조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산이 있고 그 뒤에 솔밭이 있고 냇물이 있고 바위가 있고 그리고 상상의 동물, 사자 등 현실의 동물들이 쭉 배치돼 있습니다. 기마인물상에서부터 5인의 악사까지 100가지 도상이 이 작은 공간에 들어가 있습니다.‘디테일’이 엄청나게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