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은 왜 화려한 꽃을 피웠을까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koyou33@empas.com

    입력2011-08-19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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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은 왜 화려한 꽃을 피웠을까

    ‘상인과 미술’<br>양정무 지음, 사회평론, 361쪽, 2만2000원

    방학 기간에 예술의전당 전시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대형 미술관에 가면 학생 관람객의 장사진(長蛇陣)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히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어린 초등학생이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 앞에 서서 작품 해설문을 수첩에 적고 디지털 카메라로 그림을 촬영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자녀를 데리고 온 어머니도 달뜬 표정으로 고급문화를 향유한다. 이게 30~40년 전만 해도 하루 세끼를 걱정하던 한국이란 말인가. 40년 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가난했는데….

    대학 교양과목 가운데 미술사 관련 강좌는 인기를 끈다. 화면에 비치는 명화를 감상하며 교수에게서 차원 높은 해설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문화센터, 공공 도서관 등에서 진행하는 미술 강좌도 수두룩하다. 40~50대 주부들이 앤디 워홀 그림 등 현대미술을 해설하는 프로그램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풍경이 이젠 그리 낯설지 않다.

    해외여행 상품 가운데 미술관, 박물관 순례 프로그램도 자주 눈에 띈다. 루브르, 프라도, 모마(뉴욕현대미술관), 에르미타주, 대영박물관 등에 가면 한국인 관람객 숫자가 적잖다.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만 얼른 찍고 돌아서는 깃발부대 관광객 수준의 관람자가 여전히 대다수지만, 일부 배낭족 젊은이들은 해설 자료를 꼼꼼히 읽으며 진지하게 감상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문화를 즐기는 데 돈을 쓰는 경향이 뚜렷하다.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손님이 붐빈다. 부유층 사회에서는 집에 그럴듯한 미술품이 없을 경우 품격 낮은 졸부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싫어 그림, 조각품을 사들이는 풍조가 퍼졌다. 미술관 큐레이터도 인기 직업으로 떠올랐다. 우아한 이미지와는 달리 무거운 작품을 옮기는 등 때때로 ‘노가다’ 일을 해야 하고 연봉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큐레이터는 화려한 명품 패션으로 멋을 내며 툭하면 파리, 뉴욕에 출장 가는 ‘보보스’족이다.

    미술사 전공 대학원생 가운데 상당수는 재력가, 유력자의 딸이나 부인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술사학 석사과정에 다니던 어느 여성은 광주비엔날레를 참관하러 가면서 작은 충격을 받았다. 동기생 하나가 왕복 항공료, 숙박료를 모두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동기생은 모 대기업 총수의 딸이었다. 알고 보니 여러 동기생이 떵떵거리며 사는 집의 ‘공주’였다.



    대형 서점의 미술책 코너에 가면 관련 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곰브리치가 지은 ‘서양미술사’가 거의 유일한 미술 감상 입문서였다. 요즘엔 여러 저자의 미술 개론서가 즐비하다. 대부분 번역서다. 국내 저자의 책들은 미술관 탐방기가 주류를 이룬다. 전문성을 지닌 책은 찾기 어렵다.

    너도나도 미술품 구입

    최근 출간된 ‘상인과 미술’은 국내 저자가 쓴 전문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책 제목을 금빛 번쩍이는 한자(漢字)로 인쇄한 점이 특이하다. 고품격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책의 부제는 ‘서양미술의 갑작스러운 고급화에 관하여’다. 책 표지 뒷면에는 ‘르네상스 미술 너무 많고, 지나치게 호화스럽다. 도대체 왜?’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실렸다.

    저자는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영국 런던대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은 미술사학자다.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라는 저서를 냈고 나이즐 스피비 교수의 명저 ‘그리스 미술’을 매끄러운 한국어로 번역한 바 있다.

    르네상스. 이 말을 들으면 왠지 가슴이 꿈틀거리지 않는가. ‘다시 태어남’을 뜻하니 뭔가 비루한 과거의 때를 씻고 부활했다는 환희가 느껴지지 않나. 교과서적 정의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인문주의를 중세 이탈리아에서 재발견한 위대한 사건이다. 신의 피조물인 ‘작은 인간’이었다가 르네상스 덕분에 인간은 ‘인본주의’란 어휘를 내뱉어도 될 만큼 ‘큰 인간’으로 거듭났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위대한 천재 미술가 이름이 떠오르고…. 대가들과 이들의 재능을 알아본 재정 후원자들이 르네상스 예술을 꽃피웠다…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도 머리를 스친다.

    이 책의 저자는 서양 미술을 공부하면서 의문을 품었다. 르네상스 미술이 과연 순수한 예술정신에서 비롯된 것일까. 왜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놀랄 만큼 많은 미술품이 쏟아져 나왔나. 시골의 자그마한 성당에 가도 호화스러운 르네상스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왜 그런가. 미술품 제작엔 엄청난 돈이 들었다. 이 책은 ‘상인들은 왜 그렇게 힘들여 번 돈을 미술에 쏟아 부었나?’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미술사 안에서는 뱅뱅 맴돌기만 하던 의문이 경제사를 공부하니 조금씩 풀렸다”고 했다. 중세 유럽경제사 분야의 석학 로버트 로페즈(1910~ 1986)의 ‘르네상스 장기불황론’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로페즈의 이론에 따르면 유럽 경제는 르네상스 시기에 장기 대불황에 빠졌다. 금융시장 붕괴, 흑사병 전염에 따른 인구 감소, 기근과 전쟁 등 악재가 쌓였다. 번영이 멎은 이때 사치품 시장만은 호황이었다. 빈부 격차가 심화된 셈이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사회를 귀족 사회로 파악했다. 사회 환경이 급변해 지배세력의 부침(浮沈)이 심했다. 새로 지배층에 들어온 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정당화할 기준을 찾았는데 ‘문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대표적인 예술 후원자인 로렌초 메디치는 가문의 초석을 세웠던 조상들에 비해 경영 능력이 모자라 메디치 은행의 경영에서 거듭 실패했다. 이를 위장하기 위해 예술 투자에 매달렸다고 한다. 로페즈는 1954년 미국 역사학회 학술대회장에서 이런 이론을 발표했다가 “거의 뭇매를 맞을 지경이었다”고 할 정도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경제사학자 골드 스웨이트는 한술 더 떠 “미술이라는 상품은 일종의 사치품이며 이런 럭셔리한 소비에 대한 맹렬한 사회적 탐닉이 이른바 르네상스의 핵”이라 주장했다.

    저자는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문에서 밝혔다.

    서양미술은 서구 상업문화의 맥락에서 볼 때 더욱 선명하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서구의 상업문화를 주도한 대상인들의 상업적 체험이 미술 구매로 실행되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 상인들의 적극적인 장거리 무역 덕분에 아시아의 화려한 색채가 유럽에 소개될 수 있었다. 이들은 안료 무역에 직접 관여하면서 색채감별에도 눈뜨게 되었고, 나아가 그림을 재료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방식도 체득하였다. 이처럼 미술 재료에 대한 사회 상층부의 상업적 경험이 서양미술의 갑작스러운 고급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르네상스 미술품에 유독 종교화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부자들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가족의 참혹한 모습을 보며 천국에 가기 위해 교회에 재산을 헌납했다. 교회는 지옥과 천국을 소재로 한 대형 그림들을 주문했다. 개인도 종교화를 소장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림을 사들였다. 중소상인, 노동자, 농민조차 싸구려 그림이라도 갖겠다고 발버둥 쳤으니 그림 특수(特需)가 생긴 셈이다. 그림의 평균가격은 4~6피오(약 320만~480만원)로 꽤 비쌌다. 이런 돈이 미술시장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시장 전체가 불황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그림 값 후려치는 화상

    흑사병으로 부모를 잃은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1335~1410)는 미술품을 대량 거래하는 화상(畵商)의 원조로 성장했다. 15세 고아이던 그는 당시 교황청이 있던 프랑스 아비뇽에 가서 무역을 배운다. 무기부터 그림까지 잡다한 상품을 거래하면서 차츰 재산을 불렸다. 45세 때 거부(巨富)가 되어 고향인 이탈리아 프라토로 돌아온다. 대저택을 짓고 모직공장을 세워 주민을 여럿 고용한 그는 금융업에도 손을 댄다. 미술품 거래에도 본격적으로 나서 재산을 더욱 늘렸다. 화가에게 그림 값을 깎아 지불하는 수법으로 악명 높은 그는 노년에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다티니 말고 다른 화상들도 그림 값을 놓고 화가들과 승강이를 벌이기 일쑤였다. 르네상스 미술품은 상인과 작가 사이에 벌어진 끈질긴 긴장 관계의 결과물인 셈이다.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대상인 가브리엘 벤드라민(1484~1552)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 티치아노에게 자신의 가문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자주 주문했다. 그가 숨진 뒤 베네치아 경제는 급속히 쇠락한다. 동서무역의 핵심 물품이던 향신료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추격을 받고 모직업에서는 영국에 덜미를 잡혔으며 조선업은 네덜란드에 밀렸다.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여서 이탈리아의 번영을 이끌던 ‘지중해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베네치아보다 피렌체는 몰락 속도가 더욱 빨랐다. 피렌체 경제의 중심이었던 메디치 은행은 이미 1494년에 파산했다. 화가 티치아노의 주요 고객은 상인에서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로 바뀌었다. 그는 1530년대부터 스페인 황제를 위한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 값을 흥정할 때 상인들은 깎으려 기를 썼지만 왕족들은 통 크게 지불했다. 티치아노는 1533년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5세의 초상화를 그려 백작 벼슬과 함께 영지까지 얻었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편지에 ‘당신의 영원한 종’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화가와 구매자 사이에 대등한 관계로 이뤄지던 르네상스 미술 거래 방식이 깨진 것이다.

    ‘상인과 미술’은 화려한 컬러 도판을 많이 담아 미술품 감상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패널화 제작법 등을 소개한 부록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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