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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⑦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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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1세는 취임 초기부터 진보파가 장악한 의회와 종종 충돌했다. 그러다가 1862년 그가 군사력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하고 이를 뒷받침해줄 군비 확장 예산을 의회에 제출하자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알프레드 폰 룬(Albrecht von Roon·1803~1879) 등 왕의 측근 관료 들 중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룬은 대신 의회와 대결해 이 대립 사태를 해결할 적임자로 당시 파리대사로 있던 강경파인 비스마르크를 빌헬름 1세에게 강력 추천했다. 룬은 이후 몰트케(Helmuth von Moltke·1800~1891)와 함께 비스마르크를 도와 프러시아를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빌헬름 1세는 룬의 제의를 받고 비스마르크의 강한 개성과 전권을 휘두를 가능성 때문에 한동안 임명을 망설인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반대가 점점 거세지자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의 독대를 통해 왕의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강력한 자세를 확인한 뒤 1862년 9월24일 비스마르크를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비스마르크는 9월30일 프로이센 의회 예산위원회에서 가진 취임 첫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그 유명한 철혈정책(鐵血政策)의 기조를 피력한다.

“프러시아는 상황에 대처할 힘을 집중해 유지해야만 합니다. 빈 협약에 의한 프러시아의 현재 국경은 건전한 국가 경영을 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큰 문제들은 말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해결될 것입니다(The great questions of the time will not be resolved by speeches and majority decisions-that was the great mistake of 1848 and 1849-but by iron and blood).”

철혈 재상의 강경 정책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이 유명한 연설로 이후 ‘철혈 재상’으로 불리게 되는 비스마르크는 즉시 강경 정책을 시행한다. 그는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계속되면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긴급권을 발동해 의회의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의회와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1863년 의회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반격으로 그와는 더 이상 협상이나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채택하지만 빌헬름 1세는 오히려 의회가 행정부를 부당하게 통제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의회 해산령을 내린다. 비스마르크도 이에 따라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처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강경 정책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대중적 인기는 하락해 그해 10월의 선거에서 진보당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 새 의회는 왕에게 비스마르크의 해임을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비스마르크의 후임으로 진보 성향의 총리가 들어서는 것을 염려한 왕은 한사코 의회의 요구를 거부했다.



왕의 확고한 신임을 확신한 비스마르크는 다음 목표를 독일 통일로 잡았다. 1860년대 이전의 독일은 여러 개의 주가 느슨하게 결합된 하나의 연방체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단일 국가로서의 강력한 정책을 전혀 추진할 수 없었다. 이런 독일을 통일 국가로 만들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기본 정책은 프러시아의 강한 군사력과 함께 외교력을 동원해 프러시아의 주도 아래 강력한 경쟁 상대인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상태에서 다른 지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지는 국가는 의회 중심의 자유 국가가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전제 국가여야 했다.

1863년 당시 덴마크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7세가 사망하자, 그의 관할 아래 있었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두 지역에 대한 영토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와중을 틈타 오스트리아와 정략적 연합을 한 뒤 덴마크를 패퇴시키고 1865년 8월 협정을 통해 프러시아는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했다.

그러나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일시적인 동맹 관계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논의 과정에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장자 역할을 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의도를 오래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주도의 대독일주의 통일을 반대하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상태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통일을 실현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기로 결심했다.

1866년 6월 몰래 주변국들과의 외교 협상을 마무리 지은 비스마르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 대한 양국 간의 협정을 오스트리아가 어기려 한다는 점을 내세워 홀슈타인으로 군대를 출병함으로써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오스트리아는 즉시 독일 연방의회를 열어 프로이센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회의에 참여한 독일 내 소국가 대다수를 자기편으로 전쟁에 가담시켰다. 비스마르크 역시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 있던 베네치아 지역에 대한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를 원군으로 끌어들인다.

전쟁의 결과는 주변국들의 예상과 달리 순식간에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프러시아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동시에 향후 독일 통일 문제에 오스트리아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는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이전의 독일 연방체를 해체하고 대신 프러시아가 마음대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연합체인 북독일연방을 결성한 뒤 빌헬름 1세를 대통령, 자신을 총리(Chancellor)로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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