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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⑨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신채호와 이광수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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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의 36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요즘 기준으로 평균수명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시간이다. 더욱이 다른 국가의 식민지 경험과 비교할 때 일본의 식민통치는 더없이 강압적이었다. 마치 영구적인 식민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듯 일제 식민국가는 우리 사회를 철저히 통치하고 억압했다. 그 핵심적 국가기구는 헌병을 기반으로 한 경찰제도였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문화정치가 표방됐지만, 경찰제도에 기반을 둔 탄압과 수탈은 오히려 강화됐고, 한민족 말살정책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추진됐다.

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관서의 경우 1918년 751개소였지만 1920년에는 2716개소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에 경찰 인원도 5400명에서 1만8400명으로, 경찰 비용도 800만원에서 2400만원으로 3배 정도 늘어났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기반을 둔 이러한 식민통치는 1930년대 들어와 일본의 대륙 침략전쟁에 따른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집권화됐으며, 그 운용방식 또한 더욱 군사적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 식민 지배가 우리 모더니티의 형성에서 개인적, 집합적 주체의 정치·문화 경험과 제도화에 결코 작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지 국가기구는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감시국가의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화를 저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운동을 극도로 탄압했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맞은편에 놓인 것이 다름 아닌 민족주의다. 전통사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우리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대를 경유하면서 근대적 이념으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역사학의 기여가 중요했는데, 박은식과 더불어 특히 신채호의 역할이 중요했다. “내가 살면 대적(大敵)이 죽고 / 대적(大敵)이 살면 내가 죽나니 /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신채호의 소설 ‘꿈하늘’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신채호의 생애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현 대전시 대덕구)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호는 단재(丹齋)다. 아버지는 신광식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 부인이다. 아버지가 죽자 신채호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해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905년 성균관박사가 된 다음 황성신문 등에 왕성하게 사설을 쓰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채호의 삶은 오로지 독립운동에 맞춰졌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았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1910년에는 안창호·이갑 등과 톈진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10년대에 그는 신한청년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수시로 만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저술하는 일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의정원 전원위원회 의장으로 피임됐으며,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 철저한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다.

1920년대 신채호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는 베이징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확립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집필하는 동시에 의열단 선언문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이즈음에 신채호는 자신의 사상적 거처를 무정부주의로 옮겨갔다. 1928년 대만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과 연관돼 다롄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그는 10년 형을 언도받아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6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했다.

신채호는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무엇보다 독립운동가였다. 언론인으로서의 신채호의 이름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사설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역사학자로서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를 통해서였다. 곧이어 그는 조선일보에 다시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해 한국사 연구에 일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광복이 된 후 1948년에 ‘조선사’는 이를 국내에 소개한 안재홍이 서문을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간행됐다. ‘조선상고사’는 신채호의 대표적인 역사서다. 이 책의 첫 구절은 너무도 유명하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에게 역사란 ‘아’인 조선 민족과 ‘비아’인 다른 민족 간 투쟁의 기록을 뜻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사회학자 신용하가 지적하듯이‘민족적인 것’과 ‘비민족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사대적인 것’, ‘고유한 것’과 ‘외래적인 것’, ‘혁신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역사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이러한 역사관은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과 변증법을 강조하는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민족주의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총론과 11편으로 이뤄져 있다. 구체적으로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 한족격전(韓族激戰)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對)고구려 공수(攻守)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 그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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